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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sed Society and the Enemies

  • 작성자 소울(素鬱)
  • 작성일 2006-11-29
  • 조회수 456

글의 장르를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서 일단 '감상글'로 올립니다.

소설 '광장'을 읽고 분석해본 뒤, '내가 이명준이라면'이라는 주제로 다시 소설을 꾸며보았습니다.

간단하더라도 짧은 평 부탁드립니다.

이 글이 얼마나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지 개인적으로 무척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

조금 길지만 관심있게 읽어주세요 ^^

 

 

 

 

 

 

Closed Society and the Enemies

 

 

 

주인공 이명준과 소설 광장의 분석

소설 광장은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를 모두 비판한 작품이다. 광장에서 주인공 이명준은 남쪽과 북쪽의 이데올로기에 환멸을 느끼고 결국 포로수용소에서 중립국을 택한다.

그러나 중립국이라는 선택에는 주인공 이명준의 개인적 특성 또한 많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영미나 태식 같은 인물들은 어느 한 쪽의 이데올로기를 택하여 평범하게 살아간다. 은혜 또한 이데올로기에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자기만의 밀실에서 잘 살아간다. 그러나 주인공 이명준은 그렇지 못하다. 이명준은 남에서 북으로, 또 전쟁터로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곳을 찾으러 방황한다. 이것은 이명준의 개인적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자 동시에, 독특한 주인공을 통하여 당시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다.

주인공 이명준의 특징은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것이다. 주인공 이명준은 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다소 관념적이고, 현실 세계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다. 이명준의 비판적인 태도는 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현실을 비난하고 혼자 괴로워하고 자기에게 맞는 현실을 찾아 다니는 쪽이다. 소설 초반에 주인공 이명준은 처음으로 관념적 세계로부터 벗어나, 현실 세계에서 자신이 생각한 바람직한 사회를 찾아 다닌다. 이명준은 남쪽에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북쪽에 사는 아버지가 박헌영의 남노당에서 고위급 관리직을 맡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이명준 S서 경찰서에 끌려가 심문을 당하고 매를 맞는다. 학문을 공부했던 이명준은 부당하게 사람들을 학대하는 경찰관들의 모습으로부터 남쪽의 현실세계에 환멸을 느낀다. 남쪽은 보통 부정 부패한 광장뿐이고 오직 개인의 밀실만 존재하는 공간으로 해석된다. 북쪽은 이와 반대로 개인의 밀실은 없고 오직 공허한 광장뿐이라는 것이다. 이명준은 그 후 아버지를 찾아 월북을 하는데, 그 쪽 세계는 부정 부패함이 없는 대신 자유가 없고 오직 이 있는 곳이었다. 이명준은 북쪽에서 마저 실망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명준에게 있어서 남쪽과 북쪽은 모두 닫힌 공간일 뿐이다. 개인의 사적인 공간이라는 밀실과는 엄밀히 말해서 다른 개념이다. 남쪽과 북쪽 모두 서로의 이데올로기를 증오하도록 각자 국민들에게 세뇌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곳에서 당시 사회를 비판할 수 있는 자유는 없었다. 이명준은 철학과 학생이다. 그는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정신은 당시의 사회를 자유롭게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남쪽과 북쪽 모두 이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서로의 이데올로기에 관해서 만큼은 남쪽도 북쪽이나 다를 바 없이 북쪽의 마르크스 철학은 금기였고, 북한에서도 조금이라도 남쪽과 같은 발언을 하면 부르주아적 생각이라며 매도했다. 이명준에게 있어 사회란 모두 닫힌 공간에 불과했다.

이명준은 소설 초반에 삶의 의미를 현실 생활에서 직접 찾기 위해 나선다. 그는 그때 부채의 가장자리를 걷고 있었다. S서 경찰서의 일이 있고 난 후, 이명준은 남쪽에 실망한 나머지 월북한다. 이명준은 부채의 중간쯤을 걷고 있었다. 북쪽에서 이명준부르주아적 생각을 가졌단 이유로 자아비판을 한다. 이명준은 신문사의 일을 때려 치고 단순 노동직에 근무하기를 희망한다. 이명준은 부채 사북자리 가까이까지 와있었다. 공사장에서의 가벼운 사고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이명준은 은혜를 만난다. 그는 이전의 윤애에게서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낀다. 은혜는 비록 명준과의 약속을 어겼으나, 결국 전쟁터에서 둘은 만나고 둘만의 밀실에서 사랑을 나눈다. 이명준은 부채 사북자리에 서있다.

