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과학과 문화의 위대한 Ensemble

  • 작성자 브랜드커피
  • 작성일 2007-06-30
  • 조회수 1,285

  

 종래의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위업으로 손꼽히는 과학. 그 눈부신 발달로 말미암아 세상은 끊임없이 혁명적 진보를 거듭하고 있음에 가끔은 덜컥 겁이 날 때가 있다. 10년 전 여덟 살 난 꼬마일 때만 해도 내 상상화의 주인공은 언제나, 햇빛을 모아 매연 없이 질주하는 티코의 모습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태양열자동차의 상용화시대를 목전에 두고 있으며, 발전된 수소자동차의 혜성 같은 등장으로, 내 어릴 적 ‘상상 속 티코’의 모습은 한순간에 시들시들해져 갔다. 그.리.고. 한 살 한 살 나이가 늘어감에 따라 하나씩 깨우치게 됐던 건, 여덟 살 난 어린 꼬마 시절의 이 천박한 상상력을 깡그리 분해시킨 그 ‘무언가’의 저변에, 오늘날의 과학이라는 요망한 이중적 무기가 남몰래 숨어 있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침없이 아우토반을 휘달리는 현대 과학의 앞길도 결코 그리 순탄치 만은 않다. 과학은 점점 그 오만한 능력을 앞세워 세상과 동떨어진 외길을 추구했으며, 일부 과학자들의 열렬한 지지와 성과에 힘입어 대중을 도외시하는 그 독단적 성격에 오늘날 많은 사회문화학자들의 일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상황에서 제기된 매력적인 대안이 바로 문화로서의 과학과 과학적 문화의 복합체를 뜻하는 ‘과학문화’라는 것이다. 퇴폐한 이 시대 과학문명사회의 참상을, 매체를 통해 수없이 접해온 나로서는 평소 그저 생소하게만 들렸던 ‘과학문화’라는 개념이, 이젠 더 이상 한낱 이론적 발상으로만 생각해선 안 될 상당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다가왔다. 과학과 인문의 위태로운 만남의 끈을 견고히 해 줄 과학문화가, 어두웠던 인류의 과학미래에 눈부신 광명이 돼 줄 것만 같은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현대과학문명사회의 필요악으로 자리 잡아 버린 극악의 과학문제를 타개해 줄 매력적인 ‘과학문화’, 이에 대해 논하자면 크게 두 가지로 갈피를 잡고자 한다. 하나가 인문과 과학의 조화, 그리고 상호 연대 메커니즘의 구축이라면 또 하나가 바로 대중과 함께 하는 과학문화의 이룩에 대한 필요성이다.

 

 우선, 과학이 그동안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이전의 패러다임을 포괄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과학문화를 연구하는 인문학자들은 과학이 기존의 지배적 가치였던 인문적 소요를 배제한 채, 독단의 길을 추구했기 때문에 갖가지 과학적 폐단이 초래되었다고 본다. 즉,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존의 패러다임을 수반하지 못했기 때문에 준비되지 않은 사회기반 및 분위기 속에서 과학은 올곧이 그 뿌리를 내리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날 과학은 경제적 합리주의라는 미명하에 전 사회를 경쟁지향화 시켜버렸고, 도덕적 가치마저 도구화 시키는 끔찍한 도구주의의 확산을 야기했다. 그리하여 과학은 본질적 가치를 말소시킴과 동시에 기존의 인문문화에 거부하는 반체제적 파장을 일으켰고, 이에 따라 갈수록 많은 과학적 문제들이 속출하기도 하며 과학과 문화의 괴리현상은 깊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오늘날 과학과 문화 사이에는 불가피한 사회제도적 장벽이 존재하기도 한다. 사실 이러한 과학과 문화(인문)사이의 극단적 괴리가 빚어낸 현 교육의 잣대에 의해 ‘문과’라는 집단으로 구분지어 짐으로써 나는 화학에 대한 종래의 지적호기심을 포기해야만 했다. 언젠가 찰스 퍼시 스노 교수는 켐브리지 대학 강단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문과계 사람들이 열역학 제 2법칙을 모르는 것은, 이과계 사람들이 셰익스피어가 누군지 모르는 것과 같다.”

