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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시대와 작품을 가로지르는 눈-
비평 박서양 -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3]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박서양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3월부터 2026년 5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ㅡ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3) 박서양 1부에서는 「빈집」을 중심으로 쓰레기가 공적 처리 시스템에 들어가기 이전, 사적 공간에서 수행되는 ‘버림 노동’과 그 경계의 문제를 살피고, 『자작나무 숲』에서 할머니가 거주하는 쓰레기 집을 통해 쓰레기의 인접성과 배치의 정치성을 검토했다. 2부에서는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손녀의 글쓰기를 중심으로 개연성이 무엇을 서사로 승인하고 무엇을 배제하는지를 살피며, 그 과정에서 탈락한 이야기들이 어떻게 쓰레기와 인접하게 되는지를 분석했다. 이제 연작의 마지막이 될 3부에서는 이러한 배제와 잔여를 가능하게 해 온 서사의 구조를 검토하며, 수직적 깊이에 기반한 개연성의 조직이 어떻게 흔들리고 수평적 배열로 전환되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1. 개연성과 중심: 서사의 수직적 구조 주지하듯 개연성은 사건들이 인과적 필연성에 따라 조직되며 서사적 설득력을 획득하는 원리다. 그러나 이 인과는 서사를 하나의 구심점에 수렴시키기 위해, 핵심을 향해 응집되지 못하는 요소들을 배제하고 제거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인과관계에 맞지 않는 사건은 이야기에서 제거되고, 반복되는 일상의 노동, 신체의 미세한 감각, 명확한 동기로 설명되지 않는 충동들은 쓸모없다고 판단되어 버려진다. 다시 말해 개연성은 서사 내부에서 질서에 어긋나는 요소들을 걸러내는 원리로 기능한다. 이때 서사의 개연성을 따르지 않는 것들은 언어화되지 못한 채 잔여로 남아 서사 바깥의 영역을 형성하고, 이는 매끄러운 서사 구조에 균열을 내는 잠재적 가능성으로 실재한다. 하지만 이때 무엇을 개연적인 서사로 인정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기준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개연성의 원리는 때로 현실의 권력관계와 결합하여 특정한 인과를 필연적인 것으로 구성하고, 그 과정에서 불균등한 배치를 정당화하거나 재생산한다. 물질적 층위에서도 유사한 방식의 배제가 일어난다. 더 이상 사용되거나 교환될 수 없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의미와 가치를 상실한 쓰레기로 간주된다. 요컨대 서사의 구조에서 탈락한 경험과 물질의 층위에서 배제된 쓰레기는 세계를 하나의 중심으로 정리하려는 질서가 필연적으로 남기는 잔여다. 『자작나무 숲』에서 개연성의 질서에서 벗어난 서사적 잔여와, 가치의 질서에서 배제된 사물(쓰레기)이 나란히 놓이며 공명하는 것은 이들이 동일한 배제의 구조에 놓여 있음을 드러낸다. 모든 인물이 명확하고 일관된 동기를 가져야 하고, 뿌려진 복선은 회수되어야 하며, 결말은 갈등의 원인을 해명해야 한다는 소설 작법은 목적론적이고 합리적인 주체를 전제한다. 이러한 전제는 무엇이 이야기로 인정될 수 있는지를 가르는 기준으로 작동한다. 쓰레기 집을 만들고 사체를 은닉하는 할머니의 행위나, 합리적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열정 속에서 부유하는 여성들의 궤적은 이 기준 앞에서 개연성이 결여된 것으로 처리되며, 괴담이나 소문으로만
작성일 2026-05-01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이미진 - 끝에서 두 번째 폭력끝에서 두 번째 폭력 - 최은미의 「김춘영」과 현호정의 「달빛」 이미진 1. 오르페우스는 뱀에 물려 죽은 아내를 도로 데려오기 위해 타르타로스로 내려갔다. 그의 슬픈 음악을 들은 하데스는 잔인한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오르페우스에게 에우리디케를 이승으로 데려가는 것을 허락했다. 하데스는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에우리디케가 햇빛에 안착할 때까지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었다.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의 리라 소리를 따라 캄캄한 통로를 올라갔고, 오르페우스는 자기가 햇빛에 안착한 그 순간 비로소 그녀가 아직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를 영원히 잃었다.1) 팔레스타인 문제를 꾸준히 다루어 온 일본의 비평가 오카 마리는 『기억/서사』에서 탈 자아타르 포위와 학살 사건을 다룬 리아나 바드르의 소설 『거울의 눈(1991)』이라는 작품을 소개한다. 베이루트 교외에 있는 탈 자아타르 난민 캠프는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쫓겨온 사람들이 30년간 난민 생활을 하고 있던 곳으로, 1975년부터 1976년에 걸쳐 레바논의 기독교도 우파 민병대에 의해 몇 개월간 지속적으로 파괴되었다. 