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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월장원 발표!!

  • 작성자 웹관리자
  • 작성일 2008-01-22
  • 조회수 510

 

12월 추천작 발표


12월에는 다섯주 동안 아래와 같은 작품들이 주장원으로 뽑혔습니다.


12월 1주 추천작/ Hetero, Homophobia의 phobia ... ,


12월 2주 주장원 작품은 '897 임상수의 바람난 가족과 봉준호의 괴물을 통해 볼 ..., '을 추천하고자 합니다. 


12월 3주, [비평]독서를 하지 않는다, 안병국


12월 4주 주장원 알림-둥글레 님, -[En attendant Godot(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고] 어제, 오늘, 내일 - 기다림의 지속


12월 다섯째주 주장원- '하늬별'의 '병신과 머저리- 당신의 고통'


  작품을 살펴보니 소설, 희곡 비평글, 영화비평글, 시사비평글 등 다양한 갈래에 걸쳐서 응모하였습니다.


이 가운데 12월말 최우수 작품은 ‘아마도생선님’의 '897 임상수의 바람난 가족과 봉준호의 괴물을 통해 볼 ..., '을 추천하고자 합니다. 

 

 이 작품은 두 개의 영화 내용을 객관적으로 소개하면서도 자신의 관점에 따른 논거를 작품 안에서 찾고 증명하면서 결론을 맺으려는 노력이 잘 느껴집니다. 영화를 바르게 보면서도 새로운 관점을 통해서 바라보려는 창의적 노력이 잘 느껴지는 글이었습니다.

  두 영화의 특징을 중심으로 비교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글을 쓰니, 작품에 관련한 다양하면서도 타당성있는 관점들이 여러 가지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쓰려면 역시 꼼꼼한 작품 읽기가 중요한데, 평소에 이런 활동을 여러 번 해본 학생이라는 느낌이 드는 글입니다. 부분적으로 오탈자가 보이는데 이는 고쳐 기록해야 할 것입니다.



12월 1주 추천작/ Hetero, Homophobia의 phobia ... /  이 글은 동성애에 관한 자기 주장을 차분하게 잘 풀어 나갔습니다. 굉장히 고정관념 때문에 주장하기 힘든 논제인데 자신의 생각을 명쾌하게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소수자의 인권이라는 측면을 중심으로 살펴나간 점도 타당한 관점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좀더 다양한 사례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상대적으로 위의 ‘아마도생선’님의 글에 비해 밀려서 추천에서는 떨어졌지만 매우 아까운 글이랍니다.


12월 3주, [비평]독서를 하지 않는다, 안병국/ 이 글은  독서에 관련한 자신의 논지를 너무 일반적인 주장만 나열하였고, 주관적인 논거가 눈에 많이 띄여 좀더 갈고 닦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논리적인 글을 써나가려는 노력은 많이 느껴지는 글이었습니다.


[En attendant Godot(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고] 어제, 오늘, 내일 - 기다림의 지속/ 이 글 은 매우 추상적인 연극을 보고서도 자신의 생각을 조리있게 펼쳐내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한 점이 매우 의미있는 글이었습니다. 조금 아쉬운 것은 작품의 예시를 좀더 끌어와 자기주장을 펼쳐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크게 보아 흠잡기는 어려우나, 12월에 고수급 학생의 응모와 맞부딪혀 아깝게 밀리게 되었군요.


 '하늬별'의 '병신과 머저리- 당신의 고통'/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여 옹호하고 비판하는 입장을 분명히 한 점이 이 글의 장점입니다. 다만 부분적으로 형의 성격을 해석할 때 주관적인 해석이 있어 논거의 타당성이 약해진 것이 아쉽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위한 자본주의의 출발 - <나쁜 사마리아인들> 리뷰 /  동녘 담(東垣) 


  10월 응모작이었던 동녘담 학생의 글을  12월 월장원과 함께 연말대상 특별추천작으로 올립니다. 이 글은 신간도서이고, 경제학 관련 서적인데도 요점을 잘 파악하면서 주장의 내용이 명쾌하게 전달되는 형식으로 글을 썼습니다. 동녘 담(東垣)님의 의식과 필치는 날선 칼날처럼 예리하고, 그 가슴은 이상을 향해 뜨겁게 용솟음쳐 오르는 용암처럼 지칠 줄 모름을 느낄 수 있게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경쟁은 무엇인가? 한 국가뿐만 아니라 세계 사회에서는 경쟁에서 얻어지는 효율성과 낙오자를 배려하는 평등성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즉, 지금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공존'을 위한 경쟁이다. 학문을 하되 무엇을 위해 할 것인가 하는 목표도 분명한 입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잘 느낄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가장 칭찬할 점은 이렇게 깊이있는 책을 읽고, 그 감동을 글로 표현하고 공유하고자 하! 정신이고, 그런 점이 정말 소중해 보입니다.   

