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웹진재미나요
비평
시대와 작품을 가로지르는 눈-
비평 허병식 - 세계문학에 관한 단상세계문학에 관한 단상 허병식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문학에 새로이 등장한 주요한 담론 가운데 하나로 ‘세계문학’에 관한 논의가 있다. 세계문학이란 세계화 혹은 지구화 이후 도래한 지구화시대 문학의 새로운 존재방식에 대한 논의 속에서 등장한 담론이지만, 그 시작은 이른바 괴테-맑스의 논의가 그 기원이라고 일컬어지듯 근대의 전지구적 도래와 시점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괴테가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말한 “민족문학이란 이제 별다른 의미가 없다. 세계문학의 시대가 도래했다”라고 선언한 것과, “어느 한 국가의 정신적 창조물은 공동의 재산이 된다. 민족의 일면성과 편협성은 더 이상 불가능하고 많은 민족문학과 지방문학으로부터 세계문학이 탄생하고 있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세계문학 담론의 기원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괴테와 마르크스의 선언이 곧바로 세계문학을 근대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잡도록 만든 것은 물론 아니다. 민족이 제국주의와 식민의 결과라면, 그 제국주의와 식민지 경험이 정련한 것이 각국의 민족문학이었고,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저마다 독립국가로 이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민족문학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민족문학이 지니고 있는 ‘영향의 불안’에 대한 응답으로 등장한 것이 비교문학이었다. 민족의 정체성을 새로이 만들어가면서도 한편으로 타자의 문화를 의식하게 된 순간 등장한 것이 비교문학이었던 것이다. 이후 포스트식민주의가 제국주의의 경험이 식민종주국과 식민피지배국에 미친 영향관계를 분석하면서 비교문학이 지니고 있던 문화적 지배의 승인이라는 문제를 비판적으로 제기하고 시작했다. 비교문학과 포스트식민주의가 제국/식민지의 경험 이후에도 이어지는 문화적 지배와 혼종성의 문제와 씨름하였다면, 포스트식민주의로는 더 이상 대응하기 어려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지배가 전개되면서 그에 대한 문화적 응전으로 재귀한 것이 세계문학일 것이다. 괴테 이후의 세계문학의 전개를 이렇게 거칠게 요약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세계문학이란 지구화 시대의 새로운 비교문학이자 포스트식민을 경유하여 새롭게 등장한 ‘제국’에 대항하는 문학운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21세기 이후 ‘세계문학론’에 또다시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카사노바와 모레티의 논의이다. 그들의 세계문학론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소개와 비판이 제기되었다. 모레티와 카사노바의 세계문학론이 강조하는 세계란, 일차적으로 “하나이면서도 불균등한” 세계체제, 혹은 서로 진입하기 위해 각축하고 경쟁하는 세계문학 공간으로서 주로 사회경제적 시각에서 이해된다. 즉 이들의 세계 개념은 문학을 조건 짓는 사회경제적 환경 내지 배경에 가깝다.1) 김용규는 카사노바와 모레티의 논의와 그들에 비판적인 논자들의 세계문학론을 소개하면서 “오늘날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과정을 보면, 세계문학의 중심부에서는 중심부의
작성일 2025-11-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류수연 -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1류수연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5년 11월부터 2026년 1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1 -K-pop, 변화하는 스토리텔링 류수연 2020년대 한국 문학계를 뒤흔든 가장 큰 사건을 꼽는다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그 첫 번째에 놓일 것이다. 그것은 근대문학 이후 세계문학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오랜 콤플렉스에 종지부를 찍은 동시에 한국문학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과제를 부여한 전환점이기도 했다. 그런데 문학이라는 외연을 스토리텔링으로 좀 더 넓힌다면 한 사건이 더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방영되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등장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하게도 ‘왜’라는 의문이 따라붙을 것이다. 노벨문학상과 OTT 오리지널 영화 사이에는 별다른 연관성이 없어 보이니 말이다. 