『거울의 눈』은 이 학살 사건에서 살아남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작가가 7년에 걸쳐 인터뷰한 증언들을 토대로 집필된 소설이다. 오카 마리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소설 중반부 돌연 등장했다 사라지는 ‘나’라는 인물이다. 그가 캠프 밖에서 안으로 잠입했다는 설정은 그간 비인칭의 시점을 따라 캠프 안의 상황에 몰입했던 독자에게 갑작스러운 거리감을 느끼게 만든다. 이 거리감은 캠프 안의 전사 중 한 사람인 하산이 캠프 밖의 전사들을 비판하는 다음과 같은 말로 대변된다. “뜨거운 물 속에 손을 넣고 있는 사람은 찬물에 손을 넣고 있는 사람과 똑같이 느낄 수 없다.”2) 오카 마리는 하산의 말보다는 캠프 밖의 사람이면서 동시에 안의 사람이기도 한 ‘나’라는 인물이 놓인 이중적인 위치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거울의 눈』의 작가가 왜 ‘나’라는 인물을 통해 독자에게 혼란을 초래하는지를 말이다. 『기억/서사』에는 또 다른 소설 발자크의 「아듀」도 등장한다. 이 소설은 귀부인이었으나 전쟁 중 처참한 일을 겪어 기억을 잃어버린 스테파니와 그녀를 사랑한 필립의 이야기다. 재회 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스테파니를 보고 절망한 필립은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 그녀에게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주고자 한다. 하지만 힘겹게 기억을 되찾은 스테파니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3) 2. 나는 쫓겨날 것이다.4) ‘사건’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사건’을 온전히 말할 수 없으므로5) 다른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지그프리드 크라카우어는 『끝에서 두 번째 세계』의 이라는 챕터에서 에우리디케를 잃어버린 오르페우스를 역사가로 호명함으로써, 그에게 ‘상실 이후’의 임무를 부여한다. 오르페우스와 마찬가지로 역사가는
작성일 2026-05-01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전철희 - 거짓을, 너에게거짓을, 너에게 - 당신이 김애란의 소설을 읽으며 궁금증을 느꼈겠지만 차마 에서 답을 찾지는 못했던 문제들에 대하여 전철희 1. 환상의 끝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소녀 김애란의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는 2005년에 출간됐다. 이 책을 처음 볼 당시 나는 애니메이션 (이하 으로 약칭)이 떠올랐다. 그때의 문단에서는 “근대문학의 종언”과 “미래파”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다. 문학인들이 고담준론을 나누는데 초신성의 소설에서 애니메이션을 연상한 내가 부끄러웠다. 이제 20년이 지났고 김애란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동안 나는 등단을 했고 평론가의 책무가 비약과 과장이라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말에 공감할 수 있을 정도의 연식을 쌓았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20년 전의 생각을 글로 정리하고 이를 기반으로 김애란의 작품들을 복기해 보려 한다. 거두절미하자면 『달려라, 아비』의 주제는 하얀 거짓말(white lie)이다. 이 책의 표제작 「달려라, 아비」는 편모가정에서 자란 딸의 이야기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오래전 가출했다. “나쁘면서 불쌍하기까지 한 사람”1)이었던 아버지는 가족부양의 책무를 벗어던지겠다는 무책임성 내지는 다른 여자를 만나려는 욕망 때문에 집을 나간 것으로 보인다. 딸은 그런 정황을 알면서도 아버지가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전 세계를 누비면서 달리기를 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소설의 뒷부분에서 아버지의 허접했던 인생이 폭로되지만 그럼에도 딸은 자신의 상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의 맹목적 ‘믿음’은 자기방어 기제의 산물이다. 자식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무능함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몸에 패배자의 피가 흐름을 긍정한다는 뜻이고, 아버지가 금의환향해서 명예나 재산을 상속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아버지가 이기적인 무뢰한이었다면 버려진 가족들로서는 그에 대한 원한과 분노를 가질 수밖에 없다. 불신과 미움은 본인을 병들게 하는 감정이다. 아버지가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거짓된 믿음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라이너스의 담요로 유용하다. 당시 주목받은 작품 중 하나였던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는 소녀와 아버지의 대화 장면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소녀는 아버지에게 “나는 어떻게 태어났어요?”