 

  자칫 걱정스런 것은 이 책의 저자 생각이 주로 펼쳐진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생각과 느낌으로 정리된 것인지 구분이 불명확한 점입니다. 비평글 지도교사가 동녘 담(東垣)님의 정치적 성향이 매우 자유스럽고 진보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임을 그동안 여러 글을 통해 파악해 두었기에 더욱 그런 점을 경계하며 써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맘에 맞는 말만 골라 쓰고, 반론을 예상하지 못하고 자기주장을 너무 강조하는 것은 아닌지 항상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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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수의 바람난 가족과 봉준호의 괴물을 통해 볼 수 있는 가족을 뛰어넘은 가족

                                                                          아마도생선

1. 바람난 가족 내의 여성중심 가족

  평론가 황진미에 따르면 <바람난 가족>은 가족의 본질을 규명하며, 이제 가족윤리를 넘어 새로운 개인윤리를 정립해야함을 역설하고 있다.1)  첫 번째의 가족은 개인이 가족이라는 집단에 귀속되는 가족이다. 가족은 인격의 대변체이면 가족은 개인을 말한다. 일종의 집단주의적 태도의 가족이다. 그들에게 그들의 가족에서 떼어놓은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족은 그들의 정체감을 형성하며 그들의 심리를 대변하는 공간이다. 두 번째의 가족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누가 누구에게 생계를 걸고 있진 않아 보인다. 그들은 말한다. “남의 인생 참견 하지 말고, 남의 탓 할 것 없이, 각자 인생 똑바로 살자.” 그들은 “내 몸 원하는 대로 내 몸을 위해주며” 산다. 남이야 뭐라던 시아버지는 죽기 직전까지 술 담배 끊지 않고, 시어머니는 15년 만에 새 파트너와 섹스를 하며, 남편은 “별 문제될 것 없이” 다른 여자 좀 만난다. 아내 역시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하고 산다(그녀가 원하는 것이 반드시 남편일 필요는 없다). 이들은 한 덩어리로 결부되어 있지 않으며, 사안에 따라 ‘따로 또 같이’ 연접하는 독립된 개인들이다. 여기 양극단의 가족이 충돌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며, 상대의 약점을 틀어쥐고선 관대한 척 매끄럽게 빠져나가던 “신원 확실하신” 그가 가족주의와 개인주의의 중앙에서 50년 가부장제라는 허상을 짚고 실족한다. 영작의 할아버지는 처와 딸 여섯을 두고, 아들만 데리고 월남하였으나 이후 그들은 생사조차 모르고 산다. 가부장제의 핵심 요소인 父-子만 추려왔건만 그들은 가족을 이루지 못한다, 父-子는 가부장제의 핵심이긴 하지만, 가족의 핵심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남녀의 생물학적, 심리학적 성적인 차이를 보여줌으로써 궁극적으로 가족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그 남녀의 성적인 차이는 영화 내에서 크게 3가지로 나온다.