이명준은 의미 있는 삶을 찾기 위해 방황하지만 그럴수록 이명준이 갈 수 있는 길은 좁아진다. 결국 그는 부채 사북자리에까지 서게 된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그는 인도행 배에 타고 있다. 그는 인도에서의 삶을 상상한다. 그는 경비원일 수도 있고 소방관일 수도 있다. 그는 이웃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며 평화롭게 산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미 명준에게 있어 모두 비본질적인 삶이다. 더 이상 철학과의 명준이 아니다. 은혜도 사라지고 없다. 그 순간 푸른 바다가 보인다. 그곳은 명준에게 있어서 의미 있는 넓은 광장이었다. 명준은 마치 은혜와 딸을 다시 만날 것 같다. 명준은 사북자리에서 뒤로 홱- 돌아선다. 부채의 넓은 바닥이 보인다. 넓은 광장이다. 명준은 결국 물에 빠지는 방법으로 자살한다. 명준에게 있어 자살이란 의미 있는 삶의 형태였다. 소설의 구성은 명준이 자살 할 수 밖에 없도록 설정되어 있다. 갈수록 명준의 자리는 좁아지고 마침내 부채의 사북자리만 남는다. 그러나 순간 명준은 환영을 보게 되면서 바다라는 넓은 광장을 만난다. 명준은 현실 세계에 뛰어든 그 순간부터 좁아지는 길을 걸었다.

또한 명준의 죽음을 명준의 삶의 이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개인이 살아가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것은 태백산맥의 염상진처럼 이데올로기일 수 있고, 자신이 몰두하는 학문일 수도 있으며,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철학과의 이명준은 은혜를 만나기 전까지 이데올로기를 속에서 삶의 이유를 찾으려 했으나, 결국 양 쪽 모두에게 환멸을 느낀다.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명준의 삶의 이유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때 은혜를 만난다. 은혜는 이전의 윤애와는 달랐다. 명준은 은혜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느낀다. 명준의 삶의 의미가 이데올로기에서 사랑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은혜는 뱃속의 아이와 함께 전쟁터에서 죽는다. 명준에게 있어 삶의 이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배 위에서 명준은 갈매기의 모습에서 은혜와 딸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들 곁으로 가기 위해 자살한다. 명준의 삶의 이유는 끝내 사랑이었던 것이다.

소설 광장은 이렇게 끝이 났다. , 그렇다면 내가 이명준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이명준이라면..

지금부터 나는 주인공 이명준이다. 나는 남쪽에서 철학을 공부하던 학생이었다. 그 당시 남, 북은 3.8선으로 갈라져서 남쪽은 서구의 민주주의, 북쪽은 공산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남쪽의 부정 부패한 관료들과 무조건적인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에 실망하여 결국 월북했다. 그러나 북쪽도 이상적인 세계는 아니었다. 그곳에서는 언제나 이 존재했다. 이름 뿐인 민중을 위한 사회였고, 민중은 다만 높으신 동지들의 뜻에 따라 움직이면 족한 것이었다. 결국 나는 더 이상 이데올로기 같은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단순 노동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나는 은혜를 만났고, 우린 진정한 사랑을 나누었다. 나에게 있어 은혜는 나의 존재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은혜가 잠시 나를 배신하고 러시아로 간 사이, 6.25전쟁이 터지고 극적으로 나와 은혜는 전쟁터에서 만났다. 전쟁 중에 은혜와 뱃속의 딸은 죽고, 나는 혼자 살아 남아 지금 여기 판문점의 포로 수용소에 있다. 조금 뒤면 포로들은 각자 자기가 선택한 쪽으로 돌려 보내질 터였다. 나 또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서 살아야 할 것이다. 나의 일생을 건 선택이다. 프로스트 시인의 가지 않은 길(Road not taken)에서 나는 숲 속의 두 갈래 길에 서있는 것이다. 두 길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무한 발산할지도 모르는 것이기에, 이것은 내 인생을 판가름 하는 선택이다.

