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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은 켜지지 않을 거야

  • 작성자 강완
  • 작성일 2024-03-19
  • 조회수 435
이 게시글은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 (폭력, 자살, 자해 등)

*(1)


층계참은 차갑기만 하다. 항상 그랬지만.


센서등이 켜질까 조마조마한 건 아직도 그렇다. 이젠 불이 켜진다고 해도 맞거나 하진 않지만.

조금 어렸을 때는 궁금했었다. 혹시 저 불빛은 내 생각이라도 읽는 걸까. 분명 몸을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환해지던 문가. 그와 동시에 날아오던 책. 볼펜. 마우스. 크고 아프고 많은 뭔가들. 그때만 유난히 일관되었던 감정선. 나한테 온 몸으로 보내던 축객령. 이 짓거리도 이제 육년째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면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소리들은 자장가랑 다를 바도 없다. 아마 내가 아는 유일한 자장가가 혀 아래에서 뾰족하게 튕겨오는 억센소리밖에 없어서겠지. 기억나는 부분을 불러볼 수도 있다. 이놈, 애새끼, 시발, 개새끼. 가끔은 안무도 있었고 그때 그사람 입에선 어김없이 단내가 났었지.


어쨌거나 내가 탈 엘리베이터는 아니다. 내 몸은 항상 땅바닥 어딘가에 나뒹굴고 있으니까. 무기력하게. 비참하게. 구차하게. 어렸을 때 한번쯤은 그 속에서 천사가 나와 나를 구원해주는 상상을 해봤던 것 같다.


몸은 분명히 컸는데 닫힌 현관문의 크기는 똑같다. 똑같은 크기의 절망. 똑같은 크기의 단호함.

구역질이 난다. 그사람도 내가 자기 지갑 속에 놓여 있던 빳빳한 오만원 두 장과 잔돈 천 오백원을 도둑질하지 않았단 거 쯤은 알 거다. 애초에 그런 뻔한 짓을 왜 해?

그냥 이유를 찾고 싶었던 거겠지. 인생을 송두리채 가져가 버린 도둑놈을 세상에서 없애고 싶었던 거겠지, 점차 작아지고 투명해져서 결국 센서등조차 인식하지 못할 만큼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무의식이였겠지, 막연한 생각이지만.


사실 센서등의 불이 켜진다는 게 곧 살아있는 걸 의미한다니, 그만큼 웃긴 소리도 없다.

어쨌든 죽은 사람을 그 아래다 가져다 놓으면 불이 켜지진 않겠지만.


눈 앞이 뿌얘져 온다.


*(2)


꿈 속의 나는 혼자 집에 있어. 혼자 집에서 빵 봉지를 뜯고 있어. 보들보들 부들부들 맛있는 빵. 뜯기는 어렵지만 맛있는 빵. 어디서 가져왔더라? 아무래도 상관없지. 빵 먹어야

 응? 엄마 올 시간이다.


나는 엄마를 마중하러 엘리베이터로 나가.


기다려.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려. 기다리면 엘리베이터에서는 엄마가 내리겠지. 음음, 음. 내리겠지. 엄마가 오면 엄마를 꼭 안아줄 거야.


엄마가

오면

오면

오면..


와! 엄마가 나와. 엄마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어. 엄마가 웃으니까 세상이 따라 웃어. 아마 나한테는 엄마가 세상이니까 그렇겠지.


엄마는 내 손을 꼭 잡고 집으로 들어가. 집, 집, 집. 혼자 있을 땐 슬펐는데 이젠 안 그래. 엄마가 있으니까.


밤이 되니까 우리는 다시 집 밖으로 나와. 어? 빵이다. 아까 미처 못 뜯었던 빵이 신발장 앞에 있어. 엄마한테 뜯어달라고 해야겠어.


마트로 가는 걸까? 아님 놀이터에? 사실 어디로 가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엄마랑 있으니까. 난, 엄마랑 있어서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행복해.


조금 기다리니까 엘리베이터가 와. 행복해. 뭔가 재미있는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도 같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 행복해. 엄마 눈꼬리가 반달 모양으로 구부러졌어.

이제 엘리베이터를 탔어. 행복해. 나는 엄마한테 빵을 건네. 엄마, 나 빵좀 뜯어주라.


빵 봉지를 본 엄마는 갑자기 무서워져. 엄마? 엄마? 엄마? 왜 그래? 왜 갑자기 나한테 무서운 목소리로 말해? 왜 갑자기 발을 쿵쿵 굴러?


문이 닫혀.


우리는 내려가. 그러다가 점점 더 빨리 내려가. 내려가. 내려가내려가내려가, 내려가? 내려가. 빨리빨리빨리빨리빨리. 불안해. 불안해. 불안해. 불안해. 까드득까드득. 까드득. 까드득. 떨어진


*(3)


그날 엄마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던 걸로 기억한다. 하긴, 누구라도 그랬겠지. 좋아하는 사람을 몇년만에 처음 본다는데. 그리고 내가 그런 엄마를 보면서도 마냥 웃지 못한 것은 절대로 엄마 탓은 아니다.


음.. 사실을 말해야 되나?


시트가 너덜너덜해진 차 안에 앉아서 그곳으로 간다. 추워서 엔진이 켜지는 데까지 몇 분이나 걸렸다. 그치만 괜찮다. 그곳으로 가니까. 학교에서는 거기 사는 사람들이 다 나쁘다 그런다. 그치만 우리 엄마는 아니라 그랬다. 그리고 나는 엄마 말을 믿는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아무래도 사실을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빗길을 달린다. 낡은 차라 그런지 빗소리가 그대로 들려왔고 의자는 시간이 지나도 지나도 따뜻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엄마는 신났다.


