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자본 앞에 선 이방인

  • 작성자 관리자
  • 작성일 2007-06-23
  • 조회수 663

 

  이제 가치있는 것은 무엇인가.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예전처럼 신 혹은 국가 혹은 이상과 이데올로기가 정말로 중요한 가치를 갖는가. 자본 앞에서 그 모든 것들은 껍데기만 남고 스러졌으며, 그러한 현상의 주인공인 자본조차도 어쨌든 냉소의 대상이 되지 않는가. 다만 우리는 회전목마에 올라탄 것처럼 빙글빙글 돌아갈 뿐이다. 그 것이 고작 놀이공원이라는 하이퍼리얼리티 속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므로 모든 것이 끝내는 뫼르소가 버릇처럼 자주 대꾸했던 '이러나 저러나 상관없어요.', 혹은 '그건 중요치 않아요'의 대상이 되고야 만다. 마치 「이방인」이 쓰여졌던 2차 세계 대전 때 죽음 앞에 모든 가치들의 질서가 전복당해 사라졌던 것처럼. 그 때와 현대는 상황적으로는 다르지만, 나는 이 소설의 주제와 현대의 상황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느껴 읽는 내내 공감할 수 있었다.

 

 「이방인」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공허이다. 주인공인 뫼르소는 삶의 불모성을 철저히 감각하며 살아가는 인물로, 그 것은 소설 첫 장면에서부터 드러난다. 양로원에 있던 어머니의 임종 소식을 전보로 받고 장례에 참석하지만,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무감한 모습. 그에게는 어머니의 죽음조차 '이러나 저러나 상관없어요.'의 대상일 뿐인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인 것이다. 장례 다음날 그는 해변에서 마리라는 옛 일터의 동료를 만나 코미디 영화를 보고 집으로 가서 동침한다. 그 다음날과 그 다음날도, 그는 계속해서 덤덤하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나날들을 보낸다. 장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다가 그는 같은 층의 레몽이라는 이웃과 친구가 된다. 레몽은 변심한 아랍인 애인을 해하려 하며, 거기에 뫼르소를 끌어들인다. 그로 인해 뫼르소 일행이 해변으로 놀러갔을 때, 그들을 그 애인의 오빠 일행이 미행하고 싸움을 벌이게 된다. 레몽이 다쳐 싸움이 끝이 났을 때, 뫼르소는 별안간 아랍인을 향해 여러번 총을 쏜다. 단지 태양이 너무 눈부시다는 이유로.

 

 그는 그 일로 재판을 받게 된다. 재판은 계획적 살인의 여부를 가늠한다. 검사는 뫼르소가 장례식 때 보인 행동을 토대로 그가 비도덕적 인간이며 그러므로 진범임이 분명하다고 열변을 토한다. 그런데 뫼르소는 피고인이 아닌 그저 그 재판장에서 이방인인 것처럼 행동할 뿐이다. 이상한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은 실제로 그가 그 사건과 그 재판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행한 행동이었다. 검사의 이야기와 자신의 행동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선고는 내려지고 있었다. 사형선고를 받는 주체가 그 임에도 불구하고 그 선고에서 그는 배제당했다. 마치 그가 아랍인을 죽인 것처럼, 아랍인이 그에게 죽은 것처럼, 모든 사건에서 뫼르소는 이방인이었다.

 

 부조리하게도 삶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끝나버리는 것이다. 삶을 사는 것은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삶의 주인처럼 삶의 끝에 대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방인. 이 것은 당시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사건 앞에서 사람들이 자신이 자신의 삶에 대해 이방인임을 깨닫게 되는 시대적 배경과 연관이 있겠으며, 또한 현대에 자본이라는 사건 앞에서 사람들이 자신이 자신의 삶에 대해 이방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과도 본질적으로 동일한 문제라고 사료된다. 평상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직시하지 않고, 마치 우리가 우리의 삶에 대해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우리에게 삶은 도래되는 것일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도래되는 삶에서 단지 이방인에 불과하며, 정말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회전목마를 타고 무기력하게 빙글빙글 돌아가다가 누군가가 정해놓은 시간이 되면 목마에서 내쫓기고야 만다.

