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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철학(밀란 쿤데라의 '느

  • 작성자 다이모니온
  • 작성일 2006-09-19
  • 조회수 581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은 인내력이 부족하다고들 말한다. 그들은 조금만 힘이 들어도 포기하려고 한다. 육체노동을 할 바에야 실업자가 되겠다고 하는 많은 젊은이들의 태도만을 봐도 극명히 드러나는 사실이다. 이러한 젊은이들의 인내력 부족은 우리 사회의 살인률 증가에도 기여하고 있다. 부모를 죽이는 자식, 동료나 선배를 죽이는 군인, 사회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자기 표적이 되는 사람들은 닥치는 대로 죽이는 연쇄 살인범 까지. 그들은 자신의 가슴 속에 쌓여있는 울분을 참지 못하여 결국 살인이라는 형태로 분출하는 거란다. 이와 같은 사회문제를 발생시키는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부족한 인내심의 원인을 점점 빠른 것만을 추구하는 이 세상에서 찾고자 한다.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은 느림의 철학을 모른다. 그들은 오직 스피드 속의 광란과 쾌락만을 알 뿐이다.

  조선시대의 한 선비를 생각해본다. 그의 생활에서 급할 것이란 하나도 없다. 이른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할 것이다. 아침공기는 차갑지만 그보다 더 맑은 것도 없다.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며 아주 느리게 길을 거닌다. 그는 길을 거닐며 새벽 어스름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아름다운 주변 풍경을 감상하고 깊은 사색에 잠긴다. 어젯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읽었던 글 한 줄, 한 줄을 곱씹어 보며 옛 현자들의 말씀을 가슴 깊이 아로새겨본다. 집에 돌아와서는 어제 못다 읽은 글을 읽다가 오찬을 든다. 오후에는 산수가 훤히 보이는 정자에 올라가 잘 우러난 차를 음미한다. 자기 앞에 펼쳐져 있는 진풍경을 바라보며 인생을 생각한다. 인생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인생의 괴로움을 생각하고, 인생의 허망함을 생각한다. 그러고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붓을 들어 시를 한수 써내려 간다. 그의 시에는 그가 고뇌를 거듭하여 얻게 된 인생철학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 시는 누구든지 공감할 만큼 훌륭하고, 누구든지 감탄할 만큼 그 문장이 아름답다.

  선비는 단 한시도 서두르지 않았다. 흘러가는 시간에 안타까워하지도 않았다. 충분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한 느림의 태도에서 새로운 깨달음과 깊은 인생철학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그가 천천히 걷고, 천천히 생각한 것은 분명 빈둥거림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느림이라는 것을 삶 속에서 적절히 활용할 줄 안 참다운 지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젊은이들의 삶은 어떠한가. 그들은 인터넷 속도가 조금만 느려도 참지 못한다. 왜 이렇게 느리냐며 짜증을 자기 스스로의 기분을 망친다. 차든 오토바이든 빠른 속도로 운전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 빠른 스피드 속에서 그들은 황홀경에 빠진다. 그들이 빠른 속도로 달릴 때 온 세상은 마치 모두 자기들의 것만 같다. 밀란 쿤데라가 말 했듯이 그들은 스스로 달릴 때처럼 자신의 근육과 폐의 기능을 사용하여 육체적 고통을 느낄 필요가 없다. 오직 속도에 몸을 내맡기고 그 속에서 쾌락의 절정을 맛 볼 뿐이다. 시내나 지하철역에 가면 사람들의 걸음걸이는 빠르기만 하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바쁜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과 무엇에 쫓기는 듯한 걸음걸이를 보면 그들의 머릿속에는 아무런 상념도 차지할 자리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이 세상이 돌아가는 대로 아무렇게나 몸과 정신을 내맡긴 삶을 사는 것만 같다. 과연 그들의 삶이 그들 자신의 것인지도 의심이 들 정도이다.

