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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고 싶었던 인간, 오바 요조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읽고)

  • 작성자 구테본
  • 작성일 2013-11-16
  • 조회수 4,940

대다수의 사람이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완벽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 사실이다. 무엇보다 인간은 이성뿐만이 아니라 감정, 충동, 욕망 등 비합리적 요소를 두루 갖춘 존재이며 이에 따라 인간의 행동은 항상 합리적이지만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거지에 있어서 이성의 지배를 실현하지 못하고 비이성적인 충동, 고뇌 따위에 휩쓸려 행동하는 사람을 보고 ‘나약하다’ 라고 말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나약함은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르나, 오래전부터 나약함은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으며, 나약한 사람들은 의지박약이라는 등 부정적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모든 인간은 그 정도만 다를 뿐, 나약하며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다. 고백하지만 나도 이런저런 걱정과 고민을 하며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에 대해 뼈저리게 느꼈었다. 아무튼, 이런 점에서 다자이 오사무가 자신을 ‘오바 요조’라는 인물에 투영시킨 자전적 소설 「인간 실격」에서의 요조는 나약함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이며,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나약함을 극도로 표출하면서, 독자에게 위안을 주기도 한다.

요조는 순수한 인간관계를 갈망하지만, 인간에 대한 불신 때문에 인간관계를 맺기 두려워하며, 또 인생의 뜻 없음을 느끼는 인물이다. 요조의 불신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시작한다. 그는 어렸을 적 친척들이 지인의 연설을 듣고, 연설에 대해 거센 비난을 하면서도 지인 앞에서는 알랑거리는, 위선적인 모습을 본 후,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불신을 가진다. 게다가 그는 어렸을적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원숭이에 빗대기도 하며, 낮은 자존감을 보여준다. 아무튼, 어렸을 때의 이런 경험은 그로 하여금 인간관계를 두려워하게 하며, 타인과 마주할 때 익살꾼이 되게 한 이유이다. 익살로 상호 간의 긴장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모습과 낮은 자존감은 그가 인생을 어렸을 때부터 아무런 뜻 없이 살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목적 없이 그는 인생을 살아가며, 고등학교 때에는 잠시나마 자신에게 안락함과 편안함을 주는 술과 여자에 빠지기도 하고, ‘동지’들의 편안한 분위기가 좋아서 당시 거센 비난을 받던 비밀 공산당 조직에 가입하여 중심인물로 활동하기도 한다. 사실 그는 두려움에 인간관계를 거부하면서도 그 누구보다 순수한 인간관계를 갈망했던 사람이다. 실제로 그는 어린이의 순수성에 감동하기도 하며, 다방에서 그를 편견 없이 바라보아 주던 순수한 소녀를 만나 결혼하여, 충성을 다짐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결혼 후에도, 술을 끊으려고 시작한 모르핀에 중독되는 등, 나약함을 극복하지 못한다. 결국, 그는 주위 사람들에 의해 정신병원에 갇히고 그는 충격을 받은 채, 자신을 ‘인간 실격’이라고 말한다.

소설이 1인칭 고백체로 쓰여있기 때문에 그를 따뜻하게 이해할 수 있는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는 정신병자가 아니다. 비록 인간관계에 대한 편집증, 약물 중독 증세 등을 보이긴 하지만 그정도는 많은 사람들 역시 갖고 있는 것 아닌가. 오히려, 그는 의지가 부족한 나약한 인간의 전형이며, 약간의 윤리 의식이 부족해 일탈을 저지르는 것 뿐이다. 비록 그가 그의 일탈적인 행동으로 가족이나 주변사람에게 골칫덩어리이기도 했지만, 순전히 그러한 행동들은 남에게 해끼치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안위를 위한 행동이였다. 실제로, 그의 주변사람들은 ‘그를 순수하고 착했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오히려, 요조는 돈, 권력도 아닌 순수한 인간관계를 그 누구보다 갈망하는 가장 순수한 존재이다. 가장 희고 하얗던 요조이기 때문에 요조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순수하고 고통스러워 하던 존재였기 때문에, 그가 술, 여자를 탐닉하던 모습도 부정적이 아닌, 연민으로 다가왔다.

인간이 다른 존재와 확연히 구분되는 점은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동물에게도 의식이 있겠지만은, 인간의 그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아무튼, 인간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지위를 부여받고 정체성을 형성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회 안에서 타인들과 더불어 지내면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아 나가는 것이다. 그 과정이 바로 ‘소통’이다. 개인은 자신의 생각을 남들에게 말하면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고, 타인과의 생각을 교환하면서 역시 남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며 필연적으로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존이다.

