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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 맨의 죽음

  • 작성자 로자르아힘
  • 작성일 2010-10-08
  • 조회수 553

 

<원작「세일즈맨의 죽음」 아서 밀러 / 번안 「옌볜빠바 - 세일즈맨의 죽음, 연변을 무대로」>


세일즈맨의 죽음


해독 


 원작을 먼저 읽고 번안작을 다음에 읽었다. 번안작을 읽어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번안이라는 말도 처음 들었다. 원작을 먼저 읽고 나서 보니까 구조가 쉽게 들어왔다. 이 이야기에서 원작과 제일 많이 다른 것은 배경이다.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원작과는 달리 번안작은 연변을 무대로 한다. 난 연변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다. 연변하면 떠오르는 것은 시골 같고, 낙후된 듯한 이미지다. 번안작에 나온 표현들이 재밌었다. 정말 연변에서 쓰는 말인지, 그렇다면 작가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다.

 내가 번안작에서 다르게 본 것은 결말이었다. 번안작에서는 원작에서 끝내 마무리 짓지 못했던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를 그려냈다. 원작에서는, 린다가 믿기지 않는다며 흐느껴 울고 배경을 집중 조명하는 것으로 끝난다. 원작을 그대로 따랐다면 번안작에서 순실이 무덤 앞에서 하는 말이 마지막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 뒤에 호준이 나온다. 호준은 순실을 부축해 안방에 데려다 놓고 아버지가 심은 꽃 한 송이가 핀 화분을 학룡의 영정 앞에 놓는다. 흐느끼던 호준이 눈물을 훔치고 그 화분에 물을 주면 어릴 때 아버지가 호준에게 울지 말고 돌진해야 한다며 격려하며 했던 말이 메아리치며 끝이 난다. 이 결말은 호준과 아버지의 갈등이 어느 정도 풀어졌음을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원작에서도 아버지는 뭔가를 심기는 심었다. 꽃은 아니었지만 당근, 완두콩 같은 것들을 환각 속을 헤메면서 말이다. 그러나 원작의 아들들은 그것을 까맣게 잊었고, 번안작에서는 이 씨앗의 뒤를 재조명했다. 하지만 나는 이 조명이 밝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학룡과 호준의 화해가 희망차기는 하지만, 결국은 원점을 도는 게 아닌가 싶었다.

 원작이든 번안작이든 여기에 나오는 가족들은 서로를 끔찍하게 생각한다. 평생을 가족을 위해 일해온 학룡도, 그런 학룡과 아들들을 뒷바라지 해온 순실도, 현재는 별 볼일 없게 커버렸지만 아들들도 싸우고 비난하기는 해도 언제나 결국엔 가족들 생각에 다시 희망을 갖는다. 하지만 이런 희망은 서로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희망으로 허황되고 과장되어 있다. 호준은 그걸 깨닫고 아버지에게 안겨 울지만, 아버지는 끝내 현실로 돌아오진 못한다. 원작에서는 윌리가 환청에 시달리고 시달리다가 나중에 아들과 싸우고 자살을 하게 되는데 비해 번안작에서 학룡은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작품 중간에서 암시하듯이 보험금을 생각하고 자살한 것으로 여겨진다. 윌리가 완전히 현실을 등지고 환각으로 떠난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면, 번안작의 학룡이 조금 더 현실적인 인간으로 느껴졌다. 결국에 학룡은 끝까지 가족 생각을 한 것이다.