 자족감과 친밀감과 사회 성원의 재생산 능력이다. 알몸으로 카펫을 뒹굴며 자기 몸의 충만감을 즐기는 호정은 남편 옆에서 자위를 할 만큼 자기 욕망에 충실하다. 그녀는 자신의 성욕을 중시하지만, 그것을 남편에게 귀속시키지 않는다. 영작은 항시 타자를 욕망하고 필요로 한다. 그는 애인에게 “쿨한 척하지만 진짜 외롭죠?” 소릴 듣는다. 아버지의 임종에서도 “간호사년의 치마를 벗기는” 상상을 한다. 아들이 죽고 나자 애인에게 “내 안의 무언가를 쏟아내고 싶어 미치겠다,”고 애걸하고, 애인에게 쫓겨나자 비서를 찾는다. 그에겐 자기 충만감이 없다. 호정의 자족감은 그를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한다, 그의 열등감은 아들이 죽자 폭발한다. 그가 호정을 때리면서 했던 말은 “네가 뭐가 그렇게 잘났니?… 내가 용서가 안 되지?”였다. 그가 “자기 생각하며 자위했다”고 말하는 애인, 나아가 더 만만한 비서를 찾는 것은 호정에게 느끼는 열등감의 발로다. 영작은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므로 밖을 향해 욕망할 뿐,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 안으로 욕망하지 않는다. 반면, 호정는 시아버지에게 술을 사드리고, 토한 피를 닦아준다. 병식에서 그녀는 영작을 위로한다. 시어머니의 새로운 인생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듣고 지지하며, 아들에게는 진심이 통하는 엄마였다. 영작은 아비의 몸을 닦다가도 아비의 허세에 짜증을 내며, 피를 토하자 “호정아!”를 찾는다. 어머니 이야기가 듣기 싫어 이불을 파고든다. 거짓말하는 그는 아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다. 그는 성적 관계가 아닌 사적 친밀감을 나누는 관계에 무력하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사적 친밀감은 가족을 운위하는 핵심요소이다. 영화에서 남자는 친화력이 떨어지며, 친밀감의 담지자는 여자이다, 호정과 영작은 불임이었다. 하지만 고딩과 호정의 아이는 태어나 호정과 가족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영작의 아이는 제거되고 만다. 남자는 여자의 몸을 통해서만 아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생물학적 재생산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고, 남자는 ‘노동력’을 갖는다. 따라서 남성은 여성은 노동에서 축출함으로써 지배적 위치를 견지하려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가부장제라고 한다.


  영화는 경제적으로 여유있고 가족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이 가족을 통해서 신자유주의의 압박속에서 한강다리 위에서 몸을 던지는 영화 괴물의 유사장같이 자본주의의 낙오자가 된 가장과 무너지는 가부장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가족을 구성하는 중심에는 여성이 있음을 얘기한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남성의 노동력 확보를 어렵게 만들었고, 호주제 폐지 등 가부장제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드는 시점에서 기존의 가부장적 가족관계가 아닌 새롭게 재편되는 가족관계를 상상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호정과 아들의 관계에서 보듯이 생물학적 토대를 차치하고서라도 가족 내부의 친화력은 여자에 의해 유지됨을 알 수 있고, 이를 통해 ‘여성이 중심이 되어 친밀감을 교류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그려볼 수 있다.


  더불어 이 영화는 가족의 본질을 보여주며, 나아가 ‘화목한 가정’을 목표로 삼는 가족윤리에서, ‘행복한 개인’을 목표로 삼는 개인윤리로, 윤리의 단위가 바뀌어져야 함을 제안한다. 진짜 어떻게 살아야 ‘내가’ 행복해질 것인가? 연애가 답이면 연애를 하고, 가정이 답이면 가정을 꾸려라. 그러나 남에게 “재수 없게 연설”하지 말고, “네 아버지 탓”도 하지 말고, 오지말라는 애인에게 “내가 미쳤었나보다”며 우격다짐으로 들이밀지도 말고, “내 인생 내가 책임지며, 맨 정신으로, 솔직하게 사는 것”이 “이제 짐승의 시간은 관두고, 사람답게 사는” 최소한의 개인윤리이지 않겠냐고 감독은 ‘바람’을 빌려 자신의 ‘바람’을 이야기한다.


2. 괴물의 가족-아버지

<괴물>에는 서로 합치되지 않는 세 가지 층위의 ‘아버지’가 존재한다. 첫째는 남루하고 무능하지만 자식을 지키고자 사투를 벌이는 아버지이다. 둘째는 무능하면서 억압으로만 작동하는 아버지, 한국 정부이다. 셋째는 유능하지만 남의 아버지일 뿐인 미국이다.


<괴물>의 아버지는 “아비는 개흘레꾼이었다”(김소진)를 연상시킨다. <괴물>의 아버지는 ‘알아서 기는 종’도, 헛된 꿈을 꾸는 혁명가도 아니다. 오히려 그에 턱없이 못 미친다. 아예 권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발적 굴종도 없고, 권력을 탈취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러나 <괴물>의 아버지는 괴물을 무찌른다. 그는 죽은 독재자에게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산 괴물에 적극적으로 맞붙는 용기를 지녔으며, 자식에게 무심했던 ‘바람’ 같은 아버지와 달리 자식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무능에도 불구하고 딸을 위해 사투를 벌인다. 그 우직한 과정에 운동권 삼촌과 굼뜬 고모가 함께한다.


