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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을 걷기 위해서. <현실의 대한민국 학교를 바라보며>

  • 작성자 희희희
  • 작성일 2012-01-11
  • 조회수 5,881

 

나의 길을 걷기 위해서. <현실의 대한민국 학교를 바라보며>


 0. 불쌍한 인생

  난 올해로 만 17살, 대한민국 인문계 고등학교의 고3 수험생이 되었다. 겨울방학이지만, 그리고 보충수업을 거부하고 집에 틀어박혀 매일 하릴없이 영화를 보는 게 일이지만, 지금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 아이들만큼이나 걱정과 고민이 많다. 주변에서는 등급, 점수, 대학, 선택과목, 독서실 등의 얘기로 그득하다. 내가 그런 화두를 전혀 즐기지 않음에도 이제 고3이 되었다는 죄목(?) 하나로 어쩔 수 없이 나누게 되는 이야기 소재들이다.

  지나친 자기애는 이기주의로 전락하기 쉽고, 나 또한 별 것 아닌 것에 자기연민을 과하게 불어넣고 싶지는 않지만, 요즘 나는 내가 정말 불쌍하다고 느낀다. 내 친구들 또한 자신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끔찍하지 않은가? 자신들의 삶을 불쌍한 삶, 안타까운 삶으로 규정하고 내면화할 수밖에 없는 현실.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고 해도, 또 사는 것이 원래 고통의 연속이자 불행이라고 쳐도 이건 좀 슬프다. 행복을 추구해야 할 인간이, 더군다나 이제 열일곱 열여덟인 우리들이 벌써부터 우리의 인생을 불쌍하다고 여기는 현실이 안타깝다. 왜인지 생각해보니, ‘무언가가 우리의 삶을 갉아먹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답이 나왔다. 그래. 우리가 늘 당연시 하며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했던, 혹은 문제라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순응하고 타협했던 것들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것들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인간’이기에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들을 무시당했다. 그 무시는 은폐된 채로. 그리하여 그 종자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더욱더 굳건하고 탄탄히 유지해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이 별 것 아닌 것이 절대 아닌데도 ‘별 것 아닌 문제’로 치부되고, 오히려 그게 너무나도 당연한 듯 여겨지는 이 사회를 보며 매일 울음을 삼키는 것도 이제는 신물 난다.

  

  1. 교육제도

  우리의 삶을 갉아먹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나라의 교육제도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대학 입학의, 대학 입학에 의한, 대학 입학을 위한’ 이 나라의 교육제도 말이다. 우리나라의 대학들은 서열화 되어있다. 말 그대로 ‘학벌사회’다. ‘스카이’, ‘인서울’, 심지어 ‘지잡대’라는 용어들만 봐도 대학으로 개개인의 직위를 나누고 차별을 두는 이 사회의 풍조를 엿볼 수 있다.

  물론, 학생은 ‘공부를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공부를 하다보면 저절로 대학을 가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을 보면 그렇지가 않다. 우리나라의 학생들은 ‘점수를 받아오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이 사회가 학생에게 묻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른들에게 여쭤보고 싶다. 자신의 아이들에게 “어떤 것을 배웠니?”, “그걸 공부하면서 어떤 걸 생각하게 되었니?”라고 물은 적이 많은지, “몇 점 받았니?”, “몇 등 했니?”, “어느 대학에 갈 수 있니?”보다 많은지. 가치가 전도 되었다. 이런 교육에서 나온 숫자 몇 개가 한 개인의 지적능력을 판단하고 평가한다. 그리고 그 숫자로 입학한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또 엇비슷한 수치화된 자료가 나의 남은 인생을(정확히 말하자면 계급과 신분을) 규정짓는다.

  나는 우리의 삶이 진짜 배움과 참교육을 갈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녕 내가 무언가를 알고 싶어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의견에 동의한다. 그래서 최근 들어서는 ‘대안학교’와 ‘혁신학교’, ‘홈스쿨링’과 같은 새로운 교육에 대한 논의도 늘었다. 하지만, 여전히 매년 대한민국의 60만 명에 육박하는 수험생들이 수능 시험을 보고 대학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 과정이 너무도 고단하다. 한 교실에 적어도 30명이 넘는 아이들이 차례로 줄 세워지며, 등수의 앞자리 수를 줄이기 위해 영어단어를 몇 개라도 더 암기해야 하고, 수학 공식을 더 외우는 경쟁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에게 교사들은 ‘너희의 경쟁 대상은 옆에 앉아 있는 친구가 아니라 전국의 아이들이다.’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계속해서 토해낸다. 그 토사물을 꾸역꾸역 내면으로 집어넣으며 악착까지 버텨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아이들이다.

