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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교육에 대하여

  • 작성자 아마도생선
  • 작성일 2008-01-23
  • 조회수 952

 

 오늘날의 우리 학교교육은 개항 이후 전통적인 학교제도 대신에 받아들여 식민지 해방 이후에 본격적으로 발전시킨 서구식 공교육체제이다.  식민지 시대를 통한 타율적인 제도 수용과 남북 분단에 따른 이데올로기 통제 필요성, 그리고 이를 악용한 권위주의적 정치집단의 장기적인 권력 남용 등은 한국 교육의 특수한 문제들을 낳은 주요 배경이다.

이러한 문제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교육에 대한 국가의 과도한 간섭에서 오는 획일성과 경직성이다. 이는 근대교육의 기본 속성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하다. 최근 다소 완화되는 경향을 보이고는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전국의 학교가 거의 같은 내용을 비슷한 시기에 가르쳐야 하는 획일적인 교육과정을 가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드물게 우리는 국정교과서를 편찬하고 있으며, 대학의 입학시험을 국가가 관리하고 있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교육행정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교원 인사와 교육재정이 일사분란하게 통제된다. 이 속에서 교사 개인 또는 단위학교의 자율적인 시도는 유무형의 압력을 받아 좌절된다. 입학과 퇴학, 진학과 취업의 길은 서로 반복교류하기 어려운 '다른' 세계로 인도한다. 구조적으로 한 번의 실수는 평생을 좌우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중요한 현상이 과도한 입시경쟁이다. 물론 다수가 한정된 재화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경쟁이 불가피하지만, 진로의 사다리가 단선화되고 이것이 국가의 개입 속에서 경직되게 운영될 때 경쟁의 정도는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치열한 경쟁에서 불거질지도 모를 정치적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서 국가는 경쟁 과정에 개입하게 되고, 이 개입은 이후 더욱 치열한 경쟁을 낳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아울러 이러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한 눈'을 팔 수 없으며, 그 만큼 우리의 학생들은 '교과서적으로' 획일화되고 교사들의 수업 방식 역시 경직되는 또 다른 악순환도 계속된다.


근대교육의 시대적 적합성에 대한 회의는 곧 대안교육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대안교육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는 '대안교육'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따라서 대안교육의 등장을 말하기에 앞서 대안교육의 의미를 간단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 대안교육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90년대 중반이다. 그러나 이 말은 자생적이라기보다 영어(alternative education)의 번역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서는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에 기존의 학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학생들의 다양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실험학교들이 등장하였는데, 이들을 '자유학교' 또는 '대안학교'라고 불렀던 것이다. 교육백과사전은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대안학교'의 의미를 "표준적인 '공립학교들'이 제공하는 '전통적인 것'과는 다른 경험을 추구하는 아동과 학부모들을 위하여 특별한 교수법과 프로그램, 활동, 여건 등을 제공할 수 있도록 고안된 학교"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전통적인 것과 다른 경험'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여전히 열려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경험일 수도 있고 약간 변화된 정도일 수도 있다. 또 기존의 형식을 유지한 채 내용만을 바꾼 것일 수도 있고 형식 자체의 변화에 초점을 둔 것일 수도 있다. 이 점에서 볼 때, 대안교육은 정형화된 교육의 어떤 형태나 내용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정태적이기보다는 동태적인 개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안교육을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기존의 교육에 반하여 새롭게 추구되는 교육'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최근에 대두되고 있는 대안 교육의 의의나 성격을 제대로 포착하기 어렵다. 그것은 이 시대의 고유한 문제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고려할 때, 대안교육의 의미는 '20세기 후반에 표출된 근대교육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주목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시도하는 새로운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은 대안교육 의미는 현시대에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독특한 문제의식과 여기에서 비롯된 가치지향을 담고 있다. 물론 이렇게 보더라도 현행 교육의 문제를 파악하는 시각에서 따라 대안교육의 구체적인 의미는 다양하다.


