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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 - 이창동> 시

  • 작성자 로자르아힘
  • 작성일 2010-10-08
  • 조회수 734

 

<영화 「시」 -  이창동>



해독


 영화 <시>를 보고 감상문을 쓰는 게 조금 힘들었다. 평소에 시에 대한 내 막연한 생각과 고민이 영화 <시>를 보면서 떠오르는데 무엇부터 말해야 할 지 모르겠기 때문이었다. 내가 시를 쓰기 때문인지 아니면 영화에 나오는 일들을 비슷하게 겪었기 때문인지 아무 것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에 대해 쓰려고 하면 생각이 경직되곤 했다. 나침반 없이 망망대해에 있는 느낌, 사막 한 가운데에 있는 느낌이 지금 이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영화 <시>는 미자가 시를 배우게 되면서 생기는 일들을 보여준다. 손자가 집단 성폭행에 연루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미자는 회장님과의 관계를 이유로 돈을 받아 위자료를 마련한다. 미자는 단어를 하나씩 잊어먹게 되는데, 마지막으로는 죽은 소녀의 이름을 붙인 '아녜스의 노래'를 쓰고 사라진다.

 보는 내내 느꼈던 것은 어떤 불안감이었다. 굉장히 일상적이고 특이할 것 없는 장면인데도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사람을 불편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점이 있었다. 보고 나서는 이야기 구성이 탄탄하다고 느꼈다. 영화에 나오는 장면 어느 하나도 필요 없는 게 없었고 의미 없는 게 없다. 이런 치밀한 구성이 별 것 아닌 장면에도 보는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에서 시를 쓰고 있지만 사실 시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 내가 왜 시를 쓰고 싶어하는지도 잘 모른다. 미자가 시창작 강의에서 처음 물었던 질문들을 나도 똑같이 가지고 있다. 미자처럼 시를 한 번도 써보지 않은 것은 아닌데 시를 쓸 때는 처음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과학이나 사회학 같은 경우는 역사가 있고 퇴적물이 있지만 예술은 그렇지 않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다. 어제 좋은 글을 썼다고 해서 오늘은 그것보다 더 나은 글을 쓸거란 보장이 없다. 그 말을 시를 쓸 때면 느끼곤 한다. 그렇기에 나는 시 외의 것으로 시를 말 할 수가 없다. 마치 모든 단어들을 잊어버린 것처럼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래서 누가 내게 시가 왜 좋아? 시를 왜 써? 하고 물어보면 그 느낌은 분명히 있는데 대체 어떤 말로 표현해야 좋을지 몰라했다. 표현한다고 해도 막상 뱉어내고 나면 허물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영화 <시>를 보고서 바로 글을 쓰지 못하고 묵혀야 했던 이유는 할 말이 없었다기 보다도 어떻게 이 느낌을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미자는 왜 갑자기 시를 쓰고 싶어 했을까? 나 같은 경우에는 시를 시작한 건 처음부터 쓰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자의가 아니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 1학년에는 시와 소설을 둘 다 배워야 했기 때문에 써보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2학년 때 전공을 시로 정했다. 지금도 전공을 정했던 날을 기억한다. 오대산 월정사로 가는 버스 안이었고, 초겨울이었다. 전공을 뭘로 선택할 거라냐는 문자에 나는 잠결에 시요. 라고 보냈다. 왜 시였을까. 시는 문학을 공부한다는 내게도 거림감 있는 위치에 있었다. 시에 대한 느낌은 대부분 그런 것 같다. 영화에서 어느 시인이 꼬집은 대로 이제 시를 쓰지도 읽지도 않는 시대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가 친근할 리가 없다. 게다가 사람들은 시에 대해서는 뭔가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 환상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시를 써도 읽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건, 약속한 장소에 약속한 사람이 오지 않는 것처럼 맥 빠지고 슬픈 일이다.

 미자는 시를 쓰기 위해서 강의에서 들은 내용을 모두 실천한다. 나무를 느껴보려고도 하고, 생각나는 것들을 메모한다. 하지만 시상은 잘 잡히지 않는다. 시창작 강의에서 시는 아름다운 것을 쓰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장면에서 나는 반신반의 했었다. 미자가 시 낭송회에서 경찰이 시를 모독하려고 한다는 말도 이해가지 않았다. 시를 숭고하고 성스럽게 만들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좋은 시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좋은 시와 잘쓴 시의 차이도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시를 무엇이라고 말했을 때 언제나 그 무엇만으로는 시를 설명할 수 없다고 느꼈다. 더럽고 야한 걸 쓰면 시가 될 수 없는 걸까? 하지만 세상에는 음담패설만으로 이루어진 시도 있고 욕으로 쓰인 시도 있다. 물론 재료의 차이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재료를 미화시키고 승화시키려는 게 더 음흉하다. 미자가 시의 모독에 대해서 말했을 때 나는 미자가 시를 대하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내가 생각할 때 시는 충분히 모독할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했다. 어느 곳에나 있을 수 있는 게 내가 느끼는 시와 가까웠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운율이 없어도 되는 시가 있고, 산문도 운문도 아닌 전혀 새로운 형식으로 날뛰는 시도 많다. 어디까지를 시라고 봐야 하는지 기준이 없다는 건 처음에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이것도 시가 되고 저것도 시가 되고 세상에 시 아닌 게 없다고 선생님은 날 가르쳤지만 그럴수록 나는 내 시가 망나니가 되는 건 아닌가 걱정을 했었다.