  아마 우리나라의 교육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인간들은 없을 것이다. 뭔가 기형적이고 파행적이라는 사실은 누구나가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부모들은 자신들의 아이를 행복하게 공부시킬 수 있다는 ‘대안학교’에 들여보내고 싶어도, 아직 이 사회의 시선들이 곱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 애가 미래에 좋은 직업을 갖지 못할까봐 두려워 포기한다.(물론 그런 부모들보다 ‘특목고’와 ‘자사고’에 아이를 들여보내고 싶어 하는 부모들이 훨씬 더 많겠지만.) 교사들은 ‘어쩔 수 없다’, ‘지금 당장 바꿀 수 없다’라는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말들만 되풀이하는 타성에 젖은 지 오래다. 그리고 그 어른들 밑에서 가장 고통 받는 아이들은, 무슨 말이라도 할라 치면 묵살 당하고, 매를 맞는다. 참아라, 견뎌라, 조금만 버텨라, 라는 말을 들을 뿐이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디로도 물러설 수가 없어 그 잔인한 경쟁의 장에, 모순적인 살생 게임에 (아무리 큰 회의를 느낀다 하여도 결국엔) 들어서는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는 불합격을 하여 절망하고, 그의 불합격을 전제로 한 나의 합격은 ‘지난 노력의 산물’이자 ‘아름다운 결과’로 둔갑된다. 다른 길이라는 게 없다. 다른 길이 있다 해도, 그 길을 걸을 경우 대부분이 무시 받고 외면당한다. 각 개인의 재능과 관심을 모른 척하는 이 사회의 문제를 다름 아닌 학교에서 가장 잘 목격할 수 있는 것이다. 대학 가지 못해도, 혹은 가려 하지 않아도 무시 안 받고 자신의 꿈을 인정받는 사회여야 하는데, 이 사회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특기생’, ‘예체능 학생’이라면 공부를 못해서 그 길을 선택했다고 보거나,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고 보는 현실이 그러하다. 결국 이 사회에서 재능은 두 가지 차원으로서밖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발견되지 못하거나, 밟히는 차원으로서.

  김규항이 말했듯 “보수엘리트 부모들은 아이가 일류대학생이 되길 바라고, 진보엘리트 부모들은 아이가 진보적인 일류대학생이 되길 바란다.” 결국 진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자기 아이가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거나 소위 잘 나가는 대학에 들어가게 된다면 용돈을 더 주거나 맛있는 음식을 사주는 영락없는 대한민국의 학부모들인 것이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며 아이들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공부하길 닦달하는 분들에게 또 하나 여쭤보고 싶다. 그 공부가 지극히 교과서에 나오는 협소한 내용들을 주입식으로 단순 암기하며 밤 10시, 늦으면 12시까지 학교에 남아 ‘감독’받으며(나는 ‘감시’라고 생각하지만.) 자습하게 하는 것이면 문제 아닌가? 학교 마친 그 늦은 밤에도 또 과외를 받고 학원을 가는 데도 여전히 성적에 대한 고민과 불안이 하루하루 줄지 않고 오히려 더해진다면 문제 아닌가? 그 공부가 이미 점수 올리기, 등수와 등급 올리기로 전락했다는 사실은 문제 아닌가? 대체 어디까지 가야, 얼마만큼 해야 ‘이건 문제다’라고 인정할 것인가?

  아이들은 점수가 잘 나온 것에 기뻐하지, 자신들이 배운 것을 잘 활용해서 기쁘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다. 나의 예를 들자면, 나는 수학을 정말로 싫어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많은 문제들을 떠안고 있는 교육제도에서 나온 수학’이 싫기도 한 것이다. 시험 거부, 대학 거부 말이 많지만 애초에 그것들이 제 기능과 역할을 진정으로 수행했다면, 우리의 교육이 시험과 대학에 천착하지 않고 여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체제와 환경이었다면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사회는 자발적으로 시험 응시의 여부를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하지 않더라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보는 인식이 기저에 있는 사회겠지.) 내가 매일을 고민하고 우는 이유는, 그냥 ‘시험’, 그냥 ‘대학’ 때문이 아니라 이런 교육제도에서 파생된 ‘이런 시험’, ‘이런 대학’이여서다.


