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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라는 타투 - 은반지 / 권여선

  • 작성자 조셉 고든 레빗
  • 작성일 2014-01-27
  • 조회수 1,159

1.

 

사물과 현상에 있어서도 정의내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순조롭고 유려하게 흘러가는 논리와 치밀한 관찰 끝에 얻은 결과에 따라 사물과 모양을 지각하고 그 뜻을 규정해보지만, 이내 외관 속에 머물렀던 본질이 비어져 나와 막힘없어보였던 당연한 이치를 부정하는 순간이 더러 있기에, 어떤것에 정의내린다는 것은 무척이나 까다롭고 복잡한 일임이 명백하다. 서로간의 관계에 정의 내리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나와 상대방을 지탱해주었던 관계속의 끈끈한 인력은 몇마디의 실언과 잠깐의 실수로도 어느새 서로를 거부하는 척력이 되어 짦게나마 공유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 조차 염증을 느끼게 만든다. 친구와 가족의 관계라고 명명하고 금세 우리의 사이를 단정짓지만 그 관계속에 도사리고 있는 타인의 심상과 감정을 결코 눈으로는 목격할 수 없기에 쉽사리 부서지고 허물어내리는게 관계이다. 권여선은 이것을 포착해낸다. 이제는 복구가 불가능할 지경으로 도태되어버린 인간관계에서 원인을 규명하는 처사따위는 불필요하다는 것을 문학으로 담아내며 흉터를 씻어지울 수 없듯,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기억속의 흔적을 남기고 간 당신이라는 타투를 지긋이 응시한다.

 

2.

 

똑같은 사물을 대면하고 있더라도 그것에 대한 나와 타인의 생각이 동일한 범위에 속해있다고 단언할 수 없듯, 같은관계를 공유하지만 이 관계에대한 상대방의 의중 역시 결코 수를 세는 것 마냥 쉬이 헤아릴 수 없다. 우선 작품속으로 들어가보자. 주인공은 어느덧 이마에 굵은 주름이 패인 노파(오여사)로, 아무런 경제적 어려움 없이 그런대로 자기나름의 삶을 영위하는 중이다. 그녀에게 걸리는 문제가 한 가지 있다면 얼마전까지도 자신의 집에서 동거하다가 갑작스레 훌쩍 떠나버린 심여사와의 관계이다. 비록 심여사가 자신의 집에 얹혀사는 신세였지만 그녀 자신은 심여사에게 단 한번도 '눈치를 주거나 모멸감을 느끼게 한일이 없었'으므로, 꽤나 괜찮은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자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딸네 집으로 간다는 통고 한마디만 남긴 채 연락을 끊어버린 심여사의 행동에 오여사는 그 의중을 알 수 없는 상태로, 벌써 반년이 지나갔다. 계속해서 자신의 비위를 건드리는 딸들의 전화를 받고 문득 울화가 치민 오여사는,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지속했던 심여사를 그리워하며 기필코 그녀를 한번 만나보리라 결심한다. 유려하지만은 않은 과정을 거쳐 심여사가 머무르고 있다는 요양소에 당도했지만, 그녀가 기대했던 환대와는 달리 심여사의 얼굴엔 당혹스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하고, 대화가 계속될수록 거북함과 불편함만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돈다.

 

다 지나간 얘기지만, 아니, 이런 얘긴 안 하는게 좋겠어요.

아니 얘기해봐요 심여사. 우리 사이에 못할 말이 뭐가 있어?

제가 일본에 있는 딸네 집에 가기 전에 말이지요 몇날 며칠을 두고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몰라요. 간다는 얘길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오 여사님 앞에만 가면 입이 떨어지지 않더라고요. 왜 그런가 했더니 오 여사님이 절 못 가게 붙들까봐 그런 거 였어요. 오 여사님이 붙들어 앉히면 제가 또 그 구렁텅이에 붙들려 앉혀지겠다 싶었거든요.

...(중략) 가자미 좀 사다가 바짝 구워서 쪽쪽 일어나는 살점을 흰밥에 얹어 먹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아이, 난 비린 건 딱 질색이야, 하고 자르시데요. 오여사님 모시고 살면서 제가 무슨 강아지 새끼마냥 길이 들어가지고 여사님이 일본에 가지 말라고 하시면 그 말씀을 거역하기가 힘들 것 같더라고요.

(중략).. 그런데 오 여사님 그때 왜 그러셨어요?

그 때 언제?

