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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시대와 작품을 가로지르는 눈-
비평 소영현 - 미치고 싶거나 미쳐가는, 미친 여자들
미치고 싶거나 미쳐가는, 미친 여자들 소영현 사이보그 글쓰기는 본원적 순수함이라는 기반 없이, 그들을 타자로 낙인찍은 세계에 낙인을 찍는도구를 움켜쥠으로써 획득하는 생존의 힘과 결부된다. - 도나 헤러웨이, 『해러웨이 선언문』, 책세상, 2019, 72쪽. 1 은유로서의 미친년 황정은의 소설 『디디의 우산』(2019)에는 젊은 여직원에게 집요하게 이른바 ‘작업’을 걸고 “사적인 접근”1)이 여의치 못할 때 “공적으로”(200쪽) 폭언을 쏟아내거나 고압적인 태도로 업무를 지시하면서 직장 내 괴롭힘을 일삼는 남성에 관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흔하게 만나는 에피소드이다. 그만큼 현실에서 상시 발생하는 일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례에서 정의가 구현되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 특히 가부장적 성격이 여전한 한국의 직장 문화에서 이런 일은 대개 불쾌나 모욕감이 쌓인 끝에 여직원 혹은 피해자가 퇴사하는 경우로 끝나게 된다. 그나마도 자발적 퇴사보다 더한 피해를 입는 일이 허다하니, 최소한의 피해로 상황이 정리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에서 흔하디흔한 여성혐오적이고 비윤리적인 상황에 대한 사례 모음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디디의 우산』 속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서 작가는 화자 김소영의 에피소드를 다루면서 동생 김소리의 입을 빌려, “미친년이 되더라도”(202쪽) 사무실 사람들에게 김소영이 겪고 있는 불쾌와 모욕감, “심리적이고 신체적인 위협과 불안”(202쪽)을 사람들에게 말할 필요가 있다고 짚는다. 거꾸로 이해해보자면, 위협과 불안을 말함으로써 그녀 자신이 미친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미친년은, 말하자면, 스스로 사회의 상식, 그것은 황정은 식으로는 종종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이 상식이 된 악의 세계 바깥으로 자신을 내보내는 일이 된다. 여기서 미친년은 상식의 세계 너머의 정상성을 획득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의미를 갖는 말이 된다. 2 낙인으로서의 미친년 미친년은 그런 의미에서 현실 너머 정상성을 역설하는 말이 된다. 바로 그런 초월성의 획득을 통해서나 가닿을 수 있는 지점이라는 점에서, 삶의 비정상성을 바로잡기 위해 억압적인 사회적 틀을 넘어서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도약이 ‘미친년 되기’라고 한다면, 『디디의 우산』에서 작가도 밝히고 있지만, 그 ‘미친년 되기’는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의미로라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그만큼의 의미를 획득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사실 현실의 차원에서 보자면 스스로 미친년이 되는 일보다는 미친년으로 낙인찍히는 일이 더 많다고 해야 한다. 미친년이 되기를 원하지 않지만, 미친년으로 지목되거나 명명되어 내쳐지는 일, 어쩌면 ‘미친년 되기&rsquo
작성일 2025-09-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박동억 - 고통의 서열과 증언의 권리
고통의 서열과 증언의 권리 ―고통과 쟁론 입론 마무리 박동억 1. 인간의 범주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고통으로 향하려는 실천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고통은 섬이다. 고통을 겪는 이는 말할 여력을 가지기 어렵고, 듣는 자는 판이한 삶의 입장에서 고통을 오독하며, 사회제도는 고통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춘다. 결국 모든 존재는 자기 몫의 고통을 홀로 짊어지며, 한 존재가 끝까지 살아 낸 고통은 그의 오롯한 비밀로 남는다. 하나의 고통은 하나의 침묵 속에서 죽는다. 사실 그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고통은 아주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겪었던 고통을 내가 겪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부끄럽지만 다행이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사람에게 고통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주 예외적인 사건이 우리에게 그러한 욕망을 간절한 것으로 만든다. 어떤 참혹한 사건과 그러한 참혹을 겪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그 자체로 사건이다. 그것은 고통의 우주에서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그저 한 줌에 지나지 않음을 죄악으로 느끼게 한다. 수많은 애도 행위와 추모 행사, 그리고 기도는 그저 당신의 고통을 잘 이해했다는 착각을 만들어 낸 뒤 당신을 떠나보내는 일을 합리화하는 과정이 아닌지 반문하게 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쓴다. 