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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정당화 : 도덕적으로 정

  • 작성자 관리자
  • 작성일 2007-03-18
  • 조회수 7,355

 

 

 

나는 인간과 동물이 ‘같다’고 말한 적도 없거니와 그럴 의사도 없다. 피터 싱어가 쓴 것처럼,


        인간 평등의 원리는 인간들이 실질적으로 평등하다(이는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기술(description)하고 있는 원리가 아니다 : 그러한 원리는 인간 존재를 어떻게 처우해야 할지에 대한 규정(prescription)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원리를 동물과 인간 사이에도 적용한다. 그러므로 육식의 근거를 따져 묻고자 한다. 정당화하지 못한다면, 지금의 이 학대가 ‘도덕적으로 타당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진정 종차별주의의 혐의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평등이란 개념을 다시 써야 할 뿐 아니라 ‘배려’의 범위를 동물 전체, 그리고 생명 전체로 확대해가야 한다. 말하자면, 동물과 인간이 같으니 다르니 할 것이 아니라 동물의 생활을 향상하는 방향을 논의할 때인 것이다.



동물은 인간과 ‘다르므로’ ‘동일하게’ 대우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반박하겠다.



돼지가 인간보다 멍청하기 때문에 먹어도 된다는 주장은 크게 두 가지 오류를 갖고 있다.

첫째, 모든 인간이 모든 돼지보다 영리한 것은 아니다. 둘째, 당신이 나보다 영리하지 못하다고 해서-그리고 영구히 나와 동일한 지적 능력을 얻지 못할 것이라 해도-내가 당신을 냄비에 삶고 양념하고 볶는, 말하자면 오독오독 씹어 먹는 행위가 허용될 수는 없다. 아니 적어도 당신은 허용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텔레비전 아홉 시 뉴스가 잔혹한 살인사건을 내보낼 때면-단지 ‘도살’했을 뿐 먹진 않았는데도-언제나 혀를 차며 얼굴을 찌푸리던 당신이니까.



당신과 육식자들의 논리대로라면, 동종(同種) 살해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 이외에는 내가 당신을 식탁에 올리는 데 아무런 문제될 게 없어 보인다. 식인(食人)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사람이 육식에 분노하지 않는 건 굉장히 이상한 일이다. 채식의 문제에서, ‘같다’ 혹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밝히는 건 핵심이 아니다. ‘우월하다’ 혹은 ‘열등하다’를 밝히는 것도 무관하다. 당신은 동물이 때로 도덕적, 법률적으로 고려돼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면서도 잔인한 입맛을 바꿀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누가 개를 걷어차기만 해도 ‘도덕적으로’ 분노를 느끼는 선량한 당신은 왜 하필이면 개와 다를 바 없이 영리하고 쾌활한, 운이 조금만 좋았다면 우리들의 좋은 친구가 되었을 게 분명한 돼지를 잡아먹어야만 하는 걸까. 정말 거대한 무엇인가가 ‘돼지에게는 연민을 느끼지 않아도 돼’ 속삭이기라도 하나. 그 불일치는 얼마간 우울하다.



대부분이 육식을 하고, 육식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육식이 ‘도덕적으로’ 정당해지지 않음은 명백하다. 고작 ‘다른 사람들도 다 동물을 먹어왔다’는 한 마디로, 당신은 셀 수도 없는 동물들을 고통에 빠뜨리고 있다. 동물이란 인간이 먹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성서가 그것을 증명했다는, 동물은 ‘영혼’이 없다는 따위의 오만하고 어리석은 억지는 시간을 소모할 가치도 없다. 대체 독보적인 지구 약탈자, 온갖 생명의 살해자인 당신에게 무슨 ‘영혼’? 더러운 짐승들에는 감히 가져다 댈 수도 없는 그 고결한 ‘영혼’이란 건 머리카락처럼 애초에 당신 몸 어딘가에 붙어서 태어났다. 이 논의에는 ‘영혼’, 그리고 ‘도덕’ 같은 것들은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



‘육식이 옳다’는 말은 ‘육식을 해도 된다’거나, ‘육식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채식으로 도덕적 우월성을 획득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적어도 육식이 ‘옳다’고 하는 데 효과적인 반박을 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거의 무가치하다. 적어도, 생명이 죽임을 당하고 있는 이 순간 그런 것들을 논하는 것은 도피다. ‘옳다’ 혹은 ‘옳지 않다’와 같은 가치평가적 단어는 당신의 주장과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다. 그러한 알기 어렵고 추상적인 것들 대신, 생명을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당신이 느낄 수 있는 것은 흔히 ‘진리’-당신이 분명하고 확고부동하게 여기는 듯한-가 아니라 ‘고통’이 아닌가?



