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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잇는 아픔

  • 작성자 우재영
  • 작성일 2017-03-25
  • 조회수 4,791

 

대를 잇는 아픔

하근찬의『수난 이대』를 읽고

 

‘수난 이대’는 전쟁으로 빚진 한 가족의 수난사를 담담하고 솔직하게 풀어썼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아픈 기억, 어쩔 줄 모르며 아들을 기다리는 행동, 서운하고 속상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내던지는 듯한 투박한 말투들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더 저미게 만들었다.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는 핑계로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는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친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가 점점 잊혀져 가고 있는 가운데, 역사가 만들어낸 한 가족의 비극을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그것이 왜 중요한가? ‘수난 이대’가 말하고 있는 역사의 아픔은 단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근찬은 소설 내적으로 이러한 아픔을 두 가지 상징물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이 소설의 오프닝과 엔딩에 일관성이 있다는 점을 발견했는가? 좋은 작품은 오프닝과 엔딩이 잘 짜여 있다. 작가가 그만큼 오프닝과 엔딩에 신경을 썼다는 것과 그 작은 부분들에 비교적 큰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세히 보면 이 소설의 오프닝과 엔딩에서 하근찬 작가가 애초에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처럼 보이는 공통어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용머리재’다. ‘그래 그런지 몰라도 박만도는 여느 때 같으면 아무래도 한두 군데 앉아 쉬어야 넘어설 수 있는 용머리재를 단숨에 올라채고 말았다.’ (하근찬,『수난이대』) 이것이 오프닝에서 용머리재가 사용된 문장이다. 이는 주인공인 박만도가 용머리재를 단숨에 넘을 만한 사건이 일어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을 매듭짓는 문장이기도 한 엔딩 문장을 살펴보자. ‘눈앞에 우뚝 솟은 용머리재가 이 광경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근찬,『수난이대』) 엔딩 문장에서 우뚝 솟아 있는 용머리재가 두 부자(父子)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자연물 용머리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즉, 이 자연물, 용머리재는 우리 민족의 수난의 역사를 지켜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두 ‘용머리재’의 의미는 상반되면서도 함축적인 의미를 지녔는데 특히 엔딩 문장의 용머리재가 더욱 그러하다. 오프닝에서는 주인공 혼자 등장하지만, 엔딩에서는 아들도 함께 등장한다. 오프닝에서는 주인공인 박만도가 용머리재를 넘은 후지만, 엔딩에서는 용머리재를 아직 넘지 않았다. 오프닝에서 박만도가 용머리재를 넘고 혼자 등장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의 시련과 고비를 넘긴 것으로 보인다. 엔딩에서 박만도는 막 외나무다리를 건넌 직후, 아들과 함께 용머리재를 올려다보는 입장이다. 이는 그들이 함께 수난을 극복했음을 알려주는 동시에 견뎌내야 할 또 다른 수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암묵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두 번째, 이 소설에서 핵심 소재로 다뤄진 ‘외나무다리’를 살펴보자. 박만도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졌던 적이 있었던 외나무다리와, 아들과 함께 힘을 합쳐 건넌 외나무다리가 등장한다. 물에 빠졌을 적에는 술김에 그랬던 것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외나무다리를 건너지 못했기에 어려움을 극복해내지 못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엔딩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외나무다리에 다다르자, 아들은 아버지의 등에 업히고 고등어를 든다. 서로의 장애를 극복하고 힘을 합쳐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수난 이대가 극찬 받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아픈 역사를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로 주인공에게 자연스럽게 녹여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주인공에 따라 달라진다. 전체적으로 보면 6·25 전쟁 직후이지만, 아버지와 아들에 각각 초점을 맞추고 보면 시대적 배경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시대 때 징용에 끌려 나가 한쪽 팔을 잃었고, ‘아들’은 6·25 전쟁에 참전하여 한쪽 다리를 잃었다. 시대적 배경이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시대, 아들은 남북전쟁이라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겪은 아픔을 그린 수많은 작품들과는 다르게, ‘수난 이대’는 억지로 짜 맞추려 하지 않고 주인공을 부모와 자식으로 설정함으로써 두 시대를 담아냈다. 두 시대를 2대에 걸친 한 가족의 비극으로 담아낸 것이다.