문학은 당신이 ‘아직 여기 있다’라고 말하기 위한 형식, 이 작품의 언어가 당신이 겪는 고통 자체이기를 꿈꾸는 하나의 몽상이다. 물론 타인의 고통을 재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또한 설령 그들의 고통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때조차 그들의 고통을 미화하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는 데 그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환부를 드러내고 그의 고통을 향하기 위한 단초로서 문학은 하나의 탐구이다. 그런데 주디스 버틀러가 『불확실한 삶』(2004)에서 강조했던 것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해야 한다는 윤리적 소명을 간직한 상태에서도, 어떤 이들에게는 눈길조차 두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예컨대 전쟁터의 적군이나 제3세계의 국민이 그렇다. 버틀러는 미국의 저널에서 이스라엘 병사와 국민을 위한 추모란은 존재하지만, 팔레스타인 국민을 위한 추모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비판한다. 어떠한 선량함은 더 윤리적인 지평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제약한다. 여기서 그가 제안하는 용어는 ‘애도의 서열’1)이다. 애도의 서열이란 이웃은 소중히 애도하고 타인의 죽음에는 반응하지 않는 차별의 원칙이 우리에게 내면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것은 누군가의 고통으로 향하려는 우리의 의지 자체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러한 의지의 방향에 대해서는 냉철하게 반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허수경은 그러한 애도의 서열이야말로 그가 극복해야 하는 과제임을 자각한 시인이었다. 그는 독일에 체류 중인 한국인 학생이었고, 한국인의 시선으로든 독일인의 시선으로든 유고슬라비아, 이라크, 팔레스타인 등은 낯선 이국이었다. 허수경은 2000년대를 전후로 그러한
작성일 2025-09-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이채원 - 빛의 실패가 사과 한 알을 생성하는 순간
빛의 실패가 사과 한 알을 생성하는 순간 -심지아, 『로라와 로라』(민음사, 2018) 이채원 1. 유폐된 모든 것을 향해 글쎄, 라고 답하며 기존의 언어 체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목소리를 발화하는 일은 시가 늘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시작(侍作)에 있어 고정화된 관념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기존의 언어가 초래한 대상의 고정된 내부를 새롭게 모색하려는 시도는 역설적으로 기존에 상징화된 기호와의 연결 선상 위에서 재구성될 따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언어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실재를 포착하려는 일, 현존하는 이미지에 언어를 부여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선언을 끌어내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여기, 여러 가치가 충돌하는 이 세계에서 끊임없이 무언가에 실패하고 있는 시인이 있다. 모든 풍경 앞에서 “글쎄”(「부엌의 부흥」)라고 답하며, “나는 나의 이야기를 믿지 않”(「여름 자르기」)는다고 말하는 이, 바로 심지아다. 시인은 뭔가를 선명하게 확정이나 확신하는 대신 이탤릭체의 목소리나 상반되는 개념을 배치하고, 동일한 단어를 일관되지 않은 감각으로 무한히 번복하는 행위를 끊임없이 발화하며 언어의 간극을 부러 형성하는 듯싶다. “한 땀 한 땀 꿰매진”(「풍경의 예절」) “단단한 문장”(「우리들의 테이블」)에 의도적으로 틈을 벌리는 듯한 시인의 방식은 현실에서 달성할 수 없는 언어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의미화의 지연으로 연결되며, “언어가 잊은 것들”(「소유자」)에 대해 사유하는 시선의 토대로서 작동한다. 시의 가능성이 새롭고 낯선 목소리로 우리를 둘러싼 견고한 지반을 허무는 것이라면, 심지아는 언어의 틈새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오류와 관성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다. 가령 본고에 수록된 시에서 로라, 글쎄, 서랍, 사과와 같은 기표의 연쇄를 통해 “당신은 몇 개의 허용을 가졌습니까”(「소유자」)하고 성찰하듯 던지는 질문이 그러하다.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심지아의 첫 시집 『로라와 로라』을 읽어 보기로 하자. 로라와 로라, 한 사람처럼 두 사람처럼, 다섯 사람처럼, 로라와 로라 (‧‧‧) 가장 나이며 가장 나의 것이 아닌 것처럼 가장 너이며 가장 너의 것이 아닌 것처럼 (‧‧‧) 얼굴이 비대칭으로 자라나는 로라와 로라 ―「로라와 로라」1) 부분 표제작 「로라와 로라」를 보면, 로라는 “한 사람처럼, 두 사람처럼, 다섯 사람처럼” 분열하며 증식한다. 로라는 단일한 존재가 아닌 동명이인이 되기도 하고, 혹은 이름은 다르지만 외양이 유사한 “쌍둥이”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나아가 화자는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나 “코끼리”나 “시체”, “외계인”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ld