 

 그는 사형선고를 앞두고 감옥에서 사제를 만나도록 된다. 사제의 의견에 의하면 우리 모두는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 것은 사정이 다르며 위안이 될 수 없는 일이라고 대꾸한다. 사제는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닥쳐올 죽음이라며, 그 것을 어떻게 받을 것이냐고 그에게 묻는다. 그는 자신이 지금 받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시련을 받을 것이라고 답한다. 사제는 내세에 대해 묻는다. 그는 지금 이 생애를 회상할 수 있는 세상으로 본다고 답한다. 사제는 또 하나님에 대해 묻다가 화제를 바꾸어 자신을 왜 몽페르(나의 아버지, 신부님)라고 부르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는 사제가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며 다른 사람들과 한 편이라고 답한다. 사제는 자신이 그와 함께 있으며 그의 마음이 어두워 그것을 모르는 것일뿐이라 답한다. 그는 그만 사제의 법의를 움켜잡고야 만다. 그는 사제가 죽은사람처럼 살고 있으며 사제의 신념은 여자의 머리카락만한 가치도 없다고 확신한다. 그는 자신이 사제와는 다르게 진리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또한 그는 그가 살아온 허망한 생애에서 그에게 도래할 죽음이 그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외친다. 그리고 나서 신부는 간수들에 의해 그에게서 떼어진다.

 

 이 상황에 대한 분석을 현대에 적용시켜보자면, 사제는 현 상황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갖지 않는 현실순응형 인간이라 할 수 있겠다. 사회의 요구에 순응하면서 앞으로 그 것들 덕분에 -마치 기독교의 내세에서처럼- 자신이 행복해질거라 굳건히 믿는 사람이다. 반면에 뫼르소는 내세와 같이 미래에 행복해질 일은 없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도래할 사회적 요구들, 즉 현실이라 불리우는 것들, 그리고 소위 객관적이라 불리우는 것들 속에서 자신이라는 주체의 내면성은 모두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 즉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져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두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그에게 위안을 가져다 주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그 것을 현실순응형인 사람에게 날카롭게 따지며 기쁨과 분노를 느끼지만, 결국 간수로 표상되는 사회의 법률에 의해 그러한 행동을 금지당하는 인물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잠이 든다. 그리고 싸이렌이 울린다. 그는 만년에 어머니가 왜 약혼자를 가졌는지, 왜 생애를 다시 꾸며보는 놀이를 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에 젖는다. 죽음 가까이에서 어머니는 해방감을 느꼈을 거라는 것이다. 그는 아무도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으며, 그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마음이 생겼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스런 무관심에 마음을 연다.

 

 죽음 가까이에 서면 사람은 그제야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상기하게 된다.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이, 마치 사막 위에 모래로 쌓은 성처럼 한순간에 스러져버리는 것임을, 무상하고 무상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또한 사막에 선 이방인이 무엇을 하든간에 사막은 다만 다정한 무관심을 보일 뿐임을 깨닫게 된다. 사막은 거대하고 영원하며, 우리는 그 속에서 이방인으로서 모래로 즐거운 장난을 하다가, 다시 모래성과 함께 이방인으로 사라진다. 무엇을 하든 사막은 사제처럼 내세를 약속하며 명령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사제처럼 무엇을 해야한다는 당위도 없고, 이방인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거기에서 기인하는 것은 무력감이나 슬픔이 아닌 해방감이다. 단지 우리는 모래 장난을 하며 현재의 충동에 따라 즐겁게 놀다 가면 될 뿐이므로.

 

 현대인들 또한 마찬가지다. 자본 앞에서 자신의 내면성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이러나 저러나 상관 없어요'의 마음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자본의 질서 가장 가까이에 와닿았을 때, 그들이 사제와 같은 종류의 인간이 아니라면, 그 모든 것들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무상함과 함께 자본의 다정한 무관심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모든 것을 살아보기로 마음 먹게 되는 것이다. 사제처럼 내세- 즉 사회의 요구에 따른다면 노후에 행복해질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삶을 버리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현재의 충동에 충실하며 끝내 아름답게 흩날리며 스러질 모래성을 즐겁게 쌓기로.

 

 「이방인」은 우리의 눈이 애써 외면하는 문제를 이르집어 주는 소설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주인이 아니라는 것, 이방인일 뿐이라는 것. 무력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이 점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사제가 되곤 하지만, 그들에게 내면화된 내세를 신의 말씀-내세를 약속하는-이란 자신의 욕구는 아니라는 것. 현대인들에게 적용하자면, 사회의 요구에 따른다고해서 자신의 욕구가 채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 우리는 회전목마를 타고 빙글빙글 돌아갈 뿐이다. 하지만 그 위에 올라탄 채로 우리가 놀이할 수 있는 것도 무궁무진하다. 해방. 내가 여기서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이방인임을 수용하면서도 그 모든 것들의 무상함을 깨닫고 있음으로해서, 지나친 사회화로 인한 자신의 진정한 욕구의 억압과 그로 인한 무기력감과 공허감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회전목마에서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그 위에서 즐거운 놀이를 해보자는 것이다. 마치 죽음 앞에 선 뫼르소가,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마음을 열었고 어머니를 떠올렸던 것처럼.

