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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수의 바람난 가족과 봉준호

  • 작성자 아마도생선
  • 작성일 2007-12-14
  • 조회수 975

 

임상수의 바람난 가족과 봉준호의 괴물을 통해 볼 수 있는 가족을 뛰어넘은 가족



1. 바람난 가족 내의 여성중심 가족


        평론가 황진미에 따르면 <바람난 가족>은 가족의 본질을 규명하며, 이제 가족윤리를 넘어 새로운 개인윤리를 정립해야함을 역설하고 있다.1)  첫 번째의 가족은 개인이 가족이라는 집단에 귀속되는 가족이다. 가족은 인격의 대변체이면 가족은 개인을 말한다. 일종의 집단주의적 태도의 가족이다. 그들에게 그들의 가족에서 떼어놓은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족은 그들의 정체감을 형성하며 그들의 심리를 대변하는 공간이다. 두 번째의 가족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누가 누구에게 생계를 걸고 있진 않아 보인다. 그들은 말한다. “남의 인생 참견 하지 말고, 남의 탓 할 것 없이, 각자 인생 똑바로 살자.” 그들은 “내 몸 원하는 대로 내 몸을 위해주며” 산다. 남이야 뭐라던 시아버지는 죽기 직전까지 술 담배 끊지 않고, 시어머니는 15년 만에 새 파트너와 섹스를 하며, 남편은 “별 문제될 것 없이” 다른 여자 좀 만난다. 아내 역시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하고 산다(그녀가 원하는 것이 반드시 남편일 필요는 없다). 이들은 한 덩어리로 결부되어 있지 않으며, 사안에 따라 ‘따로 또 같이’ 연접하는 독립된 개인들이다. 여기 양극단의 가족이 충돌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며, 상대의 약점을 틀어쥐고선 관대한 척 매끄럽게 빠져나가던 “신원 확실하신” 그가 가족주의와 개인주의의 중앙에서 50년 가부장제라는 허상을 짚고 실족한다. 영작의 할아버지는 처와 딸 여섯을 두고, 아들만 데리고 월남하였으나 이후 그들은 생사조차 모르고 산다. 가부장제의 핵심 요소인 父-子만 추려왔건만 그들은 가족을 이루지 못한다, 父-子는 가부장제의 핵심이긴 하지만, 가족의 핵심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남녀의 생물학적, 심리학적 성적인 차이를 보여줌으로써 궁극적으로 가족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그 남녀의 성적인 차이는 영화 내에서 크게 3가지로 나온다.

 자족감과 친밀감과 사회 성원의 재생산 능력이다. 알몸으로 카펫을 뒹굴며 자기 몸의 충만감을 즐기는 호정은 남편 옆에서 자위를 할 만큼 자기 욕망에 충실하다. 그녀는 자신의 성욕을 중시하지만, 그것을 남편에게 귀속시키지 않는다. 영작은 항시 타자를 욕망하고 필요로 한다. 그는 애인에게 “쿨한 척하지만 진짜 외롭죠?” 소릴 듣는다. 아버지의 임종에서도 “간호사년의 치마를 벗기는” 상상을 한다. 아들이 죽고 나자 애인에게 “내 안의 무언가를 쏟아내고 싶어 미치겠다,”고 애걸하고, 애인에게 쫓겨나자 비서를 찾는다. 그에겐 자기 충만감이 없다. 호정의 자족감은 그를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한다, 그의 열등감은 아들이 죽자 폭발한다. 그가 호정을 때리면서 했던 말은 “네가 뭐가 그렇게 잘났니?… 내가 용서가 안 되지?”였다. 그가 “자기 생각하며 자위했다”고 말하는 애인, 나아가 더 만만한 비서를 찾는 것은 호정에게 느끼는 열등감의 발로다. 영작은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므로 밖을 향해 욕망할 뿐,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 안으로 욕망하지 않는다. 반면, 호정는 시아버지에게 술을 사드리고, 토한 피를 닦아준다. 병식에서 그녀는 영작을 위로한다. 시어머니의 새로운 인생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듣고 지지하며, 아들에게는 진심이 통하는 엄마였다. 영작은 아비의 몸을 닦다가도 아비의 허세에 짜증을 내며, 피를 토하자 “호정아!”를 찾는다. 어머니 이야기가 듣기 싫어 이불을 파고든다. 거짓말하는 그는 아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다. 그는 성적 관계가 아닌 사적 친밀감을 나누는 관계에 무력하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사적 친밀감은 가족을 운위하는 핵심요소이다. 영화에서 남자는 친화력이 떨어지며, 친밀감의 담지자는 여자이다, 호정과 영작은 불임이었다. 하지만 고딩과 호정의 아이는 태어나 호정과 가족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영작의 아이는 제거되고 만다. 남자는 여자의 몸을 통해서만 아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생물학적 재생산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고, 남자는 ‘노동력’을 갖는다. 따라서 남성은 여성은 노동에서 축출함으로써 지배적 위치를 견지하려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가부장제라고 한다.