작성일 2025-09-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신은조 - 셀프캠 시뮬레이션; 존재하지 않는 그리움의 시작법
셀프캠 시뮬레이션; 존재하지 않는 그리움의 시작법1) -황인찬과 배시은의 시를 중심으로 신은조 1. 왜 그리움은 이 세상에 없는가 이창동의 영화 은 “나 돌아갈래!”라는 외침으로 포문을 연다. 기차가 달려오는 선로 위에서 절규하는 남자 “영호”는 어느 순간 자신의 인생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행복으로부터 멀어져 버렸으며,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부터 멀어지기를 선택한 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후 미쳐 버린다. 그래서 영호의 비명은 만약 시간을 멈추고 행복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이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이때 앞으로만 나아가는 기차의 이미지는 역행을 불허하는 시간의 특성과 매우 흡사하며, 선로에 서서 기차를 막아서는 영호의 행동 또한 시간의 흐름을 멈춰 세우려는 의지의 표명 그 자체라고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은 언제나 앞으로만 흘러가며, 이 장면과 함께 그의 삶은 막을 내릴 것이다. 과거는 그것이 이미 지나갔다는 사실만으로도 매혹적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고향 땅의 꿈을 꾸거나, 기행을 일삼는 사람들의 주변에 사진, 비디오, 일기와 같은 기록 매체가 놓여 있는 장면은 낯설지 않다. 지나간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고, 독자적인 물성을 부여하는 이미지들. 시리즈와 같이 과거의 사건들을 그대로 되살려 내는, 그 자체로 노스탤지어인 매체는 대중들이 시간을 넘나들 수 있도록 권능을 행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요즘 등장하는 미디어·매체·창작물에 드러나는 노스탤지어는 조금 다른 선로에 올라타 있는 듯하다. “베이퍼웨이브2) 음악 장르에 조악한 영상을 짜깁기해 놓은 에스테틱 영상”이 유행하는 현상과, 80년대 미국 올드스쿨 힙합 패션의 대표 격인 펑퍼짐한 바지와 브라탑을 입고 춤을 추는 톱 아이돌 가수들을 떠올려 보자. 그들의 뮤직 비디오에는 일본 도쿄 외곽의 풍경이 비추어지며, 등장하는 인물은 90년대의 전자 제품들을 사용한다. 이와 같은 이미지는 앞서 언급했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동떨어져 있음은 물론, 실존하는 시대상을 재현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는 “복고”나 “레트로” 등의 키워드와도 거리가 있다. 이상한 일이라면 일련의 작품들을 감상한 대중들이 해당 영상에 공감하며 심지어는 그리워한다는 것이겠다. 이하림은 시대적, 정서적으로 동떨어진 이미지들을 매개 삼아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현대 매체들의 동향을 “액체 근대(지그문트 바우만)”로 통칭되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의 파편화된 기억, 그리고 그로 인해 파열된 역사성의 형상이라고 정의한다.3) 세계화와 개인주의로 인해 “집단 기억”이랄 만한 상실의 경험을 갖추지 못한 현대인의 집단적 무의식이 정체성 혼란을 불러일으키므로, 경험한 적 없는 것을 기반으로 한 ‘보철 기억’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작성일 2025-09-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조대한 - 가짜들의 문학
가짜들의 문학 조대한 이상의 실제 이름은 김해경이고 이상은 그가 만든 가명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이름의 탄생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과 추측들이 존재하는데, 전기적으로 설득력 있는 주장은 크게 두 가지 정도이다. 하나는 동생 김옥희의 증언이다. 경성고공에서 건축을 전공했던 해경은 졸업 후 공사 현장에서 종종 일을 하곤 했다. 당시 일본인 인부들 중 해경을 김 씨가 아닌 이 씨로 착각했던 이들이 있었고, 그들이 ‘김 상(金さん)’을 ‘이 상(李さん)’이라고 오인하여 부른 까닭에 해당 이름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1) 다른 하나는 친우 구본웅이 선물한 상자와 관련된 설이다. 김해경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구본웅이 그에게 오얏나무로 만든 화구 상자를 선물로 주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해경이 자신의 이름에 ‘이(李)’와 ‘상(箱)’자를 넣었다는 것이다. 실제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서 발견되는 이상이라는 이름과 반평생 지속된 구본웅과의 교류 등을 생각한다면 이 또한 충분히 수긍이 가는 설명이다. 어느 쪽이 진실이든 이후 이상은 김해경을 대신하는 이름이 되어 한국문학사 내에 영원히 박제되었다. 