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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송종원 - 미래파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아니 무엇이었을 수 있었나 (2)
미래파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아니 무엇이었을 수 있었나 (2) 송종원 1. 문제는 가족이야 지난 회차에서 김민정의 시에 쓰인 고통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 두었다.1) 그 이야기를 먼저 꺼내 보자. 『날으는 고슴도치아가씨』에 실린 해설의 가장 뒤에는 이런 문장들이 있다. “지금 내게는 그저 상식적이고 흔한 질문이 떠오른다. 어째서 한 시인의 머릿속에 이토록 끔찍한 이미지들이 미친 듯이 자라고 있는 것일까? 이 여자의 악몽들은 대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창문 밖을 바라보니, 초등학교 아이들이 정문을 나와 마구 거리로 쏟아지고 있다. 햇살이 총총, 가득하다.”2) “상식적이고 흔한 질문”이야말로 비평이 던져야 하는 진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비평이 고담준론을 늘어놓을 때 작품과 독자 사이에는 장벽이 생기고 비평가와 작가 사이에 불신이 형성된다. 비평이 자상해지는 순간 독자는 문학 작품 곁으로 다가오고, 작가는 비평가와 협업에 흥미를 느낄지 모른다. 각설하고. 인용에서 질문과 이어지는 서술을 보면 이장욱은 저 질문의 답으로 ‘학교’를 의심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런데 사실 그는 해설 중반에 악몽의 발신처를 한번 짚고 넘어간 적이 있다. “아마도 이 시집에 대해 말하면서 이 시집에 담겨 있는 가족 풍경을 피해 갈 수는 없을 것 같다. 가족들이 모여 있는 공간은 어떤 의미에서, 들끓는 거리와 세상과 내면의 악몽이 발원하는 곳이면서, 그 악몽들이 압축되어 있는 곳이다.”3) 나 역시 가족을 지목하고 싶다. 모든 가정마다 해골이 하나씩 있다고 했던가. 문제는 김민정이 그린 가족 속의 해골이 어떤 사연을 가졌는지에 있다. 담배 피우다 담배 먹은 엄마가 글쎄 날 염통 속에서 건졌다지 뭐예요 아마도 연기가 매콤해서 내가 재채기를 했나 봐요 훌쩍거리는 내 콧소리를 듣고 주먹을 입에 넣어 바람 빠진 럭비공 같은 염통을 턱 하니 뽑아냈다나요 (···중략···) 난 가끔 엄마의 목구멍에 미끄럼틀이 깔려 있는 건 아닐 까 속 깊이 플래시를 비춰 보곤 해요 그러나 심심해지면 미끄럼틀을 타고 미끄러져 보다 엉덩방아를 찧기도 하죠 줄줄이 총살당한 죄인들처럼 고개를 늘어뜨린 바나나나무들이 죽기 전에 참 많은 바나나를 흘려 놓았거든요 만일 엄마가 봤으면 기를 쓰고 다 주웠을 텐데 그럼 나도 다 까먹고 배 터져 죽었을 텐데······ 참, 엄마의 애기집 속에는 아직 한 아이가 살고 있어요 하지만 난 걔를 좋아하지 못해요 바나나 나라에서 바나나씨로 날아온 걔가 내 탯줄까지 쪽쪽 빨아먹고는 십여 센티 장딴지로 혼자 굵어 갔거든요 나가 나가 당장 우리 집에서 짐 빼 그 아인 살색 샤프심처럼 삐쩍 곯은 날 염통까지 단번에 걷어차 버렸어요 (···중략
작성일 2023-12-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344상세보기 -
비평 홍성희 - 안전의 방향 (3)
안전의 방향 (3) 홍성희 * 2023년 가을 『자음과모음』에서 기획한 좌담은 “한국문학은 여성의 것이 되었나”1)라는 제목으로 지면에 발표되었다. ‘여성의 것’이라는 소유격을 가정하게 된 최근 문학장의 모습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좌담은 작가와 작품이, 현실 세계와 작품 속 세계가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최근의 경향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2021년에 발표된 박서련의 「그 소설」과 김보경의 「실종」을 2023년의 지금 다시 중요하게 읽게 되는 것은, 어떤 논의의 구도가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복되는 패턴을 살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국문학은 여성의 것이 되었나”라는 의문문의 맥락에서 문학과 현실을 분리하거나 하지 않는 일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는 데에는 어떤 면에서 마찬가지로, 안전을 향하는 방향성이 거듭 작동하고 있다. 우리가 사회적으로 쓰이는 언어로써 창작할 때는 수많은 기제들 속에서 내적 검열을 하고 그 안에서 대결하며 나오는 것이 결국 내 창작의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2016년 이후 의식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의식하게 함으로써, 내가 쓰고 재현하고 있는 언어들이 이 세계의 오염된 언어와 얼마나 닮아 있는가, 어디에서 그것들과 싸우고 있는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전환했다고 봐야죠. 이건 아주 유의미한 전환이었고, 한국 문학의 새로운 장소를 열어 줬다고 여깁니다.