        영화는 경제적으로 여유있고 가족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이 가족을 통해서 신자유주의의 압박속에서 한강다리 위에서 몸을 던지는 영화 괴물의 유사장같이 자본주의의 낙오자가 된 가장과 무너지는 가부장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가족을 구성하는 중심에는 여성이 있음을 얘기한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남성의 노동력 확보를 어렵게 만들었고, 호주제 폐지 등 가부장제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드는 시점에서 기존의 가부장적 가족관계가 아닌 새롭게 재편되는 가족관계를 상상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호정과 아들의 관계에서 보듯이 생물학적 토대를 차치하고서라도 가족 내부의 친화력은 여자에 의해 유지됨을 알 수 있고, 이를 통해 ‘여성이 중심이 되어 친밀감을 교류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그려볼 수 있다.

        더불어 이 영화는 가족의 본질을 보여주며, 나아가 ‘화목한 가정’을 목표로 삼는 가족윤리에서, ‘행복한 개인’을 목표로 삼는 개인윤리로, 윤리의 단위가 바뀌어져야 함을 제안한다. 진짜 어떻게 살아야 ‘내가’ 행복해질 것인가? 연애가 답이면 연애를 하고, 가정이 답이면 가정을 꾸려라. 그러나 남에게 “재수 없게 연설”하지 말고, “네 아버지 탓”도 하지 말고, 오지말라는 애인에게 “내가 미쳤었나보다”며 우격다짐으로 들이밀지도 말고, “내 인생 내가 책임지며, 맨 정신으로, 솔직하게 사는 것”이 “이제 짐승의 시간은 관두고, 사람답게 사는” 최소한의 개인윤리이지 않겠냐고 감독은 ‘바람’을 빌려 자신의 ‘바람’을 이야기한다.


2. 괴물의 가족-아버지

<괴물>에는 서로 합치되지 않는 세 가지 층위의 ‘아버지’가 존재한다. 첫째는 남루하고 무능하지만 자식을 지키고자 사투를 벌이는 아버지이다. 둘째는 무능하면서 억압으로만 작동하는 아버지, 한국 정부이다. 셋째는 유능하지만 남의 아버지일 뿐인 미국이다.

<괴물>의 아버지는 “아비는 개흘레꾼이었다”(김소진)를 연상시킨다. <괴물>의 아버지는 ‘알아서 기는 종’도, 헛된 꿈을 꾸는 혁명가도 아니다. 오히려 그에 턱없이 못 미친다. 아예 권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발적 굴종도 없고, 권력을 탈취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러나 <괴물>의 아버지는 괴물을 무찌른다. 그는 죽은 독재자에게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산 괴물에 적극적으로 맞붙는 용기를 지녔으며, 자식에게 무심했던 ‘바람’ 같은 아버지와 달리 자식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무능에도 불구하고 딸을 위해 사투를 벌인다. 그 우직한 과정에 운동권 삼촌과 굼뜬 고모가 함께한다.

