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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4주 추천작 1편-생각의징검

  • 작성자 물처럼
  • 작성일 2006-11-07
  • 조회수 260

10월 특별 추천작 교사 평가글

 

  10월 3주에 추천하지 못하였던 또 한 명의 추천은 10월 중에 쓴 글 가운데서 한 편을 더 뽑아 추천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주에 응모한 분에게는 조금 아쉽겠지만, 글의 완성도를 중심으로 추천하고자 하니 양해 바랍니다.   <보편 법칙이 될 수 없는 개인의 삶의 구원>, 생각의징검다리 (ID: hirudbwjd) 님을 추천합니다.

 

  이 글은 현대 자본주의 환경에서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개성, 절대성)을 지키며 살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현대사회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모두 지키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쓴 글입니다.
  우선, 이런 논술 과제에 자신의 의견을 쓸 때에 다양한 독서 배경지식을 폭넓게 활용하여 글을 쓰는 능력을 칭찬해야 하겠군요. 통합적 사고지식을 잘 느낄 수 있는 장점이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실제로 대학입시에서 논술문을 쓸 때는 너무 많은 자료를 간단히 인용하여 자신의 논거를 삼는 방식은 자칫 최대의 감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한 두 개의 논거라도 그것을 정당화하는 자세한 풀이글을 덧붙이는 방식이 신뢰감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글에서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개념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 눈에 뜨이는군요. 사용가치는 '본질적 가치'를 말하고, 교환가치는 '거래되는 가격의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사용가치로 보지 않고 교환가치로 바라보는 현상에서 인간소외가 발생하지요.
  전체적으로 이 글은 기본관점은 인간이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개인'은 완벽하게 자신의 본질적 가치와 절대성의 합일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르나,  '인류' 전체 그런 상태를 이루기 어렵다는 입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결국 개인 개인의 실천이 중요하다는 관점이겠지요.
'생각의 징검다리'의 글은 매우 진지하고 논거도 풍부해서 글을 읽는 즐거움과 보람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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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글 전문 

 

보편 법칙이 될 수 없는 개인의 삶의 구원 


글쓴이 : 생각의징검다리 (ID: hirudbwjd) 

 
 

 

 현대 사회의 병폐

 

