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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학자를 위하여

  • 작성자 관리자
  • 작성일 2007-06-16
  • 조회수 158

 

 

읽은 계기 따위는 없었다. 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산 건 만화였고 이 책은 단지 껴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환호성을 지르며 만화들을 다 넘겨본 다음에야 슬쩍 눈길이 갔다. 배수아도 몰랐고 소설이라면 잘 읽지도 않는 처지에, 그저, <독학자>라는 제목이 좋았다. 책을 쥐자 놓을 수 없었다. 지독한 고립을 택하여 독서와 독후감만을-그것도 이십 년동안이나-계속하겠다는 스무 살 청년, 자유롭고 선명한 존재가 되어 자신만의 대학을 졸업하겠노라 자신만의 언어를 찾겠노라 낮게 읊조리는 '나'의 목소리에 빨려들어갔다. 

 

 

'나'는 대학에서 참담한 실망만을 맛보았다고 말한다. 다만 S를 만나는데, '나'는 '영어 텍스트를 번역하는 그의 아름다운 문장력에 이끌렸'고 그 문장의 '문학적이면서도 절제된, 지적인 힘에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감동'한다(16P). 비만한 S와 유난히 왜소한 '나'는 겉으로는 우스꽝스런 모양새를 이루며 정신적으로는 단단한 우정을 쌓는다. 그것은 치기와 낭만과 영웅심에 취해 군사독재정권에 맞서는 투사로 변신한-고등학교 때만 해도 그는 단지 친구가 필요한 인간이었으므로-김진호를 재회한 것과 대조적이다. S의 친척 P교수 역시 '나'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런 식으로 그의 언어가 나를 끌어당겼다. 그가 비록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을 때라도 말이다(49P).'

여행을 떠난 '나'는 내내 P교수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돌아와서, 자신이 떠난 직후 P교수가 죽었음을 알게 된다. 교수의 아내 경희는 자신이 그 편지들을 읽어주었으며, P교수가 '나'에게 컴퓨터를 남겼다고 알려준다. 다시금 여행을 떠나기 전 198X년, '나'는 자신의 스무 살-읽을 수는 있으나 쓸 수는 없는 나이(128P)-을 컴퓨터로 기록한다. 그것은 S와 결별하며 대학을 떠나기까지의 짧은 기록이다.

 

 

변한 것은 S였다. '그것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 만에, 즉 너무나 빨리 다가왔기 때문에'(132P), '나'는 충격을 받는다. '나'는 사랑이란 '인간이 정신의 훈육을 통해 얻게 되는 아름다운 상태인 교양이나 지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갑작스럽고 충동적인 감정이란 '감히 영혼을 가진 어느 한 대상의 면전에 들이밀기에는 모욕적이고 경솔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135P). S와 '나'는 사랑에 대하여 기나긴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우습고, 멍청하고, 황당할 만치 S에게 걸맞지 않으며 '나'로서는 그 이상 모를 수 없는 연애감정이라는 것이 둘의 우정을 파고든다.

자신이 아닌 사람이 S에게 필요할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한 것, 외톨이로 지내기를 두려워하지 않던 S가 잘 알지도 못하는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긴 사실, 더구나 S가 '그의 로테에게 비록 상상 속에서일지라도 육체적으로 흡인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이(138P) '나'에게 당혹과 슬픔과 구토를 일으킨다. '나'는 불안에 떨며 S에게 묻는다. 그러자 S는 기묘하게 웃으며 외설적인 시-그러나 '나'에게는 그들 세계에 대한 냉담한 변심이자 차가운 거절', '천상에 올려놓았던 사랑의 죽음'에 지나지 않는(145P)-를 읊는다.

'궁극적으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그를 잊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최초로 들었을 때, 마음속으로 나는 울었다(147P).'