<괴물>의 아버지가 중요한 이유는 첫째, 우리나라의 수많은 ‘부성부재’의 텍스트와 달리, 드물게 부성애를 보여주었다는 점. 둘째, 권력에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거대 권력에 맞서는 새로운 부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두개의 ‘아버지 찬가’가 흘러나온다. 첫째,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는 모 카드사의 욕마으로서 아버지. 둘째,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가 꿈꾸던 나라, 대한민국입니다”라는 국정홍보처의 ‘아버지’에 대한 상징조작. 수많은 광고가 그렇듯, 이는 실제의 아버지가 아니다. 욕망으로서만 존재하는, 아버지 판타지이다.

첫째, 자본주의 이전에 인생을 즐기는 것과 아비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병행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쾌락의 추구는 곧바로 의무이자 윤리이다. 자본주의-아버지는 ‘인생을 즐기라’ 명하고, 자식들은 쾌락을 강제하는 모순된 이 명령을 수행하고자 ‘소비하고 노동하기(카드 쓰고 카드 막기)’를 반복하느라 ‘쎄가 빠진다’. 따라서 한번도 존재한 적 없는 ‘부자(부르주아)아빠’를 불러내는 이 광고는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축적의 정도가 식민지적 천민자본주의의 ‘서자의식’이나 ‘고아의식’에서 막 벗어났다는 선언이다.

둘째, 국민국가 만들기의 신화적 재구성이라 할 만한 ‘대한민국’ 광고는 일종의 ‘자수성가한 아들의, 없는 아버지 만들기 작업’과 비슷하다. 영광의 아버지를 만들어내어 존경하고 동일시하며, 역으로 상상의 아버지로부터 지지받고자 하는 이 전략의 핵심은 결국 자화자찬이다(“대한민국은 바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원래 부자였던 아버지와 자랑스러운 아버지를 꿈꾸고 그 말씀을 기리는 것, 이는 ‘자본주의적 축적과 국민국가의 형성’이라는 근대적 과제가 완수된 이 시대의 ‘해리성 정신장애’이다.



3. 괴물의 가족- 대안의 가족에의 모색


<괴물>에서 괴생물체는 체제에 의해 ‘공적’으로 선포되고 그로 인해 서울 시민들의 일상이 강력하게 통제되지만, 정작 그것이 괴물이 되는 이유는 그 자신이 지니고 있는 공격성과 가공할 파괴력 때문이 아니다. 사실 ‘괴물’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최소한의 공격성만을 드러낸 것일 뿐이며,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서 싸운다. <괴물>에서 공권력이 괴물과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장면은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종반부에서 ‘옐로우 에이전트’와 괴물의 대결은 계획된 전투가 아니라 우연한 조우에 가깝다). 체제는 오로지 미디어를 통해서 괴물을 창조해내며, 그것을 통해 시민들을 통제하고자 한다(사실, 괴생물체의 희생자 및 접촉자들이 모여 있는 장례식장을 통제하러 온 공무원(김뢰하)은 정작 괴물에 대해 알고 있거나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단지 TV를 보라고 되풀이해 말할 뿐이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강력한 신종 바이러스의 숙주(host: 이것은 <괴물>의 영어 제목이기도 하다)로 선고를 받는 순간, 오염된 한강을 자궁 삼아 태어나, 한강에 연결된 한 하수도에 자신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한강의 수많은 교각을 자신의 이동 수단이자 놀이터 삼아 성장해온 외로운 돌연변이인 ‘그것’은, 비로소 공포의 대상으로서의 ‘괴물’이 된다. 이상하게도 그 ‘괴물’은 자신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다고 가정-조작된 바이러스를 겨냥하고 있는 ‘옐로우 에이전트’를 뒤집어 쓰자 무기력하게 쓰러진다. 하지만 정작 그의 최후의 숨통을 끊어내는 데는, 매스미디어의 현실 효과 외부에 존재하는 일군의 루저들(삼남매와 다리 밑 부랑아)의 연대가 필요했다. 어찌보면 괴생명체는 자연과 하수구를 자유롭게 오가는 또 한명의 루저였고, 박강두의 가족은 바이러스 보균자로 낙인 찍히는 순간 이미 괴물이었다. 그래서, 그 처절한 마지막 사투는, 은밀한 연대와 소통의 순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괴물의 최후의 순간은 새로운 탄생의 순간이기도 하다. 죽은 괴물의 입은, 대문자 가족의 경계를 벗어나 새로운 가족이 탄생되는 자궁이 된다.