 

관리자
관리자

추천 콘텐츠

[감상&비평] 2024년 4월 월 장원 발표

글틴 친구 여러분 안녕하세요. 감상&비평 게시판 멘토인 문학평론을 쓰는 김태선입니다. 요즈음 산책을 하다보면 봄에 피었던 꽃들 지고 그 자리에 작게 열매가 자라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요. 한낮에는 반팔만 입고 다녀도 될 정도로 따뜻한 날씨가 되었습니다. 모두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나요. 4월에 감상&비평 게시판에는 글들이 많이 올라오지는 않았어요. 4월에는 늘 열심히 쓰는 송희찬님과 화자님, 그리고 이번에 새롭게 Alicja님 세 분의 글을 만날 수 있었어요. 송희찬님은 예전보다 글의 짜임새가 좋아졌고, 화자님은 늘 나름의 관심 분야에서 치열하게 생각하는 글을 써주었어요. Alicja님도 자신의 경험 평소의 생각해온 것들에 빗대어 작품을 읽고자 한 모습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모두 글쓰기의 목소리가 독자보다는 글을 쓰는 자신으로만 향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조금은 아쉬웠던 것 같아요.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월장원을 선정하지 못했습니다. 비평&감상 게시판에 많은 글들이 올라와서 다음 달에는 여러 작품을 장원으로 선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달에는 조금은 독특한 책 두 권을 추천 도서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동물과 세계가 서로 능동적으로 관계맺는 방식을 살피는 생물학 책으로, 인간 중심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세계를 생각할 수 있도록 합니다. 다른 하나는 다른 예술 장르와는 다르게 감상자가 행위자로 참여하는 장르이자 매체인 ‘게임’을 탐구하는 책으로, 기존의 예술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미학적 운동에 관해 생각하게 합니다. 야콥 폰 윅스퀼,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정지은 옮김, 도서출판b, 2012 C. 티 응우옌, 『게임: 행위성의 예술』, 이동휘 옮김, 워크룸프레스, 2022 그럼 항상 안전하고 건강한 나날 만들어가시길 바랍니다. 글을 쓰다가 궁금한 점이 있다면 게시판에 글을 올릴 때 함께 남겨주세요. 답을해드릴 수 있는 것이면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관리자
  • 2024-05-09
[감상&비평] 2024년 3월 월 장원 발표

글틴 친구 여러분 안녕하세요. 감상&비평 게시판 멘토인 문학평론을 쓰는 김태선입니다. 어느덧 4월이 되었어요. 모두들 새로운 환경에 적응도 하고 새로운 친구도 만나게 되었을 것 같아요. 4월은 기온도 따뜻해지고 꽃도 피어 야외 활동을 활발하게 하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한데요, 이런 때일 수록 안전과 건강에 유의하는 일 역시 중요합니다. 그럼 2024년 3월 월장원 선정작을 말씀드리겠습니다. 3월에는 산문집 『그냥, 사람』에 관해 쓴 난바다님의 글 「그냥, 사람은 그냥, 사람으로부터」를 월장원으로 선정하였습니다. ‘사람’이란, 그리고 ‘그냥, 사람’이란 어떠한 모습일까, 그리고 이른바 ‘정상’이라든가 ‘일반’이라는 것들이 이루어내는 포함과 배제의 논리에 관해 자신의 경험담과 더불어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좋은 글이었습니다. 특히 ‘나’와 다른 조건과 환경에 처해 있는 존재에 관해 외면하지 않고 헤아려보고자 노력하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번 달에 함께 읽어보면 좋을 책으로는 ‘우정’에 관한 것들로 골라보았어요. 각각 두 시인이 함께 쓴 시집, 장편 소설, 그리고 비평적 에세이를 엮은 책입니다. 김은지·이소연, 『은지와 소연』(디자인이음, 2023) 김금희, 『복자에게』(창비, 2020) 모리스 블랑쇼, 『우정』(류재화 올김, 그린비, 2022) 모두들 건강하게 글 쓰기를 바랍니다. 글을 쓰다가 궁금한 점이 있다면 게시판에 글을 올릴 때 함께 남겨주세요. 답을해드릴 수 있는 것이면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관리자
  • 2024-04-11
[감상&비평] 2024년 2월 월 장원 발표