  이처럼 빠른 생활을 하는 현대인들은 주변을 바라볼 여유를 갖지 못한다. 어느 누가 한가로이 거닐며 옛 선비와 같이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겠는가. 그들은 오직 앞만 보고 걸어간다. 아니 달려간다. 빠르게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인생에 대한 깊은 사색을 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저 기계처럼 손과 발을 빠른 속도로 움직일 뿐이다. 아니면 빠르게 돌아가는 기계 위에 몸을 맡겨 그 속에서 모든 잡념들을 떨쳐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작은 고민거리도 참지 못한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괴롭게 하는 무언가가 마음속에서 싹트면 오직 빠른 스피드에 의지하여 그 무언가를 떨쳐버릴 궁리만 하는 것이다. 그들은 괴로움 속에서 깊이 고뇌하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자기 자신을 한층 더 성숙하게 만들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리고 결국 참다운 인생의 행복도 맛보지 못한다. 삶에 대한 깊은 고뇌를 통한 새로운 깨달음과 성숙함은 인생을 바라보는 새로운 창을 제공해줌으로써 더욱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그러나 삶의 고뇌를 피하려고만 하고 빠른 스피드 속에서 인생의 어려움 따위는 날려버리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태도는 새로운 마음의 고통을 받고 그것을 잊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을 되풀이하게 할 뿐이다. 그러한 삶에서 행복의 빛 한줄기를 찾는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이요, 과거도 추억할 수 없고 발전된 미래를 바랄 수도 없게 되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정도에 정비례한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오늘날과 같이 빠른 것이라면 으뜸으로 치는 이 시대에 우리의 삶에는 과거의 그것과는 달리 기억을 통한 낭만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의 괴로움 속에서 고뇌하는 인간, 끊임없는 사색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과 같은 깨달음을 얻는 인간, 지난날의 행복과 고통을 모두 아름다운 과거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을 찾아보기 힘들다. 사람들은 빠름에 그들의 인생을 내맡긴 채 모든 것을 망각하고, 결국 인간 삶 자체는 스피드의 광란 속으로 빨려들어 가버린다.

  느림의 철학을 알아야 한다. 가끔은 빠르게 돌아가기만 하는 이 세상에서 빠져나와 자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깨달음을 얻으면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의 것으로 엮어 참다운 인간 삶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더 이상 망각의 자유에만 몸을 내맡겨선 안 된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더 이상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자신을 인간으로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고통을 견뎌내고, 인내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힘을 기르게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변화 속에서 앞서 제기하였던 살인율의 증대와 같은 사회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느림의 철학을 실천한다면 이 사회가 더욱 인간다워지고 아름다워지기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느림의 철학이 던져주는 희망의 끈을 잡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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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예, 글쓴 의도가 무엇인지는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다만, 서구의 논리나 관점에서 우리가 존중해야할 귀중한 생각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또한 너무 우리의 현실을 무시한 측면만 강조하다보면 그것이 우리의 삶을 조여대는 또하나의 억압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체 국가예산의 50-60%를 복지예산으로 쓰는 프, 독, 스웨덴의 경우와 25%만을 쓰는 한국의 상황을 무시하고, 느림의 철학만 강조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 2006-09-25 23:35:32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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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 /1500
  • 익명

    방금 댓글을 올리셨네요; 좋은 지적 감사드려요^^ 한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다면 제가 여기서 말한 느림이라는 것은 정말 여유를 부리며 살자는 것만 강조한 것이라기 보다는 모든 것을 빨리빨리 하면서 사느라 자기 자신의 본질에 대해 잊고 살게 되는는 위험이 범하지 말자고 말한 것이지요. 비본질적인 삶에서 벗어나 본질적이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항상 돌아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속뜻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런 내용을 적절히 표현하지 못한 것은 제 실력 부족이었던 것 같네요.^^;

    • 2006-09-25 22:59:09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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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전체적으로 글을 쓰는 어휘력이나 문장 사용능력은 매우 안정된 글이어서 그런 측면에서 공감하고 칭찬할 바가 많은 글입니다. 더욱 좋은 글 기대할께요.

    • 2006-09-25 22:56:33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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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그러나 한국에서 느림의 철학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조급하게 돈을 모아 살지 않으면 전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작용하여 빠르게 뛰어다니게 하는 문제점을 만드는 원인이 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무시하고, 개인의 태도에서 문제점이 생긴다는 입장만 강조하면 또하나의 억압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하는 비판적 읽기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 2006-09-25 22:56:30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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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느림의 철학이 필요한 까닭은 사색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라는 관점이 잘 드러난 글입니다. 글읽기에서는 공감하며 읽기(빠져들어 읽기)와 비판하면 읽기(거리두며 읽기)가 있을 터인데 이 글은 앞의 경우에 가깝군요. 사색하면 사는 삶의 소중함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만, 독일에서 밀란 쿤데라가 강조하는 사회여건과 한국의 여건은 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독일사회주의 공화국에서는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에서 사회복지가 많이 이루어졌기에 자신의 욕망의 크기를 줄이며 느리게 살면 됩니다.

    • 2006-09-25 22:53:24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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