4. 봉준호의 영화들 안에서의 괴물


봉준호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들은, 봉준호 영화의 전체 서사와 환유적 관계에 놓여 있다. 봉준호가 만들어내는 영화적 서사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자유분방한 리듬의 설화성에 있다. 도시-소시민의 일상=현실을 만들어내는 매스미디어의 영향력을 비껴가며 자연과 도시의 지하 공간 사이를 자유롭게 왕래하는 이야기의 세계. 사실, 그 세계에서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으며, 그 경계의 구별이 큰 의미를 지니는 것도 아니다. 그의 영화에는 늘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미장센으로서의 ‘연기’(煙氣)와 그 경계를 아예 지워버리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편집이 등장한다. <플란다스의 개>의 소독약, <살인의 추억>의 새벽 안개, <괴물>의 소독약과 ‘옐로우 에이전트’. <플란다스의 개>의 옥상 응원 판타지의 그 유연한 고속 촬영, 그리고 <괴물>에서 괴물에게 잡혀간 딸 현서가 피곤에 지친 가족과 함께 밥을 먹는 그 천역덕스러운 판타지. ‘객관적인’ TV 뉴스 보도에서처럼 명징한 현실은, 애초에 없다. 봉준호의 인물들은 그 뉴스 보도의 자의성과 편파성과 선정성에 불만을 터뜨리거나(<플란다스의 개>의 현남, <괴물>의 세 남매), 무시한다. 그리고 바로 그 미디어의 현실 효과 외부에서, 이야기는 펼쳐진다. 그들은 미디어의 현실 효과 외부에 있으며, 그 강력한 포섭망을 그런 식으로 ‘비껴간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들은 매스미디어가 구축하는 현실 세계의 위선성에 분노하거나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덤덤하게 비껴간다. <괴물>에서의 어린 세주의 말처럼, ‘밥 먹는 데 집중’하기 위해서 TV는 꺼야만 하는 것이다. 이 덤덤한 무심성, 이것이 그의 인물들의 살아가는 방법이자 무기이다. 그들은 그 무심함을 무기로 애초에 그 자장 밖에 놓여 있던 자연 또는 루저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소통과 연대의 흐름이 이루어진다.