  2. 두발과 복장규제

  우리의 삶을 갉아먹는 둘째인 ‘두발과 복장규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최근 ‘서울학생인권조례’가 어렵사리 성사되면서 학교에서의 민주주의가 조금이나마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나 싶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 이대영 부교육감에 의해 재의 요구가 신청되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우리나라의 인권감수성이 얼마나 수준이 낮은지를 알 수 있다. 더군다나 ‘교육’을 연구하고 논한다는 이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이라 더 무섭다. (물론 학교의 교사들을 통해 그런 무서움을 느낀 적이 많긴 하지만.) ‘서울학생인권조례’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학생도 사람이고, 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가 되겠다. 근데 그 말이 다수에게 동의를 얻는 데까지 너무도 오래 걸렸다. 그 뿐만 아니라 ‘학생도 사람이고, 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의제기마저 나오는 현실!

  그 현실을 대변하는 것처럼 여전히 ‘교칙’, ‘규정’이랍시고 전국의 학교들에서 매서운 힘을 발휘하고 있는 두발과 복장규제에 대해 논하고 싶다. 두발과 복장규제는 명백한 기본권 침해다. 헌법에 명시된 ‘신체의 자유’, ‘표현의 자유’, 행복추구권으로써 ‘개성 발현권’에 모두 위헌이다. 게다가 ‘기본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이다. 헌법에 명시된 바로는 ‘국가안보, 질서유지, 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만 법률로써 제한 가능하다’고 하는데, 두발과 복장규제가 국가안보, 질서유지, 공공복리를 위할 리는 전혀 없고, 무엇보다 ‘법률’로 만들어진 경우에만 제한이 가능하다지 않은가.

  교육제도에 관한 이야기에서 언급했듯, 교사들은 이 나라의 교육제도에 대해서도 ‘어쩔 수 없다’, ‘지금 당장 바꿀 수 없다’라고 말한다. 학교 내의 반인권적인 규정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레퍼토리로 응수한다. 이미 정해진 것이니 ‘안 따르면 너희들만 손해’, ‘우리 때도 그랬다’라는 식이다. 듣다보면 참 어이가 없다. 잘못 됐으면 고쳐야지 따르긴 왜 따르라는 건지. 그렇게 고치는 걸 미루고 따르기만 하다가 후세대까지 그걸 물려주려고 그러는 모양이다. 당신들의 기성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당신들이 그러고 있는 것처럼. 당신들 때도 그랬고 지금도 이런 게 잘못된 것 아닌가? 그래서 바꿔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떤 사람들은 학교공부를 열심히 하기 위해서는 두발과 복장규제가 불가피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난 애초에 성적과 두발-복장에 상관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관련 있다고 치더라도, 성적을 위해 인간의 인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오류다. 무엇보다 학생들을 공부만 하는 기계로 보는 인식이 기저에 있으니 그런 말들이 나오는 것이다.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는, 개개인의 개성을 짓밟고 규제를 강요하는 일종의 전체주의 논리를 내세우며 머리 길이와 치마 길이와 외투 색깔까지 지정해주는 아주 ‘친절하신’ 우리나라 학교들. 공부를 교과서와 문제집에 나오는 지극히 협소하고 획일적인 개념으로서밖에 생각하지 않으니 이런 인권탄압 문제에서도 모자란 인권감수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내가 나에게 맞는 옷을 입고 내게 어울리는 머리 모양을 찾는 것, 어떻게 입으면 옷맵시가 사는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 또한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나다운 미(美)를 추구하는 것도 다 공부인데 말이다.

  


  3. 체벌과 상벌점제

  최근, ‘학교폭력’이 전보다 훨씬 부각되면서 학교 내의 집단 따돌림과 폭력을 근절시켜야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 ‘이런 애들은 매로 다스려야한다’, ‘폭력으로 군림하는 자에게는 폭력이 답이다’라는 댓글들이 다수의 네티즌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을 정도다. 물론 나는 ‘학교폭력’이 이슈화되면서 많은 이들의 관심을 얻고 논의가 되고 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분명 중요한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식의 방향에는 조금 회의적이다.