(35) “문학적 현실을 실제 현실의 연장으로 간주”하여 “인물들에게 실제 현실의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엄격한 도덕성을 강요”(34)하는 최근의 흐름에 대해 우려 섞인 입장을 드러내는 발언들에 이어, 하재연은 페미니즘 리부트가 가능하게 한 ‘전환’이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정리하고자 한다. 하재연의 발언에서 2016년을 기점으로 이루어진 ‘전환’이란 현실 세계의 ‘도덕성’을 기준으로 문학 창작에 ‘검열’이 작동하게 만드는, 그렇게 모든 언어가 동질해지도록 하는 명사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검열’이라는 단어 대신 ‘어려움’이나 ‘갈등’과 같은 표현을 선택한다. ‘전환’을 이해하는 언어가 ‘검열’이 될 때 초점은 문학적 현실과 실제 현실, 문학의 언어와 현실의 언어의 밀착을 ‘강요’하는 문학 ‘외부’ 현실의 문제처럼 여겨지지만, 그것을 ‘어려움’이나 ‘내적 갈등’과 같은 언어로 소화할 때 초점은 창작자 혹은 문학의 ‘내부’ 동력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현실적 움직임의 문제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단 문학의 언어를 현실의 언어와 분리하여 “안전하고 안온하”
작성일 2023-12-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92상세보기 -
비평 송종원 - 미래파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아니 무엇이었을 수 있었나 (1)
미래파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아니 무엇이었을 수 있었나 (1) 송종원 0. 낚였던 비평(가)들 밤마다 나는 어항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어요 들리거든요 금붕어들의 반짝거리는 수다 이리 와, 이리로 와서 우리랑 함 께 뻐금거려보자 우와, 정말로? 나는 주걱으로 죽어라 내 입술을 때리기 시작했어요 밤마다 학의 긴 부리 끝에 한 꿰미로 똥구멍에서 주둥이까지 한 큐에 꿰여버리고 마는 금붕어들 매일 나는 새로 산 금붕어를 삶아 어항 속에 풀어두어요 때때로 플라스틱 금붕어들이 산란하기도 한답니다 -「열쇠魚」 전문1) 아마도, 자신의 시를 잘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힌트라도 주고 싶었던 것일까. 지금 와서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 시인의 첫 시집을 ‘엽기’ 코드에만 너무 집중해서 읽은 듯도 하다. 제목의 “열쇠魚”는 재치를 부려 숨겨놓았지만 ‘열쇳말’, 말 그대로 키워드를 말한다. 그러니까 시집의 문을 열수 있는 열쇳말이 이 시에는 쓰여 있다. 우선 “어항”은 어장(語場)이기도 하다. 더 좁혀 말하면 시인이 쓰는 시의 장일 수도 있겠다. 시인은 거기서 금붕어들의 수다를 적어놓는다. 금붕어라는 단어 안에 ‘금어(禁語)’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는 것을 보면 금지된 말들을 시 속에 부려놓는 시인의 모습을 생각해볼 수 있다. 알다시피 김민정은 사회적으로 금기시 하는 것들을 자주 시 속에 풀어놓았기 때문이었다. 금붕어에 대한 연상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금붕어를 자조적으로 썼을 때 그것은 망각의 맥락을 지닌다. 살면서 겪어온 것들 중에서 속된 말로 우리가 자꾸 까먹는 것을 시인은 까발린다. 시인이 입이 아프도록 까발린 말들은 사실 아픔의 언어고 어떤 죽음과도 연결된 언어였을 것이다.2) 하지만 시인의 어항에 ‘학’이 찾아와 큰 부리로 저 풀어버린 금어들을 한 덩어리로 꿰어 죽음으로 만들어버린다. 학의 학살. 눈치 빠른 이라면 이 학이 그 ‘학(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시를 읽어내기도 전에 지식의 편견으로 시를 대하는 사람들, 그래서 시를 일정한 틀 안에 가둬버리는 이들에 대한 독설이라고 볼만도 하다. 풀어보면 작품의 언어를 감당하지 못하면서 작품의 평가를 먼저 내린 자들에게 반성하라는 항의가 담겨 있다. 그리고 시인이 지목하는 무리 안에는 당연히 비평가가 들어 있을 것이다. 시인은 비평가들의 오해에 자신의 시가 잠식당할까 그에 질세라 산 금붕어들을 구워삶아 어항에 다시 푼다. 때때로 거기에 가짜 금붕어들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저 가짜 금어들은 살아있는 언어를 살려두기 위해 시인이 비평가들에게 던진 일종의 미끼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이 미끼는 미래파를 긍정하는 쪽과 부정하는 쪽 중 어디로 흘러갔을까? 1. 동물화하는 시로서의 미래파? 2000년대 한국 시단을 말하며 누군가는 20005년을 기점으로 2000년대의 시단은 둘로 나뉜다는 흥미로운 표현
작성일 2023-11-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750상세보기 -
비평 홍성희 - 안전의 방향 (2)
