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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리는 머리카락과 인권

  • 작성자 밥공기
  • 작성일 2010-01-25
  • 조회수 10,138

많은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오가는 복도에 수많은 머리카락이 잔뜩 떨어져 있다.

선생님은 손에 가위와 바리깡을 들고 있다. 줄지어 서 있는 학생들은 금방이라도 울 거 같은 표정 짓고, 마침내 짧아진 머리를 감싸고는 퉁퉁 부어버린 허벅지 때문에 교복이 허벅지에 스칠라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교실에서는 뜨거워진 허벅지를 식히기 위해 책상다리에 허벅지를 대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학교 또 다른 풍경이라 하겠다.

두발규제가 일제 강점기의 잔재라는 건 더 떠들면 입이 아플 정도로 다 아는 사실이다.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행해졌던 단발령을 학생에게 강요하는가?

일제 강점기를 우리 역사의 크나큰 치욕으로 남기면서 말이다.

당시 조선에게 강제로 단발령을 내려 칼을 들고 조선인의 상투를 자르는 일본 순사의 모습과 억울하게도 잘려나간 머리카락을 눈 앞에 두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조선인의 모습은 마치 지금의 그것과 흡사하지 않은가?

대체 왜 어른들은 학생의 머리에 그토록 집착하는가? 어디 변명을 한번 들어보자.

"학생들이 머리가 길면 학업에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들의 가장 흔한 변명이다.

매사에 논리적이고 냉철해야 하는 선생님들이 이런 발언을 하는 건 좀 우스운 일이라 하겠다.

머리가 긴 학생들이 공부를 못하고 머리가 짧은 학생들이 공부를 잘한다는 통계가 어디 있던가.

공부 잘하는 엘리트들이 많다는 '외고'는 상당수가 두발자유를 표방하고 있다.

또한, 학업에 집중할 수 없다고 하여 학생들의 머리를 자르는게 정당한가?

일부 선생님과 어른들의 생각은 인권보다 학업이 우선인가?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 되야 할 것이 인권이라 배웠다. 선생님들에게 말이다.

"학생은 학생의 본분에 충실해야 합니다,"

학생의 본분은 머리를 짧게 자르는 일인가?

학생의 본분은 공부인가? 라는 대답에 고개를 끄덕일수도 있다.

하지만, 공부와 머리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머리의 길이와 가방끈의 길이는 반비례 하지도, 비례하지도 않는다.

단지 머리의 길이는 머리의 길이일 뿐.

"학생들의 머리가 길면 학교의 위상이.."

많은 보수적인 어른들은 길거리에 머리가 긴 학생들을 보고는 혀를 끌끌 찬다.

예컨대 "학생이 무슨 머리가 저렇게 길어가지고 무슨 학생이람..쯧쯧" 따위 말이다.

학교는 어른보다 학생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학교는 학생들이 올바른 인성교육을 위해 다니는 곳이지 어른들에게 훈훈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신체 일부분에 불과한 머리카락 조차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다면 학생은 과연 국민이란 말인가?

헌법은 나라를 위해 존재하고, 나라는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교칙은 학교를 위해 존재하고, 학교는 학생들을 위해 존재한다.

학생들이 최우선시 되어야 할 학교에서 왜 학생들이 당연하지만, 간절히 원하는 일에 그토록 기를 쓰며 반대하는가.

"천부인권"이라는 말이 있던가.

인간이라면, 다른 조건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인간이라면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 가지고 있는 권리이다.

살인자와 같은 범죄자의 천부인권도 지켜주는 세상이다.

학생들에게 천부인권은 어디로 갔는가? "학생"이라는 이름이 살인자라는 이름보다 큰 죄악을 지닌 이름인가? 대한민국에서 "학생"은 살인자보다 못한 존재인가?

흔히들 학생을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기둥이라고 한다.

나라가 미래의 기둥에게 범죄자보다 못한 만큼의 인권을 주는데 어떻게 기둥이 버틸 수 있을까.