나는 고민한다. 나는 남쪽도 북쪽도 모두 다녀본 터였다. 그러나 두 사회 모두 나에게 있어 닫힌 공간일 뿐이었다. 남쪽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를 주장하였으나, 그 곳은 부정부패가 이미 뿌리를 내린 사회이다. 해방 이후 사상의 좌, 우에 따라 남 북이 갈라졌다. 남쪽은 서구의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우파였다. 그러나 말뿐인 민주주의다. 민주주의의 그림자만 있을 뿐 민주주의는 없었다. 이승만은 일제 시대에 우리 민족을 억압한 친일파들을 숙청하기는커녕 한민당으로 불러들여 세력을 형성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민족 통일을 주장하시는 김구와 여운형이 습격을 받아 죽게 된 것이다. 라이벌이 사라져 버렸으므로, 이승만이 지금의 실질적 남쪽의 권력자인 것이다. 결국 남쪽에서는 민족의 배신자들이 가장 고위직에 올라 앉아 부귀영화를 누리는 곳이다. 정의가 죽어버린 곳이다. 김구와 여운형이 누구에 의해 죽었겠는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하필이면 이승만의 라이벌이 갑자기 둘 씩이나 죽는 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 정의로운 두 사람은 죽고 부정 부패한 반대쪽은 더 큰 권력을 얻었다. 남쪽은 정의롭기 보다는 부정의로워야 더 살기 좋은 가치가 전도된 사회이고 매우 더러운 사회라는 것은 웬만한 지식인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 이념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공산주의에 대하여 배타적으로 곧 사상의 자유가 없는 곳이다. 민주주의는 헌법에 의해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곳이다. 그러나 남쪽에서 헌법은 저 멀리 하늘나라에서나 통하는 얘기이다. 허울만 좋은 헌법이다. 조금이라도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말을 하거나 빨갱이로 의심을 받게 되면 그 즉시 잡혀가는 사회이다. 더 웃긴 것은 이런 것들이 국가 보안법에 의해 합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48년 국가 보안법 제정 이후 공산당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모두 부역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미 사형된 사람이 수백에 달한다. 그 사람들이 과연 모두 공산당이었을지, 단순히 여당에 위협적인 정치적 인물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북쪽이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북쪽은 공허한 광장이 있을 뿐이다. 그 곳에서도 일체의 사상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다. 북쪽은 민중들을 위한 사회라는 구호를 내걸었지만, 민중들은 위대한 동지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일 뿐이었다. 북쪽의 인민들은 국가가 배정해준 직장에서 국가가 명령한 만큼의 생산량을 달성하면 되는 것이다. 공산주의란 인민들의 혁명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건만, 북쪽에서의 인민들은 모두 위대한 동지의 얌전한 인형일 뿐이었다. 조금이라도 위대한 동지의 뜻에 어긋나는 사상을 내비치면 그 즉시부르주아의 불건전한 사상을 가진 것으로 취급된다. 북한은 남한보다 더 무서운 곳이다. 그 곳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반동분자로 몰려 소리 없이 암살될 가능성이 크다. 그 곳은 마르크스주의를 내걸었지만, 진정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 군림하는 왕과 귀족이 있을 뿐이다.

철학자에게 있어 사상의 자유가 없는 곳이란 모든 자유가 없는 곳과 같다. 남쪽과 북쪽 모두 사상의 자유가 없는 곳이었고, 그것은 내가 영원한 자유가 허용된 광장에 설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립국은 어떤가? 중립국. 그 곳은 나에게 있어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곳에 불과하다.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아니다.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곳. 그 곳은 낯선 곳일 터이다. 언어를 모르니 의사소통도 되지 않을 터였고, 아는 사람도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중립국으로 간다면 분명 경비원 같은 단순 노동이나 하리라. 중립국은 분명 나의 정신적 안식처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이나, 그 곳의 이명준을 과연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단순 노동이나 하는 평범한 노동자. 그가 정녕 과거의 철학자 이명준인가.

