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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프> “나와 너와 세상을 살리는 길”

  • 작성자 희희희
  • 작성일 2012-02-29
  • 조회수 939

 

<헬프> “나와 너와 세상을 살리는 길”



“그래요. 공론화하는 용기가 자신과 세상을 살리죠.”

어느 평론가의 한줄평이었다. 이 문장 하나가 내 마음을 툭 쳤다. 나의 경험담과 생각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소통해나가는 것. 그것을 향한 용기가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 또한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인식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것. 그것이 그렇게 중요함을 알면서도, 우리는 자주 벽에 부딪히지 않는가. 그렇게 가르친 이들이, 그 벽이 되어 우리를 가로막지 않는가. 그 분노 때문에 이 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다. 궁금했다. 세월은 40년이 지났고, 또 태평양을 건너야 도달할 수 있는 저 먼 나라에서의 이야기였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넓고 복잡다단할 뿐만 아니라 여전히 불합리와 부조리와 불의가 끊이질 않는다는 점에서 시대와 환경이 다르다고 하여 이 영화를 보지 않을 이유 또한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배경은 1960년대 미국 미시시피 잭슨이다. “어떤 병을 옮기지 몰라” 주인 식구와 흑인 가정부 간 화장실을 따로 설치하는, 이른바 ‘따로 하되, 평등하게’라는 교묘한 논리가 대부분의 백인들에게 호응을 얻던 시대.

한여름 밤의 토네이도 앞에선 피부색도 상관없이 그냥 다 쓸려가 죽고 마는데, 그럼에도 산 사람들은 여전히 유색인을 차별하고 ‘더럽다’고 여기는 게 일상이던 시대였다.


“그 어떠한 백인 간호사도 흑인 남자의 병동에서 근무할 수 없다.”

“백인 학교와 유색인 학교 간의 책 교환은 금지된다. 처음 사용한 인종이 그 책을 계속 사용해야만 한다.”

“유색인 남자 이발사는 백인 여성을 접대할 수 없다.”

“누구든지 문서의 인쇄 및 출간, 배포를 통해 백인과 흑인 간의 화해와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은 징역형에 처한다.”


이것이 그 시대의 ‘법’이었다.

그리고 그 법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공평하기까지 했던 시대였다.


‘에이블린(바이올라 데이비스)’은 1960년대 미국에서 흑인 여성으로 살아가는 비애와 고통을 간직한 인물이다. 백인 주인의 집에서 가사와 아이 돌보는 일을 맡으며 몇 푼 안 되는 임금을 받고 가난한 삶을 연명해가는 가정부. 그 시기의 다른 흑인 가정부들과 똑같을 뿐이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주인 식구의 친구인 기자 ‘스키터(엠마 스톤)’가 찾아와 흑인 가정부로서의 삶을 이야기해 줄 수 없겠느냐 묻는다. 흑인이기 때문에 외면 받고 무시당했던 일들과 여러 차별들을 기록하여 책으로 내고 싶다며. 에이블린은 망설인다. 백인과 흑인이 대로변에서 대화를 하는 것도 고운 시선으로 볼 수 없는 사회, 흑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백인이 차를 타고 들어서는 것도 위험한 사회다. 차별을 당하는 것보다, 차별을 세상에 얘기함으로써 자신이 잃게 될 것들이 있음을 아는 것이 더 무섭고 견디기 힘든 것이다. 그것이 현실인 것이다.


그 시대 백인들에게 있어서 흑인 가정부란, 일도 음식도 꽤 잘해서 편하지만, 마음에 안 들 때는 언제고 당장 내쫓아낼 수 있는 존재 비슷한 것이다.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사회 기저에 권력관계가 수직적으로 놓여 있기에, 백인은 언제나 흑인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사회 기부를 실천하고 아프리카 아이들을 돕는 등의 자선행사를 가지면서도, 정작 자신의 집에서 모든 궂은일을 도맡아 행하는 이에게는 생계비도 안 되는 임금을 주며 괴롭히는 위선적 행태 또한 일상적으로 배어있다. 그리하여 유색인들은 웬만큼 두둑한 배짱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백인들의 그 경멸과 멸시를 내면화하거나 감내하는 것밖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다. 아무리 기분이 나쁘다 하여도 ‘싸우는 것’은 절대 금지다. 대로변에서 백인과 흑인이 대화하는 모습조차 곱게 보이지 않는 사회에서 ‘싸움’이 일어난다니. 그건 자승자박의 덫에 걸리는 것과 다름없는 재앙이다. 그렇기에 도둑으로 내몰려 경찰들에게 붙잡혀가는 다른 가정부 친구를 향해 “싸우지 마, 싸워선 안 돼(Don't Fight)”를 연신 외치는 에이블린의 모습이, 현실의 벽 앞으로 끌려가는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해줘야만 하는 가장 필요한 말이라는 사실에 안타까움과 아픔이 눈앞을 가리게 된다. 불의 앞임에도 불구하고, 더 큰 불이익과 손실을 당하기 전에 그저 싸우지 않는 것이 최선임을 몸소 알고 견뎌야 하는 생(生)이라니. 이 얼마나 가슴 아픈 현실인가.