작가 한강에 대해 논하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문학의 일이며, 그의 노벨상 수상은 지극히 문학 그 자체의 사건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다르다. 애초에 그것은 문학 텍스트가 아닌 영상이지 않은가? 원작이 있는 작품도 아니니 미디어믹스로 접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문학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다루는 것에 고개를 갸웃할 사람이 많다는 것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대단히 의도적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는 필연적으로 이 두 개의 키워드를 선택했다. 그것은 현재의 한국문학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 그 자체를 환기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OTT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현 단계 한국문학과 한국적 이야기가 전 세계인에게 어떻게 수용되고 소비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가장 강력한 지표이다. 그 사이에는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대문자 ‘K’로 지칭되는 K-컬처가 놓인다. 이 연재에서 나는 ‘K’를 화두로 한국문화, 그리고 한국문화를 그려낸 스토리텔링의 3가지 국면을 탐색하고자 한다. 1. 바깥, 또 다른 중심 스토리텔링으로서 한국문화를 말하는 첫 번째 장에서 가장 먼저 선택한 키워드는 한강이 아닌 K-pop이다. 이 연재의 최종적인 종착지가 결국 문학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선택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현 단계에서 한국을 둘러싼 모든 스토리텔링의 중심에 있는 것이 다름 아닌 K-pop이라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오히려 어쩔 수 없는 선택에 가깝다. 오늘의 세계인이 실감하고 상상하는 한국문화의 첫 장면은 매력적인 아이돌이 등장하는 K-pop 퍼포먼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K-pop의 성공은 여전히 놀라운 사건이다. 세계 문화의 가장 변방에 있는 한국이 이토록 많은 세계적 스타를 배출했다는 것은 놀라움을 넘어 때로는 기적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거기엔 수많은 ‘왜&rs
작성일 2025-11-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현재 - 내 솔직한 마음*아래의 글은 이라는 제목으로 기획된 강연의 강연록을 개고한 글입니다. 은 말과활 아카데미 북클럽 [산책:자]의 일환으로 2025년 10월 16일부터 11월 6일까지 총 4주간 진행되었습니다. 내 솔직한 마음 현재 인생에서 수많은 적수를 만났지만, 아내여. 그대 같은 적은 생전 처음이다. -바이런의 격언, ···이라고 알려진 격언 1. “My soul is dark!” 솔직한 사람들은 이기적 오늘 제가 다뤄 볼 시인은 김수영이고요, 그리고 주해할 시는 「풀」입니다. 너무 유명한 시인이고 너무 유명한 시죠. 그렇지만 결국에는 고백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고백’. 사전을 찾아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감추어 둔 것을 사실대로 숨김없이 말함”.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수영은 고백의 달인이었습니다. 숨기는 게 좀 나을 법한 일상적인 치부까지도 굉장히 적나라한 발화로 시에다 풀어내곤 했었죠. 그런데 시만 그런 게 아니라 생활에서도 말이나 행동에 거침이 없었나 봐요. 예를 들어 「성(性)」 같은 시에는 외도를 비롯한 시인의 성생활이 가감 없이 노출되고 있는데, 실제로도 당시의 출판사 접대 자리에 참석하고 돌아온 이른 아침이면 아내인 김현경 여사에게 전날 밤 다른 여성과 동침한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늘어놓곤 했었더래요. 눈까지 반짝여가면서 말이죠. 그러면 김현경 여사는 또 그 얘기에 장단 맞춰가면서 재미나게 들어주었다고 하고요. 서로가 어떤 심정으로 그런 대화를 주고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모습이 유쾌해 보인다기보다는 약간 닳고 닳은 부부간의 기싸움 같기도 한데, 하여간에 이런 고백은 생전에 두 사람의 복잡한 관계를 감안하고서라도 상대방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진솔함이죠. 그러니까 김수영은 너무 솔직해서 탈이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왜 살다 보면 자기 기분이나 생각이 얼굴에 바로바로 드러나는 사람들 있잖아요? 좋으면 좋다든지, 싫으면 싫다든지, 도대체가 갈무리가 안 되는 사람들. 김수영이 딱 그런 타입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좀 완전 반대인데, 면전에서는 눈치 보느라 쩔쩔매다가 집에 가서 끙끙 앓는 타입이거든요. 그래서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람들 보면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화도 좀 나기도 하고요. 얼마 전에는 제가 자주 가는 카페가 있는데 사장님이 저 보자마자 한숨을 푹 쉬는 거예요. ‘하아···.’ 뭐지? 손님 나밖에 없는데. 혹시 방금 나 들으라고 그런 건가? 제가 독서대 들고 다녀서, 갈 때마다 허름하게 이거저거 펼쳐 놓고 죽치고 앉아 있거든요. 이런 일 있으면 항상 역지사지해 봅니다. 아니 짜증이 날 수는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나 같으면 좀 안 들리게 할 것 같은데···. 아니, 자기 심기가 불편