 

하지만 ‘수난 이대’의 아픔은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이 아픔이 현재까지도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일제 강점기 시대는 위안부를, 남북전쟁은 남북분단의 결과를 낳았다. 위안부 문제와 남북분단의 현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가장 큰 비극이자, 수난이다. 이는 아직까지도 속 시원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로, 앞으로 우리가 꼭 풀어가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수난 이대’를 좁은 의미에서 보면 한 가족에게 수난이 대물림되는 것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시대가 변함에 따라 수난이 또 다른 수난을 낳아 대물림된다는 것이다. 이 소설이 현대 사회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보게 해 준다는 점은 ‘수난 이대’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또한 슬픔을 담담하게 풀어쓰는 하근찬 작가의 특유한 문체가 더 먹먹한 감동을 느끼게 해 준다는 점도 하나의 매력이다.

우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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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희

    안녕하세요? 우재영님, 반갑습니다.^^ 하근찬 작가의 단편 소설 「수난 이대」에 대해 쓴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고등학생 때 이 소설로 공부했던 기억이 떠올라 잠깐 감회에 젖었네요. 당시 문학 교과서에 이 작품이 실려 있었거든요.) 우재영님은 이른바 작품 감상에 있어서의 네 가지 태도(① 절대론적 관점(내재적 관점) ② 표현론적 관점 ③ 반영론적 관점 ④ 효용론적 관점) 중에서, ①에 해당하는 절대론적 관점에 입각해 이 소설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글은 ‘용머리재’와 ‘외나무다리’를 중심으로 작품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지요. 그런 점에서 「대를 잇는 아픔」은 깔끔한 내재적 작품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를 잇는 아픔」을 다르게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인가하면 「수난 이대」에 대한 우재영님의 해석이 지나치게 모범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글은 교과서에 쓰여 있는, 학교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작품 감상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기존에 제출된 해석과 구별되는 우재영님만의 독특한 시각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아쉬움이기도 합니다. 감상&비평은 남들과 똑같이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만 할 수 있는 말을 전하기 위해 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수난 이대」를 절대론적 관점으로만 읽지 말고, 나머지 세 가지 관점을 종합하여 분석해야 합니다. 예컨대 이 소설이 하근찬 작가의 등단작―195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임을 고려해보면서, 1950년대 한국 사회에 짙게 깔린 휴머니즘 풍조를 비판적으로 검토해볼 수도 있겠지요. 문제를 합리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인간애로 쉽게 덮어버리는 것이 휴머니즘이 가진 부정적 면 중 하나니까요. “이 작품이 약간 우의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상처를 당한 이들이 상처를 준 역사의 의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다만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와 같은 「수난 이대」에 대한 또 다른 평을 우재영님이 눈 여겨 보셨으면 합니다. 이 점을 오래 고민해야 어디선가 봤던 작품평이 아니라, 우재영님만의 비평을 쓸 수 있을 겁니다. 「수난 이대」가 실려 있는 책이 아주 많은데, 우재영님이 그 중에서 어떤 판본으로 읽었는지도 글에 써주기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하근찬, 「수난 이대」, 『하근찬 선집』(하정일 편), 현대문학, 2011.’ 이런 식으로요. 중고등학교 때 훈련이 되어 있어야, 나중에 전문적인 글을 쓸 때 서지사항을 밝히는 일에 곤란을 겪지 않을 테니까요. 텍스트의 출처와 자기주장의 근거(인용 자료)를 제시하는 연습을 꾸준히 해주세요. 그럼 우재영님의 또 다른 글 기대하겠습니다. (「대를 잇는 아픔」을 고쳐 써서 다시 올려주셔도 됩니다.) * 「대를 잇는 아픔」에서 수정해야 할 문장은 STICKMAN님이 댓글로 잘 지적해주었으므로 따로 코멘트하지는 않겠습니다.(STICKMAN님 고마워요!^^)

    • 2017-03-28 11:22:31
    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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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ICKMAN

    죄송합니다 처음에 우지영님이라고 잘못 썼네요.. 수정하려 하니까 안 된다고 뜨네요ㅠㅠ

    • 2017-03-26 23:07:22
    STICK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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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ICKMAN