영화는 용기를 내어 자신들이 당했던 수모와 차별을 하나씩 하나씩 이야기해 나가는 에이블린과 그녀의 흑인 친구들처럼, 그들만의 이야기를 차분하면서도 조리 있게 배치하여 풀어나간다. 146분이라는 비교적 긴 러닝타임 속에서 속을 꽉꽉 채워 내용이 알찰 뿐만 아니라 지루할 틈 없이 유머러스하게, 그러나 또 긴박하게 이야기를 밀고 당기는 힘이 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장점 중 하나는, 배우들의 연기다. 주인공인 바이올라 데이비스는 몇 년 전 <다우트>에서 모두가 인정할 만한 ‘짧고 굵은’ 연기를 선보이며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던 위상을 다시금 느끼도록 한다. 그녀의 연기를 가장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던 부분은, 흑인 총살 사건으로 인해 유색인이라는 이유로 버스에서 급작스럽게 내리라는 말을 들은 후, 총성과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를 헤쳐 집으로 종종걸음을 하다 겁에 질려 줄행랑을 치는 장면이었다. 그 불안과 떨림을 단지 표정뿐만이 아니라 걸음걸이로도 표현해내는 능력에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이올라 데이비스보다도 더 나를 놀라게 한 건 젊은 두 여배우였다. 첫 번째로, 엉뚱하고 순진한 매력의 소유자이면서 동시에 흑인 가정부 ‘미니(옥타비아 스펜서)’를 그 누구보다도 동등하게 대우하고 아끼는 여인 ‘실리아’ 역을 맡은 제시카 차스테인. 그녀는 전작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 보였던 온화하며 부드러운 엄마상과는 180도 다른 푼수때기로서의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해내보인 점에서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말투와 억양, 심지어 목소리까지 눈에 띄도록 큰 변화를 보여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리고 두 번째로, 지고는 못사는 ‘못된 년’ 연기로 극중 가장 얄미운 캐릭터를 자처하는 ‘힐리’ 역의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 <50/50>에서 보였던 ‘미안하지만 못된 년’ 연기에 이어 ‘진정한 못된 년’으로 변신한 그녀는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된 못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 외에도 올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옥타비아 스펜서를 비롯하여 엠마 스톤, 씨씨 스페이식, 앨리슨 제니, 언자누 엘리스와 같은 조연들도 극에 대한 몰입에 큰 도움이 된 좋은 배우들이다. 그들 개개인이 갖고 있는 역량 또한 훌륭하지만, 함께 맞물려가며 풀어나가는 호흡도 대단하여 작년에 나온 영화들 중 앙상블에 있어서는 손가락에 꼽힐 만큼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내 마음을 툭 친 어느 평론가의 한줄평을 떠올려본다. 그래요. 공론화하는 용기가 자신과 세상을 살리죠. 그렇다. ‘살리는 것’이다. ‘바꾸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삶’이 간절한 것임을 알고, 그것을 구체화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40년 전 미국에서 스키터와 에이블린을 비롯한 여인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공론화 한 것처럼, 현재 우리 사회에서 공론화 할 수 있는 사안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작년 12월, 많은 인권운동가와 청소년들은 학교에서의 민주주의를 외쳤다. 9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UN아동권리위원회는 한국 정부에게 한국의 교육이 개선돼야 할 점이 많다고 지적해왔지만 국내 공교육의 실질적인 변화는 거의 없었다. 학생인권조례의 성사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반대세력은 ‘동성애와 임신, 출산을 조장하는 학생인권조례’라며 사안을 지엽적으로 바라보며 논점을 흐렸다.


이러한 문제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시선으로까지도 이어진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대체 무슨 문제가 된다는 것일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어느 누가 ‘병’이라고 진단할 수 있으리.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동성애는 죄’라고 주장한다지만, 모태신앙으로 자라온 나로서는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 오히려 21세기에 예수님께서 살아계셨다면, 그래도 그분은 내가 LGBT든 아니든 날 사랑해주셨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 자체가 사랑인 분이시니까.