 

 이는 과학과 문화의 괴리를 심화시키는 현 메커니즘의 극단성을 명쾌하게 풀어낸 말이라고 평하고 싶다. 과학은 결코 인문적 요소를 벗어나 올바르게 존립할 수 없다. 또한 과학의 영향력 앞에서 약소한 문화적 힘만으로 사회진보를 추진하겠다는 것도 그저 시대착오적 발상에 그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 구성주의의 원칙하에 과학과 문화의 연결망을 구축하고, 과학·문화의 상호연대 메커니즘을 확립하여 과학기술에 대한 총체적, 간학문적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 즉, 혐오스런 프래그머티즘을 지양하고, 과학문제에 관한 다각도의 고찰, 예컨대, 윤리적, 사회문화적, 경제학적, 환경생태학적 관점 등의 도입을 통해 바람직한 진로를 모색해야 한다. 또한, 앞으로 과학자들이 인문학적 교육과정을 필수적으로 이수하게 하여, 스스로가 과학문화학자가 되게 하는 신(新)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그리하여 더 이상의 ‘두 문화’ 현상을 예방해야 하며, 단순한 과학문제의 수습 단계를 뛰어 넘어 비로소 원천봉쇄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과학문화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과제는 바로 대중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잘 갖춰진 과학문화가 영롱한 구슬이라면 이를 꿰는 것이 바로 대중에게 과학문화를 보급하는 일이다. 과학문화의 궁극적 목적은 바람직한 과학사회의 이룩을 위한 것이므로 그 사회를 살아가게 될 대중의 지지가 없다면 유명무실한 공론에 지나지 않을 테다. 실례로, 과거 우리 역사에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한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의 참담한 실패가 왜 발생했는지를 따져 본다면, 그 주된 연유는 바로 민중 지지의 부재라고 말할 수 있겠다. 사회구조와 의식의 변화는 다름 아닌 대중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과학문화는 단순한 과학자사회에 국한될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 신세대, 남녀노소 모두가 공유하는 대중성을 갖춰야 한다.

 

 이에 대해, 중부 유럽의 독일 박물관은 과학전시물의 보존, 전시뿐만 아니라 방문객에게 각종 기구를 실제로 사용하게 해 줌으로써 과학 원리를 몸소 알게 하는 적극적 운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다른 외국사례, 예컨대 영국의 COPUS(Committee on the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 대중과학이해위원회), 미국의 과학진흥협회와 NSF 단체의 활발한 과학홍보활동은 과학을 단순한 과학자들만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을 완전히 바꿔놓았으며, 다채로운 국제과학의 날 행사를 통해 과학의 권위에 대한 대중의 부담을 한 단계 낮춰 놓는 데에 성공한 바 있다.

 

 대표적으로 COPUS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건대, COPUS는 1986년에 왕립학회, 왕립연구소, 영국과학진흥협회가 공동으로 설립한 기구로서 민간의 다양한 소규모 과학문화 활동을 지원한다고 한다. 왕립학회는 과학강연의 전통을 자랑하고 있으며, ‘여름과학박람회’를 매년 개최하여 상위 20개 연구프로젝트의 성과를 전시하고 소개한다. 또한 교사와 과학자를 연결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영국과학진흥협회에서는 연례 축전을 전국의 대학을 순회하면서 개최하고, 과학 커뮤니케이터의 학술대회를 지원하며, 전국 청소년 과학클럽의 조직도 지원한다. (*최석식 - ‘과학문화의 실천과 정책’ 논문 참조.)