<괴물>의 아버지가 중요한 이유는 첫째, 우리나라의 수많은 ‘부성부재’의 텍스트와 달리, 드물게 부성애를 보여주었다는 점. 둘째, 권력에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거대 권력에 맞서는 새로운 부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두개의 ‘아버지 찬가’가 흘러나온다. 첫째,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는 모 카드사의 욕마으로서 아버지. 둘째,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가 꿈꾸던 나라, 대한민국입니다”라는 국정홍보처의 ‘아버지’에 대한 상징조작. 수많은 광고가 그렇듯, 이는 실제의 아버지가 아니다. 욕망으로서만 존재하는, 아버지 판타지이다.


첫째, 자본주의 이전에 인생을 즐기는 것과 아비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병행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쾌락의 추구는 곧바로 의무이자 윤리이다. 자본주의-아버지는 ‘인생을 즐기라’ 명하고, 자식들은 쾌락을 강제하는 모순된 이 명령을 수행하고자 ‘소비하고 노동하기(카드 쓰고 카드 막기)’를 반복하느라 ‘쎄가 빠진다’. 따라서 한번도 존재한 적 없는 ‘부자(부르주아)아빠’를 불러내는 이 광고는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축적의 정도가 식민지적 천민자본주의의 ‘서자의식’이나 ‘고아의식’에서 막 벗어났다는 선언이다.


둘째, 국민국가 만들기의 신화적 재구성이라 할 만한 ‘대한민국’ 광고는 일종의 ‘자수성가한 아들의, 없는 아버지 만들기 작업’과 비슷하다. 영광의 아버지를 만들어내어 존경하고 동일시하며, 역으로 상상의 아버지로부터 지지받고자 하는 이 전략의 핵심은 결국 자화자찬이다(“대한민국은 바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원래 부자였던 아버지와 자랑스러운 아버지를 꿈꾸고 그 말씀을 기리는 것, 이는 ‘자본주의적 축적과 국민국가의 형성’이라는 근대적 과제가 완수된 이 시대의 ‘해리성 정신장애’이다.


3. 괴물의 가족- 대안의 가족에의 모색

<괴물>에서 괴생물체는 체제에 의해 ‘공적’으로 선포되고 그로 인해 서울 시민들의 일상이 강력하게 통제되지만, 정작 그것이 괴물이 되는 이유는 그 자신이 지니고 있는 공격성과 가공할 파괴력 때문이 아니다. 사실 ‘괴물’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최소한의 공격성만을 드러낸 것일 뿐이며,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서 싸운다. <괴물>에서 공권력이 괴물과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장면은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종반부에서 ‘옐로우 에이전트’와 괴물의 대결은 계획된 전투가 아니라 우연한 조우에 가깝다). 체제는 오로지 미디어를 통해서 괴물을 창조해내며, 그것을 통해 시민들을 통제하고자 한다(사실, 괴생물체의 희생자 및 접촉자들이 모여 있는 장례식장을 통제하러 온 공무원(김뢰하)은 정작 괴물에 대해 알고 있거나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단지 TV를 보라고 되풀이해 말할 뿐이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강력한 신종 바이러스의 숙주(host: 이것은 <괴물>의 영어 제목이기도 하다)로 선고를 받는 순간, 오염된 한강을 자궁 삼아 태어나, 한강에 연결된 한 하수도에 자신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한강의 수많은 교각을 자신의 이동 수단이자 놀이터 삼아 성장해온 외로운 돌연변이인 ‘그것’은, 비로소 공포의 대상으로서의 ‘괴물’이 된다. 이상하게도 그 ‘괴물’은 자신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다고 가정-조작된 바이러스를 겨냥하고 있는 ‘옐로우 에이전트’를 뒤집어 쓰자 무기력하게 쓰러진다. 하지만 정작 그의 최후의 숨통을 끊어내는 데는, 매스미디어의 현실 효과 외부에 존재하는 일군의 루저들(삼남매와 다리 밑 부랑아)의 연대가 필요했다. 어찌보면 괴생명체는 자연과 하수구를 자유롭게 오가는 또 한명의 루저였고, 박강두의 가족은 바이러스 보균자로 낙인 찍히는 순간 이미 괴물이었다. 그래서, 그 처절한 마지막 사투는, 은밀한 연대와 소통의 순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괴물의 최후의 순간은 새로운 탄생의 순간이기도 하다. 죽은 괴물의 입은, 대문자 가족의 경계를 벗어나 새로운 가족이 탄생되는 자궁이 된다.


