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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을 다녀와서

  • 작성자 애화
  • 작성일 2007-12-06
  • 조회수 123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한다. 바야흐로 인류가 21세기에 들어선 것도 어언 6년이 흘렀다. 6년이면 강산은 바뀌지 않더라도 사람이 변하고 문화가 변할만한 시간이다. 실제로 21세기에 들어 우리의 생활은 충분히 많은 변화를 겪었다. 하루와 밤낮을 가리지 않는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달로 우리의 생활은 일견 더욱 풍요로워지고 융성해진 듯하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가 말하던 제 3의 물결, 즉 정보의 혁명은 우리에게 폭넓고 깊은 지식과 정보의 무제한적 접근으로 인한 정보를 취사선택, 습득할 자유와 함께 각종 매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각종 자본주의적 이기로 점철된 상품의 홍수에 휩쓸리게 만들었다. 쉼 없이 대중의 눈과 귀를 유혹하는 상품들에의 무절제하고 방종한 소비행태의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만치 끝없는 문제점들에 대한 논란은 잠시 제쳐두더라도, 그러한 무분별한 소비의 타성에 사로잡혀 사람들은 스스로를 현대 문명의 풍요를 한껏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좋다. 어찌하였건 뉴턴의 제 3법칙에 따라 물리적 에너지는 소멸하거나 생성되지 않고 늘 순환하기 마련이다. 현대 문명의 총화로 우리 인류는 여태껏 생존을 위해 어찌할 수 없이 짊어지고 있어야했던 온갖 불필요하거나 과중했던 에너지의 소모를 과학기술에 기대어 나누어 질 수 있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감내할 수밖에 없던 에너지의 소모를 최소화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불필요한 에너지들이 욕구불만인 채로 남게 되었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과연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주체할 수 없이 늘어만 가는 여가 에너지들을 어디에 사용하게 되었을까? 그것에 대한 답은 우리 일상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입시전쟁을 치르고 한숨 돌린 입시생이 가장 먼저 할 말은 무엇일까? 아마 백이면 백 ‘문화생활’을 얘기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흔히 ‘문화생활’이라고 부르는 소비문화가 과연 진정한 의미의 문화일까?

 앞에서 늘어놓았듯이 현대 문명은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뜬구름과도 같았던 제 4의 물결, 즉 우주혁명이 점차로 가시거리에 놓이고 있는 시대이다. 그에 비하여 그동안의 21세기 현대 문화의 조류는 어떠한가. 최근에 발표된 새로운 문학, 미술 사조나 혹은 범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이데올로기라도 존재하고 있기나 한가.

 학교 소풍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을 견학하며 내가 느낀 것은 온통 내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는 무거운 위화감이었다. 그곳에선 고 백남준 씨를 위시하여 지금은 작고한 현대작가들의 유고전이 한창이었다. 비로소 나는 나를 짓누르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곳에는 온통 죽은 것들만 가득했던 것이다. 실상 현대 미술의 백미로 꼽히는 작품들을 꼽아보면 대부분은 근대미술사의 위대한 이름에도 함께 올라가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근대 미술과 현대 미술의 근친상간과도 같은 무분별한 계승이다.

 대체로 문화의 변동이란 기존의 A란 문화가 하루아침에 B란 문화로 교체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B란 문화에 A란 문화가 편입, 수용되는 것과도 같다. 그럼으로써 문화는 변동함으로서 기존의 것과 단절되는 것이 아닌 오히려 계승, 발전되는 것이다. 때문에 현대미술관의 작품들을 둘러보며 나는 무분별하고 부적절한 관계에서 태어난 기형아를 자꾸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세계 1차 대전이 종전된 후에 등장한 다다이즘은 20세기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큰 파급을 일으킨 예술조류였다. 다다이즘은 그 영향력도 막대해서 훗날 현대미술을 대표하게 되는 추상주의와 초현실주의의 발생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특히 당시 뒤샹이 주창한 레디메이드란 개념은 이전의 미술사를 뒤엎을 만큼 커다란 의미를 지니게 되며 오브제를 활용한 현대 미술의 근간으로 자리 잡는다. 또한, 다다이즘의 현대 미술에의 가장 큰 공헌은 기존 미술의 회화 형식의 정형성을 파괴한 것에 있다. 그로인해 미술의 지평은 단순한 평면적 구성이나 조형물을 넘어, 공간과 사물의 의미에까지 천착을 이루게 된 것이다. 즉, 기존 회화미술의 선험적 미의식에의 집착에서 벗어나 경험적 세계관에까지 예술의 가능성이 확대된 것이다. 하지만 초현실주의 이래로, 미술 사조의 창조적 발전은 멈춘 듯 보인다.

 경제학 용어로 프로슈머(ProSumer)라는 말이 있다. 앨빈 토플러가 제 3의 물결과 함께 언급한,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에 선 ‘생산적 소비자’를 일컫는 개념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생산은 말 그대로의 생산이라기보다는, 유산계급을 말할 때의 상품 생산으로서의 생산에 가깝다. 정보화 사회에서 현대인들은 무에서 유로 무언가를 창조하기보다는 기존의 것들을 합치고 더하여 얼마나 빠르게 의미를 재구성하느냐가 제일의 과제이다.

 이처럼 현대의 문화는 정보사회의 다원화와 다양성을 방패삼아 무언가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하기보다는 기존의 것들을 짜깁기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어쩌다 기존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 말을 해도 대부분 작품의 내적 의미에 치중하기 보다는 작품의 형태와 외적인 것에 관심을 두는 목적전치가 이루어진다.

 뒤샹이 예술에 저지른 가장 큰 폭력은, 사이비 예술가들이 예술의 모호성이나 개인주의적 심미관에 기댈 도피처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더욱더 복잡해지고 다양화되는 현대 문화에서는 기존의 미술사에 대한 정당한 계승권을 주장하기 위해서라도 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절대적 기준과 미의식에 대한 재조명과 함께 다양한 시도와 사상의 표현이 병행되어야 할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제안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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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학교에서 수행평가로 썼던 글을 찾아 올립니다.

심술이 군데군데 묻어나는데, 수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애화
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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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그런데 이 글에서는 현대 미술사조의 전반적인 흐름에 대한 입장정리가 더 우선인듯 하군요. 조금더 집중화된 글쓰기가 필요합니다. 굉장히 귀한 시간을 내어 주장한 글이지만, 조금더 입장을 간결하게 정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 2007-12-16 22:37:02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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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애화님! 제목과 내용을 비교해 보니, 표현욕구가 너무 과다하다보니 주장할 내용이 매우 크고 넓고 많군요. 주장하는 글은 주장하려는 초점을 제목에 담고, 그에 알맞는 내용을 중심으로 펼쳐 나가야 합니다. 미술관에 다녀오면서 여러 상념들이 떠올랐겠지만, 자기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에 집중하여 주장하여야 합니다. 현대미술관의 어떤 작품이 어떤 경향인데, 그것에 대해 나는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를 주로 말해야 합니다.

    • 2007-12-16 22:36:10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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