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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의식하는 행위로서의 문학

  • 작성자 조셉 고든 레빗
  • 작성일 2014-09-08
  • 조회수 835

*

 

연민이란 감정에 회의감을 느낀 일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일상의 무력감과 권태로움에 휩쓸려 타인의 불행을 대상화하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음을 깨닫고 싶을 때 느끼는 자기만족적인 우월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남이 겪은 불운에 대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동정의 표식을 드러내거나 과장된 한숨과 함께 탄식을 내뱉지만, 이는 고통받은 이들의 삶과 자신들의 평탄한 일상을 선연히 분별짓는 위선에 찬 행위이며 얼마 안가 모조리 소모되어 버리는 순간적인 감정의 표출에 불과하다고, 그렇기에 연민은 한시성을 지니고, 가슴에 새겨지는 선명한 자취, 씻어지울 수 없는 각인을 자아내는게 아닌, 언젠가는 깨끗이 세척되고야 마는 아련한 얼룩만을 남길 뿐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본인 나름대로 고통의 과정을 겪어낼 때, 툭 툭 내뱉는 몇 마디의 말들이, 금세 허공으로 흩날리는 몇몇의 단어가 크나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체감 하고 나선 연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타인을 관조하는 차원에서 아파하는 차원으로, 아파하는 차원에서 공감하는 차원으로 넘어갈 때 연민은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인지하고 있기에, 문학으로 구현된, 타자에게 보내는 위로 역시 무용하지 않음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고통과 위로를 주제로 구현된 시들을 다루고자 한다.

 

*

 

윤동주 -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윤동주 - 위로

 

거미란 놈이 흉한 심보로 병원(病院) 뒤뜰 난간과 꽃밭 사이 사람 발이 잘 닿지 않는 곳에 그물을 쳐 놓았다.

 

옥외 요양(屋外 療養)을 받는 젊은 사나이가 누워서 치어다보기 바르게──

 

나비가 한 마리 꽃밭에 날아들다 그물에 걸리었다. 노─란 날개를 파닥거려도 파닥거려도 나비는 자꾸 감기우기만 한다.

 

거미는 쏜살같이 가더니 끝없는 끝없는 실을 뽑아 나비의 온몸을 감아 버린다.

 

사나이는 긴 한숨을 쉬었다.

 

나세(歲)보담 무수한 고생 끝에 때를 잃고 병(病)을 얻은 이 사나이를 위로(慰勞)할 말이──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는 것밖에 위로(慰勞)의 말이 없었다.

 

 

곽재구 -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雪原)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윤동주의 시 ‘병원(1940)’과 ‘위로(1940)’,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는 위로와 고통을 주제삼아 만들어진 시들이다. 먼저 ‘병원’을 보자. 화자는 병원 뒤뜰에 누워있는 여자를 응시하고 있다. 여자에게는 심장질환이라는 육체적 고통이 존재하지만,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줄 이들이 부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건대, 여자는 고통을 의식하는 행위보다 쓸쓸함과 공허함을 이겨내는 것이 더욱 힘들어 보인다. 그렇지만 화자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다. 자신이 여자에게 느끼는 슬픔이 순간적 감정의 격랑에 휩쓸려 느끼는 어쭙잖은 동정의 감정은 아닌지, 그래서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내 화자역시 아픔을 느끼기 시작한다. 화자가 지닌 연민이 일순간 고양되고 폭발하는 감정이 아닌, 공감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연민이었고, 그래서 단순한 슬픔의 감정이 몸의 통증으로 확장되어 여자와 화자는 고통을 계기로 합일된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이제 진정 여자가 속히 회복되기를 바랄 수 있는, 진정한 위로를 건네 줄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한다. 이렇듯 ‘병원’이 타자와 자신의 거리감을 ‘연민’을 매개체로 삼아 함몰시킬 수 있음을 드러낸 시라면, 윤동주의 다른 시 ‘위로’는 그런 연민과 위로에 대해 다소 냉소적으로 접근한다. 한 사내가 병원 뒤뜰의 거미줄과 거미를 쳐다보고 있다. 그러다 나비 한 마리가 꽃밭에 날아들다 거미줄에 걸린다. 나비는 파닥거리며 거미줄의 척력에 저항해보지만, 이내 거미가 다가와 나비의 온몸을 감아버린다. 그것을 지켜보던 사내는 긴 한숨을 내쉰다. 화자가 사내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거미줄을 헝클어버리는 것 밖에 없다. 거대한 절망앞에 마주한 이에게 동질감의 연민이 아닌 이상, 따뜻함을 머금고 입에서 발화되는 위로의 말들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 것일까. 아니 애시당초 그들에게 위로가 필요한 것이긴 할까. 감정의 교류가 이루어 질 때 진정한 위로가 생성되는 것이자만, 고통받는 이들의 어둠이 너무 깊어 환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지경이라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위로를 표현해야 하나. 곽재구의 ‘사평역에서’가 해답을 제시한다. 창문너머에는 어둠만이 선연하고 누런 달빛조차 보이지 않는 겨울 밤, 대합실 안의 사람들이 열차를 기다린다. 무언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듯,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모두가 긴 한숨을 내뱉거나 간혹 불꽃의 일렁임을 초점없는 눈으로 쫓았고 굳이 슬픔의 기색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그 슬픔의 정체가 진정 비애에 속하는 지, 아니면 정적속의 분위기에 휩쓸려 얼굴표정만을 짓고 있는 것인지, 차장은 짐작 할 수 없었기에 몇 마디 말을 꺼내려 했지만, 아무런 활력과 생기도 서려있지 않은 눈자위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챈 순간, 이내 혀 끝 언저리까지 차올랐던 단어들을 삼킨다.