한데 김해경에게 이상 외에도 다양한 여분의 이름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그는 이상을 포함하여 비구(比久), 보산(甫山), 하융(河戎), (H)R 등의 가명을 자신의 글에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비구’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은 소설 「지도의 암실」이다. 이 작품이 이상의 창작물일 것으로 추측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작품 속에서 ‘리상’이라는 이름이 여러 차례 반복된다는 것, 이상이 비구라는 호를 썼다는 친우 구본웅의 증언이 존재한다는 것, 「지도의 암실」에서 나온 표현이 이상의 다른 작품 속에서 유사한 정황을 두고 되풀이된다는 것이다.2) 비구는 이상의 다른 필명임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보산’의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은 소설 「휴업과 사정」이다. 이 소설이 이상의 작품으로 추측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휴업과 사정」 이전에 발표된 이상의 소설 두 편은 모두 잡지 『조선』을 통해 공개되었는데, 「휴업과 사정」 역시 앞서 게재된 「지도의 암실」과 1개월의 시차를 두고 『조선』에 발표되었다. 「휴업과 사정」은 한 달 먼저 발표된 「지도의 암실」과 비슷한 문체를 사용하고 있고, 띄어쓰기와 한자 사용 방식도 이상의 작품들과 유사하다. 「휴업과 사정」이 발표될 당시 사용된 삽화가 이상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또 다른 잡지에서 똑같이 발견된다는 점3)도, 이 소설이 이상의 작품임을 뒷받침하는 근거라 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전집에서 「휴업과 사정」을 이상의 작품에 포함시키고 있고 여러 정황적 근거를 고려해볼 때 보산을 이상의 필명으로 간주하는 것은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하융’이라는 이름은 이상이 박태원의 작품 「소설가 구보씨의
작성일 2025-08-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이한나 - ‘최진실’이라는 아이콘 1
‘최진실’이라는 아이콘 1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이한나 1. 1990년대, ‘깜찍한’ 등장 1990년대를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잡지나 신문을 뒤적이다 보면 꼭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작은 인터뷰든, 신문 한 면을 다 차지하는 대기업의 광고든 ‘최진실’, 그녀의 이름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대중문화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고 이에 따라 몇 계간지에선 ‘대중성’의 확산과 견제에 대해 심각하게 논의하던 이 무렵, ‘톱스타’ 최진실은 그 진중한 분위기와는 유리된 곳에서 한껏 포즈를 취한다. 대개 컬러로 인쇄된 그녀의 그 포즈를 바라보는 일은, 처음엔 호기심이었다가, 나중에는 한 번은 살펴보아야 할 책무로 남았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최진실을 CF 스타로서 발돋움하게 해 준 대사는 나도 어릴 적 들어 본 적이 있다. 90년대로 진입하기 직전, 통통 튀는 새댁의 모습을 한 그녀는 단숨에 “최진실 선풍”1)을 불러온다. 인기의 비결이 “누이 같고 딸같이 부담 없는 분위기를 귀엽게 보아준 결과”2)라고 일컬어지듯 최진실은 “남녀노소 모두 좋아하는”, “부담 없고 솔직하여 친근감 있는”3) 이미지로 만인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다. “90년대 문화의 상징적 존재”인 “우리 시대의 스타”4), “구김살 없이 상큼한”5) 그녀는 일찍이 CF로 빚어 낸 외적인 이미지 외에도 한 PD의 발언을 보태면 “좋은 집안, 좋은 대학이 아니라도 건강하게, 제멋에 살아갈 수 있는 본보기를 마련한 인물”6)이었기에 선호된 것으로 보인다. 최진실이 답한 그 수많은 인터뷰를 따라 읽다 보면 그녀가 X세대, 오렌지족의 자유롭고 방탕한 생활과는 동떨어져 착실히 살아온 인물임이 재차 강조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섣불리 투기에도 나서지 않고 온 수입을 차곡차곡 저금하고 있는 모범적 인물로서 심지어 당시 주택은행장이었던 김재기와의 만남까지 추진되곤 한다.7) 특히 “깜찍함으로 대표되는 우리 시대 스타”8)와 같이, ‘깜찍하다’는 수식어는 셀 수 없이 최진실의 옆에 꼭 붙어 있다. 아마 탤런트 중에서도 작은 그녀의 체구와 귀여운 언행들로 인해 불러들여졌을 이 말은, 동시에 최진실이라는 아이콘이 ‘깜찍함’을 경유하여 관통하고 있던 것은 과연 90년대의 무엇이었을까? 라는 물음을 던지게도 한다. 이를 찾기 위해 이 자리에서는 최진실이 “가장 사랑하고 좋아하는 영화고 최진실 그대로 미영이 역을 기쁘고 편안하게 할 수 있었던 영화”라 밝힌, “최진실의 매력과 재능이 제 물을 만난 시네마 스페이스”9)였다고 일컬어지는 〈나의 사랑 나의
작성일 2025-08-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박동억 - 왜 고통은 증언되어야 하는가