5. 괴물과 바람난 가족 그들의 시선 너머


        괴물의 마지막 장면, 현서는 죽었고 그 자리를 세주가 대신하고 있다. 그들은 혈연에서 벗어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한다. 다만, 그 자리에는 결핍의 정서가 강하게 자리한다. 밥을 먹는 그 자리에는 남일도, 남주도 부재한다. 이러한 부재의 현실에서 봉준호는 새로운 구성원과 그 결핍을 응시하는 강두를 보여준다. 사실, 괴물은 굉장한 정치 영화다. 세 번째 씬에서 자살하는 남자가 본 괴물은 단순한 괴물이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주의의 괴물이라는 정성일의 말이 훨씬 설득력있다. 그러나 이 논의에서 빠져있는 것은 봉준호가 말하려고 했던 괴물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이다. 봉준호는 현서를 죽이고, 세주를 살림으로서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사색을 보여준다. 시종일관 영화 안에서 괴물과 싸워온 주체가 가족이라는 혈연으로 이어진 공동체였음을 상기할 때 이 마지막 장면은 봉준호가 가족주의 에로의 함몰을 피하고 진정한 연대를 추구하는 자신의 바람을 얘기한 것이다. 가족을 뛰어넘은 가족, 이는 정면으로 관계에 대해 사색하고 그 사색 끝에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제시한 동시대의 영화인 김태용의 가족의 탄생과 맥이 닫는 부분이다. 임상수의 바람난 가족 역시도 기존 가부장제의 허상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새로운 가족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 제시하는 대안은 괴물의 연대와는 조금 다르다. 그의 영화는 모계중심의 혈연 사회의 회복을 갈구하는 듯 보인다. 마치, 귄터 그라스가 그의 작품 넙치에서 12번째 세계의 귀환을 갈구했듯이 임상수는 호정으로 대변되는 여성의 자기긍정을 통한 가부장제의 극복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 두 영화는 임상수와 봉준호라는 두 감독의 현재 지점을 잘 드러내 주고있다. 임상수는 현재 한국 영화의 감독들 중에서 단연 한국적인 소재에 대한 접근이 뛰어난 감독이다. 그는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임권택의 적자로 불리운다. 그는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유교적 엄숙주의에 찌든 한국 사회내의 성을 소재로 삼았고 눈물에서는 청소년들에게 폭력적인 한국 사회 내에서 탈선할 수밖에 없는 청소년들의 삶을 소재로 삼았다. 그리고 바람난 가족에서 우리 사회의 복지공여 최소단위인 가족의 강한 가부장성을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가부장성 너머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고있다. 한국적 상황에의 정확한 응시를 통한 그 너머의 가능성의 획득, 그것이 교정적 리얼리즘의 전위인 임상수의 현재 위치다.

        봉준호 영락없는 도시인이고 소시민이지만,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소시민적 일상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는, 또한 그 외부의 세계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 자유인이기도 하다. 그 외부란, 한편으로는 ‘자연’이고, 또 한편으로는 도시의 ‘후미진 공간’이다. 봉준호의 영화는 늘 어떤 ‘풍경’으로 시작한다. <플란다스의 개>의 숲, <살인의 추억>의 가을 하늘과 들판, <괴물>의 한강. 그런데 그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의 독특함은, 그것이 단순한 도시의 대립항이라기보다는 도시와 은밀히 소통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영화 세계에서는 자연과 도시의 후미진 곳(어둡고 습한 공간: 아파트 지하실, 다리 밑, 하수도)은 ‘대결’한다기보다는 ‘소통’한다. 그의 몸은 분명 중산층 고층 아파트의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을 듯한데, 그의 시선은 늘 창밖의 자연을 향하고 있고, 그의 마음에는 도시의 지하 세계와 그곳 삶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가득하다. 청명한 하늘과 음습한 지하. 그는 이 두 이질적인 세계를 애정어린 시선을 통해 하나의 세계로 구축해간다. 그 속에서 그는 정치적 함의를 집어넣는다. 시침 뚝 떼고 넣어놓은 이라크전쟁에 대한 비유와 풍자,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괴물에 대한 불신이다,(봉준호가 괴물을 자본주의라고 은유하려 한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전 시네마테크에서 열린 관객과의 대화에서 괴물의 속편을 김곡 김선 형제가 감독하기를 원한다는 사실로도 알수있다.) 그리고 그는 그에 대한 해결로서 연대를 제시한다. 소통과 연대는 그의 모토이며 화두다. 그리고 그는 그 화두를 장르영화와 정치 영화 사이에서 가장 영리하게 이끌어가는 감독이다.