더구나, 인간이 그렇게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면, 왜 ‘동물은 서로 잡아먹는다’는 사실을 육식의 근거로 삼아야만 하는지 묻고 싶다. 동물들은 적어도 ‘먹이’를 비좁은 우리에 가두고 짧은 생을 고통으로 얼룩지게 만들지는 않는다. 적어도 젖소에게서 어린 새끼를 빼앗아가거나, 인공적으로 수차례 임신시켜 우유를 갈취해가지도 않으며, 빈혈에 걸린 송아지 고기를 비싼 값에 사 먹으며 즐거워하는 일은 더더욱 없다. 동물은 인간과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혀를 잠시 만족시키기 위해 끔찍한 학대와 폭력을 자행하고 있다. 사육되는 동물에게 일말의 행복이라도 찾아보라. 인간이 육식을 하지 않았다면 수많은 가축들이 태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공장식 농장에서 기르는 돼지와 닭의 20%가 평균수명보다 일찍 사망한다는 통계는 그것이 우리들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축산업자의 소들이 정말로 우유팩에 찍힌 그 모습대로 풀을 뜯고 노닐며 충분히 삶을 즐기리라 믿을 만치 당신이 순진하진 않겠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는 돼지는 자기 몸보다 조금 더 큰 우리에 갇혀 목숨을 연명한다. 90마리를 수용하면 그 서열을 모두 안다는 영리한 닭은 페킹 오더가 지켜지지 않아 극단적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접촉 없이 홀로 가둬두거나, 너무 많은 동물을 과밀하게 몰아넣어 빈번하게 카니발리즘이 일어난다. 당신은 보이는 사람을 무작위로 물어뜯고 싶을 만큼 극단적인 스트레스를 느껴보았을까. 혹은 그 사람을 자근자근 먹어치우고 싶다던가.



돼지의 후각은 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200배에 달하지만, 돼지 사육장은 잔인할 정도로 악취에 가득 차 있다. 당신이 암모니아가 담긴 비커에 코를 박아봤다면 그 고통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테다. 물론 물리적 폭력이 빠져서는 안 된다. 쇠막대로 구타당하고, 움직일 수 없는 돼지는 발로 차이고 짓밟히고 질질 글리고, 렌치나 시멘트 블록에 맞아 즉사하고, 정신이 멀쩡한 채 목이 잘리고 여전히 신음하는데도 가죽이 벗겨지고 다리가 잘리고…….  미국(美國)에서 불과 칠 년 전 있었던 일이니, 당신은 그 고기를 먹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나와 당신이 같이 먹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무슨 고기를 어디서 얼마나 먹었는지 다 열거할 수 있을 만큼 기억력이 좋지 않지만, 아마 맛은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우리는 고기를 ‘즐겼다.’



공장식 영농을 운영하는 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방법이 없지는 않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이익 극대화를 위한 동물 환경의 변화다. (…) 돼지가 동물이라는 생각을 내던져버려라. 돼지를 기계처럼 취급하라.” -돼지 농장 경영


        비인간화는 파괴하고 살상할 대상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물건’이나 징그러운 ‘벌레’ 정도로 인식하게 만드는 세뇌과정이다. 사람들이 벌레나 짐승을 죽일 때 도덕적 죄의식을 갖지 않는 것과 거의 같은 종류의 것이다. 무차별적 대량 살육에는 극단적인 형태의 비인간화 과정이 개입되어 있다. 인간을 죽이는 데 대한 도덕적 제약을 벗겨버리는 데 필수적인 과정이다. -이삼성,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비-생명화’라고 부르기로 하자. 공장식 대량살육은 아우슈비츠를 연상케 한다. 당신 머릿속에서 살생의 고통을 말끔히 지워내기 위해, 오늘도 ‘물건’이나 ‘벌레’의 탈을 쓰고 소와 돼지와 닭은 피를 흘리며 죽어간다. 내일도 모레도 죽어간다. 아마 당신은 적국의 선량한 시민들에게 원폭을 투하하는 것과 비슷한 심정으로 동물을 잡아가두고 칼질을 하고 있는 것일 테다. 당신은 얼마나 애처로운가.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 육식은 정당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래도 당신은 흰 송아지 고기를 즐기지는 않는다. 태어난 지 하루 만에 경매에 팔려, 아프거나 죽은 동물 사이, 22인치 개별 우사에서 짧은 생을 사는-마지못해 살아내는-그 가여운 동물은, 오로지 잉여 탈지유밖에는 먹지 못하고-씹을 수 있는 단단한 음식이라고는 없다-누울 수도, 걸을 수 없는 어둠 속에서 호흡기와 장관 질환, 빈혈에 시달린다. 연한-근 긴장 능력이 발달하지 못한-고기를 즐기는 미식가들은 송아지 스테이크에 한 번 더 칼질을 한다고 한다. 그 스테이크가 젖소의 새끼였다는 걸, 어미와 떨어지며 집어던져지고 질질 끌리고 짓밟히기도 했다는 것을 그들이 알고 싶을 리 없다.