작성일 2025-11-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최가은 - 비평의 자리 2비평의 자리 2 최가은 1. 너는 변호인이자 시해자로서, 죽은 작가의 약점과 결점을, 네 작업에 알맞은 누추한 진실을 건져낼 수 있는 교묘한 질문들 속으로 그녀를 유인할 것이다. 너는 그 질문들 속에 죽은 작가와 함께 살았던 사반세기 동안의 시간을 반성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은밀한 함정들을 설치하여, 그녀가 자신의 얼굴이라는 투명한 거울을 대면하도록 부추길 것이다. 죽은 작가의 아내는 네 속임수와 거짓말에 치가 떨릴 것이고, 그날 너를 집으로 들여놓은 것을 자책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너는 진실의 조각을 발설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죽은 작가의 아내는 네게 진실의 일부를 공유한 것을 후회할 것이다. 너는 미열 같은 흥분 속에서 응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초인종 소리가 멎었다. 너는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여전히 저택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들리지 않았다. 대문은 완강하게 잠겨 있었다.1) 소설은 ‘죽은 작가’라는 기호 아래 결집하고 흩어지는 ‘너’의 운동으로 가득 차 있다. ‘너’는 누구인가. ‘너’는 무언가를 좇는 자. 불가해한 형태로 유폐된 어떤 진실을, 진실의 환영을, 혹은 환영을 덮치는 기억을 추격하는 자이다. 누추한 진실을 누비기 위한 거짓, 투명한 거짓을 뭉개기 위한 진실 사이를 정신없이 횡단하는 ‘너’는 그 무언가의 “변호인이자 시해자로서”, “진실의 조각을 발설해야 할 의무”를 지녔다고 주장한다. 다시, ‘너’는 누구인가. ‘죽은 작가’에 관한 단편소설을 쓰기 위해 그의 흔적을 찾는 중이라는 ‘너’는 그의 문학적 “유산”을 “냉혹하게 적출”하는 “문학적 해체”, 혹은 일종의 자기기만에 불과한 “문학의 우상을 살해하는 퍼포먼스”2)를 준비하는 자이다. “숭배”와 “모독” 사이의 간극과, 그 간극을 오가는 자의 공포를 요란하게 발설하며 초조한 기대로 가득 차 있는 자이기도 하다. ‘너’는 은밀하게 설치한 네 함정에 의해 ‘죽은 작가’와 ‘죽은 작가의 아내’가 “자신의 얼굴이라는 투명한 거울을 대면하도록 부추길” 수 있다고 믿는다. ‘죽은 작가’보다 언제나 한 발 앞선 ‘앎’과 ‘진리’를 확보한 것이 ‘너’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들로부터 진실에 관한 특권적 “의무”를 지닌 그들의 미래, 다시 말해 우리의 현재이다. 곧 맞이하게 될 무력하고 무지한 과거의 몰락 앞에서 흥분한 현재는 초인종을 누른다. 한 번, 그리고 또
작성일 2025-10-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방승호 - 시쳇말: 문학이란 레퀴엠시쳇말: 문학이란 레퀴엠 방승호 1. 레퀴엠 2. 아직 있는 것을 위한: 예기적 애도 3. 거처가 되어 주는: 자기 삭감의 애도 4. 시체들의 말 5. 문학이란 레퀴엠 1. 레퀴엠 “Dona eis requiem” 저들에게 안식을 주소서 레퀴엠.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 진혼곡(鎭魂曲)이라고도 불리는, 생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를 위한 노래들. 누군가는 이것을 두고 모차르트를 떠올리거나 주세페 베르디를 말하겠지만, 이번 작업의 초점은 레퀴엠의 현대적 흔적들을 더듬어 보는 일이다. 흔적들은 떠다닌다. 다만 우리가 찾지 않았을 뿐. 레퀴엠은 그 형태를 달리하며, 혹은 변주하며 또 다른 가면을 쓰고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것이 15세기에 여러 성부의 형식으로 변주되었듯이, 이 시대의 레퀴엠은 더 다양한 이미지가 되어 잔존한다. 원형이 훼손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죽은 이가 죽어서도 세계에 존재하듯이 원형은 몰락하였더라도 그것은 이미지가 되어 세계에 기생한다. 문학이란 이름으로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도사리는, 잠재적 가능태로서 숨죽인 기표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레퀴엠은 죽은 자의 죽음을 위로하는 일뿐만 아니라 죽은 자가 여전히 우리와 함께한다고 말하는 일에도 쓰인다. “Dona eis requiem(저들에게 안식을 주소서)”. 이것은 타자를 기억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영원한 시간을 부여하려는 주문이기도 하다. 기억과 애도는 호출과 재생을 야기한다. 응답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호명하고 증언하며 기록을 거듭하는 일이 때로는 제한된 해석 바깥의 사건을 일으킨다. 