안전의 방향 (2) 홍성희 * 문학에게 현실로부터 안전한 자리가 약속될 때, 문학은 스스로를 부인하는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다. 문학에게 현실과 분리된 자리를 배당한다는 것은 비단 문학이 그리는 세계가 현실 세계의 재현일 뿐 실제 그것은 아님을 강조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학이 재현하는 세계와 문학이 재현을 수행하는 세계가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가정될 수 있다고 여길 때, 그러한 단절 감각은 문학 속에서 일어나는 일과 문학이 문학으로서 쓰이고 읽히고 유통되는 제반 사정을 별개의 것으로 여길 수 있는 태도가 될 가능성을 가진다. 그 태도로부터 ‘문학’에 관한 이야기는 거듭 시작된다. 예술로서 ‘작품’ 자체로 존재하는 문학에 관해 말할 때 문학은 사람‘의’ 창작물로서의 문학으로부터, 쓰고 편집하고 옮기고 읽고 교육하고 배우고 흡수하고 기억하는 사람들과 그들 사이의 관계성 속에서 만들어지는 문학에 대한 경험 및 관념 혹은 문학의 역사적 작동 방식으로부터 오롯이 분리된 자리에 있는 것으로 선언된다. 문학에 문학의 태생적 조건과 시간적 위치와 수행적 현실과는 무관한 자리를 쥐어 주는 그러한 언명은 다만 문학의 미적 가치를 알아보고 가꾸어 나가며 보존해 가야 한다는 소극적 의미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무관’에 관한 감각은 모든 문학 텍스트의 조건과 위치와 역할들이 작동하는 문학이라는 이름의 장, 제도로서의 문학을 미적 산물로서의 문학과 분리시킴으로써 진정 문학적 가치를 음미하게 하는 ‘문학’을 상정하여 긍정한다. 한 텍스트의 ‘문학’적 면모를 말하는 일은 그것이 문학으로 유통되는 장의 생리에 대해 말하는 일과 반드시 유관할 필요는 없으며, 두 작업이 상호 호환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문학’적 가치라는 것이 세계를 설명하는 유의미한 판단 기준이 된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으로서 ‘문학’의 위치를 긍정하게 한다. 반면 두 작업이 때로 상충되는 감정과 판단에 도달한다면 그 괴리의 책임은 ‘문학’이 아닌 곳에 있으며, ‘그들’의 ‘몰이해’는 그러한 조건에서 이해할 만한 것이자 ‘문학’의 가치를 더 적극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만일 ‘문학’과 문학 사이의 간극이 문제적으로 여겨지고 비판의 대상이 된다면, 문학은 때로 ‘문학’의 진정한 가치를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는 이데올로기적 현실, 정치, 목적, 의도, 혹은 편협으로 여겨질 수 있으며, 그렇게 바라보는 태도에 관해 문제점을 논의하려는 시도는 ‘문학’의 존재적 배경이나 도구적 조건에 관한 비본질적 논의로서 비판되고 배척될 수 있다. 문학과 ‘문학’ 사이에 용인되는 간극은 나아가 문학인으로서 창작자의 태도나 언행을 비판하는 일
작성일 2023-11-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543상세보기 -
비평 홍성희 - 안전의 방향 (1)
안전의 방향 (1) 홍성희 * 안전하려는 마음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김지연의 「먼바다 쪽으로」1)에서 ‘현태’는 누군가 자신을 해할 것이라는 공포와 불안에 시달린다. 그의 불안 증세가 완화되길 바라는 ‘종희’는 생활을 정리하고 현태와 함께 도시 밖으로 이주한다. 현태가 위험을 느끼게 된 배경의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도시에 남겨지고, 위험을 피하는 마음은 그렇게 ‘먼바다 쪽으로’ 가려는 마음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먼 바닷가에서도 현태는 무시로 공포에 휩싸인다. 멀어졌을 뿐 위험은 여전히 어딘가에 있고, 그것과의 거리는 언제고 좁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현태와 종희는 안전하려는 마음의 크기와 동일한 정도로 확고하게 이내 위험이 닥쳐올 것을 믿고, 그것을 기다린다. 현태는 그 불안이 형체를 입고 시꺼먼 모래로 쏟아져 나올 때까지 조개껍질을 열고, 열고, 또 여는 방식으로 스스로 위험한 인물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두 사람에게 안전하려는 마음은 스스로를 지키려는 마음이면서 동시에, 지키기 위해 기꺼이 위험해지는 마음이기도 하다. 그들의 그림자는 ‘먼바다 쪽으로’ 물을 가르며 계속 걸어 들어가고, 종국에 스스로 물속에 잠긴다. 이 소설에서, 혹은 세계에서 안전이란 아마도 그처럼 위험의 상대항이 아니라 위험과 이음동의어이다. 먼 바다를 향하는 현태와 종희의 이야기는 애초에 그런 조건 속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다세대 주택에서 담배를 태우고 발을 굴러 게임을 하고 기타를 연주하여 이웃들의 항의를 받는 현태에게 종희는 이웃들이 모두 우리를 미워할 것이라고, 특히 “아랫집 남자가 우릴 죽일 거”(218)라고 ‘농담’한다. “농담이어야 하지 않겠어요?”(219) ‘아랫집 남자’가 종희에게 건네는 또 다른 ‘농담’은 실질적이지 않지만 실질적인 위험으로 ‘아랫집’에 상주한다. 그 얼핏 안전한 ‘농담’들의 세계에서 공포와 불안은 이미 현태에게서보다 먼저 가동 중이다. 일상은 위험 위에 세워져 있으며, 다세대주택에서 모두는 기꺼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위험해진다. 독을 피하기 위해 “위험한 것들에 이름을 붙”(227)이는 바닷가 마을에서 조개 줍기는 안전하게 반복된다. 그러나 조개의 이름은 종종 이것인지 저것인지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겉보기에 이것과 저것이 선명하게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오래 살면서 독이 있는 건 피해 주워 먹고 산 사람”(227)의 경험과 시간을 막연히 믿을 따름이다. 그러나 어떤 이름의 조개더미에건 시꺼먼 모래가 가득한 패각은 숨어 있다. 위험은 이름이나 직관으로 구분해내는 안전의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안전을 가장한 모든 것의 내부에 있다. 어쩌면 정말 공포스러운