  손수 베란다와 현관을 고치는 것이 삶의 낙이었을 정도로 매우 소박했지만 가족들을 위해 오직 성공하기 위한 일념으로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 세일즈맨이 된 윌리 로먼이라는 한 남자가 있었다. 계속 빚을 낼 정도로 방만한 살림을 하는 아내 때문에 빚을 갚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스트레스 속에서 그는 30년 간을 일하고 결국 정신 착란증까지 앓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직업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자기는 매우 훌륭한 가장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 회사에서 내팽개쳐지고 아들들 앞에서 초라해진 그는 마지막으로 장남에게 보험금을 남겨주어 자기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심산에서 자동차를 타고 과속으로 달려 자살한다. 그의 장례식 날 그의 아내는 집의 마지막 할부금도 갚고 난 지금, 이 집에는 아무도 살 사람이 없다며 울부짖는다. 위 이야기는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이다. 이 희곡은 현대 사회의 수많은 윌리 로먼들의 삶과 그들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도록 만든 사회체계를 비판한다.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은 이근삼의 희곡 ‘원고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 그리고 영화 ‘Modern times’ 처럼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찾아내어 비판하는 사회의 옴부즈맨이다. 이 작품들은 자기 본질에 따라 살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삶과 진정한 인간적 교감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그들의 사회적 관계를 비판한다.
 현대인들이 자기 본질에 따라 살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다. 자기 본질에 따라 살지 못하는 삶은 껍데기의 삶이고 자기 정체성이 희미한 불빛 같은 삶이며 시간이 지나 되돌아 보았을 때 허무한 삶이다. 빚을 갚기 위해 평생을 괴로움 속에서 살지만 정작 빚을 갚고 나니 그 소유의 만족을 누릴 사람이 없다는 여자의 절규는 현대인들의 삶이 무의미한 가치를 위한 쳇바퀴를 돌리는 삶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한다. ‘원고지’에서도 교수는 자기의 아내와 자식들에게 주려는 돈을 벌기 위해 쳇바퀴 같은 일상을 산다. 소설 ‘변신’에서도 벌레로 변신하기 전의 주인공은 가족을 넉넉히 부양하기 위해 일에 강박관념을 가질 정도로 집착한다. 결국, 이 세 주인공들이 자기의 삶에서 중요시 한 것은 바로 ‘돈’이었다. 이들이 대표하는 수많은 현대인들이 집착하는 것 또한 돈일 것이다. 그러나 ‘돈’ 그 자체는 삶을 유지하기 위한 일시적인 것이고 비본질적인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본질적인 목적은 망각하고, 삶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집착한 결과, 그들의 삶의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고 허무해진다. 인간의 삶이 단 한번뿐이라고 할 때, 비본질적인 것에 매달려 일평생을 보내는 것은 낭비일 뿐만 아니라 소중하고 존엄해야 할 인간의 삶에 대한 모욕이다.
  목표의 상실, 수단에 대한 집착은 현대인들에게 타인과도 진정한 소통을 이루지 못하고 파편화된 삶을 살게 한다. 로먼이나, 그레고리, 교수는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지만 정작 그 희생의 성과를 누리고 있는 가족들과는 소통하지 못하고 소외된다. 이미 수단이 되어버린 그들의 목소리는 공허하게 반복될 뿐이어서 주변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결국 그들은 돈이나 버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소통이 단절된 파편화된 삶의 결과 교수나 로먼이나 그레고리가 그들의 기능을 해내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가족들은 쉽게 그들을 버리고 만다. 타인과의 관계는 제쳐두고라도 적어도 진실해야 할 가족관계에서 개인의 사용가치가 떨어지자 양심의 가책도 없이 내팽개치는 것은 그들의 관계가 필요에 의해 물건을 찾게 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비단 소설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특히 남자가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 오는 것이 당연시 되면서 그들은 돈을 벌어오는 기계로 전락했다. 자녀의 해외 연수를 위해 요즘 급증하는 ‘기러기 아빠’들은 가족 내에서 그들의 역할이 오직 돈을 버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아이들도 아내도 만나지 못하지만 열심히 돈을 버는 것이 곧 아이들을 위하는 최선의 역할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런데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기가 오로지 자기의 사용가치에 의해 존재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사용가치 이외의 소중한 부분 ? 요컨대 자신의 본질 ? 을 외면해 버리고 소외시킴으로써 공허해지게 된다. 또한, 자기의 가치가 순전히 외부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만일 사람들이 원하는 자기 자신의 가치(사용가치)가 사라져버릴 경우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를 사용가치에 의해서 규정하는 것처럼 타인을 대할 때에도 그들의 사용가치만을 보게 되어 타인과의 진정한 관계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국, 개인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세우지도 못하고 타인과의 진정한 만남도 갖지 못한다.

 

 

  문제의 원인

 