상징이 이미지가 되듯 레퀴엠은 파생된다. 형식적 애도 바깥에서 주체의 출현을 예비하는 시도로서 레퀴엠은 변이된다. 들뢰즈가 말한 해석 자체를 전환시키는 해석, 다시 말해 관습 바깥의 해석을 가능케 하는 이행은 정형화된 애도에서 탈피할 때 비롯된다. 의식과 실천이 범벅되는 그 경계로부터 현대식 레퀴엠은 다시 꿈틀댄다. 문학이란 이름의 레퀴엠이 모습을 드러낸다.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이라는 전제를 뒤흔들면, 관행의 중력 바깥으로 무엇인가 보이기 시작한다. 아직 죽지 않은 자를 위한 형식. 자기 삭감의 형식으로 뒤틀린 채 존재하는 양태. 오히려 이러한 지점들이 레퀴엠을 작동하는 작금의 방식이랄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학을 레퀴엠이라는 이름 아래 포섭하자는 말은 아니다. 타자에 대한 애도라는 명분으로 다시 정형화된 그 관습 이면의 무엇들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문학은 늘 질서 바깥의 것을 주목해 왔으며, ‘문학적인 것’은 그 양태들과 함께 뒤섞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레퀴엠으로부터 다시 보아야 하는 것은 반드시 삶과 죽음의 경계가 아닐지라도 주체와 타자로 호명되는 그 이분적 질서 사각지대에 애도 대상이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다. 죽음으로 호명된 타자는 잠시나마 주체의 자리에 서게 되지만, 죽지 못한 존재는 타자라는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채 경계에
작성일 2025-10-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한강의 양의성(Ambiguity)한강의 양의성(Ambiguity)1) 후쿠시마 료타(福嶋亮大)2) 한국어 번역: 정창훈 1. 우선 한 가지 밝혀 두자면, 나는 한강의 열렬한 독자라고는 할 수 없다. 그녀가 주제화하고 있는 한국 근현대사에는 큰 관심을 갖고 있지만, 내가 그것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으며, 한강의 서술 방식 또한 종종 암시적인 측면이 있기에 읽어 나가다 보면 구름을 잡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적지 않다. 그녀가 예리한 감각의 소유자이며 그것이 문장에 추진력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모든 작품에서 소재나 주제에 적합한 서술 방식이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게다가 그녀의 문학이 일본에서 수용되는 방식을 보면, 전반적으로 비판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 위화감을 느낀다. 예를 들어, ‘시적(詩的)’이라고 일컬어지는 그녀의 문체가 구체적으로 분석되지 않고 무조건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이 그러하다. 그러한 평가를 하고 싶다면, 글쓴이가 먼저 ‘시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단순히 꾸밈만 있고 내용이 없는 문장과 어떻게 다른지를 책임을 갖고 확실히 검증할 필요가 있다. 솔직히 말해서, 한강을 둘러싼 일본 독서계의 분위기는 ‘아픔’이나 ‘상처’나 ‘회복’과 같은 심오해 보이지만 결국 누구나 안심하고 입에 담을 수 있는 클리셰를 동반할 뿐이며, 개별성・비판성을 결여한 채 모호한 안개처럼 퍼져 나가고 있는 듯 보인다. 그녀에 관한 일본인들의 비평은 대체로 판에 박힌 듯이 이러한 클리셰로 이뤄져 있는데, 이는 현재 일본에서 우크라이나나 팔레스타인 전쟁이 빈번히 언급되는 반면, 과거 식민 지배에 대한 언급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서구의 독자들이라면 그래도 괜찮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본의 독자들이 한강이 묘사하는 ‘아픔’을 그토록 쉽게 일반화해도 괜찮은 것일까? 애초에 근현대 한국의 ‘아픈 역사’의 원인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카터 에커트의 방대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 뿌리내린 군사주의의 뿌리는 일본 육군의 사관 교육에 있었다. 군사 쿠데타를 거쳐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본래 만주국 군관학교 출신으로, 일본인 교관으로부터 규율과 가치관을 주입받은 군인이었다. 따라서 ‘개발 독재’를 기축으로 하는 그의 국가 형성 사업은 “항상 현저한 군사적 색채”를 띠었고 “경제를 포함한 모든 분야의 국가 프로젝트가 군대식으로 행해졌으며, 그 영향은 한국 사회 곳곳에까지 미쳤다”고 한다.3) 한강의 대표작 『소년이 온다』에서 다뤄진 1980년 광주 항쟁도 한국의 군사주의적 정신 풍토를 고려하지 않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박정희 암살 사건 이후, 전두환의 계엄령 아래 북한의 공작에 의한 치안상 위협을 구실로 삼아 일어난 이 학살에는