작성일 2023-10-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005상세보기 -
비평 한영인 - ‘우익’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3)
‘우익’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3) – 오에 겐자부로의 「세븐틴」과 장정일의 『구월의 이틀』 겹쳐 읽기 한영인 6. “새로운 성장소설”1) 장정일은 『구월의 이틀』의 작가 후기에 이렇게 썼다. “내가 이 소설을 쓰면서 의식했던 것 가운데 하나는 ‘우익 청년 탄생기(성장기)’를 써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서구 유럽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서구 우파에 대한 막연한 부러움이 구체화되면서부터였다.”2) 그가 읽었던 서구 유럽 소설의 목록이 소개되어 있지 않아 독자로서는 그가 느꼈던 막연한 부러움의 정체를 짐작하기 어렵지만 이후의 서술로 미루어 볼 때 거기에는 보편적 근대의 정상적 경로를 밟아 왔다고 가정된 유럽의 이념적 지형에 대한 ‘후진국적 선망’이 내재해 있는 것 같다. 장정일은 서구 유럽에는 “건전한 상식과 나름의 철학을 토대로 한 우파가 득세”했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정당성도 갖추지 못했을뿐더러 부도덕한 우파가 득세”했기에 “‘우익 청년 일대기’” 같은 것이 나올 수 없었다고 말한다. ‘품격 있는 보수’에 대한 선망은 익숙하다. 식민과 분단, 뒤이은 반공 전체주의 체제 하에서 소멸된 것은 좌익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품격 있는 보수’는 공동체가 함께 수호하고 전승해야 할 가치에 대한 보편적인 합의가 존재할 수 있을 때 가능하지만 한국의 경우 ‘반만년’ 운운하는 역사가 무색하게 공동체가 공유하는 유무형의 가치에 대한 존숭(尊崇)이 희박하다. 건국절 논란에서 보이듯 보수를 자처하는 ‘대한민국 세력’은 자신들의 기원을 좀처럼 1948년 이전으로 소급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전쟁을 예비한 극심한 갈등과 학살, 그리고 전쟁 이후 온 나라를 병영으로 만들어 운영했던 폭력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자주 망각한다. 그런 풍토에서 ‘우익 청년’은 앞서 살펴본 『오욕의 강물』의 이상태처럼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 병리적 인물로 표상될 뿐 시간의 내력을 충분히 견디어 거기에 앞날을 정박시키려는 ‘품격 있는 보수’에의 의욕을 보여주지 못한다. 장정일이 ‘우익 청년 일대기’를 시도했다는 건 이상태와 같은 우익 청년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우익 청년의 형상화를 도모해 볼 수 있을 만큼 세상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2000년대 들어 ‘뉴라이트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면서 일군의 젊은 청년들이 스스로를 보수 우익으로 정체화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이 ‘뉴라이트’를 새로운 보수 운동의 총아로 승인하는 데 목적이 있지는 않다. 장정일의 시선은 당면한 &lsquo
작성일 2023-09-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698상세보기 -
비평 윤재민 - 1960s-2020s 반(半/反)예측의 상상력 ③
1960s-2020s 반(半/反)예측의 상상력 ③ 윤재민 나를 박해하던 자들은 증오심을 온갖 수단으로 표출하면서도, 그들이 가진 적대감 때문에 정작 한 가지를 놓치고 말았다. 그들이 적대 효과의 강도를 점진적으로 높여 감으로써 내게 언제나 새로운 타격을 입혀 고통을 지속시키고 되살아나게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만약 그들이 내게 희망의 빛을 조금이라도 남겨 두는 간계를 부릴 줄 알았더라면 지금도 거기에 나를 묶어 두었을 것이다. 가짜 미끼로 나를 또다시 그들의 조롱거리로 만들고, 이어서 내 기대가 좌절되면 나를 새로운 고통으로 영원히 상처 입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쓸 수 있는 방책을 미리 다 써버렸다. 