라고 묻는다. 농담에 가까운 거짓말로 일관하던 아버지가 진실을 말하려던 찰나 소녀는 잠이 들고 자신의 탄생에 대한 상상을 시작한다. 소녀가 아버지의 답을 회피한 이유는 쉽게 짐작 가능하다. “나는 어떻게 태어났어요?”라는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답은 밋밋하고 초라하다. 남녀가 성관계를 할 때 정자가 난자에 착상과 수정을 해서 아기가 생겼다는 생물학적인 설명은 낭만적이지 않다. “부모님이 사랑해서 자식이 태어났단다”라는 말은 손발이 오글거리고 “너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갖고 태어났단다&rdquo
작성일 2026-05-01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박서양 -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2]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박서양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3월부터 2026년 5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ㅡ 김인숙의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 (2) 박서양 1. 앞서 1부에서 살펴보았듯 『자작나무 숲』을 단편에서 장편으로 개작하는 과정을 거쳐 쓰레기 집이 지니는 의미는 보다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된다. 기존의 사회적 담론이 쓰레기 집을 단순히 개인의 병리적 현상이나 위생 문제로써 다뤄왔다면, 장편소설에서 작품의 주된 배경이 되는 쓰레기 집은 한 가문의 은폐된 기억이 귀환하는 실체적 장소로 탈바꿈한다. 그렇기에 이곳은 단순히 한 노인의 저장강박이 빚어낸 결과물이 아니다. 쓰레기가 켜켜이 쌓이고 느리게 부패하는 이 공간은 공적 시스템의 신속한 망각에 맞서 기억의 소멸을 유예하는 지연의 장소다. 그런 점에서 소설의 과거 배경이 1989년이라는 사실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1995년 쓰레기 종량제가 시행되며 규격 봉투 안에 모든 폐기물이 동질화되고 익명화되기 이전, 쓰레기는 그것을 배출한 자의 삶의 궤적과 정보가 선명하게 남겨진 물질이다. 즉, 1989년이라는 시간은 쓰레기가 아직 완전히 규격화되지 않은 채,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었다는 실명(實名)의 흔적을 지닌 채 공동체 내부에 머물던 시기다. 또한, 좁은 다리 하나를 통해서만 외부와 연결되는 곡교의 폐쇄적인 마을 구조 역시 이러한 쓰레기의 관계적 속성을 한층 강화시킨다. 쓰레기차가 드나들기 어려워 쓰레기를 각자 태우거나 묻는 비공식적 처리에 의존해야 했을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 변두리 마을에서 쓰레기의 출처는 서로에게 투명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누가 무엇을 버렸는지 훤히 알 수 있는 동네에서 타인의 쓰레기를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단순한 수집이나 저장 행위가 아니라 누군가가 서둘러 지우고자 했던 기억들을 자신의 공간으로 편입시키는 행위가 된다. 더욱이 할머니가 쓰레기를 쌓아 올리는 산1번지의 집이 본래 일제강점기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축적했던 시아버지 모칠성의 거처였다는 점도 자못 의미심장하다. 할머니의 수집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그곳은 이미 채무자들에게서 거두어들인 장물들이 켜켜이 쌓이던 공간이었다. 저당 잡힌 물건들은 누구에게서 어떤 연유로 빼앗아 왔는지 그 유래가 명확하다는 점에서, 그 어떤 폐기물보다도 비극적이고 선명한 서사를 품고 있다. 요컨대 이 집은 단순히 버려진 사물들의 무덤이 아니라, 타인의 삶의 서사가 강제로 유입되고 축적되어 온 역사적 장소인 셈이다. 이러한 공간적 내력은 언뜻 산1번지의 쓰레기 집을 마을의 배제된 기억과 비밀이 축적되는 일종의 아카이브처럼 비치게 만든다. “할머니한테는 저 집이 뭐랄까…… 박물관 같은 거지요.”(124쪽) 하지만 할머니의 수집 행위를 ‘기억의 보존’으로 쉽게 낭만화할 수는 없다. 집 안으로 모여든 쓰레기들은 한데 뒤엉켜 부패하며 본래의 형태와 개별성을 잃고, 그것이 매개하던 고유한 서사 역시
작성일 2026-04-01 댓글수 1상세보기 -
비평 윤옥재 - 비평하는 나비평하는 나 윤옥재 인간은 항상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데 실패한다. - 롤랑 바르트 1. 최근 ‘비평하는 나’를 둘러싼 것들 # 1) 파편의 리스트 혹은 반(反)구조적 잡록 나는 이 글에 대해 반(反)구조적이라는 비평이 들어올 것을 상상한다.1) 이 문장은 나의 것이 아니라 롤랑 바르트의 것이다. 롤랑 바르트가 자신의 저서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에 대한 메타적 인식을 표현한 이 문장은 바로 그 책을 구성하는 200여 편의 짧은 텍스트들 중 하나인 ‘잡록과 작품’의 첫 문장이기도 하다. 바르트는 이 무수한 파편적 단상들의 모음을 “백과사전” 혹은 “이질적이고 잡다한 오브제들의 리스트”로 명명한다. 