 

시간이 흐르면 고통역시 추억으로 귀결될 것이다. 어깨를 짓누르는 고통의 무게를 온몸으로 체감하고 두 눈으로 목도할 때, 그들은 비로소야 고통을 의식하지 않을 것이며 추억속에 저장해놓고 가끔씩 환기할 것이다. 스스로 의식함으로서 살아있는 것이 고통이지만, 통각을 차단하면 자신의 정체마저 차단하는 것이기에, 고통을 의식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의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대합실에 모인 이들 또한 고통을 의식하는 과정속에 놓여있을 거라고, 차장은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듯 각자의 삶의 궤적과 그들 고통의 고유성을 재단하지 않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는 차장의 모습을 보건대 때로는 침묵의 연민이 환부를 어루만져줄 수 있음을, 고통을 그러안을 수 있음을, 우리는 쉬이 짐작해 낼 수 있다.

 

학교 숙제였지 말입니다.

숙제마감 하루 전날 날려썼지만 그래도 뭔가 아쉬워서

조셉 고든 레빗
조셉 고든 레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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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셉 고든 레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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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죽음을 말하는 법 - 50/50

*. 죽음은 뭘까요? 육체의 소멸일까요? 영혼의 이탈일까요? 자신이 죽게되리라는 비보를 처음 접했을때,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기분을 느끼게 될까요? 상황을 한번 가정해봅시다. 저기 문을 열고 의사가 걸어오네요. 의자에 앉는 의사는 좀처럼 짐작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이때가지는 비교적 침착한 당신은 그래도 결과에 귀를 기울이는 시늉이라도 해보며 아무래도 좋다는 듯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네요. 이내 의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의학용어를 난잡하게 주절거리며 줄곧 차트를 쳐다봅니다. 당신은 뭐가 뭔지 알 수 없어 좀 더 쉽게 설명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랬더니 의사는 덜컹, 암입니다 하네요.  헐... 이 미친... 의사양반이 엑스레이 방사선을 많이쬐서 그런가 잠깐 정신이 오락가락 하나보네. 당신은 고개를 외틀며 헛웃음을 짓거나, 하하하 재미있네요. 사람 목숨가지고 장난을 치다니 똑바로 얘기 안해 이 새끼야!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린채 화를 내거나, 어어.... 어어엌.. 어어.. 뜨거운 액체가 눈자위를 부옇게 흐려놓는 것을 느끼며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영화에서는 어떨까요? 영화속의 아담이 의사와 대면하고 죽음을 처음 접했을때, 그는 그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격정적인 분노에 휩싸이거나 슬픔에 표류하지 않고 잠깐 어안이 벙벙할 따름입니다. 입에 달라붙지 않는 긴 병명을 듣고 나서는, 시야가 탁해지고 귓가엔 웅웅거리는 소음이 군림합니다. 자신이 죽게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좀처럼 피부로 와닿지는 않고 월요일의 일상과 같은 무력감이 전신을 감쌀 뿐입니다. 그동안의 대중문화에서 죽음을 다루고 표현할 때 거기에 항상 공통되는 정서는 슬픔으로, 아무런 서사적 고민없이 그저 눈물로서 일관하고 갈무리하기 마련이어 소재를 안일하게 소비했다면, 본작은 '죽음'이란 소재를 지니고 있음에도 유쾌하고 심드렁하게 접근하여 동일한 장르의 영화들과는 이질적인 행보를 보임은 물론, 이것을 다루어내는 솜씨가 제법 능숙합니다. 자기연민에 빠져 관객들의 감정을 강요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고 죽음을 앞두고 갑작스레 전혀 다른 인물로 변모하는 주인공의 궤적을 쫓지도 않습니다. 앞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주인공은 의외로 병치레를 하는 중에서도 담담한 모습을 보이고, 경쾌한 분위기가 영화전반을 관통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본작이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영화는, 죽음앞에서 담담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두려움의 과정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것뿐임을 보여주며 유쾌함속의 이면을 드러냅니다.   * 아담이 자신의 병을 회사사람들에게 털어놓을때, 그들의 반응 대부분은 동정입니다. 아니 동정을 가장한 자기위안일지도 모르겠네요. 측은한 눈빛과 위로의 말을 건네지만 속으로는 분명, 내가 아닌 남이 가진 병이라는 것에 안도의 기색을 보일테니까요. 그래서 아담은 이전까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달래준답시고 벌이는 파티나 어깨에 올리는 손 같은 것들이 어쭙잖고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뿐인 친구에게 털어놓을때의 반응만큼은

  • 조셉 고든 레빗
  • 2013-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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