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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보이후드>는 왜 과대평가되었나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4-01-08
  • 조회수 925

 ‘1년에 15분 분량을 찍’으며, 무려 12년 동안의 세상을 스크린에 담은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영화 <보이후드>는, 주인공 메이슨을 따라 그의 성장과정과 인간관계를 다루며 배우와 감독의 시간을 총망라한 추억과 기록의 산물로서 남는다. 이 영화는 개봉 이후 놀라운 프로듀싱과 제작과정, 작품성 등을 인정받고 국내 외 유수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고 다녔다. 나 또한 유수한 수상실적에 기대하며 이 영화를 보았다. 그러나 그 기대는 얼마 가지 못했다. 우선 말하자면, <보이후드>는 과대평가되었다. 이 영화는 세간의 지지만큼 좋은 영화도 아니고,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걸작도 아니다. 자기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 거린다. 

이 영화가 세간에서 받는 평가는 스필버그와 같은 것이다. 스필버그는 최초의 블록버스터를 만들며, 현대 영화산업을 구축한 세계적인 산업가(영화감독이 아니다)가 되었다. <보이후드>는 비록 스필버그만큼 산업적인 성공을 이루어내지 못했지만, 영화 프로듀싱, 또는 포로세싱(과정)에 있어서, 12년이라는 시간을 소비함으로써 세계 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다. <보이후드>의 성취는 12년동안 자본과의 사투를 벌여온 것에 있다. 투자자의 시선으로 생각해보라. 자본가들은 저명한 영화감독에게 돈을 대었지만, 정작 영화는 제작과정에만 멈춰있다. 영화가 중단되면, 잠재적인 시간동안 배우나 감독에게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 어떤 사고라도 일어난다면 이 영화는 무기한으로 연기될 수 밖에 없고, 심하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자본가들에게 그건 돈낭비고, 득보다는 실로서 가능성의 몸집을 키운다. 결국 자본이 없다면 영화는 만들어질 수 없고, 운동할 수도 없다. 이 영화를 만들며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해낸 가장 큰 성과는, 12년 동안 투자자들을 설득하고 회유하며, 결국은 영화를 끝까지 비호했다는 점이다. 또한 그 과정들, 그 시간의 연속과 인물들의 성장 과정을 영회외부의 위기들로부터 안전히 담아내었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12년은, 안전함과 자본으로부터 벗어난, 우리의 12년이다. 이 12년이 의미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제작과정이 영화의 가치가 될 수는 없다. 영화 외부요소로서 가치가 될만한 것은 오직 그 작품의 파급력 뿐이다. 독재정권의 시작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일명 ‘검찰 독재시대’에 의해 불충분한 근거들로 안타까운 희생자(이선균, 지드래곤 등)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시국 흥행하는 것처럼 말이다. 작품의 외적 요소는 시대를 가늠하고 총체적으로 파악하도록 만드는 역할만 할 뿐, 작품에 그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지는 못한다. 12년의 제작과정은 듣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도록 하지만, 그것이 영화가 표명하고자 하는 의지나 시국을 나타낼 수는 없다. 단지 사사로운 여담일 뿐이다. 관객은 영화를 보는 사람이지, 만드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보이후드>가 어떻게 좋은 영화인지 설명하지 못한다. 



 후반부 5분 시퀀스 '순간'에 대하여 말하는 메이슨 - 리처드 링클레이터, <보이후드>


그렇다면 영화 자체는 어떠한가? 

