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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꽃을 품은 모든 버러지에게 - 오시미 슈조 「악의 꽃」

  • 작성자 탈퇴 회원
  • 작성일 2019-07-25
  • 조회수 1,614

 

 

 

이 세상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사춘기를 겪는다. 대부분 10대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장하며 극심한 '성장통'을 앓는데, 청소년에서 청년으로 가는 길은 일종의 입사식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각자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 다채로운 일을 겪으며 성장한다. 어린이에서 청소년으로, 청년 - 장년 - 중년 - 노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경험을 하고 길지 않은 생애를 떠나보낸다. 그리고 남녀노소 상관없이 사춘기를 거치고 어른의 길을 향해 발을 딛는다.

 오시미 슈조 「악의 꽃」은 청소년들의 방황과 역경, 성장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주인공 '카스가'는 보들레르 시집 「악의 꽃」을 좋아하는 내성적이고 소심한 '문학소년'이다. 그 나이에 걸맞게 짝사랑 상대도 있다. '사에키'는 카스가에게 '뮤즈이자 운명의 여인'이다. 그는 어느 날 우연히 사에키의 체육복을 발견하고 충동적으로 자신의 옷 속에 숨긴다. 그 모습을 동급생 '나카무라'가 목격하고 나카무라는 카스가의 약점을 잡아 '변태적인 행동'을 강요한다. 변태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비정상과 일탈을 의미한다. 동시에 탈바꿈(變態)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나만 이상한 것일까, 나만 이 답답한 세상에서 동떨어진 사람인가 고뇌하던 그는 무언가 정상에서 벗어난 일을 하는 카스가를 목격하고 나만 변태가 아니었구나, 동질감을 느낀다. 나카무라는 카스가의 가면을 벗기고 싶어 한다.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모습을,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면서 깊이 박혀 있는 카스가의 본성을 보고 싶어 한다. 이 세상에 묵묵히 순응 못 하는 내가 변태라면, 너도 변태여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가운데 카스가는 나카무라에게 유일한 친구이자 동지이다.

카스가는 처음에 나카무라의 강권에 못 이겨 여학생들의 팬티를 훔치고 교실을 엉망으로 만드는 등 만행을 저지르지만, 자신이 이때까지 믿어온 악의 꽃, 문학, 짝사랑 등 모든 것이 가짜이고 가면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본격적인 변태의 길에 들어선다. 문학과 보들레르, 랭보와 사에키는 그가 어떻게든 의지할 무언가가 필요해 만들어낸 허상이자 거품이다. 진정한 버팀목은 나카무라가 된다. 둘은 그들만의 비밀기지를 세우나 경찰에게 꼬리가 잡히고, 동반 자살을 계획한다. 하지만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모든 것은 세월 속에 잊힌다.

나카무라는 변함없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청소년들의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비좁은 마을, 산으로 빽빽이 둘러싸인 숨 막히는 공간에서 카스가와 나카무라의 변태적 행각은 그들에게 유일한 안식처이며 도피처이다. 그들은 마을 밖, '저쪽'으로 나가고 싶어 한다. '저쪽'은 갑갑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이자 새로운 세상이다. 나카무라는 말한다. "몸속 저 아래 깊은 곳에서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뭔가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고, "이 세상 전부 내 부글부글 속에서 버러지가 돼버리면 좋겠"다고 고백한다.