아마도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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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문제’에서 청소년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어째서 청소년의 반대말이 자유가 된 것일까요. 이유는 청소년이 ‘미성년자’라는 단어의 범위 내에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미성년자’라는 말을 풀어서 해석해보면 ‘아직 다 완성된 나이가 아닌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이 풀어서 해석된 ‘아직 다 완성된 나이가 아닌 사람’이라는 말에는 ‘무엇’이 아직 다 완성이 되지 않았다는 것인지가 빠져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펄떡이는 심장을 가진 하나의 ‘완성된’ 생명이고, 인격을 가진 ‘완성된’ 인격체인데 무엇이 아직 다 완성이 되지 않았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도구’로서의, 그리고 ‘부속품’으로서의 미완성입니다. 물론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때 교육부의 정식 명칭이 교육인적자원부였다는 것 또한 이런 관점에서 ‘인적 자원’이라는 용어를 쓴 것입니다. 우리는 단번에 석유와 같은 자원이 된 것입니다. 인적 자원의 관점에서 미성년자, 즉 ‘아직 다 완성된 나이가 아닌 사람’이라는 의미는 아직 정제되지 않은 석유와 같은 의미가 됩니다. 다시 말해 석유가 분류과정을 거쳐 가스, 휘발유, 경유, 타르 등으로 나누어져 쓰임새를 찾듯 인적 자원도 그런 과정을 거쳐야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석유나 석탄과 똑같이 보는 관점에서 ‘미성년자’란 아직 쓰임새를 찾지 못한 원유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제과정을 거쳐야하는 대상이 됩니다. 교육받아야 하는, 미성숙한 인간, 완성되지 않은 인간, 도중인 인간, 준비단계인 인간으로 규정지어 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머리 길이와 모양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몽둥이로 엉덩이를 맞고, 출석부로 머리통이 깨지고, 빗자루로 얼굴이 쓸리고, 주먹으로 뺨을 강타당해도 그것은 폭력이 아닙니다. 정제의 과정입니다. 성숙으로 가는 데에 주어지는 도움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의 가방은 호주머니는 일상적 감시의 표적이 됩니다. 학생회는 학교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됩니다. 미성숙한 학생은 학교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의 주체는 더욱 아닙니다. 감히, 선거리니요. 교육감 선가가 아무리 우리 자신과 관련이 있다 해도 우린 그냥 조용히 있어야합니다. 미성숙하고 완성되지 않았으니까요. 완성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인간으로서의 권리는 박탈되어 있는 것입니다.  힘든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청소년이 부모와 국가의 극진한 보호 아래 공부만 하면 되는 시대가 온 것을 두고 역사의 진보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청소년이 고된 노동을 강요당하던 때와 비교한다면 분명 상황은 나아졌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비교는 너무 단순합니다. 표면적으로 볼 때 그 변화는 생산 양식의 변화에 따른 사회 문화적 진화의 과정이었을 뿐이고 청소년이 더 행복해졌다는 식의 판단을 내릴 성질이 아닙니다. 청소년이 미성 청소년 인권 운동은 이러한 지점에서 청소년의 외침을 들리게 합니다. ‘보호’의 미명 아레 ‘억압’당하지 않기 위해서 청소년 인권 운동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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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1-23
상처가 날아간 자리에도 희망의

