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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샛길, 독방. 광장, 최인훈

  • 작성자 데카당
  • 작성일 2024-03-27
  • 조회수 167

광장은 열려있는 공간이다. 이에 대비되는 공간으로는 샛길로 연결된 독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특정한 때 이들의 성질은 뒤집힌다. 광장이 폐쇄되고 독방의 문이 젖혀진다. 광장이 폐쇄되는 이유로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이탈과 강압에 의한 추방이 있겠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이탈하는 일은 광장에 대한 실망의 여론이 떠오를 때 발생한다. 기본적으로 독방에 있던 사람들이 기나긴 샛길을 걸어야 도달하는 광장에 모였던 이유는 그곳의 기능이 자신들에게 꼭 필요하기 때문이었지만 이제는 그 기능이 필요하지 않거나 변질되어 제기능을 하지 못함이 기본적이다. 사회라는 광장에 모인 사람들 사이의 불화 또는 불안정해진 사회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광장을 떠날 때 효용을 따진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은 듯 여러가지 핑계를 대며 소위 정의를 잃은 사회 같은 변명들이다. 이런 이탈을 두고 누군가는 애초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도 할 것이지만 이미 광장의 편익이 없으면 기존의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 조차 힘들어지는 경우가 있다. 사회에서 빠져나와 독방에 숨은 이들이 자연스러운 생활을 한다고 하기에는 잃어버린 편익이 많은 것이다. 자발적인 이탈이 아니라 강제에 의해서 추방되는 경우 사람들은 사라진 편익에 대한 기억을 가져 강제의 주체를 몰아내거나 주체와 타협해 작아진 편익만이라도 얻으려 든다. 이때 강제의 주체로는 권력을 찬탈한 독재자/집단, 제도 뿐 아니라 광장의 다른 이들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내 옆의 사람들 또한 포함될 수 있으며 작은 부속 사회에서의 추방, 소외가 예시가 된다. 큰 광장의 작은 구획 안에서 전체를 이루는 바깥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외압은 내부 억압의 정당성을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그럼 독방의 문은 언제 젖혀질까? 이것 또한 주인이 여는 것과 외부에서 여는 것이 있겠다. 스스로 독방의 문을 연 후 남은 선택지는 샛길을 걸어 광장으로 가는 것, 다시 독방으로 돌아가는 것, 샛길의 도중에 멈추는 것이 있다. 광장으로 가려 한다면 편익이 필요함을 느낀 것이고 돌아온 것은 재고해 봤을 때 편익이 독방 생활의 이점을 포기하는 것보다 작다고 느낀 것이며 도중에 멈추는 것은 편익을 얻고는 싶지만 독방 생활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은 애매한, 어떤 면에서 이기적인 것이다. 샛길에서도 광장의 광경이 보이고 소리가 들리지만 광장과는 분리돼 있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독방의 문을 열 때는, 만약 알 수만 있다면, 의도가 판단의 기준이 되며 광장의 편익을 공유하려는 의도로 문을 젖히는 것과 독방을 열어 광장의 일부로 만들 의도로 젖히는 것이 있다. 첫번째 것은 젖히는 입장에서야 도움을 주겠다는 것이고 두번째 것은 광장의 편익을 늘려 구성원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 독방 안의 개인에 대한 고려는 없다고 볼 수 있다. 독방을 나오지 않는 이유는 광장의 편익이 필요없기 때문이고 독방의 이점을 광장에 제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또한 강제로 젖혀진 문은 다시 닫히지 않기 때문에 두 경우 모두 어찌됐든 광장 구성원의 편익만을 늘린다. 샛길로 진입해오는 과정도 문제가 있다. 샛길은 근본적으로 독방의 개인만을 위해 설계된 통로이지 외부의 불특정 다수를 위해 나 있지 않다. 그리고 그 다수가 샛길로 진입한다면 샛길이 넓혀지며 정말 만약의 경우 문을 젖히지 않는다고 해도 문 바로 앞까지가 광장에 포함된다. 개인이 문을 열기를 선택하는 순간 광장에 진입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독방의 굳게 걸어잠근 문을 보려고도, 열려고도 하지 말자. 개인의, 합리적이든 아니든, 판단으로 걸어잠근 문을 향해 우르르 몰려가 문을 박차는 것은 어떤 변명을 통해서든 정당화 될 수 없는, 자신이 속한 광장을 뇌와 갈아낀 전체주의로의 달음박질이다. 필요에 의해서 모인 광장에 초월적인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 말자. 광장에 개인적인 의미를 두는 사람에게는, 이해는 할 수 있지만 강요받고 싶지 않다. 같은 광장에 서있겠지만 나는 저기 남쪽에, 너는 저어기 북쪽에 서있다. 스스로 광장에 걸어나왔지만 내 뇌를 광장으로 덮어쓰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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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에 나타난 가치관들