요조가 그토록 어떤 특정한 목적이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인간 관계를 갈망한 것도 그가 이런 실존 의지에 충실한 인간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삶을 생각해보자.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자존감이 턱없이 부족했으며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는 그를 순수하게 사랑하며 그의 고민을 듣고, 마음 깊숙한 곳을 다스려줄 사람은 없었다. 결국 그는 소통하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 채, 무(無)로 남았다. 요조는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한채, 단지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안락을 좇으며 술, 여자, 공산당 조직 가입 등의 일탈을 저지른다. 그 사이에 그의 주변에서는 그를 ‘문제아’로 규정되었다. 요조는 남들에 의해 문제아로 비로소 인식되었다. 하지만 이는 요조의 주변인들이 일방적으로 요조에게 그 생각을 전달하는 일종의 명령이지 결코 쌍방향의 소통이 되지 못했다. 요조는 일생을 문제아라는 꼬리표를 달며 일생을 살아가고, 결국 문제아라는 틀에 갖혀 고립되어 산다. 가문에서 요조를 호적에서 팠을 때, 자신이 그나마 마음의 안식처로 여기던 가족을 잃었다는 마음에, 요조가 삶을 더욱 아무런 의지 없이 산 것도 이런 맥락이다.

종합하자면, 요조는 자신의 정체성을 얻기 위해 순수한 인간 관계를 열망했으나, 소통의 부재는 그의 열망을 낙담시켰고, 그를 무(無)로 만들었다. 하지만 요조가 항상 삶을 살고자 하는 의욕없이 죽음만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집에서 나오고 난 후 2층집의 미혼모를 만나고 그들의 순수한 마음에 감동하여 만화가 일을 의욕적으로 시작하기도 하였다. 물론 후에 요조가 그들의 순수함에 대한 믿음을 잃으면서 다시 삶의 의욕을 잃기도 했으나, 후에 다방의 소녀를 만나고 결혼을 한 후 자신의 부인을 위해 약을 먹으면서까지 술을 끊고 건강을 챙기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는 요조가 단순히 아무런 삶의 의욕이 없었던 인간이 아니라, 실존 의지를 가진 인물임을 증명한다. 만약 그와 소통하며 그 실존의 실마리를 전해줄 순수하고 마음따뜻한 친구가 있었다면, 요조는 삶의 목적을 가지고 그 누구보다 능동적으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요조의 비극은 비단 요조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에게 무관심 했고, 그와 말을 나누어 보지도 않고 몰아세운 주위 사람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건의 배경은 20세기 초의 일본이지만, 그 시대의 사회와 오늘날의 사회는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공동체주의에서 개인주의로의 이행은 그 종착역에 다달은 듯 하며, 전자 기기와 매스 매스컴의 발전으로 인간 대 인간의 깊은 소통이 훨씬 더 줄어들었다. 더군다나 사회 모든 분야에 퍼진 시장의 원리와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욕망을 긍정하며 경쟁의 상태로 들이밀었고, 순수한 대화는 점점 사라지고 권력 의지로 왜곡된 대화들이 사회를 지배해왔다. 요조가 세상을 토머스 홉스의 말을 빌려 ‘만인은 만인에 대한 투쟁’, ‘사람은 사람에 대하여 이리(狼)’라고 묘사했는데, 이는 현대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도 될 듯 싶다. 위에서 요조의 삶이 단순히 요조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에도 책임이 있었음을 확인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은 또 다른 여러 명의 요조가 양산될 수 있는 구조를 갖춘 셈이다. 실제로 현대 사회로 이행함에 따라 소통이 줄어들면서, 자살율도 계속 늘어나기만 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결국,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순수한 관계는 더욱 힘들어지고, 각 개인의 실존 의지는 전혀 충족되지 못하고 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과 고독을 느낀다. 소통이 부족한 사람들은 오늘날 요조가 그랬던 것 처럼 술, 게임, 텔레비전 등 비인간적 수단으로 실존의 불안함을 해결하고 있다. 그마저로도 감당이 안되는 사람들은, 요조처럼 자학과 자조에 빠져 살기도 한다. 요조는 정신병자가 아니였으며 오히려 오늘날의 우리들과 비슷하다. 다만 우리는 이러한 체제에 더 잘 적응했을 뿐이다.

글을 시작하면서도 고백했지만 나 역시도 나의 나약함을 뼈저리게 느껴왔다. 종종 충동에 의해 내가 해야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적도 많았고, 나의 이상과 현실의 거리감에 절망을 느끼기도 했다. 더군다나, 일부 정치인들의 간사한 행동들과 사회 곳곳에서 존재하는 이중잣대들을 보면서, 요조와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불신하기도 했다. 특히, 스스로 점점 이해타산적으로 변해가는 자신을 느끼면서, 나 역시 홉스의 ‘사람은 사람에 대하여 이리’라는 생각에 공감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약한 인간의 극한인 요조를 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절망과 공포보다는 위로와 희망이였다. 위로를 느꼈던 것은 요조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나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약함은 나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며,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타협의 대상일 수도 있음을 느꼈다. 희망을 느꼈던 것은 요조를 통해서 인간은 이리 떼가 아닌 순수한 관계를 갈망하는 개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자신의 비극적이였던 삶과 순수함에 대한 갈망을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순수한 관계와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모두가 소통이 없고, 어떤 도덕적 또는 사회적 규범만이 엄격한 사회. 그곳에는 인간도 없고 그저 의식없는 기계들만 있을 뿐이다. 서로 소통하고, 연대하고, 관용하는 것이 모두의 실존의지를 발현시키는 길일것이며 그 때 모두의 삶이 풍요로워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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