젖소의 자연수명은 20년 이상이지만 공장식 농장에서는 4년 안에 사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려 자연적으로 얻어낼 때보다 20배나 더 많은 우유생산량은, 젖소의 생명을 단축시킨 결과물이다. 새끼에게 젖을 물리고도 젖소는 인간에게 부족하지 않은 우유를 주어왔단 사실을, 당신은 잊었다. 강제 몰팅-살모넬라균 감염 원인이기도 한-된 닭이 10일 이상 모이를 먹지 못한다는 걸, 그 모이는 대개 병아리로 만든 것임을 당신은 모른다. ‘불필요한’ 수평아리는 쓰레기봉투에 던져져 질식사하거나, 생고기 분쇄기에 들어가 닭과 다른 가축의 사료가 된다. 닭은 급격한 성장으로 인한 울혈성 심부전으로 많은 수가 사망하며, 대부분의 닭이 6주만 되어도 걸을 수 없을 만큼 비만한다.



의도적 비만화는 칠면조도 마찬가지다. 자기 몸도 가눌 수 없는 칠면조는 모두 인공수정의 결과로 태어났다. 터키-베이스터라는, 바늘 없는 주사기 같은 것으로 추출된 정자와 화학물질의 혼합물을 암컷의 몸에 넣는 것이다.


        무게가 겨우 7파운드인 아기를 오늘날 칠면조(혹은 닭)를 사육하는 식으로 키우면 18주 만에 1,500파운드(680킬로그램)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랭카스터 파밍

 

 

 

누가 가축을 ‘돌본다’는 것일까.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공장식 축산농장에서 사육하는 동물 한 마리에 인간이 들이는 시간은 4개월에 12분이다. 식품가격을 낮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그러나 잔혹행위 상당수는 적은 비용으로 시정 가능하다. 맥라이벌 법정싸움 당시 벨 수석 판사는 “비용이 엄청나게 증가한다는 것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말했다. ‘생명’이 아닌 ‘식품’에게 굳이  ‘엄청난’  비용을 지출할 필요가 있겠는가. 도살 직전의 닭 중 90%가 백혈병, 돼지 중 4분의 3이 폐렴을 앓고 있다는 건 그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소는 도살하기 전 ‘스터닝’이라는 전기충격법으로 기절한 상태여야 한다. 그러나 실패율은 30%나 된다. 거꾸로 매달려서도 10분은 살아있을 수 있으며, 목이 잘리고 가죽이 벗겨지고 위장이 끄집히고도 살아서 움직인다. 도살과정-서로 분담해서 도살하도록 돼있다-을 살아서 통과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래도 잘라낸다. 소를 기절시키는 전문가를 두는 것 역시 결코 기업주들에게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무감각’이다. 당신이 지어올린 육식의 세계는 항생제, 호르몬제, 약품과 방부제가 섞인 사료를 가축에게 먹인다. 애완동물의 시체도 흔히 사료 재생공장으로 가고, 그것이 가축에게 먹히고, 그리고 당신이 다시 소와 닭과 돼지를 먹는 것이다. 이 ‘도덕적’이고 자연스러운 과정에서 불구인 동물들은 생명 이하의 취급을 받는다. 정말이지 당연한 일이다.



벤담이 말했듯, 문제는 그들이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가, 그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다.



동물보호법에 따르면, 관리자는 동물이 “가급적 본래의 습성을 유지하면서 정상적으로 살 수 있도록”(제3조 : 동물의 보호) “적합한 사료의 급여와 급수 · 운동 · 휴식 및 수면”을 보장할 뿐 아니라, 질병과 부상의 경우에는 “신속한 치료”와 기타 “필요한 조치”를 다하고, 다른 우리로 이동했을 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도록 도와야 한다(제5조 : 적정한 사육 · 관리). 물론 처벌은 미미하다.