 오늘날 대부분의 시는 눈을 위해 쓰여지지만 귀를 위한 시도 엄연히 존재한다. 종이 위에 활자로 쓰여진 시가 작가와 독자 사이에 개인적인 교신을 갖는데 비해 음유시는 그 생명이 다수 사이의 공감 즉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데 있다. 시인은 우주와 교감하고 만인의 심금을 울린다. 오르페우스가 그랬고 백수광부의 처가 그랬다. 음유시에는 항상 '민중'이란 말이 따라 다닌다. 소리에는 국경도, 계급도, 남녀의 구분도, 언어의 장벽도 없는 탓에 사람들 가슴 깊은 곳에 바로 가서 닿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수많은 무명시인과 무명가수들이 남긴 노랫가락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까닭은. 음유시인들은 그 노래를 모아 이곳 저곳 떠돌아다니며 나누어주는 이들이다. 왕이나 귀족, 성직자와 같은 지배자 중심의 역사가 있는 반면 그의 반대편엔 민중으로 대변되는 피지배자들의 역사가 있다. 그리고 그 민중의 역사는 세계의 전역에서 수많은 노래로 불려져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건너온다. 예지의 서양시인 빌헬름 버틀러 예이츠가 그의 시 <술노래>의 첫 구절을 빌어 '술은 입으로 흘러들고 사랑은 눈으로 든다'고 말한 것처럼, 동양의 시선(詩仙) 이 백이 <대지의 슬픔을 위한 술노래>에서 '술은 금술잔에 이미 넘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마시지는 말아라. 우선 먼저 내가 당신을 위해 노래를 부르리니,'라고 읊었던 것처럼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그의 운을 받아 한국의 국민시인 소월 김정식이 <님과 벗>에서 '그대여, 부르라. 나는 마시리.'로 끝맺었듯 사람들이 술을 마실 때와 같이 아주 자연스럽게 노래는 사람들의 가슴속으로 스며든다. 보통 TV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대부분의 노래들은 일시적인 유행에 의해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아 정신을 잃게 만드는 반면 당대의 뛰어난 시에 선율을 붙여 부르는 음유시인의 노래들은 그 생명력이 길다. 그것은 그들의 노래가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대중음악과는 달리 한 자아의 내면으로 깊이 침잠하여 자신을 발견하는 길로 인도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샹송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프랑스의 대표적 음유시인이자 무정부주의자인 조르주 브라상스는 비용과 엘뤼아르, 아라공의 시를 노래했고 좌파 지식인인 벨기에의 가수 자크 브렐과 정치학을 전공한 모나코 태생의 레오 페레와 장 페라는 사회주의 성향이 짙은 가수이며 <죽도록 사랑해>의 가수 프란시스 카브렐은 녹색당 소속의 지방의원인가 하면 사르트와 돈독한 친분을 유지했던 줄리에뜨 그레꼬 역시 남미의 반독재 시위대 앞에서 콘서트를 여는 저항활동의 기수이다. 감미로운 샹송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이브 몽땅이나 사회참여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였던 장 자끄 골드만마저도 <붉음>이라는 메시지가 강한 노래를 선보이기도 했다. 비단 프랑스를 위시한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 걸쳐 사회적 메시지를 대중 속에 깊이 뿌리 내리려는 의식이 투철한 민중가수들이 존재해왔다. 독일의 한스 바이더나 캐나다의 부르스 콕번, 터키의 쥘푸 리바넬리, 스페인의 유이스

  • 아마도생선
  • 2007-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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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병식(병실?)에서 그녀는 영작을 위로한다. 따라서 남성은 여성은(여성을?) 노동에서 축출함으로써 지배적 위치를 견지하려한다. 모 카드사의 욕마(욕망)으로서 아버지' 등의 내용을 열심히 쓰다보니 오타가 난 것이겠죠?

    • 2007-12-19 23:16:08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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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두 영화의 특징을 중심으로 비교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글을 쓰니, 작품에 관련한 다양하면서도 타당성있는 관점들이 여러가지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쓰려면 역시 꼼꼼한 작품 읽기가 중요한데, 평소에 이런 활동을 여러 번 해본 학생이라는 느낌이 드는 글입니다. 부분적으로 오탈자 가 보이는데 이는 고쳐 기록해야 할 것입니다.

    • 2007-12-19 23:05:23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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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영화평쓰기는 자칫 두가지 잘못을 범하기 쉽습니다. 줄거리만 죽 늘어 놓거나, 해설과 비평을 너무 자의적으로 하여서 작품의 창작의도를 왜곡하는 경우입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두 가지 문제점의 경계선을 넘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며 썼다는 인상을 주는 글입니다. 두 개의 영화 내용을 객관적으로 소개하면서도 자신의 관점에 따른 논거를 작품 안에서 찾고 증명하면서 결론을 맺으려는 노력이 잘 느껴집니다. 영화를 바르게 보면서도 새로운 관점을 통해서 바라보려는 창의적 노력이 잘 느껴지는 글이었습니다.

    • 2007-12-19 23:05:19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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