왜 우리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국인을 비하할 때 그토록 불을 내지르면서, 정작 ‘일본 원숭이’, ‘짱깨’, ‘오랑캐’ 등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것일까? 왜 흑인과 아시아인을 배격하는 백인들을 비난하면서 속으로는 일본인도, 중국인도, 대만인도, 필리핀인도, 방글라데시인도, 베트남인도, 러시아인도 다 차별하는 걸까?


왜 우리는 미국이나 캐나다와 같은 국가들에 시민권이 있는 남자들에게까지도 군필을 요구하는 걸까? 비판을 하려면 전쟁과 살인을 목적으로 하는 곳에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등급이 매겨진 채로 반드시 가야만 하는 군대와 그 정책을 비판하는 게 더 맞지 않을까? 굳이 갈 필요도 없고 또 가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그 의무를 요구하는 것은 군대에 대한 일종의 거대한 스톡홀름 증후군일까? 다 가는데 왜 너만 안 가냐는 ‘나만 당할 수 없어!’의 심리일까?

갈 필요가 없는 자들에게까지도 돌팔매질이 어마어마한데,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에게는 더더욱 가혹할 수밖에. 누구나 양심의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불의에 반대하는 것에 왜 사람들은 ‘아주 잘난 양심’이라며 비꼬는 것일까?


…….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이렇게 많은 문제가 존재한다. 그럼 우리는 이 문제들을 다 ‘공론화’ 해야 할까? 그렇게 하기까지, 그리고 그 문제들에 대한 시선이 변하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혹시나 남들과 다른 생각을 갖고 주장한다는 이유만으로 날 욕하고 도외시하는 건 아닐까?


그러나 시간과 세월을 걱정하는 것보다도, 타인의 시선을 걱정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아픈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들이 살면, 세상도 산다. 그 사람들이 살아야, 세상도 살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언급하지 않은-그리고 아직 내가 모르는- 많은 문제들까지도 분명 공론화 되고 사람들에 입에서 자주 회자 되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에서 에이블린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너는 착하고, 똑똑하고, 소중한 사람이야(You is kind, You is smart, You is important.)” 우리는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이런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가슴 속 깊이, 사랑으로, 진짜 마음으로.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들 또한 “착하고, 똑똑하고, 소중한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조금 더 살만하지 않을까. 내가 그 말을 해줬을 때 네가 좀 더 살만 했으니. 그렇다면 나와 너는, 그리고 이 세상은 좀 더 살만해지지 않을까.


희희희
희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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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희희
  • 2012-03-25
나의 길을 걷기 위해서. <현실의 대한민국 학교를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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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희희
  • 2012-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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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어른들 말씀 들어보면 소위 꼴통이던 놈들이 군대 갔다 와서 '철 들'거나 좋은 방향으로 바뀌는 사례도 많다고 하니 긍정적인 부분도 분명 있는 것 같습니다.

    • 2012-02-29 08: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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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병역 같은 경우엔 대한민국의 물질적-정신적 수준을 고려했을 때 징병제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해요. 직업군인으로 하기엔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않고, 대부분의 대한민국 남성들이 군대를 가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가는 상태인데 '여기서 가기 싫은 사람은 안 와도 돼'라고 단언해버리면 군대가 사라지는 건 시간문제겠죠. 통일 같은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됐을 때 상황이 조금 나아질 거라 생각됩니다.

    • 2012-02-29 08:4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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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어떤 만화에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제가 계속해서 강해져야 하는 이유는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인간이기에 진정한 평화가 이룩되기 전까지 강력한 힘으로-그것을 악을 추종하는 데 악용할 게 아니라- 정의를 수호하는 데 쓴다면 그 힘 자체를 악하다고 말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 2012-02-29 08:4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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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에 세상 사람들 모두가 평화를 진정으로 원하게 돼 전 세계의 군대가 해체되고, 무기가 폐기된다면 '군인'도 필요 없어질 겁니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에 비춰볼 때 불가능하죠. 이해 관계에 따른 강대국의 약소국 침략, 내전, 종교전쟁 등 전쟁은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군대가 공중분해된다면 그 나라는 한 마디로 무방비 상태가 될 겁니다.

    • 2012-02-29 08:3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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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희희 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군'문제에 대해선 저는 조금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예전엔 어떤 EBS 강사의 말처럼 '사람 죽이는 법'을 배우는 곳, 그러니까 군대는 전쟁과 살육을 자행하는 인간병기를 양산해내는 곳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인 부분에 대해 좀 더 알게 되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 2012-02-29 08: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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