 나는 시 중에서 감상적인 시들을 좋아하지 않는데, 예를 들자면 영화 <시>에서 미자가 살구를 느끼는 감흥이 그랬다. 살구에게 어떤 의지를 본 것은 좋았지만 그런 식의 시작법이 많기 때문인지 몰라도 거부감이 들었다. 살구는 그냥 살구대로 보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살구에게 느끼는 감정에서 힘을 빼 그게 자기 것이라는 걸 확실히 아는 게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살구에 자기 자신을 빙의 시키는 것과 다름이 없는데 이런 식의 시쓰기는 나중에 가면 어떤 사물을 보든 그것에서 자기 자신을 추출해내려 하게 되고, 똑같은 형식으로 글이 나오게 된다. 그러니까 사물과 쓰는 사람이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어느 쪽의 감정에 먹혀버린다.

주변 친구들이 다 글을 쓰기 때문인지 어떤 이야기를 들으면 '야, 그거 진짜 시다.' 라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렇게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시적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 하지만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말하는 시인은 있어도, 시가 뭔지에 대해 말하는 시인은  없었다. 시가 뭐다 라고 말해버리면 시는 바로 시의 감옥이 되어버린다. 그것 밖에 쓸 수 없게 된다. 시를 쓸 때 시를 쓰려고 하면 절대 한 글자도 안써지는 경험을 많이 한다. 처음에 미자가 시를 쓸 수 없었던 것도, 강의의 마지막 날 시를 써온 사람이 미자 밖에 없었던 것도 그 어떤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에 매달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시를 쓰지 않을 때는 그런 생각을 가장 많이 했다. 왜 시를 써야 할까. 시가 뭘 할 수 있을까. 이 세상 사람들은 시를 쓰지 않아도 읽지 않아도 다 잘 살아갈 수 있다. 가까이 우리 엄마만 해도 고등학교 졸업 이후 시를 읽어본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나는 가끔씩 시를 쓰는게 혼자 굴을 파는 일처럼 외로워진다. 그럼에도 시를 쓰는 이유는 시를 쓸 때에만 있다. 시를 쓰기 시작하면 나와 전혀 상관없는 것만 같던 문장이 나로 부터 튀어나오는데, 그 때에는 내가 시를 쓰는 것인지 시가 나를 쓰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시의 울림이 큰 까닭은 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버리는데 있다. 미자는 왜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녜스에 대해, 아녜스가 되어 썼을까. 미자가 느낀 것은 아녜스의 마음이었던 것일까. <아녜스의 노래>를 들으면서 이 시가 미자가 쓴 시도 아니고, 아녜스가 쓴 시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자가 <아녜스의 노래>를 썼지만 쓰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오히려 이 시를 쓰는 동안에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그저 만난 것 같다.

 영화 <시>에서 결론이 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시를 쓰고 나서 미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병은 악화된 것인지, 손자는 경찰서에 가 어떻게 되었는지, 미자가 쓴 시는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내가 궁금한 건 아무 것도 결론지어지지 않고 끝났다. 모르겠다. 이 모든 일들의 결말에 대해서 난 결국 잘 모르겠다. 조금씩 단어를 잃기 시작한 미자는 어떻게 될까? 장미를 장미라고 부르지 않아도 그 향기는 여전하다는 말처럼 미자에게서 말들이 하나씩 잊혀지면 그 어떤 '느낌'만 남을까? 영화 <시>를 보고 내가 느낀 것, <아녜스의 노래>를 듣고 내가 느끼는 것. 이 느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 말들은 다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감각들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 맡에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이란 구절이 제일 좋았다. 시는 피부와 비슷하다. 당신이 나를 만졌을 때 왜 따뜻한지 혹은 차가운지. 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누구는 설레하고 왜 누구는 아파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없지만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는 말들의 아주 얇은 마음 같다.

로자르아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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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읽었어요. 그런데 영화 전체 맥락 중에서 시에 대한 부분만 언급을 하니까 전혀 다른 작품처럼 느껴지는군요. 영화 '시'에 대한 감상이라기보다 자신이 생각하는 '시론'에 더 가까운 글로 여겨지기도 해요. 아이들의 집단 성폭행과 어른들의 대응, 미자의 갈등과 대응 같은 중요한 줄기를 빼고 시만으로 접근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 2010-10-13 13:41:19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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