4. 봉준호의 영화들 안에서의 괴물

  봉준호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들은, 봉준호 영화의 전체 서사와 환유적 관계에 놓여 있다. 봉준호가 만들어내는 영화적 서사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자유분방한 리듬의 설화성에 있다. 도시-소시민의 일상=현실을 만들어내는 매스미디어의 영향력을 비껴가며 자연과 도시의 지하 공간 사이를 자유롭게 왕래하는 이야기의 세계. 사실, 그 세계에서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으며, 그 경계의 구별이 큰 의미를 지니는 것도 아니다. 그의 영화에는 늘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미장센으로서의 ‘연기’(煙氣)와 그 경계를 아예 지워버리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편집이 등장한다. <플란다스의 개>의 소독약, <살인의 추억>의 새벽 안개, <괴물>의 소독약과 ‘옐로우 에이전트’. <플란다스의 개>의 옥상 응원 판타지의 그 유연한 고속 촬영, 그리고 <괴물>에서 괴물에게 잡혀간 딸 현서가 피곤에 지친 가족과 함께 밥을 먹는 그 천역덕스러운 판타지. ‘객관적인’ TV 뉴스 보도에서처럼 명징한 현실은, 애초에 없다. 봉준호의 인물들은 그 뉴스 보도의 자의성과 편파성과 선정성에 불만을 터뜨리거나(<플란다스의 개>의 현남, <괴물>의 세 남매), 무시한다. 그리고 바로 그 미디어의 현실 효과 외부에서, 이야기는 펼쳐진다. 그들은 미디어의 현실 효과 외부에 있으며, 그 강력한 포섭망을 그런 식으로 ‘비껴간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들은 매스미디어가 구축하는 현실 세계의 위선성에 분노하거나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덤덤하게 비껴간다. <괴물>에서의 어린 세주의 말처럼, ‘밥 먹는 데 집중’하기 위해서 TV는 꺼야만 하는 것이다. 이 덤덤한 무심성, 이것이 그의 인물들의 살아가는 방법이자 무기이다. 그들은 그 무심함을 무기로 애초에 그 자장 밖에 놓여 있던 자연 또는 루저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소통과 연대의 흐름이 이루어진다.


5. 괴물과 바람난 가족 그들의 시선 너머

  괴물의 마지막 장면, 현서는 죽었고 그 자리를 세주가 대신하고 있다. 그들은 혈연에서 벗어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한다. 다만, 그 자리에는 결핍의 정서가 강하게 자리한다. 밥을 먹는 그 자리에는 남일도, 남주도 부재한다. 이러한 부재의 현실에서 봉준호는 새로운 구성원과 그 결핍을 응시하는 강두를 보여준다. 사실, 괴물은 굉장한 정치 영화다. 세 번째 씬에서 자살하는 남자가 본 괴물은 단순한 괴물이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주의의 괴물이라는 정성일의 말이 훨씬 설득력있다. 그러나 이 논의에서 빠져있는 것은 봉준호가 말하려고 했던 괴물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이다. 봉준호는 현서를 죽이고, 세주를 살림으로서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사색을 보여준다. 시종일관 영화 안에서 괴물과 싸워온 주체가 가족이라는 혈연으로 이어진 공동체였음을 상기할 때 이 마지막 장면은 봉준호가 가족주의 에로의 함몰을 피하고 진정한 연대를 추구하는 자신의 바람을 얘기한 것이다. 가족을 뛰어넘은 가족, 이는 정면으로 관계에 대해 사색하고 그 사색 끝에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제시한 동시대의 영화인 김태용의 가족의 탄생과 맥이 닫는 부분이다. 임상수의 바람난 가족 역시도 기존 가부장제의 허상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새로운 가족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 제시하는 대안은 괴물의 연대와는 조금 다르다. 그의 영화는 모계중심의 혈연 사회의 회복을 갈구하는 듯 보인다. 마치, 귄터 그라스가 그의 작품 넙치에서 12번째 세계의 귀환을 갈구했듯이 임상수는 호정으로 대변되는 여성의 자기긍정을 통한 가부장제의 극복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 두 영화는 임상수와 봉준호라는 두 감독의 현재 지점을 잘 드러내 주고있다. 임상수는 현재 한국 영화의 감독들 중에서 단연 한국적인 소재에 대한 접근이 뛰어난 감독이다. 그는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임권택의 적자로 불리운다. 그는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유교적 엄숙주의에 찌든 한국 사회내의 성을 소재로 삼았고 눈물에서는 청소년들에게 폭력적인 한국 사회 내에서 탈선할 수밖에 없는 청소년들의 삶을 소재로 삼았다. 그리고 바람난 가족에서 우리 사회의 복지공여 최소단위인 가족의 강한 가부장성을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가부장성 너머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고있다. 한국적 상황에의 정확한 응시를 통한 그 너머의 가능성의 획득, 그것이 교정적 리얼리즘의 전위인 임상수의 현재 위치다.