제7조 : 동물학대 등의 금지

2. 살아있는 상태에서 동물의 신체를 손상하거나 체액을 채취하거나 체액을 채취하기 위한 장치를 설치하는 행위. 다만, 질병의 치료 및 동물실험 등 농림부령이 정하는 경우를 제외한다.

제12조 (동물의 수술)

거세 · 제각(除角) · 단미(斷尾) 등 동물에 대한 외과적 수술을 하는 자는 수의학적 방법에 의하여야 한다.


가축을 보호하기에는 극히 허술하고, 더구나 현행법상 개는 가축이 아니므로 도살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늘 그렇듯 ‘도덕적인’ 법도 당신의 입맛에서 가축을 지켜내지는 못한다. 


 

당신은 고기가 연필이나 옷과 같은 제품처럼 생산된 것으로 여긴다. ‘죽은 동물’의 일부가 아닌 ‘쇠고기’, ‘송아지고기’, ‘돼지고기’를 먹는다. 살해된 소와 돼지와 닭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식품’으로 탈바꿈한다. 도살장이  ‘소리 지르는 기계’ 에 불과한 동물을 포장만 하는 곳이라 생각한다면 얼마나 편할까. 모르고 외면한다면, 사는 건 얼마나 편할까. 칼로 스테이크를 자르듯 도살장은 살아 움직이는 가축을 절단하고 있는 것이다. 모르니까, 정말 단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들을 떳떳하게 으깨고 조리하고 맛보는 거라고 해도, 나는 날 용납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느낀다. 도덕적 우월성에 뿌리를 둔 독선이라는 것은 차라리 이런 것이어야 마땅하다. 제발 동물이 식량이라는, 먹히려고 태어났다는 소리는, 진정 그것만은 동물들의 눈을 똑바로 보며 하라. 어서 내게서 그 두꺼운 낯을 치워라.

 

 


그들은 연민의 대상으로 삼는 대상들을 불쌍히 여기며 먹는다(올리버 골드스미스). 그렇지만 더 많은 ‘그들’은 연민조차 느끼지 않는다. 고기가 맛있다거나, 내 안에는 끊어낼 수 없는 폭력이 흐른다고 인정하는 편이, 도덕을 들먹이며 하는 고상한 체보다 훨씬 낫다. 돼지가 인간과 거의 동일한 고통을 느낄 것임을 뚜렷이 알고 있으면서도 ‘야채는 왜먹느냐’고 묻는 그 논리가 얼마나 자기기만으로 차 있는지, 당신 자신에게만은 시인하면 좋겠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데 동물의 권리를 주장하는 건 잘못된 우선순위라고 지적하기 전에-그 논리의 허술함을 차치하고라도-아무런 행동도 하고 있지 않은 자신을 먼저 반성하면 좋겠다. 나는 동물의 희생으로 배를 채우면서도 당당한 당신이, 설마 지구 반대편의 기아를 생각하며 밤마다 눈물을 흘리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할 수가 없다. 도저히, 그렇게는 생각이 되지 않는다. 생물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한 모든 사람들은 나치다(아이작 B. 싱어).



고기를 계속 먹는 것은 이 거대한 폭력에 스스로 안주하는 것이다. 나는 생명의 경외가 도덕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옳다’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를 굳이 구분하지 않는 자라면, 육식이 정당하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기를 바란다. 인간은 단지 영양소를 섭취하기 위한 존재인가? 혹여 영양소가 부족할 세라, 가축을 죽여 생명과 최소한의 존엄도 빼앗고 그 살점으로 자신의 살을 찌우며, 고집스럽게도 당신은 건강을 이야기한다. 이미 그 몸이 죽은 짐승의 무덤임을 모르는가? 고질적인 병에 시달리는 육식자들이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안다. 활기찬 채식자들이 있다는 것도 당신은 알고 있다. 채식자들은 애초에 당신과 다르게 만들어진 사람인가? 고기를 먹는 당신은 육식이 정당한 이유를 대지 못하면서, 내가-당신이 아닌-왜 채식의 근거를 논리적으로 늘어놓아야 하는지 의아스럽다.