작성일 2025-10-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소영현 - 미치고 싶거나 미쳐가는, 미친 여자들미치고 싶거나 미쳐가는, 미친 여자들 소영현 사이보그 글쓰기는 본원적 순수함이라는 기반 없이, 그들을 타자로 낙인찍은 세계에 낙인을 찍는도구를 움켜쥠으로써 획득하는 생존의 힘과 결부된다. - 도나 헤러웨이, 『해러웨이 선언문』, 책세상, 2019, 72쪽. 1 은유로서의 미친년 황정은의 소설 『디디의 우산』(2019)에는 젊은 여직원에게 집요하게 이른바 ‘작업’을 걸고 “사적인 접근”1)이 여의치 못할 때 “공적으로”(200쪽) 폭언을 쏟아내거나 고압적인 태도로 업무를 지시하면서 직장 내 괴롭힘을 일삼는 남성에 관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흔하게 만나는 에피소드이다. 그만큼 현실에서 상시 발생하는 일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례에서 정의가 구현되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 특히 가부장적 성격이 여전한 한국의 직장 문화에서 이런 일은 대개 불쾌나 모욕감이 쌓인 끝에 여직원 혹은 피해자가 퇴사하는 경우로 끝나게 된다. 그나마도 자발적 퇴사보다 더한 피해를 입는 일이 허다하니, 최소한의 피해로 상황이 정리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에서 흔하디흔한 여성혐오적이고 비윤리적인 상황에 대한 사례 모음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디디의 우산』 속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서 작가는 화자 김소영의 에피소드를 다루면서 동생 김소리의 입을 빌려, “미친년이 되더라도”(202쪽) 사무실 사람들에게 김소영이 겪고 있는 불쾌와 모욕감, “심리적이고 신체적인 위협과 불안”(202쪽)을 사람들에게 말할 필요가 있다고 짚는다. 거꾸로 이해해보자면, 위협과 불안을 말함으로써 그녀 자신이 미친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미친년은, 말하자면, 스스로 사회의 상식, 그것은 황정은 식으로는 종종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이 상식이 된 악의 세계 바깥으로 자신을 내보내는 일이 된다. 여기서 미친년은 상식의 세계 너머의 정상성을 획득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의미를 갖는 말이 된다. 2 낙인으로서의 미친년 미친년은 그런 의미에서 현실 너머 정상성을 역설하는 말이 된다. 바로 그런 초월성의 획득을 통해서나 가닿을 수 있는 지점이라는 점에서, 삶의 비정상성을 바로잡기 위해 억압적인 사회적 틀을 넘어서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도약이 ‘미친년 되기’라고 한다면, 『디디의 우산』에서 작가도 밝히고 있지만, 그 ‘미친년 되기’는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의미로라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그만큼의 의미를 획득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사실 현실의 차원에서 보자면 스스로 미친년이 되는 일보다는 미친년으로 낙인찍히는 일이 더 많다고 해야 한다. 미친년이 되기를 원하지 않지만, 미친년으로 지목되거나 명명되어 내쳐지는 일, 어쩌면 ‘미친년 되기&rsquo
작성일 2025-09-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박동억 - 고통의 서열과 증언의 권리고통의 서열과 증언의 권리 ―고통과 쟁론 입론 마무리 박동억 1. 인간의 범주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고통으로 향하려는 실천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고통은 섬이다. 고통을 겪는 이는 말할 여력을 가지기 어렵고, 듣는 자는 판이한 삶의 입장에서 고통을 오독하며, 사회제도는 고통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춘다. 결국 모든 존재는 자기 몫의 고통을 홀로 짊어지며, 한 존재가 끝까지 살아 낸 고통은 그의 오롯한 비밀로 남는다. 하나의 고통은 하나의 침묵 속에서 죽는다. 사실 그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고통은 아주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겪었던 고통을 내가 겪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부끄럽지만 다행이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사람에게 고통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주 예외적인 사건이 우리에게 그러한 욕망을 간절한 것으로 만든다. 어떤 참혹한 사건과 그러한 참혹을 겪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그 자체로 사건이다. 그것은 고통의 우주에서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그저 한 줌에 지나지 않음을 죄악으로 느끼게 한다. 수많은 애도 행위와 추모 행사, 그리고 기도는 그저 당신의 고통을 잘 이해했다는 착각을 만들어 낸 뒤 당신을 떠나보내는 일을 합리화하는 과정이 아닌지 반문하게 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쓴다. 문학은 당신이 ‘아직 여기 있다’라고 말하기 위한 형식, 이 작품의 언어가 당신이 겪는 고통 자체이기를 꿈꾸는 하나의 몽상이다. 