이는 결국 스케일이나 체계면에서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의 단단한 메커니즘을 갖춘 기막힌 과학홍보체제인 셈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실상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 국가가 운영하는 정보과학도서관이라고는 과천시정보과학도서관(http://www.gclib.go.kr) 하나가 전부이며, 국내 과학의 날 행사는 언론에서 보도하는 것만큼 실제로 그리 효과적이지 못한 현실이다. 교내 과학의 날 행사는 그저 단순한 의례적 행사가 되어 버렸고, 참여하는 학생들의 관심이나 호응 또한 높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정부를 주축으로 대중에게 제공되는 과학교육은 그 영향력이 크지 않을 뿐더러 지속적이지도 않다. 이는 한국의 과학이 문화화되기 까지는 그 역량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과학문화재단이 실시한 <2002 과학기술국민이해도 조사>에 따른 결과를 분석해 보자면, 우리국민의 과학의식 수준 및 관심에 관해 저절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데이터를 몇 가지 나열해 보건대,(이하는 2002과학기술국민이해도조사를 바탕으로 함) 2002년 한국 국민이 ‘관심이 많다’라는 항목에 있어서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 19.8%, ‘새로운 발명과 기술의 사용’이 18%로서, ‘환경오염’ 52.2%, ‘교육문제’ 47.4% ‘경제와 경기상황’ 37%에 비하면 상당히 저조한 상태가 아닐 수 없다. 이를 바탕으로 도출한 ‘분야별 국민 관심지수’에 따라 최근 미국과 비교해 보면, ‘새로운 과학적 발견’에 대한 관심지수는 한국이 43.5점인데 반해, 미국은 69점이고, ‘새로운 발명과 기술의 사용’에 대한 관심지수는 한국이 41점, 미국이 66점을 기록한 바 있다.

 

 미국에 비해 현저히 저급하고 뒤쳐져 있는 한국 일반국민의 과학에 대한 인식과 태도의 실상을 깨닫고는, 과연 이 나라가 반도체수출 1위의 첨단과학 수출국이 맞는 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이는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위 데이터를 접하는 모든 한국인들의 심정이 상동할 것으로 확신한다. 그만큼 대중과의 괴리감이 심각한 현실 속의 과학에 다시금 ‘과학문화’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다.

 

 과학문화는 앞으로 야기될 수많은 과학문제들을 제어해줄 가장 이상적인 대안이라 판단된다. 따라서 오늘날 과학의 양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음을 깨우치고, 다양한 학문적 관계 속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를 다각도로 발견해 내어, 그 폐단을 최소화 시켜야 할 것이다. 또한 과학의 맹목적 전문화를 지양하고, 대중의 눈에 맞춘 친숙한 과학문화의 확립을 통해서 과학을 인류의 진정한 이기로 사용해야 한다. 더불어 느낀 건, 이번 ‘과학문화’에 대한 진단으로 말미암아 모든 이들이 미래과학에 대한 진지한 사유의 기회를 한번쯤 가졌으면 싶은 마음이 든다. 내 유년시절 상상화 속 주인공이 ‘태양열 자동차, 티코’였다면, 이제 내 마음 속 상상화의 제재는 바로 과학과 문화의 조화가 숨쉬고, 이를 5천만 국민이 공유하게 될 ‘과학문화 교과서’ 한 권이면 충분할 것만 같다.


브랜드커피
브랜드커피

추천 콘텐츠

Drama는 Dreamer를 만든다.