파편적 글쓰기의 구조적 취약성을 ‘반구조적’이라는 자평을 통해 스스로 드러내는 그의 자조적 태도는 매혹적이다. 그가 일컬은 미친 ‘잡록(polygraphie)’2)에 착안해 이 글 역시 파편적인 방식으로 써 보려 한다. # 2) 에세이, 아마추어리즘, 자기이론 ‘비평적 에세이’ 혹은 ‘에세이적 비평’이라는 화두가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치 않다. ‘비평적 글쓰기’라는 구체적 방향성을 갖게 된 시점부터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에세이’라는 형식과 ‘아마추어리즘’이라는 개념이 비평과 맺는 관계에 관한 생각들이다. ‘비평의 에세이화’에 대한 비판이 이미 2010년대 초반부터 이루어졌다는 것을 인식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한 명의 문학 독자였던 나는 언젠가부터 비평 텍스트에 나타나기 시작한 ‘나’라는 일인칭 표현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비평은 쓰는 자의 주관과 감정을 최대한 배제해야 하는 장르라는 선입견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불가피하게 자신을 지칭해야 하는 경우 사용되던 ‘필자’라는 말에 나는 불편함을 느끼곤 했다. 왜 ‘나’라고 하면 안 되는 거지? 사정이 이렇다 보니, 비평을 쓰는 ‘나’를 드러내는 문장을 발견할 때면 놀라운 동시에 반갑기까지 했다. 오늘날 비평 텍스트에서 쓰는 주체 ‘나’를 발견하는 것은 전혀 낯선 일이 아니다. 심지어 ‘나’의 비평적 자의식과 정동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도 새로운 일이 아니다. 에세이와 아마추어리즘 사이에서 비평적 글쓰기의 자리를 탐색하던 내게 최근 강력한 키워드가 새롭게 추가되었다. 최근 문학 연구와 문화 비평에서 주목받고 있는 ‘자기이론(autotheory)’이 그것이다. 이로써 ‘비평하는 나’를 둘러싼 삼각형의 세 꼭짓점에 각각 ‘에세이’, ‘아
작성일 2026-04-01 댓글수 1상세보기 -
비평 이융희 - ‘남성/여성 + -향’이라는 함정‘남성/여성 + -향’이라는 함정 이융희 ‘남성/여성 + –향’ 분류의 형식과 한계 올해 초 X(구 트위터)에서 한 가지 해프닝이 있었다. 한 연구자가 ‘남성향’ 웹소설을 보는 여성 독자를 찾겠다며 연구 설문을 돌렸는데 다수의 유저가 연구자의 대상 텍스트가 ‘남성향’ 웹소설이 아니라 ‘여성향’ 웹소설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현재는 해당 글이 삭제되었으나, 해당 연구자가 발표한 논문을 통해 어떤 웹소설이 ‘남성향 작품’으로 프레이밍 되었는가 확인해 볼 수 있다.1) 해당 논문에서는 예시 작품으로 , , , , , , , , , , , , 등을 제안한다. 리디, 네이버, 카카오페이지 등 대형 플랫폼과 달리 ‘문피아’는 각 소설에 대한 로우데이터를 제공하는데 상술된 소설의 남녀 통계를 살펴보면 은 남성 20.8%, 여성 79.2%,2) 3)는 여성 50.5%, 남성 49.5%, 은 여성 61.9% 남성 38.1%4) 은 여성 41.8%, 남성 58.2%5) 는 여성 51.9%, 남성 48.1%6) 등임을 고려한다면, 해당 작품을 ‘남성향’이라고 규정한 연구자의 이야기가 시장에서 거부된 까닭을 짐작게 한다. 일련의 사태는 시장에서 범용적으로 사용된 용어가 학계에 저항 없이 사용될 때 또는 시장의 용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학계에서 다른 의미로 전유해 해석했을 때 발생하는 단절을 강하게 시사한다. ‘남성/여성 + –향’이라는 이분법이 업계에서 넘어와 학계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만큼 지금 여기의 웹소설을 제대로 분석하고 비평하기 위해선 ‘남성/여성 + -향’이란 이분법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구조에 대해서 고민하고 입법시켜야 한다. 지금까지 ‘남성향’과 ‘여성향’의 분류는 두 가지 축을 바탕으로 논의되었다. 한 축은 시장에서 널리 통용되는 서사의 내용과 형식 기준의 분류법이고 또 하나는 소비자들의 젠더적 욕망과 정치적 수행 행위로 보는 연구자들의 해석이다. 전자의 경우 좁게는 서사 내부에 존재하는 작은 기호부터, 넓게는 서사를 직조하는 각 시퀀스의 구조와 연출, 전개를 통해 인물이 획득하는 보상의 성향, 전체 작품의 주제 등에 따라 해당 서사의 종합적인 결과물을 남성적 구조와 여성적 구조로 나눈다. 이러한 분류는 통상 작법서를 통해 시장으로 재생산된다. 시장에서 요구되는 ‘좋은 웹소설’을 교육하기 위한 작법서에서는 웹소설 작가들과 독자, 그리고 유통망이 추구하는 ‘남성향/여성향’의 대상 텍스트를 판타지, 로맨스, 로맨스 판타지, 무협 등 하위 장르에 선행하는 상위 범주로 간주한다. 이 안에서 로맨스(판타지)라는 ‘여성향’ 장르와 판타지·무협(줄여서 &lsquo
작성일 2026-04-01 댓글수 1상세보기 -