물론 타인의 고통을 재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또한 설령 그들의 고통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때조차 그들의 고통을 미화하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는 데 그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환부를 드러내고 그의 고통을 향하기 위한 단초로서 문학은 하나의 탐구이다. 그런데 주디스 버틀러가 『불확실한 삶』(2004)에서 강조했던 것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해야 한다는 윤리적 소명을 간직한 상태에서도, 어떤 이들에게는 눈길조차 두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예컨대 전쟁터의 적군이나 제3세계의 국민이 그렇다. 버틀러는 미국의 저널에서 이스라엘 병사와 국민을 위한 추모란은 존재하지만, 팔레스타인 국민을 위한 추모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비판한다. 어떠한 선량함은 더 윤리적인 지평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제약한다. 여기서 그가 제안하는 용어는 ‘애도의 서열’1)이다. 애도의 서열이란 이웃은 소중히 애도하고 타인의 죽음에는 반응하지 않는 차별의 원칙이 우리에게 내면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것은 누군가의 고통으로 향하려는 우리의 의지 자체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러한 의지의 방향에 대해서는 냉철하게 반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허수경은 그러한 애도의 서열이야말로 그가 극복해야 하는 과제임을 자각한 시인이었다. 그는 독일에 체류 중인 한국인 학생이었고, 한국인의 시선으로든 독일인의 시선으로든 유고슬라비아, 이라크, 팔레스타인 등은 낯선 이국이었다. 허수경은 2000년대를 전후로 그러한
작성일 2025-09-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이채원 - 빛의 실패가 사과 한 알을 생성하는 순간빛의 실패가 사과 한 알을 생성하는 순간 -심지아, 『로라와 로라』(민음사, 2018) 이채원 1. 유폐된 모든 것을 향해 글쎄, 라고 답하며 기존의 언어 체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목소리를 발화하는 일은 시가 늘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시작(侍作)에 있어 고정화된 관념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기존의 언어가 초래한 대상의 고정된 내부를 새롭게 모색하려는 시도는 역설적으로 기존에 상징화된 기호와의 연결 선상 위에서 재구성될 따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언어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실재를 포착하려는 일, 현존하는 이미지에 언어를 부여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선언을 끌어내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여기, 여러 가치가 충돌하는 이 세계에서 끊임없이 무언가에 실패하고 있는 시인이 있다. 모든 풍경 앞에서 “글쎄”(「부엌의 부흥」)라고 답하며, “나는 나의 이야기를 믿지 않”(「여름 자르기」)는다고 말하는 이, 바로 심지아다. 시인은 뭔가를 선명하게 확정이나 확신하는 대신 이탤릭체의 목소리나 상반되는 개념을 배치하고, 동일한 단어를 일관되지 않은 감각으로 무한히 번복하는 행위를 끊임없이 발화하며 언어의 간극을 부러 형성하는 듯싶다. “한 땀 한 땀 꿰매진”(「풍경의 예절」) “단단한 문장”(「우리들의 테이블」)에 의도적으로 틈을 벌리는 듯한 시인의 방식은 현실에서 달성할 수 없는 언어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의미화의 지연으로 연결되며, “언어가 잊은 것들”(「소유자」)에 대해 사유하는 시선의 토대로서 작동한다. 시의 가능성이 새롭고 낯선 목소리로 우리를 둘러싼 견고한 지반을 허무는 것이라면, 심지아는 언어의 틈새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오류와 관성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다. 가령 본고에 수록된 시에서 로라, 글쎄, 서랍, 사과와 같은 기표의 연쇄를 통해 “당신은 몇 개의 허용을 가졌습니까”(「소유자」)하고 성찰하듯 던지는 질문이 그러하다.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심지아의 첫 시집 『로라와 로라』을 읽어 보기로 하자. 로라와 로라, 한 사람처럼 두 사람처럼, 다섯 사람처럼, 로라와 로라 (‧‧‧) 가장 나이며 가장 나의 것이 아닌 것처럼 가장 너이며 가장 너의 것이 아닌 것처럼 (‧‧‧) 얼굴이 비대칭으로 자라나는 로라와 로라 ―「로라와 로라」1) 부분 표제작 「로라와 로라」를 보면, 로라는 “한 사람처럼, 두 사람처럼, 다섯 사람처럼” 분열하며 증식한다. 로라는 단일한 존재가 아닌 동명이인이 되기도 하고, 혹은 이름은 다르지만 외양이 유사한 “쌍둥이”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나아가 화자는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나 “코끼리”나 “시체”, “외계인”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ld