중립국은 아니다. 중립국은 택하지 않겠다. 그 곳에서는 삶의 의미가 없다. 아무리 단순 노동직을 하더라도 한반도 내에 있겠다. 물론 내가 어느 한 쪽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아간다면 분명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이 오히려 내 삶을 의미 있게 할 것이며, 고통스럽지만 나는 더 행복할 것이다. 강요된 이데올로기에 의해 내 정신이 고통 받을 때, 그것이야말로 내 정신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아직은 철학자 이명준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또한 삶의 이유가 주체적인 사상을 가지는 것 하나일 수는 없다. 만일 내 삶의 이유가 철학과 이데올로기뿐이라면, 과거에 내가 겪었던 은혜와의 사랑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짓인가? 나는 은혜로부터 철학 못지 않은 행복을 느꼈다. 최근까지만 해도 은혜는 분명 나의 삶의 의미였다. 같이 죽어버린 내 딸까지도.

나는 다시 삶의 이유를 찾아 재기하겠다. Gone with the wind의 스칼렛이 말한 것처럼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테니까. 삶의 이유가 없는 존재란 죽어버린 존재와 같다. 중립국으로 간다면 그것은 죽는 것과 다름 없다. 그러나 대신 내가 한반도 내의 어느 한 쪽을 택한다면 나는 다시 살아나갈 것이다.

한반도의 어느 쪽을 택하느냐. 나는 지금 그 선택을 목전에 두고 있다. 북이냐 남이냐. 어느 쪽을 택하든 크게 상관이 없다. 어느 쪽이든 모두 닫힌 사회일 뿐이다. 칼 포퍼가 말했듯이 닫힌 사회는 불완전한 사회이다. 닫힌 사회는 필연적으로 이상적인 사회가 될 수 없다. 심지어 플라톤과 같은 현자(賢者)가 다스리는 독재국가라 할 지라도 닫힌 사회에서 이상적인 사회로의 발전은 있을 수 없다. 대신 열린 사회는 자유로운 비판과 토론을 통해 조금씩 개선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을 보아서는 남쪽이나 북쪽이나 다 닫힌 사회이다. 남쪽에서는 이미 친일파가 정권을 잡았고, 그 권력이 몇 대를 이어 언제쯤이나 끝날지 알 수 없다. 북쪽 또한 마찬가지이다. 북쪽의 공산주의는 닫힌 사회와 같다. , 북쪽의 공산주의가 끝나지 않는 이상 북쪽은 닫힌 사회로 남을 것이다.

내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은 남쪽일 것이다. 왜냐하면 명목뿐일지라도 열린 사회를 표방한다면 그것은 미약하지만 가능성이 있음을 뜻한다. 내가 살아 있을 동안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 후손의 누군가가 죽어버린 헌법을 끄집어내고 흩어져버린 정의를 불러 모아 혹여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 남쪽이야말로 언젠가는 열린 사회가 될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내가 묻힌 곳이 그래도 발전하는 곳이라면 더 좋겠다.

또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이지만 얼마 전에 북쪽에서 박헌영이 피살당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6.25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일성에 의해 피살 당한 것일 게다. 박헌영이 죽었다는 것은 곧 박헌영의 지휘 하에 있던 남노당 전체가 몰살된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내 아버지도 무사하시기 힘듬을 말한다. 만에 하나 북에 갔다가 잘못된다면 나까지도 죽임을 당할 수 있다.

남쪽이라고 또 얼마나 빨갱이의 아들에 대해 관대하겠느냐마는 적어도 남쪽에서는 나만의 밀실에 숨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이름을 바꾸고 살아가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전쟁을 치른 후라 많이 혼란스러운 사회이니까 그래.. 이거야..

 

 

잠시 후,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문을 열고 뚜벅뚜벅 걸어간다. 왼쪽이 북쪽 사람들이고 오른 쪽이 남쪽 사람들이다. 그 가운데 길이 하나 나 있다.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그래. 이미 결정했는걸. 떨리는 마음을 천천히 오른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남쪽 대표들은 웃으면서 아이구, 잘 선택하셨습니다. 후회하시지 않으실 겁니다.하며 반갑게 손을 내민다. 그러나 남한이 좋아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북한보다 덜 나빠서 선택한 것이고, 또 그 대표들 또한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기에 악수하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다. 그저 그런 표정으로 무뚝뚝하게 다가갔다. 왼쪽의 북한 사람들이 눈에 살기를 띄고 노려본다. 그 모습을 보니 남한을 선택한 것이 괜히 잘한 선택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이명준은 시선을 거두어 남쪽 대표들을 본다. 남쪽 대표 중 서기로 보이는 사람이 이름을 묻는다.