  학교는 이 사회의 축소판이다. 그리고 이 사회는 ‘다름’에 대해 배척하는 정도가 다른 사회보다 심하다. 그런데 이 사회 전반에 만연한 ‘왕따문화’는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고 무턱대고 ‘어린 것들이 어떻게 저런 짓을 할 수가 있느냐’는 식으로 나오는 이들을 마주하게 되는 현실에 한숨만 나올 뿐이다. 오늘 트위터 타임라인을 보다가 한 역사학자의 트윗을 읽었는데, 맞는 말이다 싶어 인용해본다.


‘어린 일진’은 100원 주면서 “빵이랑 이것저것 사 오고 나머지는 너 가져”라고 한답니다. 생계비도 안 되는 임금 주면서 궂은 일은 다 시키는 ‘어른 일진’이 아니면 누구에게 배웠겠습니까.


모든 것은 어른들 탓이다! 라는 맹목적인 원망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각 가정과 학교를 보면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다는 것을 쉬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훈계’랍시고 ‘어른이 아이를 때리는 것’을 너무도 당연시 여기지 않는가.

  체벌에 대해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자. 체벌은 순간 일어난 문제를 손쉽게 매듭짓고 교사가 아이를 편하게 통제하기 위한 한시적 대책으로서-대책도 아니지만.- 자행되어왔다. 이 문제는 우리 사회 전반에 존재하는 ‘위계질서’라는 것에 기인한다고 보는데, 결국 체벌은 ‘나이 혹은 신분에서 소위 연장자나 강자가 나이 적은 사람이나 약자를 때리는 것이 쉽게 가능하고,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의식을 당연시하며 그것에 쉽게 편승함으로써 촉발된 일종의 ‘폭력’이다. 친한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장난 식의 주먹다짐도 아니고, 친한 사이더라도 가끔은 진심으로 화가 날 때가 있는데, 학교에서 벌어지는 체벌의 대부분은 그런 수준에서 그치는 것도 아닐뿐더러, ‘교육현장’이라는 곳에서 그 행위를 무탈하다고 여기며 행사하는 것이 과연 교육적인 것인 걸까? 오히려 반교육적, 비교육적 행태가 아닌가.

  실제로 많은 이들이 학창시절 체벌을 받고 자신의 행위에 반성한 적이 있었느냐, 라는 물음에 거의가 ‘없었다’고 답했다. 나 또한 되돌아보면 그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누가 누구의 잘못에 대해 ‘때린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왜 나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규제가 ‘맞아야한다’까지 연장 되는 것인지. 결국 잘못을 한 뒤 체벌을 받고 다시는 그 잘못을 하지 않았다면, 그건 단순히 체벌을 피하기 위해서지 ‘내가 잘못 했구나’하고 ‘반성’했다고 보기는 힘든 것이다. 근본적인 대책이 아니란 말이다.

  체벌이 문제로 부각되자 대안으로서 등장한 것이 바로 생활평점제(상벌점제)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본질적으로는 체벌과 다를 바가 없다. 규정들을 정해놓고 아이들의 생활, 태도, 모습에 점수를 매긴다는 것이다. 근데, 누가 누구의 행동에 벌을 주고 상을 주고 한다는 건지? 18년간 성장하며 만들어져온 ‘나’라는 수백 수천 명의 인격체를 겨우 학교와 기성세대들이 보기 좋은 아이로 길들이기 위해 만든 제도 아닌가. 그래서 아이들은 아무리 추워도 학교에서 지정한 날짜부터 자켓을 입어야 하고, 체육복과 교복을 상하의로 나눠 입어서는 안 된다. 대체 어떻게 그것이 ‘교육’이고, ‘질서’를 가져다주는 것이란 말인가!

  상벌점제는 결국 체벌로 자행되던 악습을 명문화 한 것에 불과하다. 그에 더해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논리로 규정들을 상정하고서는 그에 미치지 않으면 ‘니가 어떤 환경과 사정과 성격을 지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규정 어겼으니 가차 없이 벌점 1점, 탕탕탕! 빠이!’로 아이들의 자유와 마땅히 누려야 할 인권을 탄압하고 억제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체벌을 금지한다고 상벌점제를 시행했으면서도 교사들마다 기준을 다르게 적용하는 것, 상쇄 프로그램에서 한 시간 동안 눈 감고 의자에 서 있게 하는 간접체벌을 한 후 청소를 시키는 등의 부차적인 문제 또한 엿보인다. 이름 바뀌고 표면적인 방식도 변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체벌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4. 글을 마무리하며.