대안교육이 우리 나라에서도 모색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초를 전후해서이다. 이 시기에는 급진적 사회운동의 흐름을 타고 교육 제도의 구조적 변화를 목표로 전개되었던 80년대의 교육운동이 퇴조하고, 정치 지형의 변화와 함께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새로운 사조가 유포되고 있었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나타난 뚜렷한 경향은 제도 변화보다는 인간 중심의 소규모 교육 실천을 통한 청소년들의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 선구적인 형태는 '또 하나의 문화' 동인들이 1986년부터 시도했던 캠프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점수 경쟁과 타율적 인간을 양산하고 있는 기존의 교육 상황에 대한 근본적 대안을 모색하기 위하여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실험적 성격의 캠프였다. 철저하게 자율적이고 동시에 공동체적인 가치를 추구한 이 캠프의 교육 이념과 방식은 대안적인 교육을 찾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될 만하였다. 그러나 또 하나의 문화의 문화 중심 운동은 중산층 이상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다.

90년대 초를 지나면서 이와 유사한, 비형식적 공간에서의 소규모 교육적 실험이라 할 수 있는, 캠프 또는 체험중심 프로그램은 학생들과 학부모의 호응 속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특히 입시와 성적의 중압감에 의한 학생들의 자살이 매년 100여 건을 넘는 현실은 이를 더욱 촉진하였다. 이 무렵 다양한 '대안학교'들이 등장하는데,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한 서울의 다솜학교(90),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광명 창조학교(92), 대구의 민들레학교(93), 자유학교 물꼬 준비 모임(93), 부산 창조학교(94), 성남의 여럿이 함께하는 학교(94), 중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따로 또 같이하는 학교'(95), 가출 청소년을 위한 들꽃피는 학교(예수가정, 94),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꾸러기학교(92), 공동육아협동조합 어린이집(94)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 속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은 1997년 3월 9일 우리 나라 최초의 상설 대안학교라 할 수 있는 산청 간디청소년학교가 개교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주로 계절 또는 주말 프로그램 위주인 여타의 대안교육 프로그램에 비해 내용과 형식에서 명실상부하게 대안적인 교육을 지향하는 학교가 출현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대안교육 운동은 기존의 학교교육에 보완적인 프로그램 운영에서 점차 대안학교 설립 운동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전환을 촉진한 것은 1996년 12월 교육부가 '학교 중도탈락자 종합대책'의 일환으로 발표한 대안학교 설립 계획이었다. 여기서 대안학교란 이미 학생 중심의 인성 교육을 통해 학교 부적응 학생들을 성공적으로 재적응시키고 있던 영광의 성지고등학교를 모형으로 한 것으로서, 당초 전국에 6개교를 시범적으로 설립, 운영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다소 수정·보완되어 1997년 하반기에 체험위주의 인성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특성화고등학교 제도로 법제화되었고, 이에 따라 1998년 신학기에 성지고등학교와 산청의 간디고등학교를 포함한 6개의 대안학교가 정규고등학교로서 개교하였다. 이후 1999년에는 4개교, 2000년에는 1개교가 추가되어 현재 11개교가 운영되고 있다.

 물론 90년대 후반에 대안교육이 이처럼 대안학교 형태로만 존속된 것은 아니다. 특히 정규학교 방식은 학생 모집이나 재정 지원 등에서 매우 유리한 조건을 확보할 수 있는 반면, 각종 법령과 당국의 간섭에 따른 제약을 감내해야 한다는 점에서 대안교육의 본래 뜻을 지켜나가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이에 따라 일부에서는 아예 학력 인정을 고려하지 않고(필요한 경우 검정고시 활용) 대안적인 교육 이념에 충실한 방식을 추구하기도 한다. 공동체 생활과 교육을 결합한 변산 공동체학교나 예천의 방하생활학교, 파괴된 가정의 복원을 위한 그룹 홈 방식과 교육을 결합한 안산 들꽃피는학교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90년대 초에 대안교육 운동의 장을 열었던 계절제 또는 방과후 프로그램들은 다양한 형태로 존속되는 한편, 정부의 교육개혁 정책과 맞물려 기존 학교교육의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한편, 대안교육의 확산에 비례하여 종래의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려는 경향도 증가하였다. 이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전개되었는데, 하나는 가정학교(home schooling)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탈학교 운동이다. 둘 모두 아직은 초보적인 단계이지만 참여자들끼리 정례적인 모임을 갖고 있으며, 최근 종래 학교교육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점차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다. 대안교육의 이념적 지향