  그런데 이런 황폐한 삶은 개인에 국한된 특별한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또 사회 전체적으로 일어난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은 개인적인 수준에서 일어나는 문제로 보기 보다는 사회적인, 구조적인 문제로 볼 필요가 있다.
  현대 사회의 특징은 시장경제가 고도로 발달되었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시장경제를 지배하는 법칙, 즉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에 따라 값을 매기고 자연과 인간을 자연 자본이나 인적 자본 등의 생산을 위한 재료로 취급하는 시장의 원리는 개인이 자기 자신을 상품가치에 따라 하나의 제품으로 취급하고 자기를 소외하는 현상이나 타인을 사용가치로서 대하는 양상으로 드러난다. 즉,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시장 체계의 논리가 오히려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논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시장체계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생산을 위한 투입물과 그것으로부터의 산출물,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지닌 무수히 많은 재화와 서비스가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이들은 인간에게 적은 비용으로 풍부한 재화를 얻을 수 있게 하여 삶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여러 문학작품에서도 드러나듯이, 현대 사회에서 황폐화된 개인은 자신에게 있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사용가치를 지닌 상품으로 존재할 뿐이다. 즉, 현대 사회에는 오직 시장체계만이 남아 있다.
  게다가 많이 소비하기 위해, 혹은 좋은 말로 현재의 삶의 질을 유지하고 나아가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만큼 생산성을 내는데 주력해야 한다. 결국 더 높은 생산성을 추구하는 동안 자기 삶의 전부를 그것에 바치게 된다. 처음에는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기준에 맞추어 자신의 생산성을 올리는 것에 불과했던 것이, 남들의 소비수준과 자기의 소비수준을 끊임없이 비교하는 마음, 혹은 높아진 소비 수준을 다시 낮추지 않으려는 소비의 불가역성의 심리, 혹은 자기 외의 가까운 사람, 가족들이 높은 소비수준을 원함으로써 결국 모든 개인들이 이 엄청난 시장 메커니즘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상적인 삶의 형태

 

  가장 이상적인 삶이란 삶의 순간 순간을 영원한 행복으로 채워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순간 순간에서 영원한 행복을 맛보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타고르의 ‘시(時)’에서처럼 ‘신비의 모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끼고 환희에 차 별들과 더불어 구르는 것이고, ‘기탄잘리’에서처럼 내가 열망하는 ‘당신’이 나에게 노래를 불러줄 때 내 가슴이 자랑스러움으로 터질 것 같고 너무 기뻐 ‘당신’의 발을 어루만지고 싶은 상태이고,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처럼 날카로운 첫키스 이후 눈이 멀고 귀가 먹을 정도로 기쁨에 넘치고 행복하여 심지어 님이 떠난다 해도 포기하지 않고 님의 침묵을 맴도는 것일 것이다.
  종교로 치자면, 기독교에서 기도를 통해 그 순간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고, 인도에서 만물과 ‘범아일여(凡我一如)’의 상태가 되는 것이며, 동양에서는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이루는 것이고, 불교의 일파(一派)인 남선종에서는 자성(自性) 속에서 만물과 일체가 되고 우주 본체와 서로 일치하여 성불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매슬로우가 말하는 욕구의 최고 단계인 ‘자아실현’단계에 도달하는 것이며, 그래서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가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말하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 상태들은 모두 자기가 열망하는 어떤 ‘절대성’과 일치하는 순간에 혹은 그것과 접촉하는 순간에 최절정의 행복에 이른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이러한 ‘절대성’과의 접촉은 따로 외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본질을 깨닫는 것에 맞닿아 있다. 결국, 부처가 자기의 불성(佛性)을 깨닫는 것과 같이, 혹은 시인이 자기의 시성(時性)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이 자기 본질을 아는 것이야 말로 절대성과 합일하는 것이며 이상적인 삶을 사는 길이다.
 
  절대성과의 합일을 통한 인간의 구원

 