글틴 친구 여러분 안녕하세요. 감상&비평 게시판 멘토인 문학평론을 쓰는 김태선입니다.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은 새 학년을 맞아 들뜬 마음으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 같아요. 지금 당장은 바뀐 환경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금방 적응하여 익숙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2024년 2월 월장원 선정작을 말씀드리겠습니다. 2월 월장원은 영화 에 관해 쓴, 담님의 「천진은 영원하지 않다」입니다. 글의 길이가 다소 짧은 게 아쉽게 느껴질 만큼, 영화에 관한 솔직한 심정을 자신만의 생각과 함께 잘 표현한 글이었습니다. 금안백님과 송희찬님 두 분 꾸준하게 글쓰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 아직은 생각한 만큼의 결과물이 나오진 않겠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그리고 2월에 처음 만나게 된 gksgPdnjs님, 이윤서님, neverland님의 글도 반가웠습니다. 모두 꾸준히 활동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 이번 달 부터는 마무리 하는 자리에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은 책을 몇 권 추천하고자 합니다. 추천하는 책은 다음과 같아요. 차례대로 시집, 소설집, 그리고 철학자가 쓴 산문집입니다. 모두 우리가 맺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관계’에 관해 생각해보도록 하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민구, 『세모 네모 청설모』, 현대문학, 2023.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문학동네, 2023. 빌렘 플루서, 『사물과 비사물』, 김태희·김태한 옮김, 필로소픽, 2023. 모두들 건강하게 글 쓰기를 바랍니다. 글을 쓰다가 궁금한 점이 있다면 게시판에 글을 올릴 때 함께 남겨주세요. 답을해드릴 수 있는 것이면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관리자
  • 2024-03-1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
  • 물처럼

    다만, 레이피어님 지적대로 단어나 문장 수준에서 많이 단련을 해야 하겠군요. '도래'라는 단어는 이 문장과는 어울리지 않은 것 같고, '다정한 무관심'같은 애매모호입장도 글을 읽는 이에게는 많은 논락을 불러 일으킬 것같습니다. 이런 점을 조금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 2007-06-29 22:19:59
    물처럼
    0 /1500
    • 0 /1500
  • 물처럼

    이방인에 대하여 깊이있는 분석을 하려는 시도가 글 전체에 잘 나타나 있는 글이군요. 왜 뫼르소는 그토록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심하고 관계가 단절된 성격으로 나타나는가? 왜 자신이 판단을 절대화하여 총을 쏘아 아랍인을 쏘아 죽이는가? 이런 점에 대하여 많은 독자들은 새롭게 해석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이 글도 그런 점을 '우리의 삶에서 주인이 아니라는 것, 이방인일 뿐이라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군요. 현대인의 삶은 그래서 쓸쓸하고 무기력한 것이라는 느낌이 잘 드러나게 해석하면 큰 방향은 맞다고 봅니다.

    • 2007-06-29 22:17:54
    물처럼
    0 /1500
    • 0 /1500
  • 익명

    아, 그리고 하나 덧붙이자면. 불어로 어머니(mere)와 바다(mer)의 발음은 같습니다. 또한, 현존하는 액체 중 바닷물이 양수와 가장 가깝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어머니 장례식 후 해수욕장에 간 뫼르소의 결정은 어머니의 죽음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라고 보면 좀 억지일까요. 소설 가장 첫 문단에서 까뮈가 어머니를 가리킬 때, mere 대신 maman 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도 뫼르소와 어머니 사이의 친근감을 표현한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 2007-06-24 11:28:57
    익명
    0 /1500
    • 0 /1500
  • 익명

    까뮈는 미국에 갔을 때 자신의 철학이 'philosophy of hopelessness' 이나 'nihilism' 과 같은 철학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실 '이방인' 이나 '시지프 신화' 를 통해 그가 주창하고 싶었던 바는 부조리 속에 숨어있는 삶의 아름다움인데 말입니다. 그렇기에 '이방인' 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다정스런 무관심이 아니라 무관심한 삶의 다정함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2007-06-24 11:24:57
    익명
    0 /1500
    • 0 /1500
  • 레이피어

    너무 어려운 표현보다는 쉽고 간결한 표현을 쓰시면 이해하기 한층 더 수월할 것 같아요. 하지만 글 내용은 좋은 것 같아요. 2차 세계대전 당시를 배경한 소설을 현대에 접목시킨 것도 좋고 사회에 대한 부조리를 비평한 것도 좋구요.

    • 2007-06-23 23:48:04
    레이피어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