남한으로 가시겠습니까?

.

이름이 이명준씨 맞습니까?

죄송합니다만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이름은 박 태식이고 나이는 28살 입니다.

포로 명단에 이름이 없는 데요?

아마 어제 늦게 합류해서 그런 모양입니다.

.. 그런가요? 북한에서 오셨나 보죠?

그런 셈이죠.

 

이름: 박 태식

나이: 28

남한으로 합류 확정.

 

포로 수용소 문을 나온다. 조금 뒤면 나는 차에 실려 서울로 내려가겠지. 서울. 결국에는 다시 돌아가는구나. 삶의 의미를 찾아 다녔지만, 결국 나는 서울로 가는구나. 그러나 서울에 오래 있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삶의 의미를 찾겠다고 남한을 선택했지만, 아직은 깜깜하구나.

사람은 사회와 개인의 밀실 사이에서 살아간다. 나는 이미 사회에서 살 수 없는 몸이다. 내가 갈 수 있는 사회란 없다. 나에게 남은 것은 밀실뿐이구나. 전쟁터에서 발견한 그 굴. 그 굴과 같은 밀실뿐이구나. 이미 나와 함께 지낼 은혜는 없다.

저기서 한국병사가 다가온다. 아마 나는 이 사람들과 같이 버스에 실려 서울로 곧 돌아가겠지.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우리를 데려가는 병사가 하나일 리가 없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병사는 벌써 내 앞까지 와있다.

  잠깐 같이 좀 가주셔야겠습니다.

나는 순간 내가 이제부터는 박태식이라는 사실이 떠오르면서 두려워졌다.

S서 경찰서에서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이 새끼가 그 새끼 새끼란 말이지..

경찰의 차가운 조소 어린 웃음이 떠오른다.

차가운 철방 안으로 들어간다.

거기엔 이미 선글라스를 낀 군인 셋이 앉아 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침이 바싹바싹 마른다.

앉으시오.

 

책상 앞에 놓여진 의자가 하나뿐이다. S서 경찰서..

 

이름.

박태식입니다.

박태식..?

군인 한 명이 코웃음을 친다.

똑바로 불어. 너 같은 새끼가 어떤 새낀지 다 알고 있어.

정말입니다. 어제 밤 늦게 합류해서..

닥쳐. 어제 밤에 합류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갑자기 새로운 한 사람이 생겨났는데, 있어야 할 포로 한 명이 사라졌어. 그게 누군지 알아? 박헌영이의 시다바리 새끼의 아들 이명준이야.

아니..

숨이 턱 막힌다. 죽음의 공포가 나를 덮친다. 은혜, 은혜의 얼굴이 눈 앞에 아련하다. 은혜.. 내가 곧 네 곁으로 갈게. 그래. 철학이나 공부하던 샌님이 무슨 거짓말이겠어.

 빨갱이 우두머리 새끼의 새끼를 받아줄 것 같아? 조용이 이름 불고 지나갔으면 3개월은 살려줬을 텐데.

3개월.. 나는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나. 정녕 이 곳이 민주주의 사회란 말인가. 남한에 대한 실 같은 희망이 사라진다.

이 새끼 끌고 가.

 

.

.

.

.

.

윤애, 혹시 명준 소식 있나?

아뇨. 못 들었어요. 혹시 아버지 계시는 북으로 간 게 아닐까요?

그런가.. 그 친구 한번쯤 더 볼 줄 알았는데. 아쉽군.