왜 고통은 증언되어야 하는가 ―고통과 쟁론 입론 2 박동억 1. 고통의 서열 몸에 남은 물의 기억을 다 태우는 당신과 당신 물의 기억이 다 지는 것을 들여다보는 나는 어쩔 것인가 허수경, 시 「불을 들여다보다」 중에서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아니 나 자신이 나의 고통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기록하게 만드는 동력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손쉽게 체념한다. 우선 자기 몫의 삶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지쳐 있기 때문이고, 그다음으로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기록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신중함 때문이다.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삶은 공감의 여력을 기르기에 충분치 않고, 타인의 고통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거나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멀게 느껴진다. 더욱이 내게 뚜렷한 것은 오직 자신의 고통뿐이어서 그것을 벗어나 생각하는 일은 매우 어렵게 느껴진다. 일단 공감할 여력을 갖춘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말기암 환자에게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이웃들을 심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하지 않는다. 또한 하루 끼니를 챙기기 어려운 처지에 놓인 자에게 동물의 고통을 숙고해달라고 요청하기는 어렵다. 이를테면 자신의 생존을 보장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타자의 고통을 배려할 여유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기본적으로 고통에는 서열이 있다. 누구에게든 나의 고통은 가장 긴급한 것이고,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의 고통은 중요한 것이며, 그 밖의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서열이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될 때도, 우리의 공감 능력은 ‘나’를 기준으로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비 카렐이 『아픔이란 무엇인가』에서 강조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눈앞의 고통받는 자를 연민하지만 그의 고통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림프관평활근증(Lymphangioleiomyomatosis, LAM)이라는 희귀병 판정을 받은 것은 서른다섯 살의 일이었다.1) 그녀는 진단받은 지 3개월 만에 폐 기능의 10년 치를 상실했다. 순식간에 삶이 변화했다. 한 층 계단을 오르는 것조차 각오가 필요했고, 휴대용 산소호흡기를 꺼낼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을 견뎌야 했으며, 잠들 때마다 언제든지 숨이 멎을 수 있다는 공포에 전화기를 머리맡에 두게 되었다. 누구도 그녀의 고통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병원에 가면 의사는 그녀의 ‘사례’를 진단할 뿐 그녀의 ‘고통’에 관해 묻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이 느끼는 아픔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면, 사람들은 마치 ‘도대체 누가 의사야’하고 묻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친구들은 그녀의 연락을 불편해했다.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다가도 그녀의 비참한 하루하루를 설명하려고 하면 아예 연락을 끊어 버리기도 했다. 해비 카렐에게 더욱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녀를 연민하는 시선이었다. 자신을 가엽게 쳐다보는 눈빛만으로도 그녀가 죽어 가고 있는 사람이고 끔찍한 곤경에 처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작성일 2025-08-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정의정 - 영혼이 파기된 자리에 남은 것
영혼이 파기된 자리에 남은 것 -김초엽과 우다영의 SF를 읽는 한 방법 정의정 1. 소프트 SF, ‘하드’하게 읽기 일론 머스크의 우주 탐사 기업 ‘SpaceX’는 화성을 식민지화하겠다는 일념으로 대형 우주선 ‘스타십’을 여러 차례 하늘로 쏘아 올렸다. 올해 1월에는 스타십의 일곱 번째 시험비행이 어김없이 실패했는데, 그때 공중에서 분해된 우주선의 잔해물들이 마치 유성우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이 영상에 담겨 각종 SNS로 퍼져나갔다. 일론 머스크는 자신의 X(구 트위터)에 그 영상을 업로드하며 “성공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재미는 보장된다!(Success is uncertain, but entertainment is guaranteed!)”라고 썼다. 이에 대한 주류적인 반응은 긍정에 가깝다. 혹자는 무료로 불꽃놀이를 봤다며 좋아했고, 혹자는 실패에 담긴 아름다움의 역설을 발견하는 식이었다.1) 지난 5월 9차 시험비행에 실패한 우주선의 잔해가 멕시코 땅에서 발견된 사태를 비롯하여 일론 머스크가 전 지구적으로 끼치는 해악을 고려하면, 이와 같은 반응들은 감상적이기만 하다. 