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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안톤 체홉> 박제

  • 작성자 로자르아힘
  • 작성일 2010-12-20
  • 조회수 746

 

<「갈매기」안톤 체홉>

 

 

 

박제

 

                   로자르아힘

 

 

 

 

 

 이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모두 사랑을 한다. 그것도 서로 사랑을 하는 게 아니라 일방적인 짝사랑이거나, 이루어졌다해도 진심이 아니거나(마샤와 메드베젠꼬) 시간이 지나 변심한다.(니나와 꼰스딴찐, 니나와 뜨리고린) 꼰스딴찐의 연극이 시작되는 자리에서 모든 등장인물이 모인다. 연극은 꼰스딴찐의 엄마인 이리나의 비판으로 올려지자 마자 막을 내리게 되고, 꼰스딴찐의 연인이자 연극 배우인 니나는 이 날 만난 유명한 소설가 뜨리고린을 사랑하게 된다. 연극의 실패와 니나의 변심으로 꼰스딴찐은 점점 피폐해지고, 어느 날 니나 앞에 총으로 쏴 죽인 갈매기를 보여주며 자신의 모습이 갈매기와 같아질 거라 이야기 한다. 니나는 결국 뜨리고린과 사랑의 도피를 하지만 뜨리고린은 변심한다. 재밌는 건, 꼰스딴찐이 갈매기를 통해 자신의 자살을 예고한 것처럼 뜨리고린 또한 이미 니나에게 죽은 갈매기처럼 어느 소녀를 파멸로 몰아가는 이야기를 이미 들려줬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 희곡에서는 단 한 사람이 갈매기가 아니라 모두가 서로가 서로의 갈매기다. 갈매기는 호수를 떠나지 못하는데, 동시에 이 호수는 어느 한 군데 정착할 수 있는 호수가 아니기 때문에 갈매기들은 계속해서 떠돌게 된다.

 이 희곡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거의가 예술가거나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들이다. 예술가는 신경증에 걸린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말을 증언하듯 이곳에 나온 사람들의 사랑은 굉장히 예민하다. 1막에서 의사 도른이 '모두들 왜 이리 신경이 예민할까! 정말 예민해!' 라고 말한다, 도른이라는 캐릭터는 등장인물 중에서 유일하게 예민하지 않은 편이다. 꼰스딴찐의 어머니인 이리나를 사랑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뜨리고린에게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리나 곁에서 의사로서 친구로서 머문다. 니나의 마음을 알고 뜨리고린에게 불 같이 결투를 신청한 꼰스딴찐과 확연히 비교된다. 마지막에 꼰스딴찐이 자살하자 도른은 침착하게 그의 죽음을 처리 한다. 신경이 예민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불행을 약속한다. 그리고 이들은 늘 그 불행을 기점으로 사랑에 빠진다. 예를 들어 니나는 끝까지 뜨리고린을 사랑했으면서 마을을 떠나기 전 꼰스딴찐을 찾아온다. 2년 간 사랑해 온 그에게 아직도 뜨리고린을 사랑한다고 이야기 한다. 만약 니나가 도른과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면 조용히 마을을 떠나지 않았을까? 꼰스딴찐이 2년은 사실 니니가 그에게 돌아오기를 기다린 나날들이 아니다. 니나의 방문은 총성과 같은 것이었다. 꼰스딴찐은 니나가 떠난 이후로 그녀가 돌아오는 날을 자신의 최후로 정하고 기다린 것 같았다. 니나 또한 그를 일부러 자살로 몰고 가기 위해서 그를 찾아 간 것이 아니라 그녀 앞에 죽은 갈매기가 놓아졌을 때 이미 약속 되어 있던 것이었다. 그들의 불행은 맞물려 있다. 이런 점은 다름 아닌 뜨리고린이 살아가는 방식과 일치한다. 뜨리고린은 니나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그래서 나는 어디인가에 있는 누군가에게 줄 꿀을 만들기 위해, 가장 좋은 꽃가루를 모으고, 꽃잎을 뜯고, 그 뿌리를 짓밟는 것 같이 내가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파멸시킨다고 느낍니다.'라고 말한다. 즉 어떠한 좋은 것을 얻기 위해 그것을 추구하다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뿌리를 밟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들은 모두 사랑을 하지만 그 사랑은 상대방과 자신을 갉아 먹는다.