     그렇다면, 바야흐로 시청률 50% 전 국민 드라마 광풍에 신바람이 난 대한민국 속의 ‘대세’는? 고3에게 사칙연산을 물어보는 것 마냥 명약관화한 질문이긴 하지만, 이에 ‘드라마’라고 대답하지 않을 ‘초딩’들은 없을 것 같다. ‘한국’이란 나라와 ‘드라마’와의 관계는, 숙주와 기생식물 간의 관계만큼이나 땔 래야 땔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임에 틀림없다. 과거 5,60년대서부터 전 국민을 고물상자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 ‘드라마’란 요물은, 힘든 삶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유일한 낙(樂)이자 희망인 동시에, 극단적으론 삶의 이유이기까지 했다. ‘드라마’는 실로 전 국민의 애간장을 녹이는 극적긴장과, 현실에서는 있을 법 하지만, 실제로 실현가능성이 0.5%도 체 되지 않을 아이러니컬한 구조와 전개로 말미암아, ‘드라마 판타지’(드라마 내의 세계와 현실 간의 괴리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게 되어 환상에 사로잡히는 착각증상 이라고 명명하겠다)라는 기이한 현상도 이뤄냈으며, 눈물을 자아내는 진한 감동과 서민들의 애환을 자극하는 사실적인 스토리로 한국인의 정서에 가장 잘 들어맞는 이상적인 매체수단으로 오늘날 입지를 확고히 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드라마의 치사(致謝)할 만한 사회·문화·정서적 힘은 며칠 전 마지막 방송에 자체시청률 최고치(29.3%, 수도권 내 30%)를 달성하는 기염을 토해 낸 ‘외과의사 봉달희(이하 외봉)’에서 다시금 재확인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만방에 고하고 싶다. 사실상 드라마는 그다지 잘 보지 않는 편인 나로서, 이 드라마에 한 회가 끝날 때 마다 아쉬움에 벽을 긁고, 다음 회를 오매불망하는 전형적인 ‘폐인증상’을 가지게 된 점은, 스스로도 쉽게 납득하지 못할, 어쩌면 UFO의 진위성 마냥 정확히 알기 힘든 사실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드라마 시청경력이 그리 길진 않은 나로 하여금, ‘한국판 현대 메디컬 드라마’의 진수를 보여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의 치밀한 구성과, 국내 드라마에서 없어선 안 될 불가결한 요소인 네 남녀의 달콤살벌한 로맨스의 적절한 가미로, 나를 완벽히 매료시켜 놓은 점은 자인한다. 종래에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최홍만의 K-1결승만큼이나 나를 들뜨게 만들었던, 그리고 나 자신이 많은 생각을 하게끔 만든 이 ‘외과의사 봉달희’라는 드라마가 대체 뭐 길래 나를 이리 미치게 하는 지는 비로소 각몽을 거친 지금에서야 서서히 뇌리에 들어났다.  우선 Drama는 Dreamer를 만든다는 점에 주안점을 두기로 한다. 그러면 자연스레 드라마는 계속적으로 현실을 반영하게 되고, 그걸 재료삼아 궁극적으론 현실적 제약을 뛰어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해 내는 귀결점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는 이렇듯 본능적으로 많은 시청자들을 그들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타 드라마와는 차별화 된 독특한 매력을 창출해 내고자 한다.  이렇듯 18회에 걸쳐 방영된 ‘외봉’은 대중들에겐 그저 흰 가운에 대한 환상만을 가지게 했던 의학계의 사실적인 장면들을 고물상