비평 박서양 -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1]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박서양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6년 3월부터 2026년 5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부패하는 기억의 공간 ㅡ 『자작나무 숲』과 쓰레기의 정치학 (1) 박서양 0. 연재에 앞서 본고는 김인숙의 장편소설 『자작나무 숲』을 중심으로 쓰레기라는 물질이 공적인 처리 제도와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 그리고 기억과 서사의 경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단계적으로 고찰하는 3부작 비평이 될 예정이다. 1부에서는 단편소설 「빈집」을 살피며 쓰레기가 공적 처리 시스템에 편입되기 이전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수행되는 분류 노동과 그 젠더화된 정동을 분석할 것이다. 2부에서는 쓰레기를 배제함으로써 질서를 회복하려는 배제의 원리가, 서사에서 개연성을 통해 사건을 정합적으로 배열하려는 충동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살핀다. 3부에서는 지워진 여성들의 언어와 역사, 그리고 쓰레기 사이의 관계를 고찰하며, 재개발과 쓰레기집이라는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서 여성 고딕적 상상력이 어떻게 변주되는지를 논할 예정이다.1) 1. 쓰레기집의 사회적 상상력 곡교동 산1번지의 쓰레기집은 소설 『자작나무 숲』의 공간적 배경이자 독자를 압도하는 오브제다. 개발과 투기의 욕망으로 들끓는 재개발 예정 구역 한복판에 우뚝 선 이곳은 그 강렬한 존재감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우리는 흔히 ‘집’이라는 단어에서 안식과 보호, 정돈과 재생산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쓰레기와 오물로 뒤덮인 이 공간은 그와는 거리가 멀다. 쓰레기와 쓰레기 아닌 것, 집과 집 아닌 것의 구분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이 이질적인 장소에서, 자본의 생리에 따라 버려져야 할 물건들은 한데 뒤엉켜 완강한 물질적 현존을 드러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물질의 축적은 단순한 불결함이나 미관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일상적 분류와 질서의 법칙이 멈춘 어느 공간에서 소설은 사물의 퇴적과 부패를 집요하게 드러내며, 집의 장소성을 ‘언캐니(uncanny)’하고 낯선 심연으로 변주시킨다. 집은 물리적으로 내부를 보호하고 외부를 차단하는 경계로 구성되며, 무엇을 수용하고 배출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분류 체계 위에 성립한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상품은 끊임없이 순환되어야 하므로 ‘쓸모’를 다한 물질은 즉각 폐기되어 사라져야 한다. 이러한 논리는 집이 수행하는 선별의 원리와 닮아 있다. 이때 집은 어떤 사물이 여전히 인간의 일상에 머물 자격이 있는지를 판가름하는, 선택과 배제의 논리가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장소로 존재한다. 산1번지에 위치한 그곳이 문제적인 이유는 이러한 소비주의 시스템과 분류 기제가 지속적으로 실패하고 무력화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사물의 분류 체계도, 공간의 경계 논리도 더 이상 안정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대신 오랜 시간 퇴적되고 방치된 사물들만이 거대한 물질 덩어리로 합쳐져 뒤엉킨 채 굳어간다. 이처럼 쓰레기 더미가 인간의 거주 공간을 잠식하는 장면 속에서 독자는 익숙한
작성일 2026-03-01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송현지 - 방의 병리학방의 병리학 ㅡ 유선혜와 차현준의 시를 중심으로 송현지 1.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몸 1929년,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이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조건으로 연간 500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을 내세운다. 이 요구는 여성에게 쉽게 주어지지 않았던 사회적 조건을 폭로함으로써 당시에도 강한 호소력을 가졌지만, 그 구체성과 상징성으로 인해 약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자주 인용되곤 한다. 특히 ‘자기만의 방’이라는 표현은 독립을 위한 물질적 요건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며 여성 창작자만이 아닌, 청년 등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이들의 문제를 다루는 데까지 확장되어 활용되어 왔다. 청년 세대를 대상으로 한 금융 자기 계발서의 제목이나 그들의 주거 형태를 분석하는 사회학적 키워드로 변주되는 것이 그 예다. 그러나 울프가 제시한 이 조건은 단순히 경제적 여유를 갖추거나 물리적 공간을 확보하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은 짚어 둘 필요가 있다. 당시 여성의 몸이 가사 노동과 돌봄을 위해 수시로 침범되며 공동의 재화처럼 사용되었음을 떠올려 본다면, 정기적 수입의 필요성은 생존을 이유로 타인에게 자신의 몸을 양도하지 않을 권리를 의미하며, 독립된 방에 대한 요청은 몸이 침범당하지 않을 최소한의 물리적 공간을 요구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울프가 요구했던 저 경제적·물리적 조건이란 타인에게 뺏긴 자신의 몸을 되찾아야 한다는 선언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러한 점에 기대어 오늘날 청년 세대의 거주 불안 문제를 경제적 관점에서만이 아닌, 신체의 주권 문제와 함께 살펴보면 어떨까. 