  봉준호 영락없는 도시인이고 소시민이지만,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소시민적 일상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는, 또한 그 외부의 세계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 자유인이기도 하다. 그 외부란, 한편으로는 ‘자연’이고, 또 한편으로는 도시의 ‘후미진 공간’이다. 봉준호의 영화는 늘 어떤 ‘풍경’으로 시작한다. <플란다스의 개>의 숲, <살인의 추억>의 가을 하늘과 들판, <괴물>의 한강. 그런데 그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의 독특함은, 그것이 단순한 도시의 대립항이라기보다는 도시와 은밀히 소통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영화 세계에서는 자연과 도시의 후미진 곳(어둡고 습한 공간: 아파트 지하실, 다리 밑, 하수도)은 ‘대결’한다기보다는 ‘소통’한다. 그의 몸은 분명 중산층 고층 아파트의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을 듯한데, 그의 시선은 늘 창밖의 자연을 향하고 있고, 그의 마음에는 도시의 지하 세계와 그곳 삶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가득하다. 청명한 하늘과 음습한 지하. 그는 이 두 이질적인 세계를 애정어린 시선을 통해 하나의 세계로 구축해간다. 그 속에서 그는 정치적 함의를 집어넣는다. 시침 뚝 떼고 넣어놓은 이라크전쟁에 대한 비유와 풍자,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괴물에 대한 불신이다,(봉준호가 괴물을 자본주의라고 은유하려 한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전 시네마테크에서 열린 관객과의 대화에서 괴물의 속편을 김곡 김선 형제가 감독하기를 원한다는 사실로도 알수있다.) 그리고 그는 그에 대한 해결로서 연대를 제시한다. 소통과 연대는 그의 모토이며 화두다. 그리고 그는 그 화두를 장르영화와 정치 영화 사이에서 가장 영리하게 이끌어가는 감독이다.


웹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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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월간총평(고용우)

10월 한 달 동안 주 장원에 선정된 작품은 다음 6편입니다. - 위대한 업적을 세웠다고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Camille(ID: d9094)-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있습니까?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를 읽고)  : Acerola - 완성된 학교는 무엇인가? (피그말리온아이들을읽고)  : 못난곰(ID: kgkdmsrla) - 농무를 읽고  : 팽글(ID: jhwan210)- 글 쓰는 과학자. 하리하라.  : Acerola(ID: toloveless) - 판타지 소설의 문학적 의의  : 외솔(ID: oesol0330) 이 중 월 장원 선정을 위해 더 따져 볼 작품은 <위대한 업적을 세웠다고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글 쓰는 과학자. 하리하라.>, <판타지 소설의 문학적 의의> 세 편이었어요. <글 쓰는 과학자. 하리하라.>는 과학을 대중적으로 소개하는 필자의 글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글을 조리있게 썼어요. 하지만 생각을 자연스럽게 드러낸 장점은 있지만 새로울 것이 별로 없는 내용이었어요. 이과생들은 글을 잘 못 쓴다는 다소 편협한 선입관에서 출발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판타지 소설의 문학적 의의>는 판타지 소설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는 성격의 글이었는데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았지만 몇 군데 논리적 비약이 보였어요. 예컨대 문학성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는 주장과 함께 펼친 논리는 많이 읽히면 문학성이 있다는 말이 될 수 있는 문제가 있어요. <위대한 업적을 세웠다고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는 제목을 좀 다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위대한’이라는 말이 너무 주관적이고 더구나 ‘위대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더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표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에도 내용으로 보면 이 글이 상대적으로 충실한 글이었어요. 그래서 <위대한 업적을 세웠다고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Camille(ID: d9094)>를 10월 장원으로 선정합니다.