내게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음으로써 그들 자신도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중략) 그 고통은 내게서 비명을 끌어낼지언정 탄식하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며, 내 몸의 괴로움은 마음의 고통을 멈추게 해줄 것이다.1) 1. 1960s: 죽음 1953년, 전쟁포로(POW) 교환 현장. 명준은 그간의 방황을 끝내고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남이냐 북이냐. 두 국가의 대변인들은 ‘조국 재건’에 일익을 담당할 인텔리 명준을 포섭하기 위해 달콤한 제안을 건넨다. 북측 대변인은 앞으로 시행될 참전 용사(명준은 인민군으로 한국 전쟁에 참여했다) 연금 수령 대상자라 말하며 명준의 ‘귀국’을 설득한다. 남측의 대변인은 명준이 일반 국민 열 명에 상응하는 인재라 높이 평가하며 개인적인 조력을 해줄 것이란 제안으로 명준의 전향을 촉구한다. 모두가 알고 있듯, 명준은 이 달콤한 제안을 물리치고 중립국을 택한다. 두 정부의 체제와 그것이 내세우는 가치에 대한 환멸 때문이다. 명준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 남한에서의 대학원 생활과 월북 후 지식노동자 생활을 통해 두 체제에 대한 가치 평가를 이미 마친 상태다. 그는 자기 자신의 전부를 던질 만한 가치와 의미가 한반도 어디에도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포로 교환협상장은 이를 확인할 마지막 순간이다. 남과 북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양쪽이 명준에게 제시한 조건은 당시 국가가 일개 국민에게 베풀 수 있는 최선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모든 포로에게 안정적인 노후 대책(연금)이나 출세로까지 이어질지 모를 주류 사회 연줄을 제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명준이 ‘조국 재건’에 널리 쓰일 인재라 판단하기에 내놓은 조건일 터이다. 그러나 두 체제는 명준이 진정 갈구하는 가치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가 원했던 건 노후를 책임질 복지나 공명심 같은 세속적인 가치가 아니다.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쫓아가고 하더라도, 그와 같이 비치는 단단함 속에 젖어 가면서 살 수 있는 삶”2)이라는 관념적인 이상(idea)이다. 대책 없을 정도로 세상물정을 모르는 아름다운 영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광장」의 서술 기조 전체에 드리운 명준의 ‘철학적 사색’과 간간이 내보이는 창작 시는 &l
작성일 2023-09-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734상세보기 -
비평 한영인 - ‘우익’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2)
‘우익’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2) – 오에 겐자부로의 「세븐틴」 과 장정일의 『구월의 이틀』 겹쳐 읽기 한영인 4. 자아로부터의 도피 800미터 달리기 시험 도중 오줌을 싼 소년은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이후 예정된 자치회에 참여하지 않은 채 그대로 학교 문을 나선다. 그리고 잠시 뒤 혼자서 전철을 기다리던 중 신토호라는 동급생으로부터 ‘우익 바람잡이’ 아르바이트 제안을 받게 된다. 일의 내용은 간단하다. 신바시 역에서 열리는 황도파 활동가의 연설에 청중인 양 참석해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러 주면 500엔을 벌 수 있다는 것. 신토호의 제안을 받아들인 소년은 신바시 역 광장으로 가 사카키바라 구니히코라는 황도파 활동가의 연설을 듣게 된다. 처음에는 얼간이처럼 절규하는 사카키바라의 모습에 실망하지만 이내 그가 쏟아내는 악의와 증오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이게 됨을 느끼게 된다. “그 자식들 전부 죽여 버릴 거야. 학살해 버린다고. 그 자식들의 마누라하고 딸들은 다 강간할 거고, 아들들은 돼지 사료로 만들겠어. 이게 정의라는 거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다! 우리는 그 자식들의 전원학살이라는 신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중략) 이건 그 자식들의 하느님인 레닌 형님이 떠들어대던 소리다! ‘제군, 자신의 약한 인생을 지키기 위해서는 저들은 모두 죽이시오, 그것이 정의라오.’라고.”(237~238면) 사카키바라가 레닌의 말을 제멋대로 전유해 읊어대는 ‘정의론’에 소년이 큰 감화를 받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소년은 거기서 제어되지 않은 순수한 힘의 분출을 감지했을 것이다. 사카키바라는 현대 자유주의 문명사회가 존속의 필수 요건으로 삼는 다양한 규범들을 공격한다. 그 증오의 언설 속에서 다원성이란 이름 아래 동등한 교섭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타인들의 존재는 사라지고 세계는 ‘나’와 ‘적’의 이분법적 대립구도로 표상된다. 