    안녕하세요 우지영님의 독후감 잘 봤습니다. 저도 나중에 하근찬 작가의 소설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도 비문과 오자를 쓸 때가 자주 있지만.. 감히 우재영님의 글에 지적을 해봅니다. ''수난 이대'는 전쟁으로 빚진 한 가족의 수난사를 담담하고 솔직하게 풀어썼다' 하근찬이 담담하고 솔직하게 풀어썼다고 해야 옳을 텐데, '수난 이대' 작품 자체가 썼다고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소설이 소설을 쓸 수는 없으므로 이 문장은 비문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전쟁으로 빚졌다고 했는데 무엇은 빚진 것인지 나와 있지 않아 저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빚지다'는 말은 '남에게 돈을 꾸었다가 갚지 못하다' '신세를 지다'는 것밖에 없는데 무엇을 빚지고 무엇에 빚진 것인지 나와 있지 않군요. 물론 전쟁으로 인해 많은 것을 빚졌겠지만요. '엔딩 문장에서 우뚝 솟아 있는 용머리재가 두 부자(父子)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자연물 용머리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앞에 용머리재를 언급하는데 뒤에 용머리재가 또 나옵니다. '엔딩 문장에서 우뚝 솟아 있는 용머리재가 두 부자(父子)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자연물 용머리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렇게 두 문장으로 나누면 자연스럽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등에 업히고 고등어를 든다' 제가 아는 고등어는 생선 고등어밖에 없습니다만.. 그 고등어가 진짜 생선 고등어인지, 그게 맞다면 왜 아들이 고등어를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앞에 고등어와 관련된 말이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설을 직접 봐야만 자세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난 이대가 극찬받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수난 이대가 극찬받고 있다는 말은 그 전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수난 이대가 극찬받고 있다고 미리 말해주어야 독자들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주인공에 따라 달라진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주인공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셨는데, 그 뒤로 '아버지와 아들에 각각 초점을 맞추'어서 설명하셨기 때문에 주인공 박만도와 그의 아들, 즉 등장인물에 따라 달라진다고 해야 맞지 않을까요? 아니면 두 시대를 2대에 걸친 한 가족의 비극으로 담아냈다고 하셨는데 그럼 '가족'에 따라 시대적 배경이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요? '주인공을 부모와 자식으로 설정함으로써' 주인공을 부모로 설정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만 부모와 자식으로 설정한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주인공 박만도는 부모와 자식 둘 다 될 수는 없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수난 이대'는 한 가족의 수난사를 다루는 동시에 '넓은 의미에서' 현대사도 다루는 소설인데, 우재영님은 '부모와 자식으로 설정함으로써 두 시대를 담아냈다'고 하시다가 마지막에는 현대 사회와 연관지어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아픈 역사를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로 주인공에게 자연스럽게 녹여냈기 때문이다' 아픈 역사를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로 '주인공에게' 녹여냈다는 것은 약간 말이 안 돼 보이지만, 분명 글 중반에 두 시대를 한 가족에 담았다고 하셨는데 끝부분에서 갑자기 말이 바뀌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앞의 말과 부딪쳐 약간의 모순(모순이라고 해야 할까요?)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에 물음형으로 일관성이 있다는 점을 발견했냐고 하셨는데 두 번째에서는 그냥 살펴보자고 하셨습니다. 첫 번째에 용머리재를 설명하고, 두 번째에 외다리나무를 설명하는 것이 전체적으로 어울릴 듯 합니다. 첫 번째에서 나온 오프닝과 엔딩 이야기는 그 전에 추가해도 어색할 게 없을 것 같고요. 꼭 그렇게 하란 법은 없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그렇게 느꼈습니다. 저도 독후감, 감상문, 비평글 등을 잘 쓰는 건 아니지만 우재영님의 글을 읽다 보니 조언을 하게 됐습니다. 부족한 제가 감히 우재영님의 글에 지적을 해 보았습니다. 앞으로 글 많이 쓰시고, 많이 활동하시기 바랍니다.

    • 2017-03-26 20:58:16
    STICK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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