  • 웹관리자
  • 2012-12-08
9월 월장원 심사평(고용우)

9월 한 달 동안 주 장원에 선정된 글은 4편이었어요. 진정한 사랑의 실천  : 임도영 (ID: dlaehdud12) 견우와 직녀, 이별과 만남  : 韓雪 (ID: agka18) 도토리의 집 - '소에 소자아'  : 구순덕(ID: jjabe84) 왕유를 기억하며 그를 읽다.  : 유현우(ID: bulls) ‘진정한 사랑의 실천’ 과 ‘도토리의 집 - '소에 소자아' ’는 독후감 성격이 강한 글이었어요. ‘당신들의 천국’을 소재로 하는 ‘진정한 사랑의 실천’은 소설의 내용과 함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학생 인권 조례 등을 엮어서 이야기를 펼쳤어요. 의미 있는 시도였으나 충분한 공감을 얻기는 어려웠어요. 만화 ‘도토리의 집’을 읽고 쓴 뒤의 글은 내용이 좀 더 풍성했더라면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비평적 접근이 가미 되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왕유를 기억하며 그를 읽다.’는 왕유의 시를 소개하는 성격의 글이었어요. 왕유의 많은 시를 접하게 한 점이 좋았으나 소개하는 데 그친 점이 아쉬웠어요. ‘견우와 직녀, 이별과 만남’은 견우와 직녀를 모티브로 하는 시를 소개하면서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별과 만남의 의미를 살폈어요. 시에 대한 접근도 좋았고, 읽기에 무리가 없는 좋은 글이었어요. 9월 장원으로 ‘견우와 직녀, 이별과 만남  : 韓雪 (ID: agka18)’을 선정합니다.

  • 웹관리자
  • 2012-10-27
8월 월장원 심사평(고용우)

8월 한 달 동안 주 장원에 오른 글은 4편이었어요. 문학의 UMC/UW를 원한다.  : 유현우 (ID: bulls) 차라리 벚꽃이었으면...  : 소이진 (ID: kang55se) 새로운 100년을 읽고  : 이노을향 (ID: min0817) 노스탤지어의 마법사가 들려주는 기묘한 이야기(부제 : 네버랜드를 읽고)  : 핑크색곰돌이 (ID: aufakdshfo) <문학의 UMC/UW를 원한다.>는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내용과 제목이 맞지 않아서 아쉬웠어요. 특히 ‘문학에서 리얼리즘을 쓰느냐 마느냐의 문제 역시도 라임을 쓰느냐 마느냐의 문제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라는 한 문장으로 해명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학과 리얼리즘’이라는 주제에 대한 해명이 필요할 것 같아요. <새로운 100년을 읽고>는 무난한 감상문이었으나 비판적 접근, 필자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구별 지어서 성찰해 보는 접근 등이 부족해서 아쉬웠어요. <노스탤지어의 마법사가 들려주는 기묘한 이야기>는 ‘네버랜드’라는 작품에 대해 썼어요. 네 명의 주인공들이 서로 어울리며 상처를 치유하고 청춘을 발산하는 내용이라는 얘기였어요. 이야기의 매듭을 좀 더 분명하게 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설 속에 너무 심취해서 그 속에 매몰된 느낌이랄까. <차라리 벚꽃이었으면...>는 좋게 보면 풍성하고, 비판적으로 보면 약간 산만한 글이었어요. 동성애자로 역사에 남아 있는 한 여성의 이야기에서 조선 시대 여성들의 삶을 이야기했어요. ‘채홍’을 중심으로 ‘해를 품은 달’을 엮어서 이야기했기 때문에 공감의 폭을 넓힐 수 있었으나 서술이 너무 길어서 좀 산만한 느낌도 있어요. 그리고 ‘김태감’의 이야기를 인용한 부분이나 ‘지인’의 경험을 이야기한 부분은 본문과 더 그럴 듯하게 연결할 수 있는 해명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초점을 흐리게 할 수도 있겠지요. <차라리 벚꽃이었으면...  : 소이진 (ID: kang55se)>을 8월 장원으로 선정합니다. 좀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앞으로의 발전을 기대합니다. 

  • 웹관리자
  • 2012-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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