듄. 프랭크 허버트의 장편소설 시리즈다. 긴 시간을 건너뛰어 전작의 결말에서 생긴 결과만을 보여주고 시작하는 특징이 있으며 따라서 전작의 주연들이 꽤나 큰 변화를 겪는다. 또 작중 이전 시점의 사건으로 정보과학과 기계공학이 제한받은 세계관 특성상 인간을 특정 목적을 위해 개량하는 용도로 생명공학이 발달해있다. 중간과정의 생략, 생명공학의 극한. 이 둘은 작가의 손에서 반응해 독특한 생명관을 생성해낸다. 우선 우주에서의 이동을 위해 일반상대성 이론에 기반한 복잡한 계산을 수행하기 위해 당연하다는 듯이 훈련된 사람을 고용해 컴퓨터를 대신할 정보처리 장치로 사용한다. 이 인간 컴퓨터들은 그 목적 하나만을 위해 태어나기도 하며 정보처리를 위해서 중독성이 강한 성분을 섭취해야 한다. 작중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노화로 인해서 정보처리 능력이 둔화된 경우 교체되는데 이때 이들이 평생동안 받아온 교육은 감정적인 판단을 거세하는데 있으므로 고용의 여부에 관계없이 일상생활을 누릴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다. 또 이들이 섭취하는 성분은 하나의 생물종의 순환과정에서만 발생하며 이들은 시리즈 전체에 걸쳐서 한 행성에서만 서식한다. 책에 나오는 표현을 따라 해당 성분을 스파이스라 하겠다. 두번째로 살펴볼 점은 인간의 품종개량이다. 작중 나오는 품종개량으로 한 종교단체의 선지자를 만들기 위한 번식 계획과 전 인류 공통 형질을 만들기 위해서 복제인간을 수천년에 걸쳐 개량한 것, 그리고 인간의 자궁을 시험관 삼아서 유전자 조작 생물을 만드는 것을 들 수 있다. 첫번째를 보면 교단에서 훈련을 통해 선별한 사람들이 특정 가문과 지속적으로 아이를 가지게 하는데 이들은 태아의 상태에 조금씩 간섭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세대가 지날수록 선지자에 더욱 가까워 진다. 교단의 능력은 과거 그들의 계통상의 여자들의 기억을 갖는 것으로 여자(대모라고 불린다)만이 사용할 수 있지만 선지자는 남자로서 그 능력을 쓸 수 있으며 자신 계통 모두의 기억을 바탕으로 정확한 예지가 가능하며 여러 갈래의 경우 중 자신이 택한 미래로 갈 수 있다. 이 처리능력은 앞의 인간 컴퓨터와는 궤를 달리하는 수준으로 스파이스를 통해 각성한다. 그러나 같은 예지를 가진 이가 관여하는 시점은 볼 수 없는데 이를 이용해서 3권의 주인공은 미약해서 없다시피 한 예지를 가지도록 계속해서 복제인간을 배양해왔고 그가 번식하도록 해서 결과적으로 전 인류를 확정적인 미래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목표를 갖는다. 세번째는 생명공학이 극도로 발달한 행성의 방식으로 기계장치가 없는 탓에 생명체를 배양할 곳도 없으니 이미 훌륭한 기능을 가진 인간의 자궁을 쓰자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며 앞의 복제인간이 여기서 배양됐다. 이처럼 듄의 세계는 몇가지 목적을 위해서라면 인간을 도구로서 이용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목적에 맞게 개조하는데 이에 대해 작중에서 아무런 윤리적 문제도 제기되지 않는다. 자궁 시험관에 대해 역겹다는 반응만을 보이고 선지자는 숭고하게까지 포장되며 복제인간 개량은 의도가 밝혀지기 전까지 폭군의 일탈 정도로 인식되고 밝혀진 후에는

