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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치전’- 동기주의의 폭력

  • 작성자 아마도생선
  • 작성일 2006-09-10
  • 조회수 354

 

‘전우치전’- 동기주의의 폭력성에 관한 고찰




 1. 칸트의 동기주의

 칸트는 그의 저서 실천이성비판에서 의무론적 윤리관을 제시했다. 칸트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끝이 좋으면 모든 게 좋은 것이다."와 같이 결과에 의해 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고 역설하며 시대적으로 어느 곳의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옳다고 인정되는 윤리의 보편적 기준을 제시하려 노력했다. 결과에 의해서 윤리가 파악될 수 있다고 말하면 보편타당한 윤리 기준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노력의 결과, 칸트가 제시한 보편적 윤리기준의 모습은 "너의 의지의 준칙인 동시에 일반적인 법칙에 타당하게 행동하라.(Act so that the maxim of thy will can always at the same time hold good as a principle of universal legislation.) 여기서 "준칙(maxim)"이란 개별적인 인간의 행동에 적용되는 원리, "법칙(principle)"이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가치를 가치고 적용되는 원리를 뜻하므로 이 말은 즉, 남이 보기에나 자기가 보기에 거리낄 것이 없도록 행동하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다시 말해 자신이 하고 자 하는 행동의 동기의 의도가 선할 경우 그 것은 그 결과와 상관없이 선하다는 동기주의의 핵심 개념인 것이다.

 이러한 동기 주의적 윤리관은 여러 윤리의식이 복합적으로 충돌하는 실생활의 여러 윤리적 모순 상황들을 적절하고 융통성 있게 해석할 수 없다.

 

2, 전우치전안의 동기 주의적 폭력

 사회의 부조리를 단칼에 박살내는 통렬한 도술의 판타지는 답답한 현실과 결부되어 그 가치를 획득한다. 조선왕조의 지배질서에 저항하는 영웅을 희구하던 시대, 하늘의 관리로 변신하여 조선의 국왕을 욕보이고 그 권위를 파훼해 억눌리고 소외 받는 궁핍한 백성들의 카타르시스를 충족키는 희망이 되는 전우치의 도술은 그러한 시대와 결부되어 판타지를 벗어난 세태소설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우치전을 읽는 내내 마음이 편치 못했던 것은 내 머릿속을 더운 여름날의 음식쓰레기 옆을 나는 파리처럼 맴돌던 물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우치의 행동들을 절대선이라고 볼 수 있을까. 여름의 뜨겁고 선명한 태양이 더욱더 짙고 서늘한 그늘을 생성하듯 전우치의 행동들이 획득하고 있는 선(善)의 이면에는 분명한 악(惡)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며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가치인 우정을 위해 또한 (조선시대에는) 소중한 가치인 순결을 파탈시키는 행위는 결국 윤리의식이 복합적으로 충돌되는 상황을 생성했으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과연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에 대한 논의는 무규칙한 카오스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주자의 음양론은 역설한다. 세상에 그 어는 것도 밝은 부분만을 지닐 수 없으며 또한 그 어느 것도 완전히 어두울 수는 없다고, 세상의 모든 것들의 이면에는 그것이 지닌 속성의 대응물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말이다. 전우치가 백성들을 위해 행했던 황금 들보의 갈취 역시도 절대선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따른다. 절대선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선의 모습을 취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황금 들보를 갈취하기 위해 전우치가 썼던 방법은 설득이나 대화, 타협의 모습이 아닌 기만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타인을 속이고 우롱해 목적을 달성하는 일련의 행위들이 귀족들에게 선사했을 배신감이나 불쾌감, 등을 선으로 볼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어떤 인격체 혹은 생명체에게 불이익 혹은 좋지 않은 기분을 초래하는 행동을 선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 어떤 생명체에 대한 무시와 모독으로 비추어지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들은 존중되어져야하며 그 생명체들의 가치관은 존중되어져야한다. 그 가치관이 자신의 가치관과 상충될 때 우리는 대화와 토론을 통한 상호합의와 이해의 과정을 거쳐서 타협의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깡그리 무시한 채 벌이는 전우치의 행동들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자신이 가지고 가던 돼지 머리가 자신을 무는 상황에서 느꼈던 관리들의 순수한 공포와 경악을 생각할 수 있다면 전우치의 도술은 선이 아닌 자기 과시적 유희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는 절대적인 진리나 정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만이 절대적인지도 모른다. 다수에게 선으로 해석될 수 있는 행동이라 해도 소수에게 폭력적일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그것은 절대선 으로 해석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의 동기주의는 부정되어져야한다. 동기주의 철학이 가지는 폭력성은 소수의 윤리의식에 대한 폭력이며 바뀌어가는 시대성을 고려하지 않은 철학인 것이다. 전우치전을 읽는 내내 내가 느꼈던 불편함 역시도 다수의 민중을 대변하며 소수의 상류층을 배려하지 않는 폭력적 서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폭력은 명확히 구분되어 질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종류의 폭력은 다른 종류의 폭력으로 환치될 가능성을 지니며 어떠한 폭력은 특정한 폭력보다 우월하다. 특정 폭력이 어떤 폭력을 막아 낼 수 있을 때 그 특정 폭력은 정당성을 획득한다. 따위의 서술은 무의미하며 올바르지 않다. 평화를 위한 폭력 또한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평화는 평화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 누구도 축출한지 않는 사랑과 애정을 기반으로 한 사회와 개인간의 관계에서 진정한 평화는 얻어지는 것이며 우리의 행복을 담보하는 가장 큰 전제인 것이다. 전우치전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오직 자신의 동기의 순수성만을 강조하는 폭력적 내용에 있다.

아마도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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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마도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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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도덕적 동기의 순수성이 있어야 하고, 과정과 결과도 그런 특성이 일관되게 일치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어떤 경우에라도 폭력은 안된다는 주장에도 공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세계의 역사는 그런 희망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을 거의 다 소외시키고 묵살하고 말살시켜 폭력을 정당한 공권력으로 정당화 시키는 과정이 많기에 그런 주장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이겠지요. 소수의 관리와 지배층의 실망과 배신감까지 배려해 줄 수 있는 아마도 생선님의 아름다운 마음씨가 널리 펼쳐지길 바랍니다.

    • 2006-09-16 02:02:50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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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 /1500
  • 익명

    그 누구도 축출하지 않은 사랑과 애정을 기반으로 한 사회와 개인간의 관계에서 진정한 평화가 얻어진다는 망리 인상깊었습니다. 잘 읽었심더- 어허허, 글틴 가입하자마자 각 게시판에 깔려있었던 생선님의 포스는 글 하나하나에도 여전하군요....

    • 2006-09-15 13:01:32
    익명
    0 /1500
    • 0 /1500
  • 익명

    잘 읽었습니다. 부수적인 거지만 중간중간에 과잉피동이 보이는군요. "존중되어져야", "부정되어져야", "구분되어 질" 같은. 여하간 재미있습니다. 작품을 보는 시선이 독특하게 느껴졌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 2006-09-10 03:15:37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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