물론 지금도 어딘가에서 꾸준한 환경 운동가들은 그의 우주 탐사 계획에 비판을 제기하는 중일 터이다. 과학기술을 둘러싸고 생성되는 담론들의 충돌은 때로 우습게 보이기까지 하지만, 어쩌면 이는 라투르적인 의미에서 번역이 만들어 낸 혼합체, 정화된 개념을 넘나들고 교차하는 난맥상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2) 경계를 가로지르는 혼합체 중 하나는 과학소설, SF다. SF는 더 이상 문학(literature fiction)과 구별되는 장르픽션(jenre fiction)으로만 국한되지 않고, 매니아보다 더 넓은 독자층에게 읽히며 한국문학 장의 한 경향이 되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문학비평가인 스티븐 샤비로는 『탈인지』에서 과학소설이 인간과 비인간,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의 경계까지 탐색할 수 있도록 하며, 인간의 지각 너머에 있는 감수성의 형태들에 간접적으로나마 접근할 수 있게 해줌을 강조한다. SF야말로 인간중심주의적 철학을 넘어서는 미학이라는 것이다.3) 그러나 한국에서 발표된 SF가 과연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설득력과 일관성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SF의 장르 문법을 충실히 계승하지 않은 텍스트의 경우, 근미래에 실현 가능성이 있는 과학적 사실과 기술에 기반하기보다 인문학적 가치와 사유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엄밀한 과학소설인 ‘하드 SF’라고 볼 수 없는 (멸칭의 뉘앙스가 있는) ‘소프트 SF’로 치부되곤 한다. 하지만 다시 샤비로를 참조해서 말하자면, 과학소설의 의의는 직접 체험할 수 없는 개체-존재자의 경험을 유추해 보고 인간종의 우월성과 자기동일성에 대한 환상적 관점을 뒤바꾸는 데에 있다. 정말로 그러하다면 최근 한국의 단편 SF들을 알레고리로만 취급하는 것
작성일 2025-08-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박동억 - 전쟁에 반대하며
전쟁에 반대하며 ―고통과 쟁론 입론 박동억 1. 고통으로 향하기 코소보가 세르비아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하고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것은 1998년 초의 일이었다. 이 무렵 시인 허수경(許秀卿; 1964~2018)은 독일에 머물고 있었다. 뮌스터 대학에서 근동 고고학을 전공하며 석사논문을 준비하던 차였다. 그해 말 NATO가 전쟁에 개입했고 공군을 동원하여 세르비아에 폭격을 개시했다. 허수경은 매스컴 보도를 보며 전쟁의 참혹함에 경악했고 두 나라의 고통받는 민간인을 위해 무엇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끔찍하게 여겼다. 그의 석사논문 주제는 기원전 6,800년에 세워진 중동의 작은 도시 초가 미쉬(Choghā Mīsh)였다. 그는 반만년 전의 멸망한 유적지를 오가며 “도대체, 이런 아카데미의 고상한 놀이가 지금의 전쟁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물음에 잠겼다.1) 다행인 것은 그가 시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2001년 발표한 세 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에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할 수 있었다. 군인들은 팔다리를 잃었고, 아이와 여자들은 고향을 잃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언어로 열거할 때 단조로운 사실이 되어 버렸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실감할 수 있도록 허수경은 시적인 상상력을 활용했다. 그의 시집에는 전쟁의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스스로 목을 자르는 극적인 사건이나 난민이 된 여자들이 짐승 우리로 피난했다가 짐승과 교접하는 일화가 나타난다. 이 그로테스크한 상상은 언어화할 수 없는 전쟁의 잔인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인에게 코소보 전쟁은 그저 먼 나라의 사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아니었다. 허수경은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장갑차에 아이들의 썩어 가는 시체를 싣고 가는 군인의 나날에도 춤을 춘다 그러니까 내 영혼은 내 것이고 아이의 것이고”라고 썼다. 이러한 애도가 무색하게 2003년에는 이라크 전쟁이 발발했고 이에 시인은 2005년 네 번째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의 서문에서 아예 자신의 시를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한 인간이 쓰는 반(反)전쟁에 대한 노래’라고 선언했다. 이처럼 시인에게 시 쓰기는 그의 영혼이 저 먼 타인의 고통에 접경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어떻게 그는 먼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영혼 곁으로 이끌어 올 수 있었을까. 어떤 의미로 그것은 그가 자임한 윤리의식이 역사적 복잡성이나 정치적 알력을 멀리한 채 성립된 간명한 문제의식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누가 가해자인가. 허수경은 전쟁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전쟁을 일으킨 자, 폭력을 수행하는 자를 고발했다. 누가 피해자인가. 그는 여성과 아이들이 겪는 고통을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전쟁을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평화주의나 남성중심주의에 기초한 문명을 비판하는 에코페미니즘으로 일컬어졌다. 나, 태어났어 추워, 라고 말하면 정말 추워서 이 세상을 떠도는 모든 먼지들을
