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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숙, 「젊은 음악가의 초상」 중에서

  • 작성일 2011-09-01
  • 조회수 1,487




 
이강숙, 「젊은 음악가의 초상」 중에서
 
 
 
 
철우가 우리말보다 먼저 배운 남의 나라 말 단어는 ‘릴레이’였다. ‘릴레이’가 우리말로 ‘계주’라는 것을 뒤늦게 배운 철우는 육상경기와 관련되는 단어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철우는 먼저 배운 것보다 뒤에 배운 것에 목줄을 매는 아이였다.
―사과는 빨강이지?
―응.
―사과는 빨강이라는 것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인 거야.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데.
―사과를 그리려고 할 때 그 고정관념을 버리지 않으면 사과를 그릴 수 없다는 뜻이야.
―그건 또 무슨 소린데.
―사과는 빨강이니까 종이 위에 빨간색만 칠해 봐. 어떻게 되는지.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야?
―닮게 그리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거야. 사과를 그린다는 말은 저기 있는 사과를 캔버스에 사과와 닮은 형상으로 옮겨놓는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닮게 그리려면 말이야. 사과는 빨강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사과 색깔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어야 한다는 거야. 다시 말하면 과거에 배운 것은 잊어버리고 새로 배워야 한다는 거야.
―새로 배운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사과를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한다는 거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걸.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사람은 사과의 색깔을 반드시 빨강만으로 보지 않아. 사과 꼭지가 붙어 있는 곳은 움푹 파여서 빨갛다기보다는 검게 보이거든. 햇빛이 많이 비치는 사과의 어깨 부분은 햇빛과 빨강이 섞여서 노랗게 보일 때가 있고. 사과를 이렇게 보는 눈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관찰하는 눈이라는 거야.
―처음 듣는 이야기네.
―다시 말해 볼까. 사과는 빨갛다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사과를 볼 수 없다는 이야기야. 사과의 어깨 부분 밑으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어깨 위쪽보다 햇빛을 덜 받는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은 빨강이라기보다 검은색과 어울려 있거든. 사과를 자세히 한번 보라고. 내 말이 틀렸는지.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배워 온 것을 잊어버리고 고쳐 배울 줄 아야야 닮게 그릴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거야.
―고쳐 배워?
―그래. 고쳐 배우는 거야. 고쳐 배우는 것은 자기 마음을 끝없이 갈고 닦아야 하는 고행의 길이야
.
 
 
 
작가_ 이강숙 - 1936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났으며, 미국 버지니아 커먼웰스 대학교 조교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KBS 교향악단 총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역임. 2001년 《현대문학》에 단편 「빈 병 교향곡」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장편소설 『피아니스트의 탄생』, 소설집 『빈 병 교향곡』, 산문집 『술과 아내, 그리고 예술』 등이 있음.
 
낭독_ 김민성 - 성우. <격동50년> <내셔널지오그래픽> 등 출연.
윤미애 - 배우. <12월 이야기>, <늦게 배운 피아노> 등 출연
.
출전_ 『젊은 음악가의 초상』(민음사)
음악_ 심동현
 애니메이션_ 민경
프로듀서_ 김태형
 
 

어쩔 수 없이 비슷한 소재의 글을 써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미 쓴 내용이라고 거절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거절하지 못하고 썼던 이야기를 또 씁니다. 고향 이야기를 하면 서울 변두리 풍경과 장미나무가 있던 옛집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고 출판사 카탈로그로 도배가 된 다락방 이야기를 피해갈 수가 없지요. 같은 이야기를 우려먹는다는 오해를 살까봐 좀더 색다르게 쓰려 전전긍긍입니다. 그런데도 매번 ‘옛집을 떠난 건 장미가 만개하던 유월이었다’라든가 ‘허리를 굽히고 다락방에 올라서면 활자가 별처럼 쏟아졌다’라는 문장을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려 머리를 궁리해보지만 이미 그 상황은 그 문장이 전매특허라도 낸 듯 다른 문장이 뚫고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다른 작가의 뛰어난 문장을 뛰어넘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더 힘든 건 바로 제가 쓴 제 문장입니다. 『젊은 음악가의 초상』의 서주 부분을 몇 번이고 다시 읽습니다. 새로운 시각은 고쳐 배우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고행의 길이라는 걸 조금은 알 듯합니다. 아주 조금은.
 
문학집배원 하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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