고시원에 거주하는 청년들을 인터뷰하며 정민우가 그들의 불안정한 거주 자체가 아닌, 잦은 이동으로 인해 소유물을 버리는 일에 익숙해진 그들이 삶을 ‘요약’한 채 살게 되었음을 포착한 것처럼 말이다.1) 이처럼 방의 문제가 주체가 삶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어떤 방식으로 운용하게 되는지를 규정하는 조건으로 작용하며 현재는 물론 미래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한다면,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방을 살펴보는 작업은 소재주의적인 탐색만은 아닐 것이다. 이 글은 임대된 방에 머무르는 유선혜 시의 화자와 내면의 방을 관리하는 차현준 시의 화자를 중심으로 청년 세대가 처한 사회적 조건을 살펴보고,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 그들이 어떻게 ‘자기만의 방’을 상상하고 변형하며 자신의 미래를 모색하고 있는지를 분석함으로써 동시대 청년들의 인식 구조를 가늠해 보려 한다.2) 2. 임대된 몸과 구멍의 존재론: 유선혜의 경우 유선혜의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에서 청년 인물들은 주로 좁고(「흑백 방의 메리」), 어두운(「Nirvana」) 방에 머문다. “조립형 서랍장이 쓰러져가”는 방에서 “싸구려 보드카와 오렌지주스를 종이컵에 섞”(「잡종의 별자리」)어 마시고, 여러 개의 방이 있는
작성일 2026-03-01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안세진 - 반복되는 세계에서 살아남기반복되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ㅡ 김엄지론1) 안세진 1. 색소폰 연주와 살아남은 소설들 내가 살고 있는 집 앞 하천 굴다리에는 매일 저녁 색소폰을 부는 할아버지가 있다. 처음에는 아저씨였는데 지금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 항상 있었다. 어제도 있었다. 당신은 테이프 반주에 맞추어 끈적한 유행가를 연주하는 중절모 쓴 노신사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겠지만, 지금 내가 말하는 풍경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벽을 보고 색소폰을 분다. 반주도 없고 관객도 없다. 중절모는 쓰고 있다. 한 이십 년쯤 들었으면 익숙해질 만도 한데 나는 아직도 그가 대체 매일 무엇을 연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불협화음 같은 프레이즈가 툭툭 던져지고 호흡을 고르는 듯 어색한 침묵이 길게 흐른다. 몇 개의 음으로만 이루어진 단순한 멜로디가 수십 번 반복되기도 한다. 아무리 들어 보아도 그것은 노래 같은 것이 아니다. 그는 그렇게 오래 연주하지도 않는다. 한 시간쯤 지나면 색소폰을 케이스에 넣고 어딘가로 털레털레 사라진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정한 규칙에 따라 매일 무엇인가를 연주하고 있다. 어떤 수련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유 모를 형벌을 받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여튼 무엇인가 반복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는 장인(匠人)일까, 아니면 광인(狂人)일까. 언제부터인가 김엄지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색소폰 소리를 듣는다. 무엇인가가 소설 속에서 그저 미친 듯이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엄지의 연주가 시작된 순간은 언제였을까? 정확히 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겠다. 그때 데뷔 육 년 차의 소설가 김엄지는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문학과지성사, 2015)와 『주말, 출근, 산책: 어두움과 비』(민음사, 2015)라는 두 편의 책을 거의 동시에 문단에 상재했다. 전자는 그의 등단작 「돼지우리」부터 시작해 비교적 ‘단편소설’의 통상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는 초기 작품들이 모여 있는 소설집이었고, 후자는 그가 최근 발표했던 각종 소설의 파편들이 이리저리 조합되어 만들어진 그야말로 괴이쩍은 장편소설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었지만 김엄지의 소설은 명백히 전자에서 후자의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무개념 상태로 널브러져 있”2)는 오피스 맨들의 기이한 무기력은 이미 그의 초기 소설이 잠시 펼쳐 보였던 ‘씹’, ‘뻑’, ‘좆’의 치기 어린 발랄함을 모조리 잠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야흐로 - 이후 김엄지의 소설을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규정하게 될 - “삶의 무게, 아니 ‘무게 없음’을 형상화한 듯한 하나의 형식”3)이 발명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김엄지의 문체(style)는 사실상 그때 이후로 거의 변하지 않았다. 성의 없이 툭툭 끊어지는 문장, 몇 페이지를 채 이어 가지 못하고