  누구나 자기의 본성을 깨달으면 바로 해탈할 수 있다고 주장한 혜능의 돈오성불설은 누구나 자기의 본질을 깨달으면 절대성과 일치할 수 있음을 말한다. 사실 사람은 각자의 고유한 본질을 지니고 있으므로 누구나 절대성과 일치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자기의 본질을 아는 것이 바로 절대성과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증권 거래원이었던 스트릭랜드도 자기의 본질, 그림을 그리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림에 자신의 온 열정을 불태웠고 자기 내부의 절대성과 일치했다.
  사실, 자기의 본질을 알아가는 것은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과 상반되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는 자기의 본질을 아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자기의 본질을 실현시켜 나가는 것은 오로지 혼자서 자기의 열정을 불태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스트릭랜드는 자기의 본질을 실현하는 방법을 찾았지만 자신의 생계를 책임질 수 없었고, 가족들과 헤어져야 했으며, 결국에는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행복했다. 이렇게 사회적 관계 문제를 차치한다면 ‘개인의 절대성과의 합일을 통한 구원’은 비교적 쉽고 간단하다.
  그러나 개인의 차원에서 벗어나 인류의 차원에서 생각해 볼 때 절대성과의 합일 문제는 간단치 않다. 개인이 추구하는 ‘절대성’이 너무나 개별적인 것이므로 사회 다수에게 제시할 수 있는 ‘절대성’을 규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또 그 절대성에 합일하는 과정 역시 개인의 특성에 따른 것이므로 이러한 과정을 제시하기도 어렵다. 구성원 각자의 행복을 각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달성하게 할 뿐이지 그것을 사회가 도와주는 것은 불가한 것이다.
  또한 개인이 각자 본질을 추구하는 것을 장려하면서 사회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체제도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우리 사회가 채택한 자본주의 체제는 자기 본질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의 요구에 맞추어 자기의 능력을 제공할 수 있는 윌리 로먼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회 전체가 필요로 하는 생산 수준을 내기 위해서는 기계 외에도 인간 기계들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의 삶에서는 본질적인 요소와 관련되지 않은 부분도 필요하다. 자기 본질에 따라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도 최소한 물감, 캔버스 같은 것들을 필요로 하고, 그것을 사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하며, 그 돈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노동을 제공해야 한다. 옛날 선비들은 자기들이 노동은 전혀 하지 않고 혼자 자연 속에서 독야청청하며 그들의 삶을 즐겼는데 그것은 그들이 생계를 가족과 노비에게 의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절대성과 합일하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의식주 생활 또한 비본질적인 삶을 살지만 생산활동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도와주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아닌 다른 체제를 상상해보아도 마찬가지다. 공산주의 체제 안에서 사람들은 기계적으로 자기가 할 일을 부여 받는데 이것은 자기 본질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자유가 보장되는 자본주의 사회보다 절대성과의 합일을 이루는 것이 더 힘들다. 오웬이 건설한 이상적인 소공동체 사회 ‘뉴 라나아크’ 또한 자기 본질에 상관없이 자기가 해야 할 작업을 배정받는 체제였다. 즉, 자본주의 체제의 대안으로 나오는 체제들 또한 자본주의 사회가 가지는 소유의 불평등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을 뿐이지, 그 작업이 개인의 본질을 실현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즉, 사회의 체제를 막론하고 절대성과의 합일 문제에 관해서는 칸트의 자기의 행동이 보편법칙이 되게 하라는 말은 전혀 가능하지 않다.
 

    맺음말

 

  자기 본질에 따라 사는 것은 자기의 본질이라는 섬에서 로빈슨 크루소처럼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인간은 사회 속에서 주어진 역할에 복무함으로써 자기의 생계를 꾸릴 수 있다. 만일 운 좋게도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이 자신이 추구하는 본질적인 삶의 방식이라면 그는 쉽게 ‘사회 속에서의 자아실현’이라는 행복한 삶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역할과 자신의 삶의 목표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중에, 늙으면, 정년 퇴직하면, 돈 많이 벌면 ‘내가 하고 싶은 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렇지만 결국 의식주의 위협을 뿌리치고 사회적 고립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소수만이 자신의 절대성을 절대적으로 합일시키는 행복한 ‘인간’이 될 수 있다.
 미래에 기계가 고도로 발달되어 사회의 모든 생산 활동을 기계가 담당하게 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본질을 추구하는 삶을 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절대성과의 합일을 통한 개인의 구원은 가능할 지 모르나 인류의 구원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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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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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지금 보니 부끄러운 글이네요 ; ㅋㅋㅋ 어쨌든 감사합니다 ㅋㅋ

    • 2006-11-23 15:55:17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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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후아. 글 잘 읽었습니다!

    • 2006-11-10 19:53:00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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