닭을 키웠다. 우리를 알아보고 낯선 사람은 부리로 쪼았다. 그 닭이 저녁 식탁에 올랐을 때 나는 생각했다. 어느 닭은 거리낌 없이 먹으며 어느 닭은 가엾게 여기는 게 더 우습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더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외면했다. 내 ‘즐거움’을 위해 다른 생명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건 얼마나 큰 ‘고통’인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 이미 죽은 것과의 연대를 생각한다. 살아있는 우리 역시 연결돼있는 것이다. 채식은 생명에 가장 가깝게 다가서고 폭력의 소리를 끊는 삶의 방식이며, 자기변혁이다. 채식은 생명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체험이다. 채식은 인간 존엄성의 문제고, 생명의 존엄이 달린 문제다. 그래서 난 이렇게 건방지고 그래서 난 이렇게 까칠하고 그래서 난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언제나 육식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생각을 참을 수 없다. 동물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사람들은 너무나 무지하거나 냉혹하다. 무지는 죄악의 씨앗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헤아릴 수 없는 악을 낳고 있다. ‘부도덕한’ 범죄를. 당신은 도덕적이지 않다.



        동물들에 대해 친절함과 동정심을 가지자고 소리 높여 이야기했던 사람들 중 몇 사람만 인용하여도, 얼마나 많은 위대한 사람들이 그 중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들과 아름다운 자연 전체를 포괄할 수 있도록 동정심의 범위를 넓힐 것"을 당부하였다. 슈바이처는 "우리는 동물까지도 포함하는 경계 없는 윤리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하트마 간디는 "동물들을 대하는 태도를 가지고 그 나라 사람들을 판단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많은 유명한 사람들이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하여 거리낌 없이 말하였다. 피타고라스는 이러한 기록을 남겼다. "지구는 풍부하여, 깨끗한 음식, 피를 흘리거나 도살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진수성찬을 마련하고 있다. 야수들만이 고기로 배를 채운다"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우리는 싸우지 않으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것들로 배를 채우고 있다"고 말하였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고기를 먹는 것이 "정당한 이유가 없는 살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사람들 중 하나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가장 열정적으로, 고기를 먹는 사람들의 몸이 "묘지, 그들이 먹은 동물들을 위한 공동묘지"라고 규정하였다.

-제인 구달, <희망의 이유>

 

 

 

 

본래 겨냥하는 건 먹는 사람이 아니라 육류를 제품처럼 생산하는 기업이고,

타인의 삶에 채식 아닌 이유로 끼어든 적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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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은인같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아마도 안 읽으시겠지만.

    • 2010-05-16 14:45:33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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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2007년에 올라온 글에 2010년에 댓글을 다네요. 2007년에 처음 읽고 엄청나게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었는데. 처음으로 고기는 "고기"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던 때였죠. 이 문장들을 까먹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저렇게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이렇게 와서 다시 보네요. 제가 잊은 줄 알았던 문장들이 무의식을 톡톡 건드리면서 꼭 반기듯 이제왔냐며 손 내밉니다. 고기가 고기가 아님을 알고서부터 고기가 고통을 느끼는 주체임을 깨달은 지금까지 삼 년 남짓 걸렸고 그 사이 무수한 생명을 먹어치웠겠지만 이제라도 다행입니다.

    • 2010-05-16 14:45:28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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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샤마지끄

    육식 지양을 위한다는 공통점에 착안하여 써드린 말씀입니다. 루저님은 이 글을 올림으로써 잘못이 없다 이 말이죠. 물처럼님 말씀대로 이런 글은 자극적일 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 2007-04-08 20:28:53
    르샤마지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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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샤마지끄

    제가 하고 싶은 말은(저는 채식주의자나 과식주의자가 아닙니다.), 구부러진 숟가락을 펴기 위해서는, 숟가락을 펴기 위한 힘의 양보다 많은 힘을 주어야 한다는 것(물리에서의 벡터를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열에 아홉 이상의 수많은 육식주의자들 사이에서 루저님 한 분쯤 강력하게 육식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오히려 는 사회의 지침에 더 가깝게 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는 겁니다. 9라는 반대에서 사회적인 목소리를 키우기 위해서는 자극적인 방법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여기 댓글을 다신 모두가

    • 2007-04-08 20:28:02
    르샤마지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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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샤마지끄

    두 의견의 가장 큰 차이는 인간을 '최고등생물로서 육식을 취하되 동물존중에 신경을 쓰도록.'의 관점과 '다른 생물들과 평등하다고, 또는 월등하다고 말할 수 없는 존재. 그러므로 현실의 무감각한 육식을 대폭 지양해야 한다.'정도로 나눌 수 있죠?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개념과 용어의 명확화. 즉, 인간의 위치에대한 본질적인 탐구가 없이(세계사적 철학으로 보았을 때도 상당히 예민한 부분이라 분명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토론이라 합을 추려내기가 어렵습니다.

    • 2007-04-08 20:25:30
    르샤마지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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