엄마 기분이 좋아 보이니까 사실을 말해도 되겠지.


나는 엉덩이 아래에 깔고 앉았던 빵을 꺼낸다. 납작해져 있다.


나는 엄마 어깨를 두드려서 엄마한테 빵을 보여준다. 엄마.. 사실은 말야,


나 또 빵을 가지고 와 버렸어.


훔쳤다, 슬쩍했다, 스윽했다 같은 동사를 쓰지 않은 건 엄마의 눈썹에 대한 호의였다. 순화해서 얘기했는데도 더 치솟을 공간이 없어 보였으니까.


순간 빗줄기 사이사이로 무수히 많은 느낌표가 스쳐 지나가 나에게로 날아왔다. 그 사람이 나에게 불러주었던 자장가와 똑같은 언어의 것이었다. 양손은 쭉 뻗은 검지만 제외하곤 꽉 쥐어져 있었고 그 검지는 날 향했다. 그리고 내 빵을 향했다. 느낌표들은 점점 거세져왔다. 음악 시간에 배웠던 크라셴도처럼.


*(4)


나의 아빠가 교도소에 간 원인은 얼굴에 난 혹만큼이나 자명했다. 실제로 사장의 얼굴과 몸 곳곳이 혹과 멍으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에.


나의 아빠가 교도소에 간 원인은 술이였다.


나의 아빠가 교도소에 간 원인은 200만원이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없었던 200만원이었다.


잘은 모른다. 


나의 아빠는 일을 하고 돈을 받지 못했다. 사장은 아빠의 어깨를 두드렸다. 사장의 아내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화를 억눌렀던 건 사장의 아내가 무릎을 꿇어서였다.


나의 아빠는 홧김에 술을 마셨다. 금지되었던 술이였다. 벌게진 얼굴로 가끔 뻗었던 손바닥은 엄마를 향했으므로. 


이후에는 목걸이 가게에 갔다. 땡전 한푼도 없이. 엄마가 불쌍해서 그랬단다. 아빠만 아니였어도 덜 불쌍했을텐데, 이 말은 눈물을 소화제 삼아 목구멍을 역류해서 다시 들어갔다.


목걸이 가게에서 아빠는 사장을 발견했다. 사장은 젊은 여자를 데리고 있었다. 흐려진 기억으로 되짚어보길, 분명 낮의 그 아내는 아니었단다, 뭔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4)


아빠는 수갑을 찼다. 생계의 족쇄보다는 가벼웠겠지만 그 족쇄는 대상을 옮겨 우리 엄말 두배로 옥죄어왔을 뿐이었다.


엄마는 의연했다.

엄마는 강했다.

엄마는 무너지지 않았다.


내가 집에 친구들을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 그 친구들은 여러 이름으로 불렸고 공통점이 그리 크진 않았다. 내 주머니에 꼭 들어맞는 크기라는 점 외에는. 주인이 따로 있다는 점 외에는. 


처음에는 뒷담의 보복이였고 다음엔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딱히 목적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엄마는 날이 갈수록 점점 힘들어했다.

나의 엄마는 가면을 썼다. 무표정이란 이름의 가면이었다.


아빠를 데리러 가던 날, 엄마는 웃었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 웃음이였다.


나의 엄마를 센서등 아래다 가져다 놓으면, 불은 켜지지 않을 거다.


*(3)


엄마의 손가락과 빗소리를 순식간에 집어삼켜온 불빛이 있었다. 아주 커다랗고, 아주 환한 불빛이였다. 


그 불빛이 우리마저 잡아먹던 순간에는 큰 소리가 들렸다.


그 사람이 2년만에 집에 돌아오는 날의 일이었다.


*(2)



*(1)


잠에서 깬다. 어렴풋한 기억으론 엄마에 대한 꿈을 꾼 것 같기도. 결말은 똑같다. 엄만 죽는다. 나는 엄마를 구하지 못한다. 나는 떨어진다. 수렁으로. 육년째.


방에 돌아와 있다.


아무래도 그 사람이 옮겨 놨나 보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굳게 닫혀 있던 현관문이 어느새 열리고 나에게 환한 불빛을 쪼였던 것 같다. 언제나 그랬지만.

반전이라면 반전이 있다. 난 비록 제대로 된 자장가를 들어본 적 없을지 몰라도 창으로 새어들어오는 햇살과 함께 그 사람의 눈물을 들은 적은 여러 번 있다


나는 육년 전부터 아빠랑 둘이 산다. 이전 일들을 봤을 때 자명한 사실이지만, 입에서 단내가 날 때의 아빠와 그러지 않을 때의 아빠는 다르다. 어렸을 때는 두려웠었고, 조금 더 컸을 때는 비참하기만 했다. 아빠 앞에만 가면 쪼그라드는 내가. 센서등 형벌에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몇시간이고 얌전히 서 있었던 나 자신이.


나는 이제 아빠와 덩치가 비슷하다. 아빠는 더 이상 술을 마시고 나를 센서등 아래에 세우지 않는다. 몇 시간이고 서 있어도 불이 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주머니에서 돈을 꺼낸다. 정확히 십만 천 구백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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