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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삼 - 북치는 소년을 읽고

  • 작성자 싸물
  • 작성일 2005-06-26
  • 조회수 875

 

북치는 소년 / 김종삼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어린 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굉장히 아름답고도 난해한 시. 제목과 내용이 전혀 매치되지 않고, 어딘가 강한 생략과 표현이 뒤엉긴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이 시를 읽을 때에 나로서는 이 시에 대해 이렇다할 어떤 느낌조차 받지 못했다. 다만, 어딘가 모르게 아름다웠다. 그래서 난 이 시를 좋아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에 대한 내 생각을 여기서 두드릴지언정, 이 시는 영원히 아름답다. 이해하지 말아도 좋다. 충분히 시 전체를 장식한 아름다운 직유가 마음 한 구석을 더욱 때리지 않는가.


   따지고 보면 내가 이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용 없는 아름다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시는 정말로 이렇다 할 내용이 없으며 북치는 소년에 대해 노래하지도 않았다. 시인은 아마 카드를 보고 있지 않았을까. 바로 가난한 아희가 웃음처럼 건네준 카드. 아희는 가난해서, 글을 몰라 아무런 내용이 쓰여 있지 않은 그야말로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 담긴 그 카드에 북치는 소년의 그림이 담긴, 그리고 이 시를 노래했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없지만 가난한 아희의 따스함이 순백의 순수가 담긴 그 카드를 가슴 속 깊이 간직하면서.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 진눈깨비처럼' - 진눈깨비는 부정적인 소재다. 하지만 이 시에서는 충분히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결코 이는 진실 되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반짝이는"이라고 표현했지만 진눈깨비는 진눈깨비일 뿐이다. 시인은 "가난한 아희"의 등성이, 그 머나먼 미래에서 반짝이는 질척한 진눈깨비. 바로 그 힘듬. 그 고난. 그 울음을 넌지시 내다보았겠지. 그리곤 밀려드는 슬픔에 젖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결코 그런 것따위 드러내지 않았다. 아희는 웃고 있기에. "진눈깨비"는 반짝일 수 없는 것이지 않는가. 아마 시인은 그 진눈깨비가 잘못 본 함박눈이길 고대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저 시를 아름답게 노래했다. 아! -등성이에서 반짝이는 "함박눈"처럼.


  그래 맞다. 저 시에 담긴, 크리스마스에 담긴 아희의 사랑은 아직 따스하고, 그 아희의 사랑이 식지 않는 이상, 이 시는 그렇게 영원히 아름답게 비치우고 있을 테니!

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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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싸물
  • 200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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