이 앙상한 세계관은 그동안 소년을 끈질기게 괴롭혔던 수치심과 혐오감을 단번에 사라지게 만들어 주는 의도치 않은 효과를 발휘한다. 아울러 나는 이 현실 세계에 대하여 타인들에 대하여 적의와 증오를 새롭게 다졌다. 언제나 자신을 책망하고 자신의 약점을 붙들고 자기혐오라는 진흙탕에 빠져 나만큼 혐오 받아 마땅한 놈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내면의 비평가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 악의와 정의라는 흉포한 음악이 재생 장치를 파괴할 정도의 볼륨으로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자신의 연약한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저들을 다 죽여 버려라. 그것이 정의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236~238면) 여기에 등장하는 “내면의 비평가”는 에리히 프롬이 “인간이 스스로 자기 마음속에 앉혀 놓은 노예 감독”이라 불렀던 것에 정확하게 대응한다.
작성일 2023-08-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817상세보기 -
비평 윤재민 - 1960s-2020s 반(半/反)예측의 상상력 ②
1960s-2020s 반(半/反)예측의 상상력 ② 윤재민 이 책에서 사람들은 ‘땅속에서’ 일하는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는 굴을 뚫고, 흙을 파내며, 아래로 파고 들어가는 사람이다. (중략) 어떤 믿음이 그를 인도하고, 또 위로한다는 게 보이지 않는가? 그는 어쩌면 자기 자신의 기나긴 어둠을 갖고자 하는 게 아닐까? 자기 자신에 대해 이해 안 되는 것들, 숨겨진 것들, 수수께끼 같은 것들을?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아침을, 자기 자신의 구원을, 자기 자신의 아침놀을 가지게 될 것임을 알고 있기에······.1) 1. 1960s: 삶 1964년 겨울밤. 서울 인근의 모 선술집에서 술 마시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김’. 그는 우연히 동갑내기 대학원생 ‘안’과 말을 섞다 합석하여 술잔을 기울이게 된다. 대학 문턱도 밟아 보지 못한 시골 출신 구청 공무원인 김은 자신을 부잣집 장남이라 소개하는 안에게 위화감을 느낀다. 동갑내기 남성이라는 점 외에 아무런 접점이 없는 두 사람의 대화는 이내 잦아들고 급속도로 어색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김은 안에게 ‘파리를 사랑하냐’는 시덥잖은 질문을 던져 아이스 브레이킹을 시도한다. 안은 갑작스러운 김의 스몰토크를 미적지근한 태도로 얼버무린 후, 곧장 김에게 질문을 되돌려 물어본다. 이에 대해 김은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그러고는 이상한 말을 부연하며 대화를 이어 나간다. “날 수 있으니까요. 아닙니다. 날 수 있는 것으로서 동시에 내 손에 붙잡힐 수 있는 것이니까요. 날 수 있는 것으로서 손안에 잡아 본 것이 있으세요?”2) 놀랍게도 안은 이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에 반응한다. 대화는 다시 활기를 띠며 이어진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지극히 추상적인 질문과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고백을 주고받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의 화두와 사적인 얘기를 깊이 소통하는 듯하지만, 그 대화의 내용은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느냐’는 안의 추상적인 질문에 김은 사관학교 입시 실패 이후 생긴 자신의 변태적인 취미생활을 고백하는 식이다. 안은 김이 질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반문한다. 그러고는 각자가 사랑하는 ‘꿈틀거림’에 대한 대화가 더 이어지다 아무런 접점 없이 흐지부지된다. ‘데모’를 염두에 둔 듯한 질문에 당당하게 ‘여자의 아랫배’라 답하는 이의 대화가 계속 이어지기란 어려운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의 대화는 화신백화점 가로등, 적십자병원 가로수, 을지로 3가 술집 작부, 종로 2가 모 빌딩 화장실에 낸 손톱자국 등 무의미한 내용의 나열로 치닫는다. 각자가 간직한 지극히 사적이고 파편적인 경험을 그저 나열할 뿐인, 그 어떤 의미
작성일 2023-08-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767상세보기 -
비평 윤재민 - 1960s-2020s 반(半/反)예측의 상상력 ①
