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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예술은 왜 예술이 될 수 없는가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4-04-08
  • 조회수 238


(슬프게도) 오랜만에 텔레비전을 돌려보다가, 어느 교양 프로그램에서 한 남자가 자신을 대중문화 평론가라고 소개하는 것을 보았다. 대중문화란 무엇인가. 대중을 중심으로 일어난 문화적 현상이나 문화 산물을 뜻하는 것인데, 그 것을 평론한다는것은 대중 중심이라는 측면에서 시대를 가늠하고, 어림잡을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척도로 보였다. 나는 약 한 시간에 걸쳐 그 프로그램을 시청했고, 꽤 도움되는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 속에는 나에게 이 글을 쓰도록만든 어떠한 사족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중예술’이라는 것이었다. 교양 프로그램의 그 평론가는 ‘대중문화’라고 해도 될 말을 가지고, 굳이 ‘대중예술’이라는 말을, 그 것도 여러번에 걸쳐 쓰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문득 ‘대중문화’와 ‘대중예술’의 차이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대중예술이란 대중적인 예술을 말한다. 그것은 대중문화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것인데, 그 차이를 확실히 하자면 대중문화는 민족의 전통이나 의식이 담긴 시대적 산물에 대한 것이고, 대중예술은 인간의 혼이 담겨있는 예술을 중점으로 하는, ‘산업적’이거나 ‘민족주의적’ 산물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서 ‘대중예술’이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예술이 ‘대중적’이라는 점에 그랬다. 대중예술에서 ‘대중’은, 일종의 산업성을 나타내는 것일텐데, 사실 예술은 결코 산업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산업적인 것의 산물이란 무릇 공산품같이 유용하고, 일상에 천착해서 우리의 삶을 더욱 편안히 해주는, 대중적인 것이다. 그러나 예술이 할 수 있는 것은 산업이 할 수 있는 것과는 그 역할과는 분명하게 다르다. 혹은 상이하다. 그렇다면 과연 예술의 역할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인류가 기술을 얻기 훨씬 더 이전인 기원전으로 돌아가야한다. 문학이 존재하기 이전, 인류에게는 텍스트가 있었다. 그것은 서로간의 의사소통을 위해 만들어졌으나, 실은 서로 간의 정보를 주고 받기 위해 사용되었고, 그것은 자신들이 발견한 것과 달성했던 성과들을 공유하는, 기록의 산물과 다름없었다. 즉,문학은 기록의 산물이었던 텍스트에 허구와 상상력, 과장을 더해서 만들어진 인류의 전유물인 것이다. 미술 역시 동굴벽화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에는 원시인들이 자신들의 성과를 정리한 기록의 산물이었으나, 미술은 카메라가 등장하고 그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 후 그것은 사실주의를 버리고 화가의 시선을 담은 회화또는 추상화로 재탄생했다. 즉, 예술을 볼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작품의 사실성이 아니라,  허구와 자신의 시각을 통해 말 하고자 하는 작가, 혹은 그 시대에 살았던 어느 개인의 영혼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에 담긴 것은 사람이다. 

사르트르는 시계는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존재하고, 연필깍이는 연필을 깎아주기 위해 존재하지만, 사람의 존재이유에는 특별한 목적이 없으므로,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고 말했다. 예술에는 사람(혹은 그것의 진실된 영혼)이 담겨있다. 그러므로 예술 역시 사람에게 목적이 담겨있지 않 듯이,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는 안된다. 예술에 있는 것은 언제나 ‘가치’일 뿐이다. 그 가치는 영혼을 드러내고, 보여주는 것에 있다. 그렇기에 애초에 예술은 역할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존재할 뿐이고, 우리가 시간과 사람을 경험하며 인생을 알아가 듯, 누군가의 작품을 통해 변화를 이룰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대중예술’이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야만 한다. 대중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시대성을 띄고, 상업적이며, 인간에게 유용하다는 것이데, 그것은 앞서 사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말했을 때 비유했던 시계와 연필깎이와 다르지 않다. 그것들 모두 인간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듯, 대중예술 역시 대중의 ‘관심, 유흥, 오락’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이것을 '영혼'이 담긴 예술이라 부를 수 있을까?