작성일 2026-03-01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민선혜 - 가려진 (아픈) 몸들, 지속되는 광장-들가려진 (아픈) 몸들, 지속되는 광장-들 -최진영, 이서수, 최은미의 소설을 중심으로1) 민선혜 1. 광장이라는 ‘사건’, 서로에게 감응-연결된다는 ‘환상’ 슬라보예 지젝은 ‘사건’을 안정화된 도식을 뒤엎을 수 있는 새로운 무언가가 출현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사건은 기존의 틀 자체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히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광장은 ‘사건’이었을까. 우리는 정말 같은 ‘사건’을 통과한 것일까. 이번 광장의 특징적인 면은 내란 사태를 경험하며 민주주의의 훼손을 온몸으로 막고자 한 시민들의 정치적 열망이 모인 곳인 동시에, 내란을 통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바꾸기 위한 다양한 목소리들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광장은 하나의 사건이라기보다, 사건들의 격전지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우리가 통과한 광장이 새로운 ‘빛’과 ‘연대’를 보여 주었다는 사실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광장을 빛과 연대의 광장으로만 의미화하는 것 역시 어딘가 석연치 않다. 새로운 민주주의를 개진시키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표하는 삼보일배의 순간에도 여성의 몸은 너무 손쉽게 남성적 언사로부터 훼손되고, 이때 여성의 몸은 또 다른 광장이 되어 버리고 만다. 민주주의를 수호하고자 하는 광장 안에 존재하는 억압, 대상화, 전시와 혐오의 광장. 광장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광장. 광장의 빛남을 이야기하는 동안 표백되고 괴리되어 미끄러지는 외따로 놓인 또 다른 작은 광장들. 이것을 ‘가려진 몸들’이라고 불러 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어떤 몸들이 경험하는 광장은 다른 이들이 경험한 광장과 완전히 동일할 수 없다. 탄핵 구호를 외치는 동안, 뉴스 속보를 확인하는 동안 고통에 응답하는 정치를 원했다. 마땅한 고통에 마땅한 응답을 내놓는 민주주의를 기대했다. 2030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이 광장에서 보여 준 활약과 그들이 들고 있던 깃발들의 이채로움에 대한 찬사 대신, 광장 속에서 부글거리고 있던 ‘우리’ 사이의 작은 차이들과 어긋남에 세심히 주목해 주는 정치를 원했다. 광장이 파한 이후에도 이들이 오롯이 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민주주의를 기대했다. 그런데 그 자리는 마련되고 있는 것일까. 그 많던 ‘우리’는 다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광장에 나타났던 ’몸‘과 다시 사라져 버리고 있는 ‘몸’.2) 지금 우리는 이 나타남과 사라짐을 경유하여 광장을 소급적으로 재사유할 필요가 있다. 광장에 부재했던 몸들을 끊임없이 호출하는 목소리와 보란 듯이 현전했음에도 다시금 사라져 버린 몸들에 대해서는 구태여 말하지 않는 목소리, 광장을 사이에 두고 발생하는 이 미끄러짐은 민주주의가 얼마간 성차화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었
작성일 2026-02-01 댓글수 1상세보기 -
비평 윤인로 - 소설로 촉발되는 신정론(神正論)소설로 촉발되는 신정론(神正論) 윤인로 신이 하는 일, 하려는 일, 그 일·의지의 정당성·정의를 상대로 문제를 제기함. 곧, 신이 집행하고 관철시키려는 힘과 뜻의 부정의·부당함·악함을 의로워야 할 신에 근거하여 항소함. 이와 반대로 그런 항소·항고를 불가항력적으로 취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신의 의로움·정당함·선함을 불가피하게 인정함. 부당하고 불의한 신에 대한 항고와 뒤이어지는 그것의 취하·철회, 신의 정의에 대한 변호·변론·변신(辯神). 줄여 말해 신정론(神正論·Theodizee, 신+정의theós+díke의 합성어), ‘신≡정의’라는 상보적 합동체로 구성되는 신의 일·뜻·앎·말·법·힘의 복합체론. 이 복합성의 구축 상황으로서, 그런 상황의 재구축을 위하여, (연작)소설집 『사랑이 한 일』의 문장들을 다시 배치해 보면 어떻게 될까. 그러니까 『사랑이 한 일』(이승우, 문학동네, 2020), 다시 달리 촉발되는 「욥기」. §1. 롯의 환대를 받은 두 방랑자가 실은 소돔을 멸하도록 신에 의해 파송된 천사들임을 밝히자, 그 임박한 절멸 앞에서 롯과 그의 삼촌은 서로 다르게 반응한다. “삼촌이 항의하고 호소했던 것과는 달리 (그의 삼촌은 의인과 악인을 동일하게 취급해서 같이 죽게 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이의를 제기하고, 그 성안에 의인이 있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 결국 의인이 열 명만 있으면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신의 답을 받아낸다) 롯은 항의도 하지 않고 호소도 하지 않”는바, 불의의 도시 소돔에 “의인은 없기 때문”이다. 