작성일 2025-09-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신은조 - 셀프캠 시뮬레이션; 존재하지 않는 그리움의 시작법셀프캠 시뮬레이션; 존재하지 않는 그리움의 시작법1) -황인찬과 배시은의 시를 중심으로 신은조 1. 왜 그리움은 이 세상에 없는가 이창동의 영화 은 “나 돌아갈래!”라는 외침으로 포문을 연다. 기차가 달려오는 선로 위에서 절규하는 남자 “영호”는 어느 순간 자신의 인생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행복으로부터 멀어져 버렸으며,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부터 멀어지기를 선택한 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후 미쳐 버린다. 그래서 영호의 비명은 만약 시간을 멈추고 행복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이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이때 앞으로만 나아가는 기차의 이미지는 역행을 불허하는 시간의 특성과 매우 흡사하며, 선로에 서서 기차를 막아서는 영호의 행동 또한 시간의 흐름을 멈춰 세우려는 의지의 표명 그 자체라고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은 언제나 앞으로만 흘러가며, 이 장면과 함께 그의 삶은 막을 내릴 것이다. 과거는 그것이 이미 지나갔다는 사실만으로도 매혹적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고향 땅의 꿈을 꾸거나, 기행을 일삼는 사람들의 주변에 사진, 비디오, 일기와 같은 기록 매체가 놓여 있는 장면은 낯설지 않다. 지나간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고, 독자적인 물성을 부여하는 이미지들. 시리즈와 같이 과거의 사건들을 그대로 되살려 내는, 그 자체로 노스탤지어인 매체는 대중들이 시간을 넘나들 수 있도록 권능을 행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요즘 등장하는 미디어·매체·창작물에 드러나는 노스탤지어는 조금 다른 선로에 올라타 있는 듯하다. “베이퍼웨이브2) 음악 장르에 조악한 영상을 짜깁기해 놓은 에스테틱 영상”이 유행하는 현상과, 80년대 미국 올드스쿨 힙합 패션의 대표 격인 펑퍼짐한 바지와 브라탑을 입고 춤을 추는 톱 아이돌 가수들을 떠올려 보자. 그들의 뮤직 비디오에는 일본 도쿄 외곽의 풍경이 비추어지며, 등장하는 인물은 90년대의 전자 제품들을 사용한다. 이와 같은 이미지는 앞서 언급했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동떨어져 있음은 물론, 실존하는 시대상을 재현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는 “복고”나 “레트로” 등의 키워드와도 거리가 있다. 이상한 일이라면 일련의 작품들을 감상한 대중들이 해당 영상에 공감하며 심지어는 그리워한다는 것이겠다. 이하림은 시대적, 정서적으로 동떨어진 이미지들을 매개 삼아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현대 매체들의 동향을 “액체 근대(지그문트 바우만)”로 통칭되는 포스트모던 사회에서의 파편화된 기억, 그리고 그로 인해 파열된 역사성의 형상이라고 정의한다.3) 세계화와 개인주의로 인해 “집단 기억”이랄 만한 상실의 경험을 갖추지 못한 현대인의 집단적 무의식이 정체성 혼란을 불러일으키므로, 경험한 적 없는 것을 기반으로 한 ‘보철 기억’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작성일 2025-09-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조대한 - 가짜들의 문학가짜들의 문학 조대한 이상의 실제 이름은 김해경이고 이상은 그가 만든 가명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이름의 탄생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과 추측들이 존재하는데, 전기적으로 설득력 있는 주장은 크게 두 가지 정도이다. 하나는 동생 김옥희의 증언이다. 경성고공에서 건축을 전공했던 해경은 졸업 후 공사 현장에서 종종 일을 하곤 했다. 당시 일본인 인부들 중 해경을 김 씨가 아닌 이 씨로 착각했던 이들이 있었고, 그들이 ‘김 상(金さん)’을 ‘이 상(李さん)’이라고 오인하여 부른 까닭에 해당 이름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1) 다른 하나는 친우 구본웅이 선물한 상자와 관련된 설이다. 김해경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구본웅이 그에게 오얏나무로 만든 화구 상자를 선물로 주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해경이 자신의 이름에 ‘이(李)’와 ‘상(箱)’자를 넣었다는 것이다. 실제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서 발견되는 이상이라는 이름과 반평생 지속된 구본웅과의 교류 등을 생각한다면 이 또한 충분히 수긍이 가는 설명이다. 어느 쪽이 진실이든 이후 이상은 김해경을 대신하는 이름이 되어 한국문학사 내에 영원히 박제되었다. 