이상의 논의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대안교육은 그 등장 시기나 배경, 형태, 내용, 이념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다. 그러나, 비교적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다양한 시도들이 모두 공교육체제에 내재되어 있는 문제들을 피하거나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아울러 그러한 시도들은 단지 방법론상의 변화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교육의 기본 가정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이념적 지향을 모색한다. 대안교육의 다양성에 비추어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를 피하기는 어렵지만, 이러한 이념적 지향들을 몇 갈래로 정리해보는 것은 대안교육 자체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 동시에 위기에 처한 학교교육의 개선을 위하여 유용한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대안교육은 아동 또는 학습자를 보는 관점이 전통적인 교육과 다르다. 근대교육의 기본 가정에 따르면 아동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따라서 사회의 온전한 구성원도 아니다. 따라서 교사 중심의 교육이 자연스러우며, 성인의 관점에 의한 통제가 불가피하다. 그러나 대안교육에서는 대체로 아동(학습자)을 온전한 인간으로 보며 따라서 자율적인 학습을 중시한다. 이는 통제 중심의 교육보다는 학습자의 자유와 자율적인 결정에 바탕을 두는 교육으로 나타난다. 당연한 귀결로서, 종래 학교와 같은 규율과 조직, 엄격한 교육과정 등을 중시하지 않으며 학습자 개개인의 특성과 필요에 바탕을 둔 교육을 추구한다. '아이들을 학교에 맞추기보다는 학교를 아이들에게 맞춘다'는 생각으로 만든 니일의 섬머힐은 전형적인 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교사의 역할이 부정되거나 과소평가되지는 않는다. 교사가 주도하지는 않되, 마치 식물과 햇빛의 관계처럼 학습자에게 교사의 존재는 필수불가결하다.

 대안교육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대표적인 이념은 생태주의라 할 수 있다. 생태주의란 생태계의 온전한 유지가 인간 생존의 전제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근대문명의 인간중심성을 비판하고 인간과 자연의 공존공생을 추구하는 사조이다. 이러한 생태주의가 반문명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자연의 파괴를 가져오는 기계문명의 편리함보다는 불편하더라도 스스로의 노동을 통한 의식주의 해결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태도를 중시한다. 그러한 행복은 기계에 빼앗긴 인간의 원초적인 능력의 회복에서 온다고 볼 수 있다.