 이 결말에서 부성애나 가족의 힘 같은 주제를 느낄 수는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결말을 통해서 번안작이 원작의 사건을 영원히 되풀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되풀이 정도가 아니라 '어쩔 수 없다'라는 느낌까지 들게 했다. 원작에서 린다는 윌리의 무덤 앞에서 이제 집도 있다고, 자유롭다고 말한다. 그러나 집은 있지만 그 집에 살 사람은 없고 자유롭지만 윌리는 죽었다. 다시 번안작으로 돌아가서, 학룡은 죽었고 학룡의 메아리가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데, 학룡이 '발등으로 힘껏 걷어차야 한다. 찰 거면 한 100미터는 차야지, 그럼 한번 공을 받았으면 절대 뺐기면 안 된다. 무조건 골문을 보고 돌진하는 거야. 걸려 넘어져서 바닥에 뒹굴어도 절대 울어서는 안된다.' 고 했던 것처럼 기회를 잡았으면 앞만 보고 돌진하면 되는 걸까? 그렇다면 윌리나 학룡은 공을 잡았을 때 골대를 향해 돌진하지 않았던 걸까? 내가 궁금한 건 돌진이나 걸려 넘어지는 일이나, 절대 울어서는 안되는 일 같은 게 아니다. 학룡이 말하는 공이라는 것은 크게 성공할 수 있는 기회, 부, 명예라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골대는 어디에 있나?

 학룡의 불륜현장을 보고 호준은 축구화를 찢어버리고 축구를 그만둔다. 학룡은 학창시절 잘 나가던 호준이 왜 갑자기 삐뚤어졌는지 친구인 영수에게 물었을 때 영수는 그 때 일을 회상해내며 그 때 호준은 한국에 다녀온 뒤 인생을 단념한 것 같다고 말한다. 세일즈맨으로 성공한 아버지를 두었다고 믿었고, 그런 아버지를 좋아하고 존경했던 호준이 서울에 와서 보게 된 것은 아버지 방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낯선 여자였다. 그 때 호준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과 함께 골을 넣어야 할 골대가 통째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을까.

 학룡은 왜 서울에서 바람을 피웠을까? 원작에서 윌리는 너무 외로웠다고 말한다. 학룡도 다르지 않다. 돈을 벌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한다고 해도 외로운 것이다. 이 외로움은 학룡만 느끼는 게 아니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추구하고 이뤄내기를 갈망한다. 어떠한 사회 구조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낸다. 예전에 눈병을 낫게 해준 태흥에게 돈을 빌리러 간 학룡은 엄청난 무시를 당한다. 그 이야기를 친구인 충국에게 하자 충국은 은혜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팔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아무 쓸모가 없다고. 세일즈맨은 모든 것을 파는 사람이다. 그래서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은혜라던지 옛 정이라던지 하는 것을 알아줘야 할 이유가 없다고 충복은 말한다. 돈이 있으면 모두들 좋아하는 세상. 이런 세상에서 외로움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닐까. 번안작의 결말을 희망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죽음이 단지 윌리의 죽음, 학룡의 죽음은 아니라는 것, 이제 단순히 울음을 참고 골을 몰며 돌진한다 해도 멋지게 슛 한 번 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데 있다. 그러니 나는 어쩐지 학룡의 메아리가 희망차다기 보다 구슬프게 느껴진다.

 이 작품이 1948년에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린다가 윌리의 무덤 앞에서 외치는 자유가 죽음도 팔아서 돈이 될 수 있는 지금 시대까지 와닿는 것은 번안작의 결말처럼 우리가 골대 없이 돌진하고 있다는 걸 알려준다. 2010년에 와서 세일즈 맨이 마지막으로 팔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이었다. 원작에서 찰리 아저씨는 '세일즈맨은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하늘에서 내려와 미소 짓는 사람이야. 사람들이 그 미소에 답하지 않으면, 그게 끝이지.' 라고 말했다. 세일즈 맨이 죽었다. 우리는 세일즈 맨이 마지막으로 팔게 된 것에 무엇으로 답해야 할까.


로자르아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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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원작과 번안작을 엮어서 얘기를 풀어냈군요. 이럴 경우 번안작의 인물 관계 같은 걸 앞에 좀 정리를 해 주고 이야기를 진행하면 훨씬 이해가 쉽겠지요. 그리고 '정말 연변에서 쓰는 말인지, 그렇다면 작가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다. ' 같은 표현은 안 쓰는 게 좋아요.

    • 2010-10-13 13:18:34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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