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 작성자 탈퇴 회원
- 작성일 2015-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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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수 1
- 조회수 290
군데군데 들러붙은 살점
좀비도 뜯어먹다 버릴 뼈쟁이
언젠가 제 부모가 틔우고 돋운
오래 전의 고사리
같은 열 손가락과
투, 두둑, 툭 삶이 떨어져나가는 소리로
남자는 자음을 줍고 모음을 쓸며
텅 빈 백지 위 자신이 디딜 땅 한 뙈기를
짓는다
그 열 손가락은 곡괭이도 됐다가
호미도 됐다가 싸리개도 됐다가
소가 되기도 하며
언젠가는 열리겠지, 하는 남자의
막연한 외침을 삼키고
텅 빈 백지 위 자신이 디딜 땅 한 뙈기를
짓는다
가끔씩 냉소 가득 품은 바람이
그 열 손가락에 생채기를 낸다
주방에서 트고 튼, 고왔던 손과
침에 퉁퉁 분 작달막한 주먹 두 개가
자주, 그 열 손가락에 매달리기도 했다
매일 1분 1초 끼니 걱정에 세금 걱정에
월세 걱정에 아내도 딸도 지쳐버린
가슴 속 남자가
고개를 쳐들어
그 열 손가락에 얼마 안 남은
살점을 뜯어 먹는다
그래도
남자의 자음과 모음은 여전히 소설을
자신이 디딜 땅 한 뙈기를
짓는다
손가락이 무뎌지면 안 돼
손가락이 무뎌지면 안 돼
끝을 날카롭게 갈고 갈아서
갈아서.......
텅 빈 백지 위 내가 디딜 땅 한 뙈기를
짓는다
눈물콧물오줌똥 다 먹은 그 땅에는
20년 이상 지어온 그 땅에는
머리로 묻고 가슴으로 묻고
마침내
그 열 손가락으로 묻은 아내와
딸이 있다
그 열 손가락으로 묻은 10대의
판타지 소설 쓰던 내가 있다
먹을 것도 돈도 집도
그 땅은 내게 주지 않았다
그 땅은
먹은 것 없어 내보낼 것도 없는
똥구멍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나아가지 못한 마우스 커서는
자기 앞에 남아있는
막막한 하얀 황무지를 바라본다
그 모양새가
껌벅이는 그 모양새가
곧 끊어질 것 같은 노인의
심장박동 그래프를 닮아있다
비오지 않는 논밭 위의 농부처럼
언제나 텅 빈 백지 위에 굽어있는
남자의 그 열 손가락은
짓는다
텅 빈 백지 위 자신이 디딜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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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퇴 회원
- 2022-01-03
나에게 겨울은 봄보다 따뜻했음을 과거의 추억에 너무 연연해하지 말자 나아질 거라는 희망에 기대하지는 말자 네가 모르게 하이얀 실을 매달아 너의 겨울을 두 번 찾아보지는 말자 나의 낙원에 다시 기대를 안지는 말자 우리의 계절은 너무 다르다는 것을 꼭 몸소 겪고 나서야 인정하지는 말자 이른 벚꽃 잎의 과거를 추억하지는 말자
- 탈퇴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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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걸음 꽃을 즈려밟았다 막연히 번지는 길에는 코스모스가 한 가득 그것들을 즈려밟았다 새파란 창공은 폐부에 찔러넣는 파편 나는 지평선 대신 땅을 보고 걸었다 피고름이 내려앉은 본인의 발을 보았다 막연히 번지는 길에는 붉은 코스모스가 한 가득 수천의 자신이 그것을 즈려밟았다 발자국처럼 찍히는 피와 고름 걸음걸음 으깨지는 꽃의 울음
- 탈퇴 회원
- 2021-12-05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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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판타지 소설을 쓰고 있는 화자의 마음이 잘 담겨 있어서 좋았습니다. 글을 짓는 과정과 화자의 심경, 상상력 등을 공감할 수 있었어요. 글을 짓는 사람이라면 '텅 빈 백지 위 자신이 디딜 땅'을 생각해본 적이 있겠죠. 아그책 님은 소설을 쓰는 분 같은데 시에도 재능이 있답니다. 앞으로도 더 열심히 써보세요. 다만 상상력이 좋지만 과장된 이미지는 삼가해야 합니다. 또한 이미지의 확장을 고려해보세요. 연상작용을 할 수 있도록, 이미지가 이미지를 낳도록 시를 하나의 그림처럼 쫘악 펼쳐준다면 더 좋을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