작성일 2025-07-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김웅기 - 경계가 지워지는 사이
경계가 지워지는 사이 -비/인간과 타자 김웅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1) 1 비인간이 가진 속도가 빨라질수록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감응하기 위해 우리가 경유하는 코뮨적 신체는 그러나 공통된 목소리를 요청하진 않는다. 인간 존재에 내재되어 있는 ‘선(善)’이라는 보편성은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의 총체적 시간 속에서 하나로 모아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선(線)’을 만들고 있음을 주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관점에서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의 의미를 재삼 곱씹게 된다. 2000년대 시적 주체는 한국 사회―넓게는 인간 사회가 구축해 놓은 알고리즘을 본격적으로 거부하는 타자의 자리에 자신을 노정 시킴으로써 “자기 존재의 근원을 확인하거나 보장받을 수 없음을 인지하고 실감하는 존재”2)로 변모하였다. 이를 통해 사회체의 최소 단위인 ‘가족’이라는 중심점에서부터 시작된 시적 사유는 단순히 생리적으로 결속된 하나의 사회체에 불과할 뿐 윤리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는 관계를 방증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아이-화자는 시적 주체를 “‘부모-자식’이라는 수직적 차원에서 불화하는 관계”로써 “윤리적 모험”3)을 나서는 존재로 거듭나게 한다. 이 아이-화자는 2010년대를 거치면서 ‘시민적 트라우마’를 흡습한 시적 주체로 전성되었다. 어떤 방식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애도의 총량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실존의 차원에서 마주치게 되는 ‘무능력’”의 테제가 되고 그 무능력이 곧 “‘내면적 성찰’과 동전의 앞·뒷면 같은 관계를”4) 희망하는 고무적인 발화자로 시인을 이끄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 복무해야 하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또 하나의 책무이자 윤리로 자리 잡는다. 이 같은 관점은 시민적 트라우마를 통감하는 주체로서 몸이 갖는 일종의 생활론적 윤리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5) 그런데 2020년대의 시적 주체에게 윤리적 책무감은 역설적으로 더 일반적이고 보편화된 ‘고독감’을 불러왔다. 시민적 영웅이 되지 못한 인간, 소박한 일상조차 꿈꾸지 못하는 인간, 죽지 못해 살아 내는 몸의 형상은 시민적 트라우마 앞에서 내색할 수 없는 존재로 내세워졌다. 이것은 “개인주의의 안온한 고립을 거부”하거나 “낮이라는 다스려진 영역을 다루는 임무 가운데 의연한 관계를 유지하는”6) 숭고한 고독과는 거리가 먼 고독감이다. 그것은 자칫하면 개인주의
작성일 2025-07-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강동호 - 새로움의 경제 2(3)
새로움의 경제 2(3) - 문학적 사용에 관한 비체계적 단상1) 강동호 1. 예술과 상품의 새로움을 구별할 수 있는 원리를 탐색하는 데 있어 ‘유용성’이라는 가치에 주목하는 것은 여전히 유의미한 출발점으로 보일 수 있다. 유용성의 관점에서 예술과 상품이 식별될 수 있다면, 양자의 새로움이 발휘하는 효과 또한 서로 다른 원리로 해명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상품 경제에서 새로움은 도구성과 결부된 차별적 정보 가치로 통용된다. 새로운 상품은 대개 기능적 유용성(사용가치)의 측면에서 과거의 상품과 구별되며, 뚜렷한 비교 우위의 원리에 따라 그 가치가 측정되기 마련이다. 이때 새로운 상품에 부여되는 더 높은 가격이라는 차이적 가치(교환가치)는, 한층 개선된 사용가치의 우월성을 통해 정당화될 수 있다. 반면 예술 작품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예술의 새로움 역시 과거와의 차이를 전제로 한 비교적 가치라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그 가치를 정당화하는 비교 우위의 척도(사용가치의 명시적 우월성)가 설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새로운 예술 작품은 과거의 것보다 한층 매력적으로 인식될 수 있고, 동시대의 감각에 보다 적합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가 과거 작품에 대한 일방적 우위를 뜻하지는 않는다. 이른바 유용성처럼 명확히 우열을 판별하는 기준이 부재한다는 사실은 예술에서의 새로움을 더욱 복잡한 가치로 만드는 주요 원인일 것이다. 2 예술의 자율적 가치를 정당화하고자 했던 전통적 이론들은 대체로 유용성의 결여 또는 그로부터의 자유를 예술의 핵심 본질 중 하나로 파악해 왔다. 