  • 브랜드커피
  • 2007-03-18
2006 양극화 돌풍, 이대로만 둘

   “연 가구 소득 상위 10% 1억···하위 10% 1천만원 - 도시 근로자가구 중 소득 상위 10% 가구의 연간 소득이 올해 처음으로 1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또 지난 2002년 이후 올해까지 4년간 도시근로자가구 상위 10%(10분위)의 가구소득은 23% 늘어나지만, 하위 10%(1분위)는 3%늘어나는 데 그쳐 양극화 현상이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략) 또 소득구성을 보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가구주의 월평균 근로소득(임금)이 상위 10%는 499만원인 데 반해 하위 10%는 66만원으로 7.5배 차이가 났다.(후략) (한겨레 5월11일자 인용)” 현재 우리나라의 소득 격차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대표적인 문구가 <20대 80의 사회>라는 말이다. 앞선 기사에서 보았듯이 이는 상류층과 하류층의 경제적 수준차의 양상과 진배없다. 파레토의 법칙에 너무나도 충실한 이게 바로 대한민국의 현 주소이다. 또한 이런 경제적 소득에서의 양극화는 학문의 터전인 학교에서도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연구원 류방란 씨는 학생 2만 여명을 대상으로 부모들의 소득격차와 그들 자녀들의 학업 수준 차와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조사를 하였는데, 놀랍게도 ‘학년이 높을수록 아버지의 직업이 학생의 학업 성취도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큰 것’으로 조사 되었다고 밝혔다. 더불어 류방란씨는 “학교가 계층에 따라 분리 될 수록 학업 성취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발생한다.”고 지적하며, “하위 계층 학생들이 집중된 학교들에 대한 정책적 지원이 시급하다.”고 발표했다.(한겨레 06년 5월 25일자 참조)  이렇듯 소득 불균형이란 사회 양극화가 교육에서 까지 초래될 경우, 종국에는 중산층 자녀들이 성실과 노력으로 아무리 공부해도, 고액과외 같은 사교육을 이수하는 부유층 자녀들 보다 절대 앞지를 수 없을 것이라는 극단적인 결론에 치닫게 된다. 이 것이 바로 앞서 말한 다큐멘터리의 핵심이었기도 하다. 꿈을 향한 그들의 항해에 '가난'이라는 뿌리깊은 암초는 생각보다 쉽지 않은 장애물이었다. 배움에 대한 열정이 그 누구보다 앞서도 경제적, 사회적 제약이 이를 가로막는 다면 얼마나 억울할 것인가. 한편, 이러한 문제점을 위해 정부에서도 움직임을 보이는데, 노대통령의 신년대국민연설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에서 양극화 해소를 위한 방안으로 ‘증세’와 ‘일자리 창출’을 주장한 바 있다. 이에 각 언론과 단체에서는 우선 노무현 대통령의 ‘증세’방안에 대해 찬반 논란이 뜨겁다. 양극화 해소를 위한 재원 마련 차원에서 세금을 통해 그 필요재원을 확충하자는 노무현 대통령의 의도는 소위 잘 사는 ‘귀족층’이 가난한 빈민층을 위해 세금을 좀 더 많이 내게 하여, 재원도 마련하고, 소득 격차도 줄여보겠다는 취지임에 틀림없다. 언뜻 보아서, 이는 가장 현명하며, 도덕적이고, 평등주의적 사고가 잘 반영된 최선의 방책으로 생각 될 수도 있겠으나, 사실상 그렇지 못할 것이라 본다. 공산주의가 아

  • 브랜드커피
  • 2006-12-21
'이인국'에 투영된 정치인의 참

-'해방50년 한국의 소설'을 읽고 (中 '꺼삐딴 리'를 읽고)  해방 전후에 등장한 한국 소설은 정말로 많고 다양하다. 좌익과 우익의 이데올로기적 대립과 투쟁을 담은 문학에서 부터, 혹은 이와 별개로 작가적 임무에 충실한 문인들, 예컨대 채만식, 김동리 등에 이르기 까지 그 변천사는 뭐라 단정 지을 수 없다. 우리나라 문학사(文學史), 그 중에서도 해방 50년 간의 문학사에는 전후문학을 비롯하여 모더니즘 경향의 문학, 순수 문학, 현실참여 문학 등을 총망라한 가히 '문학의 춘추전국시대'쯤에 버금간다. 숱한 단편 소설 가운데서도 1960년 대 발표된 전광용의 '꺼삐딴 리' 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 봤다. 되려 낯선 소설 같은 경우에는 배경지식이 없어서 깊은 사고가 뒷받침 되지 않았지만, '꺼삐딴 리' 같은 경우에는 여지껏 문제화 되어 출제되기도 하는 작품이기에 접근하기가 더 수월했다. 배탈이 난 아가의 배를 천천히 어루만지는 어미의 손길 처럼, '꺼삐딴 리'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재독(再讀)하였다. '꺼삐딴 리', 아니 '캡틴 리'. 바로 이인국을 두고 하는 말이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이인국의 비위는 참으로 좋다. 동분서주하며  일본, 러시아, 미국에 갖은 아양을 다 부린다. 기가 찰 노릇이다. 일제 치하에 일본 왜놈들에게 일본어 상용의 대가(大家)라는 더러운 칭호를 받는다. 해방이 되고 소련군이 진주하며 러시아의 세력이 커지니, 또 러시아어를 눈에 불을 켜고 독학하여 러시아 장교의 혹을 하나 떼주고, '친소파'라는 역겨운 칭호를 따내는 데 성공한다. 1`4후퇴에 월남을 하고선 유학간 전처의 딸 나미가 미국 유학 길 중 외국인 교수와 결혼을 한다니깐, 또 잽싸게 미국행을 결심한다. 미국 대사관에 찾아가서는 우습게도 그가 대사관 '브라운'에게 건낸 건 '고.려.청.자.'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나로 하여금 이로 말할수 없는 고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리고 이인국은 다시금 이를 악 물고는 생각을 하더라. 미국에서 꼭 성공을 거둘거라나 뭐라나...  당시 지도층들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한편, 새로운 도덕의식의 필요성을 인상적으로 역설하고 있다. 이인국의 태도다 기가 막힌다. 그에게 '국적'이란 개념은 유명무실시 되고, 그의 오장육부, 머리서 부터 발끝까지를 휘감는 한국산 항체의 RH+피는 온갖 더러운 양심의 찌꺼기에 기인한 동맥경화로 순환이 멈추는 듯 하다. 그에게 '조국'이라는 게 어떤 존재일지 매우 의문이 간다. 지조도 신념도 없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철저한 이기주의와 기회주의의 전형이다. 아니, 그 이상일테지. 육상 동물과 날 짐승 사이에서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며 본인의 안일만을 취하다가 동물 세계에서 영원히 추방당한 '박쥐'라는 놈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우습게도 이 천하의 간사한 박쥐놈도 아마 이인국 앞에서는 '형님!' 할테다.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 카멜레온을 압도하는 간교한 변신을 밥 먹듯