<보이후드>는 시종일관 인물만 보여준다. 매 쇼트와 컷에 담겨있는 것은 공간도, 상황도,세상도 아닌 대화를 하는 사람이다. 영화의 후반부, 메이슨이 노을을 바라보며 말하는, ‘우리가 순간을 붙잡는게 아니야. 순간이 우리를 붙잡는거지(시간 주체 -> 인물주체)’란 대사가 무슨 엄청난 명대사인 것처럼 들리는 것도 그 떄문이다. 이 영화는 인간관계에 집중하기위한 영화이며, 오로지 인물만을 탐구하려한다. 그러한 까닭에, 이 영화를 보다보면 이따금 대화형식의 영화론을 확립시킨 오즈 야스지로나, 사건보다는 인물의 심리를 담고자 했던 양덕창의 작품을 보는 듯한 감각이 일고는 하는데, 막상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들의 영화처럼 강렬하거나 진한 여운이 남지는 않는다. 오즈나 양덕창과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그 문제는 그들의 영화와 비교할 떄 더욱 가시화된다. 오즈와 양덕창은 링클레이터처럼 인물을 조망하고자 했지만, 그렇다고 결코 인물이 속해있는 장소, 또는 상황을 간과하지 않았다. 오즈는 카메라에 일본인들의 문화와 전통가옥의 양식을 완벽히 이해하고 보여주는, 일명 ‘다다미 쇼트(공간)’를 구상하여 실현했고, 곧 자신의 고유명사로 만들었다. 양덕창은 롱샷과 롱테이크(순간)로 인물을 담아내며 그들이 속한 주변을 탐구하고, 비로소 인간에게로 다가갔다. 오즈와 양덕창은 인물에 집중 했지만, 그 인물들을 이루고 있는 상황과 공간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사유하므로서 왜 인물이 중요한지를 말했다. 그들에게 순간은, <하나 그리고 둘>의 깨끗하게 치워지고 있는 예식장은 주인공에게 한바탕 놀고 간 사람들에 대한 여운을 남기고, <동경 이야기>에서 초반부 풍요롭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집이 후반부에서는 쓸쓸하기 그지없어보이는 것 처럼, 인물에게 영향을 주는 공간적/환경적 요소로 활약해왔다. 그 두 거장의 작품들에는 영향과 그 관계가 공간이라는 '시각'으로 존재하므로 추억과 현재, 인물들에 대한 사랑으로 보인다. 반면, <보이후드>는 인물에 대한 집착으로 보인다. <보이후드>는 상황이나 공간, 그 주변의 물리적인 것에 대하여 결코 설명하지 않는다. 아무 설명없이 인물만을 보여주므로서, 오히려 상황과 공간이 왜 중요한지는 설명조차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회피하며, 무시한다. 카메라는 사람만 보여준다. 최후반부, 메이슨이 ‘순간이 우리를 붙잡는게 아니야. 우리가 순간을 붙잡는거지’란 대사를 내뱉을 때야 비로소 오직 인물간의 대화와 관계만으로 직조된 이 영화가 특정한 상황과 다중플롯(논플롯이 아니다)들을 창조해내고, 스쳐갔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와 함께 결국 볼만한 것은 후반부 밖에 없다는 결론을 도출해내고만다. 이 영화는 그 마지막 말을 하기위해 2시간 40분이란 상영시간을 즐즐 끌고 마지막 5분 노을 시퀀스에서 끝낸 것이다. 그렇다고 마지막 5분 남짓의 노을 시퀀스가 2시간 40분이란 시간을 지난 것에 대한 충분한 충족감(예를 들어 여운이나 시네마틱한 기운들이랄 것들, 또는 순간에 대한 담론들)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보이후드>는 순간을 끌어들여와 인간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정작 순간에 대한 사유는 2시간 40분 동안 쓸떼없이 긴 여러 상황들과 사건, 인물 뒤에 숨어 그 질문을 요리조리 회피하며, 마지막 후반부에서야 아주 짤막하게 답을 하고 사라지는 영화다. 

하물며, 그렇담 인물에 대해서는 잘 담고 있는가? 막상 본다면 이 영화는 순간에 답을 하지 못해서 그토록 집착하게되어버린 인물조차 잘 담고 있지 못한다. 매 순간 순간 쇼트마다 인물을 비추기는 하지만, 그것은 대사를 하는 배우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생기는 감정이나 얼굴을 지닌 인물은 아니다. 그리고 배우들이 하는 대사는, ‘나는 너가 싫다’, ‘이런 일이 있었고…’,’이렇게 되었어’ 뿐이다. 인물을 일차원적으로 단순하게 그려내고, 오히려 그들로부터 하여금 상황(순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도록 하고 있다. 즉, 순간을 피해서 도망친 곳에서 인물을 쉽게 그려내고, 오히려 순간을 주도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정작 순간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순간을 ‘이야기한다’는 것과 순간을 ‘피해와서 다시’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순간을 ‘이야기한다’는 건, 그들이 상황에 대해서 대사(텍스트)로 응답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건 영화가 아니라 문학이다. 이건 영화가 될 필요가 없었다는 반증이며, 곧 12년 동안 투자자를 설득하는 고생을 굳이 할 필요 없었다는 말이다. ‘순간을 피해와서, 다시’ 순간을 다루고 있다는 건(그것도 이상한(전혀 영화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딜레마다. 여기에서 칭찬할 수 있는 건, 그 딜레마와 무조건적인 프로파간다식 인물강요를 우직하게 밀고나아갔다는 점 뿐이다.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보이후드>는, 너무 과대평가된, 모순적이고 프로파간다적인 시간낭비용 영화다. 볼 것이라고는 마지막 시퀀스와 아이들이 성장하는 외적인 거 밖에 없다. 12년이란 긴 시간 고생했을 링클레이터에게 찬사를 보내고, 그 모든 걸 버텨줬을 배우들에게도 역시 존경의 머리를 박는다(이건 진심이다). 과대평가된 <보이후드>의 링클레이터말고, 다음번에는 <비포선셋> 시리즈의 그 링클레이터를 만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나의 몰수된 2시간 40분을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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