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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흥길작가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를 읽고

  • 작성자 프리러브
  • 작성일 2009-08-22
  • 조회수 5,747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를 읽고

 

 

사람이 가난하게 살게 되더라도 꼭 지켜야 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지하철에서 가끔씩 보게 되는, 동전 몇 푼이 들어 있는 조그마한 바구니를 앞에 두고 계시는 분들을 보게 되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하루 수입도 별로 안 될 것이고 관심 가져 주는 사람들도 얼마 없을 것인데 그저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분들... 갈수록 삭막해져가는 도시에서, 모르긴 몰라도 이말 저말 많이 들으셨을 것이다. 실제 주변에서 그런 분들을 지나쳐가며 “얼마나 게으르면 일도 안하고 저러고 있을까?”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본 적이 있으니까... 그럴수록 그분들에게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하나 둘 생겨난다. 어째서 이렇게 되셨나요, 일을 구해보려고 하지 않으셨나요, 사람들의 시선이 어처구니없지는 않으신가요, 하루 수입은 얼마나 되나요... 내가 궁금한 것이 많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는 이유는 그 분들에게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지폐를 넣어드려도 정말로 못 보신 건지, 눈을 감아버리신 건지 아무 반응도 없는 분들께는 티끌만큼의 자존심이라도 남아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권씨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록 전과자이고, 여럿 딸린 식구들과 함께 온갖 눈치 다 보며 문간방 살이를 하고 있는 처지이지만 그의 구두는 그의 여느 옷들과 달리 언제나 반짝 반짝 빛이 난다. 공사장에서 막일을 할 때에도 그는 꾀죄죄하지만 사무원 복장에 역시 빛나는 구두를 신고 있으며, 그의 집 안에는 흔히 귀중품이 놓이는 자리에 구두 아홉 켤레가 늘어져 있기도 하다. 매일 구두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닦아대는 권 씨의 행동은 일반적인 시민의 대표인 오 선생이 봤을 때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자존심이 상할 때마다 바지춤에 구두를 문질러 닦아대던 권씨, 마지막에 초보 강도로 오 선생의 집에 침입한 그는 결국 아홉 켤레의 구두만 남긴 채 사라져버린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에는 그가 시시때때로 밝히는 학력이나 본관, 그리고 자꾸 의식하는 구두가 참으로 쓸 데 없다고 생각했다. 곧 네 명이 될, 딸린 가족 세 명을 부양하기 위해 권 씨에게 당장 급한 것은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된 돈이다. 아무리 그가 좋은 대학을 나와도, 본관이 좋기로 유명하다고 해도, 구두가 광이 난다고 해도 당장 먹을 밥이 없고, 아이를 낳는 것이 위험하다면 식구들 모두가 죽을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이런 상황에 처했는데도 돈을 빌리러 다니지도 않고,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며 직장을 그만둬 버리며 그 와중에도 술에 취해 오 선생에게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일 아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정말 중요한 게 자존심은 아니라고 보고, 차라리 사람들한테 구걸이라도 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권 씨의 입장에서 이 소설을 이해하려 했을 때에는 그렇게 권 씨를 비판하던 나조차도 권 씨를 이해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이 소설이 쓰였다고 했으니 권 씨를 30대라고 가정한다면 권 씨는 1940년대에 태어난 사람일 것이다. 1960년대쯤 그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대학을 다녔을 것이며, 지식인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당당히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것이다. 틈나는 대로 구두도 사고, 광을 내면서. 지금에야 어지간하면 가는 곳이 인문계 고등학교이고, 또 그에 따라 대부분 자연스레 가는 곳이 대학교이지만 우리 부모님께서 다니신 1980년대에도 대학은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니 1960년대에는 아무리 서울 출생이어도 웬만한 지식인 아니면 대학은 꿈도 못 꿨을 것이다. 그런 지식인에다 유명한 안동 권 씨 집안, 또 서울 태생이었다는 사실은 권 씨로서 어깨에 힘이 들어갈 만한 자랑거리였을 것이다. 가난한 생활도 그 자부심을 표현해주는 구두를 닦으며 헤쳐 나갈 수 있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유일한 삶의 위안인 그의 자존심, 그게 오 선생에 의해 무너져 내렸을 때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꺼낸 수술비 이야기. 일반적인 부탁을 거절당했을 때 느끼는 무안함과 부끄러움 이외에도 지독한 수치스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아내와 아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에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오 선생이라는 작자에게 실망과 분노를 느꼈을 것이고, 또 막막한 앞길, 상처 입은 자존심... 그가 술김에지만 강도가 된 이유도 역시 그곳에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가 작품 말미에서 이야기한 “이래봬도 나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오.”라는 한 마디는 그 감정이 뒤섞인 울분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다시 ‘사람이 가난하게 살아도 끝까지 지켜야 할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물론 이것마저 버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일지도 모르겠지만, 역시 ‘자존심’은 끝까지 지켜져야 할 것 같다. 굳이 학벌이나 본관과 같은 것에서 오는 자존심이 아니라도, 최소한 사람들에게 남아 있어야 할 ‘인간’이라는 자각, 그것까지 자존심이라고 본다면 그 어떤 누군가가 그들을 깔보고 무시할지라도, 그들에게 살아갈 위안을 주는 것은 그들만의 자존심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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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에요~ 과찬이십니다 ㅠㅠ 저야말로 두분 글을 보고 많이 배우는걸요...!

    • 2009-08-23 23:16:16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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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력이 상당하시네요. 많은 것들 배우고 갑니다.

    • 2009-08-23 13:09:5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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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을 잘 쓰시네요.

    • 2009-08-22 19:04:34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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