제프 쿤스와 앤디 워홀, 크리스토퍼 놀란과 류승완. 뉴진스와 BTS, 스티븐 호킹과 J.K 롤링. 이들의 공통점은 대중성과 상업성, 오락과 유흥, 그리고 그 분야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는 예술성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서 대중예술을 예술로 부를 수 있겠는지에 대한 물음을, 이들은 예술가인가, 아니면 대중인(나는 대중 예술가라고 쓰지 않았다)인가?, 하는 질문으로 바꾸어 읽을 수 있다. 

제프쿤스와 앤디 워홀이 회화의 시초였던 모네나 르누아르, 또는 박서보나 이우환을 넘어설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이 공산품 찍듯 영혼없이 작품을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그 무수한 반복과 자가복제 때문에 그들의 작품에서 모네, 르누아르, 박서보, 이우환 같은 영혼의 성장이나, 가능성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액션에 치중한 나머지 대중을 너무 의식하고 있는 크리스토퍼 놀란과 류승완은 영성을 담아내는 오즈나 로셀리니의 영화를 이길 수 없으며, 관객을 그들 만큼의 깊이에 집어 넣을 수 없다.

 오디오를 꽉 채움으로 청각적인 욕망을 해소시켜주는 뉴진스, BTS 역시 절제하므로서 영성을 끄집어내는 존 케이지나 모차르트를 이길 수 없다. 그건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가 와도 안된다. 

스티븐 호킹과 J.K 롤링 역시 셰익 스피어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고, 한국 문단의 어느 신인작가를 데려와도 넘어설 수 없다. 

이렇듯 대중미술은 추상화를 이길 수 없고, 산업영화는 예술영화를 이길 수 없다. 대중음악 역시 클래식을 이길 수 없다. 대중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모두 일시적으로만 대중의 욕망을 충족, 또는 만족시키는 ‘시한부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한부 예술’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모네, 르누아르,오즈, 로셀리니, 케이지와 모차르트의 작품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의 작품에는 욕망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이 담겨 있기 때문에,’ 영원한(또는 영원할) 예술’ 작품들이다. 수백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모차르트의 음악이 아직도 연주되고, 셰익 스피어의 희곡들이 읽히며, 오즈와 로셀리니가 많은 시네필들의 스크린을 차지하고 있는 까닭이 그 반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한부 예술’이 주목 받는 것은, 왜 일까? 그것이 주목받는 까닭은, 가치있는 ‘예술’이기 때문이 아니라, 시대의 유행과 흐름을 가늠잡는 척도이자, 시대의 얼굴을 나름대로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과 시대는 서로 상호작용하므로서, 우리는 시대를 통해 그 예술의 가치 값을 매기거나, 영혼을 가늠할 수 있다. 다만 대중예술은 어디까지나 대중만을 위해 존재하는, 소비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대중예술을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어폐가 있다. 시대는 예술이 될 수 있지만, 우리가 예술로서 보고자 하는 것은 ‘나’라는 ‘영혼’을 통한 ‘자기확인’이지, 금방 지나가버리는 소비성 욕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대를 척도하도록 하거나, 그 시대를 대표하는 상업적인 것은  문화지, 결코 예술이 될 수 없다. 


서점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코로나19 이후 극장은 한산해졌으며, 클래식 공연장은 텅 비어있는 지금, 미술관과 박물관이 공허에 뒤덮여있는 지금. 오직 소수만이 그것을 즐기로 오고, 그마저도 대부분 자신이 교양있는 사람이라고 자랑하고싶어 안달난 이들 뿐일 때. 우리는 예술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보고, 사유해 볼 필요가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사유하기 위해 아무거나 다 예술이라고 칭하고, 또는 예술을 살려내기위해 대중으로 고개를 돌려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대중적인 소비성 공산품들이 자신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예술이 우리의 곁을 떠났을 때 자신이 영혼을 품은 예술이라며 우후죽순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예술이라며 다가오는 거짓을 물리쳐야한다는 사명을 마땅히 가져야만 할 것이다.


(혹자는 이 글을 보고, 이 창작가들을 세계적인 거장과 비교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것에 대하여 어느 정도 수긍하지만, 나는 시대적인 상황이나 욕망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된 창작가의 영혼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내가 거짓들 사이에서 진실된 예술을 사유하기 위한, 일종의 발화 방식이자, 나의 윤리 의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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