 이 희곡은 상당부분 예술에 대한, 특히 문학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여기서는 낡은 형식과 새로운 형식이 대립한다. 이리나는 낡은 형식, 꼰스딴찐은 새로운 형식을 대변한다. 이 모자 관계가 갈등으로 얼룩진 것처럼 형식에 대한 싸움도 끊임없이 일어난다. 3막에서 마샤는 이 충돌이 질투 때문이라고 말한다. 마샤는 꼰스딴찐을 짝사랑하는데, 마샤의 답변에는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마샤 뿐 아니라 이리나, 꼰스딴찐, 니나, 뜨리고린 등 예술에 대한 견해는 이들이 사는 방식과 일치한다. 니나가 꼰스딴찐을 떠나기 전에 한 말. "중요한 것은 명예도, 광채도 아니고, 제가 꿈꾸었던 것도 아니며, 참을 줄 아는 능력이라는 사실을요." 니나는 어디서 이런 깨달음을 얻었을까? 바로 그녀가 이루지 못한 사랑에서다. 뜨리고린을 사랑함에도 그를 찾지 않고 마을을 떠나는 그녀의 태도에서 "참을 줄 아는 능력"이라는 건 그녀가 예술을 하는 방법임과 동시에 사랑을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꼰스딴찐은 자신의 길도, 사명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자신의 작품을 연기해 주던 니나가 아마 영감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니나가 떠난 뒤에 그가 자살하는 건 그가 더 이상 예술을 할 수 없다는 것과 같고 이것은 그에게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사형 선고다.

 마지막에 꼰스딴찐이 죽은 갈매기를 뜨리고린이 박제를 부탁했었다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정작 뜨리고린 자신은 그런 일을 부탁했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박제된 갈매기. 하지만 나 또한 니나처럼 갈매기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꼰스딴찐이 처음 갈매기를 죽여서 니나에게 보여주었을 때 니나는 그가 무슨 의도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니나는 자신이 너무 단순하기 때문이라고 꼰스딴찐에게 말했지만 꼰스딴찐은 니나에게 여기서 이해해야 할 게 뭐가 있냐고 되묻는다. 꼰스딴찐이 니나의 사랑이 변했다는 현실을 이해할 수 밖에 없던 상황과 다르게 니나는 그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꼰스딴찐이 죽고 남겨진 갈매기가 전하는 건 이 엇갈린 마음이 아닐까. 니나가 떠나고 호수를 완전히 잃은 꼰스딴찐의 죽음을 뜨리고린은 갈매기를 통해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에 박제를 부탁했는지도 모른다.

 이 희곡의 비극은 꼰스딴찐의 자살이 아니다. 뜨리고린이 갈매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독자가 뜨리고린의 기억을 되살려, 박제한 갈매기를 애써 이해하려고 노력해야만 할 때에 이 희곡의 비극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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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잘 읽었어요. 글을 읽으면서 제목이 좀 헷갈렸어요. ' 박제'라고 했을 때 제목을 무엇으로 읽어야 할지. 본문을 열어도 비슷한 상황이더군요. 자신이 쓰고자 하는 내용에 맞게 제목을 붙이고, 작은 제목으로 '갈매기을 읽고' 정도로만 해도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지 금방 알아챌 수가 있어요. 그리고 쓰려고 하는 글의 주제를 선명하게 할 필요가 있어요. 읽은 책의 주제도 선명하게 파악해야겠지만 자신이 무엇을 표현하려고 하는가 하는 점이 몹시 중요하지요.

    • 2010-12-24 15:51:47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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