유용하지 않다는 점, 즉 그 어떤 실용적 목적이나 기능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예술이 예술로서 존재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때 유용성의 부재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공통 척도의 결여를 통해 부각되는 교환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이다. 주지하듯, 이러한 사유의 계보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적 전환점을 제공한 인물은 칸트이다. 『판단력 비판』에서 그가 제시한 ‘목적 없는 합목적성’(purposeless purpose)이나 ‘무관심성’(disinterestedness)과 같은 개념은, 예술을 시장적 가치 평가와 경제적 교환의 논리로부터 구분하는 철학적 근거에 해당한다. 칸트에 따르면, 예술가는 그 어떤 외적인 목적에 의해 지배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을 생산해야 하며, 감상자는 이해득실과 무관한 순수한 향유를 통해 작품의 아름다움을 경험해야만 한다. 이처럼 예술의 자율성은 어떤 보상이나 대가에도 편향되지 않는 행위의 독립성과 무관심성에 깊이 맞닿아 있다. 이를테면 수공업적 기예는 임금이라는 대가를 전제하는 강제적 노동이지만, 예술은 그 어떤 보상도 요구하지 않기에 전적으로 자유로운 행위로 간주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이익과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경제적 주체(호모 이코노미쿠스)와 동일시할 수 없으며, 무용성은 이와 같은 비환원성,
작성일 2025-06-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1상세보기 -
비평 이지연 - 점과 획의 시간
점과 획의 시간 ― 한강, 『빛과 실』1)로 『바람이 분다, 가라』2) 다시 읽기 이지연 1. 코스모스의 정원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별의 자녀들이다. ―칼 세이건, 『코스모스』 ‘우주(宇宙)’라는 이름은 ‘예로부터 오늘, 위아래와 사방’을 가리키는 단어로 기원전 4세기경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모두 포함한 이 말은 천지만물(天地萬物)과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아우르는 세상의 총체를 뜻하는 것이었다.3) ‘우주’로 번역되는 영어 단어에는 스페이스(Space), 유니버스(Universe), 코스모스(Cosmos) 세 가지가 있는데 각각 목적과 용도에 따라 다르게 쓰인다. 그중 ‘코스모스’는 혼돈, 무질서를 뜻하는 ‘카오스(χάος)’의 반의어로서 고대 그리스어로부터 유래됐다. 1980년 칼 세이건은 천문학과 우주에 대한 지식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겠다는 목적으로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거기에 ‘코스모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방영되자마자 전 세계 인구의 3%가 시청했다는 이 프로그램은 동명의 책으로도 출간되면서 현재까지 1,000만 부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한 칼 세이건의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코스모스』가 처음 한국에서 번역된 것은 원본 출간 이듬해인 1981년이었다. 당시 번역자인 서광운은 ‘Cosmos’를 ‘우주’라고 번역했고, 이후 2004년 홍승수의 번역본에서는 원어 그대로 ‘코스모스’라는 단어를 썼다.4) 그가 번역한 『코스모스』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코스모스(COSMOS)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 모든 것이다.”5)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를 한 번에 오가는 ‘모든 것’의 이치가 우주에 담겨 있다. 그리고 이 우주는 ‘스페이스’도 ‘유니버스’도 아닌, ‘질서’를 뜻하는 이름 ‘코스모스’로 불린다. 600쪽에 달하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세이건의 메시지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인간은, 나아가 모든 생명체는 그 탄생부터 소멸까지 모두 코스모스로부터 비롯되었다. 우리는 코스모스의 일부로서 코스모스의 자손이자 미래이다. 올해 4월, 문학과지성사는 한강의 산문집 『빛과 실』을 출간했다. 책의 제목은 작년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뒤 진행한 기념 강연의 제목을 땄고, 표지에는 그의 작은 정원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의 흑백 사진이 실려 있다. 온통 까만 배경에서 유독 흰 사각형의 무늬가 눈에 띈다. 책에 수록된 산문 「북향 정원」에서 한강은 볕이 들지 않는 정원에서 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거울을 이용해 햇빛을 모아 주어야 한다고 썼다. 거울에 반사된 빛의 형상인 듯한 그것은 &lsqu
작성일 2025-06-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