'나'는 백색의 대학, 백색의 도시를 꿈꾼다. 단순노동에 종사하며 밤과 주말에 책을 읽는, 일 년 남짓한 동안 세 가지 정도의 외국어를 독서가 가능할 정도로 끌어올리고, 신문도 방송도 대인관계도 멀리 하며, 술도 마시지 않고 영화관도 가지 않고 독후감 이외에는 어느 것도 쓰지 않으며 오직, 오직 공부에 미치는. 그러므로 '완전히 대학을 떠날 것'임을(169P). 그것을 S에게 털어놓음으로써-계획의 어디에도 S는 없었다-'나'는 완전히 S와 갈라선다. 그것은 실상 저속하지도 못한 글 나부랭이나 S의 상사병이 아닌, 그들 두 사람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이별이었다. 

 

 

우정이 오래 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그날 거기 나란히 서 있었고 같은 곳을 보았지만, 실은 그들 단지 거대한 원 가운데 힘없이 던져진 어린아이라 걸음을 떼면 뗄수록 멀어져만 간다고. 무한대의 원, 그 바깥으로 그들 가야만 할 어딘가로 다가가면 갈수록, 둘 사이의 틈은 넓어지고 균열한다. 그들을 이어주던 감정은 부스러진다. 예고된 결별, 흙덩이처럼 무너진 것에 아파야 하나, 앓아야 하나. 자고 일어나면 이불 밖으로 발목이 나와 있었다는, 어느 키다리처럼 자꾸만 자꾸만 홀로 자라고 있다. 무섭게도 당연한 일. 어제의 나는 이곳에 죽고 없는 것이다.

인간은 반드시 외롭지는 않다. 그러한 말을 경멸한다. 함께 있어서 줄어들지 않는 것처럼, 홀로 있어서 외로움이 깊어지는 건 아니다. 외로움은 나의 결핍이라 타인이 채워줄 수 없고, 되려 그 불가능이 다시금 외롭게 할 뿐이다. 인간이 홀로 살 수 없고 필연적으로 서로 영향을 끼치는 거라면, 굳이 냉담하고 부주의하며 무분별한 태도로 자신을 소모하지 않아도 좋을 터다. 새로운 도시, 교통수단도 오락거리도 대중문화도 없어 사람들은 밤이면 책을 읽는, 그래서 밤은 길고도 긴, 동물을 죽이지 않고 과일과 야채를 먹으며 엄숙한 문법을 지키고 검소한 소비를 하는, 교회의 신자도 이름난 예술가도 없고 '길다란 모양을 한 배가 소리도 없이' 사람들을 실어오고 실어가는 백색의 대학에서(130P), '나'는 새 이름을 얻는 상상을 한다.

동료란 없다. 스스로 백색의 도시에 걸어들어가기를 마음먹는다. 골방에서 살기를, 창도 문도 내 안으로 내기를 결심한다. 허락되는 불멸은 세월을 살아남은 사상가의 그것-자기복제가 아닌-이다. 맛보는 영원은 덧없는 사랑이 주는 착각이 아니라 반시대적 철학을 탐구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다. 조용하고 단조롭고 소박한 생활 속에서 강하고 곧고 충만한 내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순도 높고 황홀한 행복이어서 생각만으로 가슴이 뜨거워진다. 감격을 안는다. 자신의 이상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은, 이상을 지니지 않은 인간보다 더 경박하고 파렴치하게 살아간다.* 처절한 정신적 투쟁, 그것만이 어느 보잘것없는 인간을 지상에 묶어둘 수 있다.

 

 

왜소하고 수줍은 여행가는 이제 어디에 있나. 마흔이 된 당신, 끊임없이 학생(學生)인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 니체, <선악의 저편>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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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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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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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글의 후반부에서 책을 읽고 느낀 여러 의문과 깨달음 등을 덧붙여 책을 소개한 까닭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게 하였군요. 전통적인 독후감 방식이지만 그런 형식 속에서도 무난하게 책을 읽고 싶어하는 정서를 불러일으키게한 글이었습니다.

    • 2007-06-17 21:54:59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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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지적인 탐구심이 매우 강렬하게 발동하게 하는 소설이군요. 매우 독특한 캐릭터의 삶과 사고방식을 상세하게 쪽수까지 인용해 소개해 주어서 책의 전모를 짐작하게 하는데에도 도움을 많이 얻게 된 책입니다. 이를 통해 독자에게 자신의 반복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문제점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어서 좋은 책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 2007-06-17 21:54:56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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