예전에 저하고 같이 사실 적에요 제가 오 여사님 입에 밥이 좀 되겠다 싶어서 질축하게 한번 끓어 올까요 하고 여쭈면 그러라고 하면 될 것을, 됐다고, 그냥 먹겠다고, 얼굴은 잔뜩 찌푸리시고는, 결국 제가 다시 끓여 오게 만들 거면서 왜 한번에 제꺽 말씀을 안 하시고 사람 진을 빼셨어요?

 

심여사와 같이 동거했던 지난 5년의 세월을 나쁘지만은 않았던 때라고 추억하는 오여사와는 달리, 심여사는 그 당시의 사소한 언쟁을 일일이 기억하고 들추어내 무심한 척 날을 세우고는 끝내 두 사람이 우정의 징표로서 나눠가졌던 은반지마저 벗어던지며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기에 이르는데, 이는 그것에 속한 개개인의 해석에 따라 포장되고 변질되는 관계의 본질에대한 적나라한 제의이며, 표면 깊숙이 파고들지 못한 관계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를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애시당초 심여사와 오여사는 서로 동등한 입장에 위치해 관계맺음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오여사가 인지하고 있는 서로의 관계에대한 정의가 '친구'지만, 그 표피속의 실체를 헤집고 들여다보면, 집주인과 세입자라는 상하관계가 드러나고, 두사람은 같은 공간을 공유하지만, 이 공간의 실질적인 주인임을 은연중에 나타내보이고 집안 대부분의 살림을 명령하는 이 역시 오 여사임을 본문을 통해 쉬이 짐작할 수 있음에, 심여사가 인식하는 서로의 관계가 오여사의 그것과 어긋나고 구별됨은 꽤나 자명해보인다. 은반지가 상징하는 바 역시 마찬가지다. 심여사에게 있어 은반지란, 서로의 우정을 증명하는 귀중한 의미의 물질이 아니라 오여사가 은근히 드러내는 우월감의 표식에 불과한 것이다.

 

내가 뭘 해요 한밤중에?

그런 짓을 하고도 천연덕스럽게, 참

아니 심여사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내가 말 안해도 그건 오여사 스스로가 더 잘 알잖아?

(중략)... 드릴 게 있다고 했잖아요?

그게 뭔데? 아이 몰라

가져가라면 가져가! 오 여사가 해준 그 더러운 반지를 내가 왜 갖고 있어야 되는데? 왜?

 

작품 말미에, 심여사가 불편함의 차원을 넘어서 왜 이토록 오 여사를 혐오하는 것인지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가 잠시 나오는가 싶지만, 구체적인 묘사가 부재하여 미미한 윤곽에 그칠 뿐인데, 그것의 경위를 뚜렷하게 파악할 수 없을지라도, 필자는 이 '결정적인 단서'가 소설 속 주인공이 느끼는 혐오의 감정을 진정 이끌어냈다고는 보지 않는다. 본문에서도 명시되어있듯, 심여사는 단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을 겪게되며 오 여사를 혐오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오랜시간 켜켜이 층을 이룬 감정이 '결정적인 단서'에 준하는 사건을 계기삼아 표면 밖으로 제 형상을 드러낸 것이기에 굳이 독자가 이 단서에 주목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내 작가는 은반지의 반짝거림을 서술하며 소설을 종결짓는다. 주인공인 두 여사가 은반지에 내포된 의미를 서로 다르게 해석하듯, 타인과의 관계 역시 자의적인 것임을, 작가는 본작에서 제시하는데, 소설이 지닌 흉흉하고 음침한 분위기가 이러한 주제를 더욱이 형형케밝혀 독자에게 각인시킨다. 선연한 주제와 그 주제에 도달하는 과정을 미스터리 소설의 기법을 따라 전개시키는 작가의 모습을 보건대, 분명 대단한 공력을 지녔음을 짐작케 한다. 단편문학의 수작이다.

 

제목은 김선우 작가님의 '물의 연인들'에서 따왔습니다

하하하하하하ㅏ하하하하핳하 글틴 캠프 가고 싶었는데. 신청서까지 접수해놓고 조 까지 확정된 마당에 날짜를 25일로 잘못 알아서.....ㅠㅠ 평론가님도 꼭 뵙고 싶었는데 정말 아쉽습니다. 이제 졸업하는 마당에 내년에 기회는 없을 것 같고.. 도우미를 노려봐야지.

조셉 고든 레빗
조셉 고든 레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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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셉 고든 레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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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셉 고든 레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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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케이k

    곧 졸업이군요. 시원섭섭한 심정일 듯 하네요.. 미리 축하하고, 더 큰 걸음으로 도약하기를 바랍니다! 내년엔 날짜 실수 없이 도우미로 참여하세요~ :)

    • 2014-01-28 03:06:21
    케이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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