일체의 모든 삶·관계에 고지되고 발효되는 정지·절단으로서의 신의 절멸·폭력. 신을 대신해 두 천사가 행하는 의인과 악인의 무차별·무분별, 그렇기에 신의 공정(公正/工程)에 제기되는 항의와 호소, 이에 대한 신의 조건부 응답. 항의자 삼촌과는 반대로 롯은 신의 일·폭력을 변론하는데, 신의 그 공정을 증거하고 보증하는 정초력으로서 그렇게 한다. 아래 두 대목 중 하나는 그런 롯을 표시하며, 다른 하나는 집-주인 아브라함으로부터 부당하게 추방당한 하갈의 ‘울부짖음’을 표현하고 있다. 아래, 인용에 의한 배치, 그 배치 속에서 발생되는 모종의 의미를 살펴보게 된다. [a] 사람을 울부짖게 하는 것이 악이다. 울부짖음은 고발이고 증언이다. 울부짖음이 신의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유죄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확실한, 어쩌면 유일한 증거이다. 신은 ‘규탄하는 울부짖음’만을 유죄 증거로 인정하고 판결한다는 것이 천사가 롯에게 한 말의 내용이다. 롯은 이 성을 위해 울부짖지 못한다. [b] 이
작성일 2026-02-01 댓글수 0상세보기 -
비평 이성주 - 무명(無名)의 상품, 번역의 연쇄무명(無名)의 상품, 번역의 연쇄 : 네트워크 시대의 시와 저자성 이성주 1. 저자성의 균열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 이후, 시 비평의 장에서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개념 가운데 하나는 저자성(authorship)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 시 쓰기에 인공지능을 포함한 다중 행위자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며 저자성의 해체를 주장하는 관점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인간만이 쓸 수 있는 시의 고유성을 강조하는 입장 역시 강하게 존재한다. 두 입장 사이에는 유보적이거나 비판적인 태도들이 넓은 스펙트럼을 이루며 공존하고 있고, 그에 따라 저자-시-독자의 관계나 독창성(고유성)을 둘러싼 논의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물론 이 글에서 관련 논의를 모두 정리하거나 판별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자성 비판이 오늘날 어떤 형식과 논리로 전개되고 있는지를 가늠하기 위해, 최근의 평문 가운데 하나인 박상수의 「영원한 베타 테스트로서의 여름」(『문학동네』, 2025 가을호)을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이 비평은 2010년대 이후 한국 시에 만연해진 ‘납작함’의 감각을 핵심 문제로 진단하며, 저자성 해체 담론이 간과하기 쉬운 지점을 예리하게 짚어 낸다는 점에서 중요한 참조가 된다. 박상수가 말하는 ‘납작함’이란 최근 시에 나타나는 시적 주체의 무력함, 대상에 대한 비관여성(非關與性), 타자와의 상호작용 약화, 그리고 ‘메타적 인식의 과정’만이 부각되는 경향 등을 아울러 지칭하는 것이다. 특히 박상수는 최다영의 비평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시의 생산 주체를 비인간 행위자와 기술 장치까지 포함하는 연합적 모델로 긍정하는 최다영의 논리가 결과적으로는 주체의 저항과 행위 가능성 혹은 내면의 복잡한 역학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본 글의 맥락에 맞춰 간단하게 말하자면, ‘저자성 해체’를 동시대의 불가피한 조건으로 승인할 때 타자성이나 윤리적 긴장이 소거된 ‘납작함’ 역시 쉽게 수용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최다영의 입장에 서면 다른 이야기가 가능하겠지만, 우선 박상수의 글이 지닌 문제의식에 많든 적든 공감하지 않기란 어렵지 않을까. 확실히 최근 시에서 ‘타자와의 접촉면’이 얕아지고 있음은 박상수만 느끼는 것은 아닐 것 같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인터넷상에서 실수나 실언 하나로 누군가에 대한 평가를 쉽게 뒤집고 때로 그것을 근거 삼아 혐오를 정당화하는 오늘날의 문화적 현상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여기서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박상수가 ‘무엇’을 주장하는가에 있다기보다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에 있다. 그의 글은 맥락이 다른 다양한 이론과 담론을 빠르게 호출하고 병치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가령 한병철과 마크 피셔가 별다른 매개 없이 나란히 놓이고, 현대 신학 담론의 어휘들은 그것이 형성된 맥락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채 문학 비
작성일 2026-01-01 댓글수 0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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