  • 데카당
  • 2024-03-26
봉지에 담긴 채 버려진 죄의 이야기

노찬성과 에반(김애란)자살과 남겨진 사람들에 집중해 보겠다. 소설의 시작부터 “방문객 중 한 사람이 찬성의 아버지가 ‘우연히 돌아가신 게 아니’라 했다.”가 나오며 찬성의 아버지가 자살한 것을 제시해주고 있으며 그렇게 이야기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나는 이 대목을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는 선언으로 읽었다. 끝에는 “대형 화물트럭 몇 대가 시끄러운 경적을 울리며 찬성 옆을 사납게 지나갔다.”를 제시하여 아버지의 트럭이 전복됐을 때와 유사한 환경을 만든다. 이후에 찬성의 마음에 금이 가는 것이 쩍쩍 금이 가는 소리로 나타나는데 아버지의 자살을 에반의 상황에 투영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를 상기하는 찬성은 마찬가지로 그의 관점에서 자살한 것으로 비춰지는 에반이 더해져 자살, 그리고 자살을 마주해야만 하는 남은 사람의 마음에 대한 소설의 주제가 떠오른다. 자살은 예로부터 그리스교도 신앙에서 절대 하면 안되는 커다란 죄악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소설에도 그 편린을 볼 수 있는데 죄악을 해소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용서’이다. 하지만 그 용서를 비는 사람은 누구인가? “머릿속에 난데없이 ‘용서’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다.”의 대목에서 용서를 비는 쪽은 남겨진 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그리스도교의 눈으로 볼 근거는? 할머니가 목사와 함께하며 습득했을 것으로 보이는 ‘한 번 봐달라’의 ‘용서’를 떠올린 것이기 때문이다. 할머니에게 죄악에 대한 개념은 없었을지 모르나 죄악의 감정은 습득하는 것이 아닌 용서를 비는 행위에 자연스레 앞에 놓이는 감정이다. 그래서 용서를 죄를 저지른 사람이 비는 것이 아니라 남은 사람이 비는 이유가 무엇인가? 여기서 굳이 남은 사람이 필요했던 이유, ‘대속’이 나타난다. 사람의 아들은 세상의 모든 죄를 대신 뒤집어 쓴 채 죽어갔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신앙 체계에 죄를 대신 짊어지는 개념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할머니는 죽어가는 아버지의 고통에, 그리고 기타 다른 것으로 얻은 죄책감에 용서를 구했다. 대속으로 볼 순 없는 것이지만 용서를 전수받은 찬성은 자신도 모르게 에반의 자살에서 대신 용서를 빈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대속의 개념을 윗 문단에서 끄집어낸 주제와 연결하면 내가 보는 이 책의 주제는 자살에 대한 인식과 남을 이들의 대속이 된다. 자살을 생각하는 것이 어떤지는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상황이 주제를 제시하기 위해 너무나 편의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를 들어 활동에 사회적, 신체적 제약이 덕지덕지 붙은 찬성이라든가 아예 없는 어머니, 별 다를거 없이 찬성이 어릴 때 죽은 아버지, 그리고 너무나 늙은 할머니와 에반이 있다. 어린 찬성은 자살을 대하는 어른과 아이의 대비를 나타내기 위해 쓰인 것으로 보이며 여기서 찬성의 나이가 주변의 다른 죽음을 마주하는 나이라면 할머니 두 명이 있는 것과 다를 게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점이긴 하지만 이정도의 상황을 만들어야 했을까 싶다. 또 작가는 자살에 대속이 필요하다는 것도 나타낸 것 같

  • 데카당
  • 2023-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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