  글을 쓰면서 자주 분노했다. 나는 나의 삶이 가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 사회는, 이 나라의 어른들과 학교는 그것을 이해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길이 있는데, 그래서 나는 그 길을 걷는 중인데, 갑자기 내 길에 쳐들어와서는 마라톤을 뛰어보라고 종용한다. 난 원하지 않는데 말이다.

  나는 내가 불쌍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나는 내가 불행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자신들의 인생을 불쌍하다고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이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무엇보다 지금 내 앞에 닥쳐있는 교육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고, 그에 대한 나의 견해를 피력하고, 대안을 모색할 것이다.

  수능까지 열한 달이 남았지만, 그런 것 상관없이 나는 내 삶에 주어진 길을 더 열심히 걸을 생각이다. 가다가 심심하면 옆에 세워진 나무 이파리도 보고, 향그러운 꽃내음도 좀 맡아보고, 벤치에 앉아서 낮잠도 좀 자다가, 그렇게 끝으로 도착하고 싶다. 내 인생, 내가 행복하고 싶다. 더 이상 우리 삶을 갉아먹는 것들에게 내 인생을 팔고 싶지 않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조금이나마 사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바라는 좋은 세상이 오기는 올 런지 잘 모르겠지만. 조금이나마. 조금이나마 더.


 *비문이 많아 수정하여 다시 올립니다. 그래도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이 보이네요. 흑흑.

희희희
희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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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유교적 체벌 방식이 사라지면 법의 잣대를 들이대야한다고 말씀하셨죠. 네, 일단 체벌이란 것 자체가 초중등 교육법에 명시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체벌을 한다는 것이 이미 법을 들이댄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전과로 남습니다. 생활기록부는 뭐가 되는 거죠? 생활기록부에 학생 일탈 행동이 일일히 적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건 50년(맞나요?) 동안인가 계속 따라다니면서 취직, 사회생활 등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군요.

    • 2012-01-21 00:3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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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17세에게 참정권을 주자는 것은 성인이 될 것을 대비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수업시간에 정치에 참여해야한다, 투표는 민주주의의 꽃 어쩌구~ 해봤자 몸으로 겪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법입니다.

    • 2012-01-21 00:2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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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시계님이 '15-17세 참정권'에 대한 물음은 제가 한 번 답해보겠습니다. 일단 17세 참정권이라는 가정 아래, 청소년에게 직접 참정권을 주는 것만큼 좋은 교육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청소년들에게 정치적관심과 지식, 판단 능력이 문제가 된다고요? 그렇다면 한 가지 묻겠습니다. 우리나라 제도상 실질적인 참정권인 투표권은 20세부터 주어집니다. 그러면 20세가 되면 정치적관심과 지식, 판단능력이 저절로 생겨나나요? 이 판단능력 모두 직접 투표에 참여하고, 정치에 관심을 가짐으로서 배우게 되는 겁니다.

    • 2012-01-21 00:2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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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글틴에서 활동하셨던 블랙피에로라는 필명의 분이 쓰셨던 글, 와 을 굉장히 공감하며 읽었는데, 그분의 글들도 찾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

    • 2012-01-19 14:2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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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정권에 대한 문제는 저도 늘 어렵게 느끼는 부분입니다. 작은시계님께서 물음으로서만 의견을 내주셨는데, 정확히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네요. 무엇보다 여전히 우리가 해결해나가야 할 문제들은 많고, 저는 지식이 얕거나 생각이 부족하네요. 제 글에 대해 아쉬운 점이 많았는데, 여러분께서 또 다른 문제제기와 의견을 내주시니 짧게나마 댓글로 제 의견을 더해봤습니다. 여전히 '대안을 모색하는 길'은 어렵군요. T-T 그래도 고맙습니다. 앞으로 더 많이 의견을 공유하고 소통했으면 좋겠네요.

    • 2012-01-15 02:4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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