학생들이 빨간 머리에 폭탄 맞은 머리를 한다고 해서 그게 타인에게 어떠한 피해를 주는가?

학생들의 머리가 타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가? 그 이유 때문에 학생들의 머리를 규제하는가?

10대가 하면 죄요, 20대가 하면 무죄인가?

일부, 아니 대부분의 어른들과 선생님들이 가진 고정관념이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그들을 무참히 짓밟는다.

"폭력은 무엇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유난히 선생님들에겐 적용되지 않는 것 같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자신들의 교편에 대해 존중해주길 바란다면, 선생님들 역시 학생이기전의 하나의 개인에게 최소한의 인권 정도는 보장해주어야 수지타산이 맞지 않겠는가?

상호존중은 민주주의 사회에 큰 덕목이 아니겠는가. 왜 그토록 좋은 일을 선생님들이 기를 쓰고 막는지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나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타인의 권리를 먼저 존중해주어라. 라고 분필을 들고 칠판에 적었던 선생님이 생각난다. 수업이 끝난 후 분필이 아닌 바리깡을 들고 친구들의 머리를 잘라버리던 선생님 말이다.

왜 학생들은, 아니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범죄자조차 인정받는 인권조차 존중받지 못하는가? 

밥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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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밥공기
  • 200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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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댓글이 엄청나군요. 문제점을 제기하는 데에 공감하는 이들이 이토록 많다는 것은 생각하며 살아가는 친구들이 많다는 뜻도 되겠지만, 우리 학교현실이 너무나도 팍팍하다는 뜻도 되겠지요. 여러분의 비판과 한탄과 아픔에 공감합니다. 하지만, 비평글방에서는 ''문제제기''에서 그치는 글은 아직 반쪽의 날개밖에 달지 않은 아기독수리가 알에서 깨어나 바로 하늘로 날아오르겠다고 퍼득이는 모습과 같습니다. 댓글다는 친구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대책이나 제안을 3가지 정도 정리해 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앞으로 어떤 자리에서든 건의하지요.

    • 2010-01-29 20:37:36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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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모든 인간의 눈을 뽑아내야지 비로소 해결될 문제인 듯. 서대문 교육청앞에서 두발규제/교복 관련된 시위만 2년 넘게 했습니다. 글쎄요, 정권이 바뀌더니 더욱 씨알도 안 먹히는 신세네요. 겉모습이 그 인간의 모든 걸 내비친다고 생각하는 낡아빠진 어르신들때문에 대부분의 십대들은 6년이란 긴 세월을 억압받습니다. 지금이 언젯적 시대라고 아직도 애들 머리길이 옷길이 잡고 늘어지는지 참 선생들 보면 한심합니다. 학주는 애들한테 두려운 존재로 다가서는게 참 즐거운 모양인가보죠. 한국 중고등학교보면 우스워 죽겠네요.

    • 2010-01-29 16:19:27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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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반쪽날개/ 네 그렇군요..^^

    • 2010-01-27 18: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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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루비 님 // 헌법에서 정의한 신체의 자유는 아니었구요 ㅎㅎ 그냥 관념적으로 쓴 말입니다. 누구도 우리 몸에 대해 제약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적어봤답니다. 정리 감사드립니다.

    • 2010-01-27 18:27:33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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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반쪽날개/ 혹시 헌법에서 정의하는 신체의 자유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헌법에서 정의하는 ''''신체적 자유''''는 체포와 구속에 관한 개념입니다. 아래 댓글을 안 읽으셔서 그런 듯하지만 이미 아래에서 언급되었구요^^; 예, 두발 규제의 문제에 대해 논하고 있었고 유교 윤리에 관한 문제는 토론 중 사용된 개념을 정리하는 과정이었습니다. 학교가 학생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말한 것은 제가 아니라 황찬익 님이 궁냥궁냥의 글에서 언급하신 부분 같군요.

    • 2010-01-27 18:01:2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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