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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명이 부딫친 문제에 대한

  • 작성자 아마도생선
  • 작성일 2006-12-30
  • 조회수 202

 현대 문명은 서구의 과학이란 학문을 주축으로 하여 끊임없이 개발을 이룩해왔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이러한 발전들은 환경문제를 비릇한 여러문제들을 촉발시키며 그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한계에 대한 예상에는 발전의 정체에 관한 우려이외에도 이때까지 행해져온 개발중심의 발전을 지속하다가는 인류 전체의 자멸로 이어질 것이라는 견해 또한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은 현대 문명의 지속가능성이 지극히 회의적임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특히 근대 인류가 개발이란 명목하에 자행해온 행위들은 사실상 자연을 피폐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았다. 지구 온난화나 이상기후현상등은 인류의 기술적 진보와 더불어 심화되면서 근대 후기에 들어선 최근에 이르러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진행이 이루어졌음이 알려져있다. 이시점에서 우리는 제시문<가>에 서술되어 있는 패러다임의 변환의 불가피성을 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근대 서구에서 이루어진 이성과 자연의 분리는 현대 문명의 성립과 그 발전과정에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이분법적 철학을 기저에 둔 현대 문명은 자연을 타자화 시킨 후 인간중심적 시각에서 자연을 이용해왔다. . 그러나 이러한 근대적 사유구조는 앞서 말했듯 현대 문명의 고도화와 비례해 자연에 대한 파괴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다시 말해 환경 위기를 초래한 산업주의와 지배적 세계관은 서양에서 주류를 이룬 특징적 방법론과 연루되어 있다. 그것은 방법론적 개체론이다. 개체론은 전체를 이해할 때 그 부분들로 나누어 부분들의 특성을 파악하고, 그 부분 특성을 단지 합하는 것으로 전체를 온전히 파악했다고 여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체나 물질이고 전체는 개체들의 집합적 이름일 뿐이며, 개체들의 관계도 외적이고 파생적으로 간주될 뿐이다. 개체론적 접근법은 주체와 대상의 분리주의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여기에 우열 개념이 결합되면 지배와 착취에 효과적이 되어서 대단히 생산적으로 나타난다. 우월한 주체로서 인간이 열등한 자연적 존재와 자연을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로 간주하여 한껏 착취했다. 이렇게 해서 생산성 증진이 이루어졌지만 그 이면에 환경 문제가 드리워졌다. 강한 인간중심주의를 여전히 견지하면서 환경 문제를 해결하려는 보수적 환경윤리는 도구로서 함부로 대해왔던 자연을 좀 더 신중하게 대하고자 한다. 그러나 여전히 도구가 역으로 끼칠 폐해를 과학기술에 의거해서만 해결하고자 하기 때문에, 기술중심주의로 불리기도 한다. 인간중심주의를 견지하는 한 위기 극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진보적 환경론자들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고자 한다. 이들은 과학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기존 과학기술이 문제를 초래한 뿌리 가운데 하나라고 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인간의 제도와 생활, 그리고 일상적 태도까지 변화를 촉구하는 가치관과 세계관, 그리고 규범의 전환을 도모한다. 제시문<가>에서 와 같이 문명 패러다임의 전환을 꾀하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견지해왔던 인간-자연의 이분법적 사고관에서 탈피해 자연속의 인류라는 생태학적 사유로의 전환을 이루는 것이다. 제시문 <나>에 제시되어 있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예처럼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자각은 인간 중심적 시각에서 보던 객체 로서의 자연에 대한 대안적 시각을 던져 줄 것이다. 다시말해 인간이란 존재의 자연과의 관계를 자각하고 자연의 파괴가 결국 인간에게 되돌아 온다는 것을 자각할 때 인간이 행해온 무분별한 개발의 야만성과 인간이 진정 걸어가야할 행복에 길에 대한 사유의 길이 열리게 될것이다.