1960s-2020s 반(半/反)예측의 상상력 ① 윤재민 1. 이청준의 「퇴원」은 전후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됐던 시기, 문학적 내면의 향방에 대한 알레고리를 시사한다. 소설의 화자 ‘나’는 유년 시절 아버지의 서열 정리로 ‘선생님’으로 모셔야 했던 동년배 ‘준’의 병원에서 세상의 변화와 상관없이 무위도식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나’가 입원한 준의 병원은 모든 시계가 고장 나 있는 채로 외부와 단절된 공간이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치료를 끝없이 받으면서 원인 모를 병으로 하루하루 시들어 가는 환자들과 생활한다. 그러나 ‘나’는 딱히 장기 입원할 이유가 없는 건강한 사람이다. 그 또한 자신의 몸 상태를 잘 알고 있다. ‘나’는 항상 병원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해 하며 언제든지 퇴원할 만반의 준비가 된 듯하다. 참다못한 ‘나’는 무의미한 치료와 단절된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위궤양이라는 헛된 의학적 진단을 거부하며 항의한다. 그러자 간호사는 “위궤양이 싫으시담 더 멋진 병명을 붙여드릴 수도 있”1)다고 말하며 그의 퇴원 의지를 가볍게 기각한다. 간호사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전역 직후부터 약 일 년여 간 이어진 ‘나’의 장기 입원이 실재하는 질병 때문이 아니라는 걸 폭로하기 때문이다. 현대 임상의학은 질병이 진단에 선행하는 전도를 용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질병 때문이 아니라 환자여야 하기에 질병이 부과되어 왔던 것이다. 수전 손택은 문학에서 질병은 사회와 지식에 부정적으로 예속된 신체의 은유라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나’와 질병의 문학적 관계는 손택식의 ‘은유로서의 질병’의 문제와는 차이가 있다. 신체를 규정·규율하는 임상의학이라는 특정한 지식과 관련된, 권력의 은유로서 임상의학의 문제에 가까워 보인다. ‘나’가 처한 ‘은유로서의 권력’의 문제는 단순히 신체를 속박하는 과잉 진료와 장기 입원에 국한되는 사항이 아니다. 애초 동년배인 ‘준’과 ‘나’의 서열을 정하여 ‘나’의 신체를 병원에 구속하는 원인을 제공한 부권(父權)의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다. ‘나’가 회고하는 부자(父子) 관계는 기묘하다. 아버지는 ‘친구 발바닥이나 핥으라’는 저주에 가까운 말을 퍼붓는 폭력적인 서열 관계를 ‘나’에게 강제했다. 아버지의 냉혹한 훈육은 어렸을 때부터 일관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자신의 내면에 중대한 상흔을 남기는 한 사건을 회고한다. 소학교 3학년 때 가을, 나는 그즈음 남몰래 즐기고 있는
작성일 2023-07-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223상세보기 -
비평 한영인 - ‘우익’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1)
‘우익’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 오에 겐자부로의 「세븐틴」 과 장정일의 『구월의 이틀』 겹쳐 읽기 한영인 1. ‘우익 성장소설’은 가능한가? 2023년 3월 3일, 일본의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가 타계했다. 그의 부음을 접한 순간 내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그의 작품은 다름 아닌 「세븐틴」(1960)이었다. 이 작품은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사육」(1958)이나 『만엔 원년의 풋볼』(1967)처럼 흔히 오에 문학의 ‘정수’로 거론되는 작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의 부음을 전하는 기사에도 이 작품은 거의 언급되지 않으며 자신의 독서 편력을 작품 창작 과정과 연결시켜 설명하는 대목이 단연 흥미를 끄는 『읽는 인간』에도 이 작품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왜 그의 죽음 앞에서, 그의 수많은 대표작을 두고 오직 이 작품만 강렬하게 떠올린 걸까. 가장 단순한 대답은 그것이 내가 읽은 오에의 첫 작품이었다는 것쯤이 될 것이다. 내 동년배라면 젝스키스가 주연을 맡은 하이틴 영화를, 요즘 세대라면 2015년에 데뷔한 13인조 남성 아이돌 그룹의 이름부터 떠올릴 ‘세븐틴’이라는 단어에는 확실히 청춘의 퍼포먼스를 기대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내가 이 소설을 처음 집어 들었을 때 기대했던 것도 그와 같은 밝고 싱그러운 젊음의 이미지를 흡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책장을 얼마 넘기지 않아 나의 부푼 기대는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말에 이르러 이 작품은 나를 처음의 기대와 완전히 다른 곳에 데려다 놓았다. 물론 이런 어긋남은 바탕 없이 이루어지는 독서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기에 그 어긋남만으로 「세븐틴」이 내 뇌리에 그토록 깊이 각인된 이유를 온전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계속 물어야 했다. 왜 「세븐틴」이었을까. 이 작품은 구성이 복잡하거나 형식이 난해해서 이해하기 곤란한 작품은 아니다. 실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삼은 만큼 어딘가 범속하고 선정적인 느낌을 풍기기도 한다. 