나카무라에게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버러지다. '구역질 나는 이야기를 하며 구역질 나게 웃고, 더러운 똥 덩이처럼 떼 지어 몰려다니며, 누가 누굴 좋아하니 누가 누굴 싫어하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은 쓰레기들! 버러지들!'로만 보이는 것이다. 점수가 낮다고 꾸짖는 담임선생도 잔소리하는 부모도 마을 사람들도 버러지다. 길가의 잡초와 앞길을 막은 산과 해와 달도 버러지다. 끝없이 회전하는 끔찍한 나날들,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도식화된 사회, 결코 나갈 수 없는 폐쇄된 마을을 깨부수기 위해 그들이 찾아낸 '저쪽'은 바로 변태가 되는 것이다. 알에서 애벌레로, 번데기에서 나비로 변태하는 곤충처럼 카스가와 나카무라는 이전의 나를 버리고 새롭게 변신하려 한다. 그러다 자신들도 버러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알고 봤더니 타인과 다를 게 없다는, 결국 자기들도 이 마을에 속박될 수밖에 없다는 뼈저린 현실을 받아들일 때 유일한 탈출구는 자기파괴, 자살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카스가는 이사한 마을에서 위축되어 살아가지만, 나카무라와 닮은 동급생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도키와 아야'는 문학을 사랑하는 문학소녀다. 그는 카스가에게 잊고 있었던 내면의 '저쪽'을 일깨운다. 진정으로 마음이 맞은 두 사람은 연인이 된다. 그러다 카스가의 할아버지가 위중해지고 그는 3년 전 어두운 과거를 묻어놓았던 마을로 돌아간다. 한때 엄청난 소동을 피웠던 그를 반겨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러나 우연히 자신을 고발했던 학생을 만나 나카무라의 행방을 알게 된다. 다시 만난 나카무라는 이전의 나카무라가 아니다. 이제는 해가 뜨고 지는 것이 반복되는 현재에 순응하며 살고 있다. 그들에게 파란만장했던 과거는 한순간 빛났던 추억으로 변한다. 나카무라의 눈에 사람들은 더는 '버러지'로 보이지 않는다. 카스가도 '보통 인간'으로 보일 뿐이다.

카스가는 어른이 되어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어렸을 때 이해 못 했던 「악의 꽃」을 이제는 색다르게 마주한다. 20대의 눈으로 본 악의 꽃은 10대의 눈으로 본 악의 꽃과 전혀 다르다. 이것은 주인공이 성장했다는 뜻이다. 부끄러웠던 과거를 당당히 마주하고, 새 삶을 위한 글쓰기를 시작한다.

결혼해 아이를 가진 카스가는 비로소 꽃씨를 날리는 악의 꽃을 본다. 악의 꽃은 여러 상징을 나타내며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악의 꽃은 욕망이자 진심이고, 두려움이자 희망이다. 집에서는 부모가 하라는 대로, 학교에서는 선생이 하라는 대로 복종해야 하는 답답한 현실은 주인공들 내면의 '악의 꽃'을 일깨운다. 나카무라에 의해 갈가리 찢고 밟힌 책이나중에는 카스가의 손에 의해 불태워진다. 또 사에키에 의해 물에 가득 젖기도 한다. 이렇듯 악의 꽃은 청소년들의 복잡다단한 마음을 대변한다. 악의 꽃은 카스가가 자살 시도할 때 활짝 폈다가 실패했을 때 닫히고,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자 씨앗을 뿌린다. 아버지가 된 그는 또 다른 '악의 꽃'을 낳는 것이다. 그 씨앗 중 하나가 카스가의 연필 선이 된다.

작가는 '이 만화를 지금 사춘기로 힘들어하는 모든 소년 소녀, 일찍이 사춘기로 힘들었던 옛 소년 소녀에게 바칩니다' 하고 말한다.

"사춘기는 언제 끝나는 걸까요. 사춘기란 건 요컨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초등학생'과 분별력이 생기면서 자의식의 사슬이 풀린 '어른' 사이의 어둠의 기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춘기의 시작은 알기 쉬워요. 제2차 성징이 시작되고 목소리가 변하고 생리가 시작되고 체모가 나고. 몸의 변화가 그대로 자의식으로 바뀌어 가죠. 하지만 끝은 알기가 까다로워요. 중년이 되고 머리가 벗어지고 주름이 생기고 백발이 성성해도 자의식은 사춘기 때 그대로인 인간들이 많습니다. 시작은 대상을 불문하고 무조건 찾아오지만 그 끝은 저절로 오지 않아요. 스스로 찾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만화도 내심 <사춘기의 끝>을 발견하는 만화라고 생각합니다."

운명 같게도 나는 지금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려는 경계에 서 있다. 나의 악의 꽃은 무엇일까. 나는 어떤 모습의 악의 꽃을 피워낼까. 스무 살을 코앞에 둔 나는 아직도 내가 사춘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는지, 여전히 사춘기를 겪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작가가 말하는 '사춘기의 끝'을 발견하고 어른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닫히지 않고 활짝 펴 아름다운 꽃씨를 날리는 악의 꽃이 되기를, 그리하여 청년에서 노년까지 나이를 먹을수록 굳건히 성장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독자 여러분도 자신만의 소중한 '악의 꽃'을 아름답게 피워내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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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우은실

