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 작성일 2012-04-16
- 좋아요 0
- 댓글수 8
추천 콘텐츠
멍 임솔아 더러워졌다. 물병에 낀 물때를 물로 씻었다. 투명한 공기는 어떤 식으로 바나나를 만지는가. 멍들게 하는가. 멍이 들면 바나나는 맛있어지겠지. 창문을 씻어주던 어제의 빗물은 뚜렷한 얼룩을 오늘의 창문에 남긴다. 언젠가부터 어린 내가 스토커처럼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닌다. 꺼지라고 병신아, 아이는 물컹하게 운다. 보란 듯이 내 앞에서 멍든 얼굴을 구긴다. 구겨진 아이가 내 앞에 있고는 한다. 사랑받고 싶은 날에는 사람들에게 그 어린 나를 내세운다. 사람들은 나를 안아준다. 구겨진 신문지로 간신히 창문의 얼룩을 지웠다. 창밖을 내다보다 멍든 바나나를 먹었다. -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문학과지성사, 2017)
- 2025-05-08
움직이지 않고 달아나기 멈추지 않고 그 자리에 있기 임유영 시험이 끝나고 너와 같이 걸었다 옛날처럼 손잡고 다정하게 여기서 만날 줄은 정말 몰랐네 그렇지 개구리 군복을 입은 넌 중앙도서관에서 내려왔고 나는 종로 어디 구석진 찻집에서 대추차랑 약과를 먹고 있었는데 통유리창 밖에서 네가 손 번쩍 들고 인사했지 우리 그때 눈이 마주쳐서 웃었지 네 코에 걸쳐진 잠자리 안경 밑에 (넌 가끔 안경을 꼈지) 하얀색 마스크 속에 (너도 요즘 마스크를 쓰고 있겠지) 너의 입술이 천천히 그리는 반달 우리는 천천히 산책을 했지 아무래도 쫓기는 마음으로 이제 곧 경찰이 들이닥치고 나의 친구들은 모두 맞아서 다칠 텐데 하지만 내가 대오를 벗어나는 선택을 한번 해본 것인데 경멸 없이 너를 만나보고 대추차도 먹어보고 허름한 찻집에도 들어가보고 불친절한 주인 남자에게 화내지도 않고 담배 피우지 않고 술 마시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우울하지도 않고 한 번쯤 그래보고 싶었어 다르게도 살아보고 싶어 그날 내가 본 것 그날 내가 겪은 것 모두 새로 기입하는 이 흐린 저녁 그 가로등 아래서 다시 만나자 다시 만나자 - 시집 『오믈렛』(문학동네, 2023)
- 2025-04-05
세컨드핸드 조용우 시장에서 오래된 코트를 사 입었다 안주머니에 손을 넣자 다른 나라 말이 적힌 쪽지가 나왔다 누런 종이에 검고 반듯한 글씨가 여전히 선명했고 양파 다섯, 감자 작은 것으로, 밀가루, 오일(가장 싼 것), 달걀 한 판, 사과주스, 요 거트, 구름, 구름들 이라고 친구는 읽어 줬다 코트가 죽은 이의 것일지도 모른다며 모르는 사람의 옷은 꺼림칙하다고도 했다 먹고사는 일은 어디든 비슷하구나 하고 웃으며 구름은 무슨 뜻인지 물었다 구름은 그냥 구름이라고 친구는 답했다 돌아가는 길에 모르는 사람이 오래전에 사려고 했던 것들을 입으로 외워 가면서 어디로 간 것일까 그는 여전히 조용하고 따뜻한 코트를 버려두고 이 모든 것을 살뜰히 접어 여기 안쪽에 넣어 두고 왜 나는 모르는 사람이 아닌 것일까 같은 말들이 반복해서 시장을 통과할 때 상점으로 들어가 그것들을 하나씩 바구니에 담아 넣을 수 있다 부엌 식탁에 앉아 시큼하기만 한 요거트를 맛있게 떠먹을 수도 있다 오늘 저녁식사로 할 수 있는 것들을 떠올리면서 놀라운 것이 일어나고 있다고 느끼면서 구름들 바깥에서 이곳을 무르게 둘러싸고서 매일 단지 다른 구름으로 떠오는 그러한 것들을 이미 일어난 일처럼 지나쳐 걷는다 주머니 속에 남아 있는 이름들을 하나씩 만지작거리면서 나는 오고 있다 - 시집 『세컨드핸드』(민음사, 2023)
- 2025-03-06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8건
이 시에서 반복하여 사용한 '껍데기는 가라'라는 표현은 시에서 운율을 줄 뿐더러 시의 전체적인 주제인 진실되지 않고 정의롭지 못한 것들은 모두 사라지라는 주제가 직접적으로 부각된다. 또한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에서 쓰여진 사월은 4.19혁명을 나타내어 화자가 군부세력에 비판적인 입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아사달 아사녀가..' 이 문장에서 알 수 있는 화자의 소망은 통일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라에서 백두까지..' 이 문장에서 한라에서 백두까지는 한반도를 나타내고 모오든 쇠붙이는 전쟁에 이용되는 무기들을 표현하여 화자가 말하고자하는 전체적인 입장은 군부독재 타도, 통일, 평화(알맹이)만 남아야한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올해 초에 방송되었던 고등래퍼에서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를 참고해 노래를 만들었었는데, 기회가 된다면 이 시를 직접 읽고 싶었다. 우연히 사이버문학광장을 통해 이 시를 알게되어서 정말 기쁘게 생각한다. 1연에 나온 [껍데기는 가라 사월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는 이 시에서 주제가 가장 선명하게 나와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껍데기란 시련,고난등 부정적인 상황등을 의미하는 것 같고, 알맹이는 내 안, 혹은 누군가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순수함이라고 생각한다. 안 좋은 일을 보내버리고 남아있는 좋은 일만 생각하고 살자라는 의미가 담긴 시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부분에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이 부분에서도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즉 좋은 건 남고,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방해되는 나쁜 것들은 가라라는 뜻일 것이다.
이 시는 '껍데기는 가라'라는 의미 있는 표현을 통해 4.19 정신을 노래하고 있는 시입니다. 이 시를 읽고서 가장 먼저 어떤 일이든 그 핵심이 중요하고, 그 핵심이 변질되면 본래의 가치를 잃어버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봉건사회를 개혁하려는 민중의 의지와 순수한 민주화의 열망을 나타내는 '동학 농민 운동(동학년)의 아우성', '사월(4.19 혁명)의 알맹이'는 남고 폭력, 군사, 강압 등을 상징하는 '쇠붙이'는 가라고 하는 모습에서 진정으로 화자가 우리나라의 평화와 안정을 기원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체적으로 '껍데기'로 표현되는 위선과 겉치레는 사라지고 '알맹이'라는 순수성만 남아야 한다는 시의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시를 읽으면서 나 자신도 남한테 보여주기 위한 겉치레로 살아가기보다는 진짜 나의 모습을 좀 더 드러내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