여기서 실제 일어난 사건이란 1960년, 당시 17세 소년이었던 야마구치 오토야가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연설회에 참석한 사회당 위원장 아사누마를 단도로 찔러 살해한 사건을 말한다. “전후의 가장 유명한 우익 활동가”1)로 손꼽히는 아카오 빈의 연설을 듣고 감명 받아 16세의 나이로 대일본애국당에 입당한 야마구치는 범행을 저지른 해 옥중에서 ‘칠생보국, 천황폐하 만세’라는 유서를 남긴 후 목매달아 자살하고 만다. 「세븐틴」은 야마구치를 모델로 삼아 비대한 사춘기의 자의식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기혐오로 빠져든 한 소년이 우익 테러리스트로 변모하는 과정을 담은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2) 방금 등장한 ‘성장소설’이라는 단어에 내가 느꼈던 당혹감의 핵심이 응집되어 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말하자면 「세븐틴」은 이제까지 내가 접해 본 적 없는 방향으로 내달려간 젊음의 파국적인
작성일 2023-07-01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665상세보기 -
비평 김요섭 - 상실의 형식(3)
상실의 형식 (3) 김요섭 1 아버지가 고향을 떠나온 것은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 아마도 이제는 50년 정도 전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여러 직업을 가졌지만, 항상 자신을 농부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어릴 때 아버지의 고향을 방문하는 일이 드물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낯선 곳을 찾아간 기분이었다. 먼 친척 어른의 집을 찾을 때나 가족묘를 방문하는 일 정도를 제외한다면, 경기도 북부의 그리 멀지 않은 그 마을을 방문하는 날은 정말 드물었다. 나에게도, 아버지에도. 10년 전 오래 다녔던 회사를 그만두게 된 아버지는 고향을 자주 찾아가셨다. 그리 크지 않은 선산에 아버지는 밭을 만드셨고, 그렇게나 많은 모종이 그곳에 심을 수 있는지 신기하게 느껴 질만큼 다양한 작물을 기르기 시작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운영하는 사무실에 출근하기 시작한 뒤로도, 아버지는 매주 고향 선산을 찾아가서 몇 종인지 알 수도 없는 수의 식물을 기르며, 계절마다 다른 작물을 수확해오신다. 군대를 제대 후에는 자주 주말에 아버지와 함께 선산에 있는 밭으로 가서 일을 도왔다. 아버지의 고향을 함께 가는 일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혼자 하실 수 없는 일들이 있었으므로 나도 그 농부의 시간을 함께 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가 가장 일하기 힘든 시기였다. 아직 모종을 심을 때가 아니었지만, 파종을 준비하기 위해 지난해 밭에 덮어두었던 비닐을 걷어야 했다. 아직 다 녹지 않은 땅은 축축하고 단단해서 비닐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힘을 줘가면서 당겨야 했지만, 혹여나 너무 강하게 당기면 끊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흙더미를 들어 올리면서도 비닐이 끊어지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힘을 쓰는 요령이 필요했다. 비만 체형 때문에 쪼그려 않는 게 힘들어서 하루 종일 허리를 굽히고 일해야 하는 그 시기를 가장 싫어했다. 어설픈 자세로 끙끙거리는 젊은 아들과 달리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돕고 농업고등학교를 나온 아버지는 밭이랑 사이를 누구보다 능숙하게 오가며 일하는 사람이었다. 몇 주, 몇 달에 한번 아버지를 도우려고 밭에 함께 가는 일은 힘이 들어서 싫기도 했지만, 일이 힘들어서라면 그렇게 많이 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매일 아침 정확한 시간에 일어나서 정해진 일정대로 하루를 보내는 회사원이던 아버지는 고향에 있는 자신의 밭에만 가면, 농부의 시간을 보내신다. 날이 너무 더워지기 전에 도착해서 햇볕이 따가운 시간에는 그늘에서 늦은 식사를 하고는, 해가 질 때까지 마저 농사를 짓다가 집으로 가셨다. 말수가 많지 않으신 아버지는 한참을 물어야 오늘 밭에서 할 일이 무언지 알려주셨고, 계획한 일을 끝낸 뒤에도 한참을 다른 일거리를 찾아서 분주히 오가셨다. 그럴 때면 나는 멀뚱멀뚱 그늘에 서서 언제쯤 집에 갈 수 있을지 생각하며 지루하게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할 일은 다 끝내지 않았냐고, 갈 시간이 이미 지났다고 따지는 일이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농사일에 끝날 때가 어디 있냐며, 한 두 시간은 더 정리를 하고는 집으로 출발했다. 이름도 모를 나무에 기대서 할 일도
작성일 2023-06-08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254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