    모로 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글로 뵙게 되어 반갑네요! 만화책에 대한 리뷰라니 무척 재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이전에 만화책으로 리뷰를 써본 적이 있는데, 분명히 서사를 가지고 있지만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고 그 때문에 독해할 수 있는 장면이 미묘하게 까다로웠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이 만화책을 읽어보지는 못했는데요, 그것을 감안하여 모로 님께 질문을 던지는 형태로 코멘트를 해볼게요. -먼저 이 글의 키워드는 입사, 성장, 청소년, 자의식과 같은 것이라고 읽혔습니다. 이러한 키워드를 골라낸 것은 모로 님의 현재의 '나'를 어떻게 스스로 해석하고 있고 이해하려 하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깊어 보여서 더욱 중요하게 느껴졌습니다. -카스가와 나카무라가 서로와 관계를 구축하는 장면이 조금 문제적으로 읽혔어요. 두 가지 차원에서 그러한데요, 먼저 나카무라의 행위가 과연 건강한 방식인가, 가령 이것이 입사의 과정이라고 하더라도 나카무라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펼치는 것을 마냥 옹호할 수 있는가 하는 측면이에요. '변태'라는 행위에 대한 해석이 얼마만큼의 다양성을 지닐 수 있느냐와 조금 별개의 지점에서, 나카무라의 논리가 과연 수용될 수 있는 지점 안에 머물고 있는가 묻게 되었어요. 내면에 성적 욕망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을 구성하는 여러가지 욕망 안에는 사회적으로 드러났을 때 수용 가능한 것과 또는 조금 이해되지 못할 것들이 나눠질 수는 있겠으나, 문제는 그러한 욕망을 어떠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조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가 하는 점인 것 같아요. 사회가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특이점으로서 자기의 어떤 욕망이나 행동에 고착화된 의미가 부여된다면, 글 말미에 작가의 말에서처럼 "자의식은 사춘기 그대로인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아요. '나'는 누구인가, 내 안의 여러 가지 감정 요소나 욕망의 문제들을 나는 어떤 식으로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제이면서도, 결국 '나'를 이해하는 과정으로서 타인과 어떠한 관계를 구축하도록 할 것인지를 묻도록 만드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이것은 청소년기에 시작은 되겠으나 성인이 되는 어느 시점에 끝나는 일이라고는 저는 생각지 않고요. 이러한 점을 두루 고려하여 카스가와 나카무라의 행동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는 없을지, 모로 님이 생각하는 자기 자신의 입사시기로서의 현재와 어떻게 견줄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다음으로는 이 작품이 '청소년' '입사' '방황'의 키워드를 가진다고 해서 관습적으로 사용되는 묘사의 방식을 그저 수용해도 좋은가 하는 점입니다. 어쩌다가 체육복을 훔치고, "강권에 못이겨" 팬티를 훔치는 등의 행동이 실제로 일어난 적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이 묘사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장면을 작가가 묘사하기로 했다면 이에 대한 나름의 서사 내 자기 확신의 지점이 필요한데요, 우선 그것이 과연 설득력있게 제시되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어째서 부적응, 변태(탈바꿈이라는 의미를 포함하여)의 모습이 이러한 방식으로만 그려져야 하는가 하는 지점은 '입사'라는 문제와 구분지어서 살펴보아야 할 것 같아요. 주제가 '방황'과 같은 것이라고 해서 이러한 장면이 반복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과연 좋은 방법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아요. 타인의 물품을 훔치고 특히 타인의 내밀하다고 생각되는 물건에 손을 대는 것이 주는 의미라는 것이 과연 성적 판타지에만 있는 것일지도 의문이 듭니다. 훗날 이 과정을 거치고 나카무라는 보통의 인간이 되었다고 설명되지만, 그것은 그렇게 한 번에 납득되고 반성되고 사라지는 종류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만약 반성이 필요한 지점이라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그 반성적 사고를 가지고 가야지만 가능한 일이고요. 무엇보다도, 일본 만화 안에서 이러한 장면이 관습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러한 점에서 작가가 조금 무비판적으로 이러한 장면을 사용한 게 아닌가 하는 비판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어려운 질문들을 많이 던지게 되었네요. 모로님이 조금 과중하게 느끼게 될까 조금 고민이 되지만, 이러한 질문 앞에 마주 서는 것 역시 모로 님이 지금의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는 하나의 과정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함께 담습니다.

    • 2019-07-31 14:02:13
    선우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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