 

 

 

소울(素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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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11-30
야간비행 - 생 떽쥐베리

야간 비행 - 생 떽쥐베리   시험 기간이 끝나고 삭막해진 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아름다운 서정성이 흐르는 책을 찾았다. '어린 왕자'에서 보여주었던 생 떽쥐베리의 그 순수함을 다시 찾고 싶었다. 예쁜 수채화까지 곁들여진 생 떽쥐베리의 저서, 이번에는 '야간 비행'을 읽었다.   어쩌면 단순히 마음의 평온을 찾기에 이 책의 주제는 너무 무거운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확언하지는 않지만, 자기의 신념을 피력한다. 인간의 생명은 귀중하지만, 그것은 고귀한 무언가를 위해 희생될 수도 있다고.   야간 우편 비행을 담당하는 조종사 파비앵은 폭풍우가 치는 어느 날 밤, 그만 행방불명이 된다. 파비앵의 부인은 파비앵을 담당하는 감독관 리비에르를 만나 어떠한 동정이나 위로의 말이라도 받아보려 하지만, 리비에르는 이 비극 앞에 굳게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그 날 새벽, 리비에르는 그의 조종사 하나가 실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조종사를 먼 어둠 속으로 날려보낸다. 리비에르는 생각한다. 파비앵의 미소나 그의 아름다운 부인, 그들이 함께 보내는 시간들은 매우 아름답지만, 그것들은 영원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들은 자연히 죽음이나 늙음으로 인해 파괴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희생함으로써 영구한 어떤 것을 달성할 수 있다면 마땅히 우리는 영구한 것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떠올렸다. 몇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웅장하게 대지를 버티고 서 있는 피라미드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위해 희생되었을 수많은 이집트의 노예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시간이 흐르면 응당 흙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포기해야 했던 그 행복한 시간들은 영구한 피라미드의 가치에 비해 진정으로 하잘것 없는 것들이었을까.   나는 생 떽쥐베리의 강인한 신념을 어떻게 반박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짧고 덧없는 인간 생명의 고귀함이 결코 영구한 어떤 것에 뒤지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내 감정은 그렇게 외치고 있다. 인본주의라고나 할까. 영구하고 불변하는 어떤 것은 위대한 것이지만, 짧은 인간의 삶 속에는 결코 뒤지지 않는 영원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 아름다움을 감히 다른 어떤 것을 위해 파괴하고 싶지 않을 따름이다. 내게 있어, 파비앵과 그의 부인과 우편 비행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보낼 수 있었을 시간들이 더욱 아름답고 영원한 가치인 것처럼 느껴진다.     * 제가 아이디를 여러번 바꿨습니다 ㅠㅠ 이유는 친구가 제 아이디를 알아봤기 때문이지요. 처음에 '데네브'였는데, 친구가 알아보는 바람에 '생각의 징검다리'로 바꿨습니다. 그런데 '생각의 징검다리'는 너무 길고 또 깔쌈한 맛이 없기에 만족스럽지가 않아 다시 바꿉니다. 처음의 'Deneb'로, 그냥 영어로만 바꿨습니다. 데네브는 제가 좋아하는 별입니다^^ 가장 밝으면서도 깊은 어둠 속에 자기의 빛을

  • 소울(素鬱)
  • 2006-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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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민주주의는 정치체제로서 남이건 북이건 개념이 약간 달라서 그렇지 서로 잘 사용하는 개념입니다. '남쪽은 자본주의를 표방하며 수구적이거나 보수적인 이념기반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정도의 개념으로 정리해야 할 것 같군요. 문맥상 그렇다는 말입니다.옥의 티였습니다.

    • 2006-12-07 01:35:09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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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글속에 빠져읽기를 하지 않고, 글의 안팍을 넘나들면서도 자신이 말하려는 바를 이끌어 가는 표현력이 매우 좋습니다. '열린 사회와 적들'의 개념을 '광장과 밀실'에 적용하는 점도 통합적 사고력이 잘 발달하였고, 탄탄한 인문학적 기초를 가진 학생이라는 생각이 들어 멋진 인재로 더욱 잘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생깁니다. 정진하십시오. 다만 개념파악이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군요. '남쪽은 서구의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우파였다.'라는 부분에서 '우파=민주주의'는 아닙니다.

    • 2006-12-07 01:32:21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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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광장만큼이나 길고도 긴 독후비평글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작품의 줄거리를 늘어놓는데서 그치지 않고, 여러 가지 책에서 읽은 배경지식과 연결하고, 근현대사의 상황까지 동원하여 '역사적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는 점이 매우 돋보이는 글이었습니다.

    • 2006-12-07 01:32:13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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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이명준은 시선을 거두어 남쪽 대표들을 본다 -이 부분 수정해야겠네요. 글에서 같은 설명이 중복되는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2006-11-30 19:30:23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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