아마도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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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마도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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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문제’에서 청소년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어째서 청소년의 반대말이 자유가 된 것일까요. 이유는 청소년이 ‘미성년자’라는 단어의 범위 내에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미성년자’라는 말을 풀어서 해석해보면 ‘아직 다 완성된 나이가 아닌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이 풀어서 해석된 ‘아직 다 완성된 나이가 아닌 사람’이라는 말에는 ‘무엇’이 아직 다 완성이 되지 않았다는 것인지가 빠져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펄떡이는 심장을 가진 하나의 ‘완성된’ 생명이고, 인격을 가진 ‘완성된’ 인격체인데 무엇이 아직 다 완성이 되지 않았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도구’로서의, 그리고 ‘부속품’으로서의 미완성입니다. 물론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때 교육부의 정식 명칭이 교육인적자원부였다는 것 또한 이런 관점에서 ‘인적 자원’이라는 용어를 쓴 것입니다. 우리는 단번에 석유와 같은 자원이 된 것입니다. 인적 자원의 관점에서 미성년자, 즉 ‘아직 다 완성된 나이가 아닌 사람’이라는 의미는 아직 정제되지 않은 석유와 같은 의미가 됩니다. 다시 말해 석유가 분류과정을 거쳐 가스, 휘발유, 경유, 타르 등으로 나누어져 쓰임새를 찾듯 인적 자원도 그런 과정을 거쳐야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석유나 석탄과 똑같이 보는 관점에서 ‘미성년자’란 아직 쓰임새를 찾지 못한 원유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제과정을 거쳐야하는 대상이 됩니다. 교육받아야 하는, 미성숙한 인간, 완성되지 않은 인간, 도중인 인간, 준비단계인 인간으로 규정지어 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머리 길이와 모양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몽둥이로 엉덩이를 맞고, 출석부로 머리통이 깨지고, 빗자루로 얼굴이 쓸리고, 주먹으로 뺨을 강타당해도 그것은 폭력이 아닙니다. 정제의 과정입니다. 성숙으로 가는 데에 주어지는 도움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의 가방은 호주머니는 일상적 감시의 표적이 됩니다. 학생회는 학교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됩니다. 미성숙한 학생은 학교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의 주체는 더욱 아닙니다. 감히, 선거리니요. 교육감 선가가 아무리 우리 자신과 관련이 있다 해도 우린 그냥 조용히 있어야합니다. 미성숙하고 완성되지 않았으니까요. 완성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인간으로서의 권리는 박탈되어 있는 것입니다.  힘든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청소년이 부모와 국가의 극진한 보호 아래 공부만 하면 되는 시대가 온 것을 두고 역사의 진보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청소년이 고된 노동을 강요당하던 때와 비교한다면 분명 상황은 나아졌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비교는 너무 단순합니다. 표면적으로 볼 때 그 변화는 생산 양식의 변화에 따른 사회 문화적 진화의 과정이었을 뿐이고 청소년이 더 행복해졌다는 식의 판단을 내릴 성질이 아닙니다. 청소년이 미성 청소년 인권 운동은 이러한 지점에서 청소년의 외침을 들리게 합니다. ‘보호’의 미명 아레 ‘억압’당하지 않기 위해서 청소년 인권 운동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청소

  • 아마도생선
  • 2008-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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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마도생선
  • 2007-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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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제목에 '부딪힌'이 맞습니다.

    • 2007-01-05 23:54:45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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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이 글은 논술시험 답안지이군요. 출제시험 문제를 함께 밝혀 주면 논술공부에 관심을 가진 많은 학생들이 크게 도움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고스럽더라도 문제를 찾아 밝혀 주시길 바랍니다

    • 2006-12-31 23:48:59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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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2006년 한해 동안 아마도 생선님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더욱 행복했던 한 해였습니다. 여러 분야에 관심도 많고 열심히 참여하며 살아가는 건강한 삶의 모습을 잘 느낄 수 있음을 글을 통해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새해에는 조금 힘들어지겠지요. 입시의 중압감이 많이 힘들게 할 테니까요. 그래도 사이사이 시간을 내어서 좋은 글 자주 올리기 바랍니다. .

    • 2006-12-31 23:48:56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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