한데 김해경에게 이상 외에도 다양한 여분의 이름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그는 이상을 포함하여 비구(比久), 보산(甫山), 하융(河戎), (H)R 등의 가명을 자신의 글에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비구’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은 소설 「지도의 암실」이다. 이 작품이 이상의 창작물일 것으로 추측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작품 속에서 ‘리상’이라는 이름이 여러 차례 반복된다는 것, 이상이 비구라는 호를 썼다는 친우 구본웅의 증언이 존재한다는 것, 「지도의 암실」에서 나온 표현이 이상의 다른 작품 속에서 유사한 정황을 두고 되풀이된다는 것이다.2) 비구는 이상의 다른 필명임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보산’의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은 소설 「휴업과 사정」이다. 이 소설이 이상의 작품으로 추측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휴업과 사정」 이전에 발표된 이상의 소설 두 편은 모두 잡지 『조선』을 통해 공개되었는데, 「휴업과 사정」 역시 앞서 게재된 「지도의 암실」과 1개월의 시차를 두고 『조선』에 발표되었다. 「휴업과 사정」은 한 달 먼저 발표된 「지도의 암실」과 비슷한 문체를 사용하고 있고, 띄어쓰기와 한자 사용 방식도 이상의 작품들과 유사하다. 「휴업과 사정」이 발표될 당시 사용된 삽화가 이상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또 다른 잡지에서 똑같이 발견된다는 점3)도, 이 소설이 이상의 작품임을 뒷받침하는 근거라 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전집에서 「휴업과 사정」을 이상의 작품에 포함시키고 있고 여러 정황적 근거를 고려해볼 때 보산을 이상의 필명으로 간주하는 것은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하융’이라는 이름은 이상이 박태원의 작품 「소설가 구보씨의
작성일 2025-08-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이한나 - ‘최진실’이라는 아이콘 1‘최진실’이라는 아이콘 1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이한나 1. 1990년대, ‘깜찍한’ 등장 1990년대를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잡지나 신문을 뒤적이다 보면 꼭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작은 인터뷰든, 신문 한 면을 다 차지하는 대기업의 광고든 ‘최진실’, 그녀의 이름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대중문화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고 이에 따라 몇 계간지에선 ‘대중성’의 확산과 견제에 대해 심각하게 논의하던 이 무렵, ‘톱스타’ 최진실은 그 진중한 분위기와는 유리된 곳에서 한껏 포즈를 취한다. 대개 컬러로 인쇄된 그녀의 그 포즈를 바라보는 일은, 처음엔 호기심이었다가, 나중에는 한 번은 살펴보아야 할 책무로 남았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최진실을 CF 스타로서 발돋움하게 해 준 대사는 나도 어릴 적 들어 본 적이 있다. 90년대로 진입하기 직전, 통통 튀는 새댁의 모습을 한 그녀는 단숨에 “최진실 선풍”1)을 불러온다. 인기의 비결이 “누이 같고 딸같이 부담 없는 분위기를 귀엽게 보아준 결과”2)라고 일컬어지듯 최진실은 “남녀노소 모두 좋아하는”, “부담 없고 솔직하여 친근감 있는”3) 이미지로 만인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다. “90년대 문화의 상징적 존재”인 “우리 시대의 스타”4), “구김살 없이 상큼한”5) 그녀는 일찍이 CF로 빚어 낸 외적인 이미지 외에도 한 PD의 발언을 보태면 “좋은 집안, 좋은 대학이 아니라도 건강하게, 제멋에 살아갈 수 있는 본보기를 마련한 인물”6)이었기에 선호된 것으로 보인다. 최진실이 답한 그 수많은 인터뷰를 따라 읽다 보면 그녀가 X세대, 오렌지족의 자유롭고 방탕한 생활과는 동떨어져 착실히 살아온 인물임이 재차 강조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섣불리 투기에도 나서지 않고 온 수입을 차곡차곡 저금하고 있는 모범적 인물로서 심지어 당시 주택은행장이었던 김재기와의 만남까지 추진되곤 한다.7) 특히 “깜찍함으로 대표되는 우리 시대 스타”8)와 같이, ‘깜찍하다’는 수식어는 셀 수 없이 최진실의 옆에 꼭 붙어 있다. 아마 탤런트 중에서도 작은 그녀의 체구와 귀여운 언행들로 인해 불러들여졌을 이 말은, 동시에 최진실이라는 아이콘이 ‘깜찍함’을 경유하여 관통하고 있던 것은 과연 90년대의 무엇이었을까? 라는 물음을 던지게도 한다. 이를 찾기 위해 이 자리에서는 최진실이 “가장 사랑하고 좋아하는 영화고 최진실 그대로 미영이 역을 기쁘고 편안하게 할 수 있었던 영화”라 밝힌, “최진실의 매력과 재능이 제 물을 만난 시네마 스페이스”9)였다고 일컬어지는 〈나의 사랑 나의
작성일 2025-08-01 작성자 관리자 댓글수 0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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