  • 브랜드커피
  • 2006-12-20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
  • 물처럼

    또한 부분적으로 부적절한 단어사용도 보이네요. 첫번째 문단의 '천박한 상상력'이라는 표현은 아마도 '치기어닌 상상력' 라는 의미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순수하고 어린이다운 상상력이었지, 비천하고 얄팍한 상상력은 아니었을 터이니깐 말입니다. 그런 점이 아쉽기는 해도 전반적으로는 비교적 탄탄한 논리와 문장 전개능력을 갖춘 글입니다.

    • 2007-07-05 06:43:56
    물처럼
    0 /1500
    • 0 /1500
  • 물처럼

    그런데 첫번째 주장은 논거가 부실하고 주장이 주로 반복되는 경향이 보이는 글이어서 아쉬움을 줍니다. 예를 들면 4번째 문단에는 예시가 바로 그 문단안에서 제시되지 않아 이에 대해 부정적 비판적 관점을 가진 이에게는 얼른 수긍하기 어려운 논리 전개 방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 문단에는 '찰스 퍼시 스노 교수'라는 일종의 권위있는 사람의 증언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켰기에 조금더 설득력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위의 문단도 조금더 상세화하여 논리전개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 2007-07-05 06:38:51
    물처럼
    0 /1500
    • 0 /1500
  • 물처럼

    요즘 지식의 '통섭'을 강조한 최재천 이화여대교수의 의견과 비슷한 논지를 지닌 글입니다. '과학문화=통섭'이라고 개념을 정의해도 좋을 듯 합니다. 이 글에서는 '인문과 과학의 조화, 대중과 함께 하는 과학문화 이룩하기의 필요성'에 대해 주장하고 있군요. 논지의 큰 방향잡기도 무리가 없고 주장글을 구체적으로 전개해나가는 과정도 크게 보아 뛰어난 편입니다. 특히 두번째 주장에는 논문과 잡지 내용을 인용하여 논거로 삼고 있는 점이 주장의 신빙성을 높여 줍니다.

    • 2007-07-05 06:34:33
    물처럼
    0 /1500
    • 0 /1500
  • 익명

    문이과 나누는나라가 참 희귀하죠. 동의합니다. 이공계 기피에 인문학위기인 뭐 샌드위치 비슷한 상황이죠. 점점더 과학과 인문과도 양극화되어가고 있는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런 반도체 발전이야 잘 하지요. 그 사람들은 극히 전문화되어 있으니까요. 과학과 사람들이 인문지식을 가져야 하는 것과 인문계 사람들이 과학지식을 가져야 하는 건 예전부터 정말로 절실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 2007-07-03 02:12:21
    익명
    0 /1500
    • 0 /1500
  • 익명

    /̰ 缺 ׵

    • 2007-07-02 02:55:01
    익명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