 대안교육은 공동체적 삶과 가치를 중시한다.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한 문명은 대립과 경쟁에서 초래되는 자원 낭비와 파괴적 갈등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공존과 협력을 중시하는 공동체적 가치를 띤다고 할 수 있다. 공동체적 삶과 가치의 구현은 경쟁과 통제가 불가피한 대량교육체제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안교육은 하나같이 친밀한 인간관계의 형성이 가능한 소규모 학교를 지향한다. 한편, 이러한 소집단 내의 인간관계가 스스로 고립되지 않기 위해서는 교육공동체가 위치해 있는 지역사회와의 긴밀한 관계가 필수적이다. 대안학교들이 교육과정이나 교사진의 수급과 관련하여 지역사회의 인적 물적 자원을 활용하는 것은 이러한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대안교육의 이념적 지향이 종래의 교육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작은 목소리이기는 하지만 꾸준히 추구되었거나, 또는 교육의 이상(理想)으로는 오래 전부터 인식되어 왔으면서도 실제로 구현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대안교육이란 새로운 교육이라기보다 오히려 교육이 지향하고자 했던 본래의 이념, 즉 '교육의 본질을 되찾기 위한 애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상에서 개관한 대안교육의 여러 양상과 그 전개 과정은 기존의 학교교육에 대하여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것은 역사상 늘 있어왔던, 주류에 대한 소수의 문제제기로서만 의미를 지닐 것인가 아니면 종래의 교육을 대체할 만한 가능성을 지닌 명실상부한 '대안'으로서의 무게를 지닌 것인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현존하는 다양한 대안교육의 사례들이 규모나 현실적인 영향력의 측면에서 기존의 학교교육에 비해 아직은 미미한 수준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지향하는 이념이나 교육의 방식에 비추어 보더라도 가까운 장래에 대안교육이 기존의 학교교육을 대체할 가능성은 매우 적어 보인다. 왜냐하면, 대안교육은 현존 사회의 주류적 가치― 풍요로움, 편리함, 경쟁과 승리, 속도 등 ―에 거리를 두거나 역행하며,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다수 대중의 호응을 통한 지배적 위치로의 부상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후반에 세계 각국에서 시작된 대안적 교육의 탐색과 실천이 단지 새로움을 좇는 일시적 유행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판단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근대문명의 산물로서 대두된 지구적 차원의 환경 및 생태 위기는 종래의 확대지향적 발전과 소비 문화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요구한다. 아직 자본의 확대 논리나 각국의 발전 정책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지만, 위기의 심화에 따라 생태주의가 정책 결정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은 불가피하리라고 예견된다. 이는 새로운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수용해야 함을 의미하는 동시에, 교육적으로는 생태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대안교육의 수요가 갈수록 증대될 것임을 시사한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새로운 세대의 의식과 문화가 기성세대에 비해 단절적으로 변화하는 상황 역시 종래의 학교교육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문자보다는 영상이나 인터넷에 익숙하고 획일적인 통제나 구속을 극도로 싫어하는 새로운 세대에게는 규율과 간섭이 필수적인 집단 교육보다 개인의 자율적 공간을 최대로 허용하는 개별화된 교육이 요구된다. 이러한 측면에서도 대안교육은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

 대안교육이 앞으로 그 규모나 영향력의 측면에서 점차 확대될 것임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지금의 대안교육이 기존의 학교교육을 잠식하여 결국은 대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현존하는 대안교육이 완결된 어떤 형식을 가진 것이 아니며 오히려 종래 학교교육의 한계에 대한 문제제기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대안교육이 확대된다는 것은 새로운 학교가 늘어난다는 것 외에 기존의 학교교육이 그 내부에서 질적인 변화를 거쳐 새로운 교육을 할 수 있게 되는 상황도 포함한다. 국가 주도하에 다수 대중을 상대로 하는 종래의 공교육체제하에서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미국의 여러 주에서 실험하고 있는 사례들은 주 정부가 재정을 지원하되 학교의 설립과 운영은 새로운 교육적 비전을 가진 사람들에게 일임함으로써 새로운 교육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기존 공교육체제 내부에서의 변화가 중요한 것은 교육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국가 외에 다른 누군가가 부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종래의 학교교육이 대안적인 교육으로 전환한다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앞으로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근대적인 합리성 대신에 자기성찰적인 인간, 보편적인 지식 대신에 개별적인 의미가 강조되는 지식(교육내용), 교사가 가르치기보다는 학습자 스스로 배우는 교육, 남을 이기기 위한 개인간의 경쟁보다는 상호 공존과 협력을 중시하는 공동체 교육, 자격증이나 졸업장보다는 실제로 얼마나 아는가를 중시하는 풍토 등이 강조될 것이다. 한 마디로, 교육이란 무엇이며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생각, 즉 새로운 '교육 문법'이 구체화될 것이다.  그리고 기존 구조 안에서 차별을 받은 청소년들은 기존 교육에서 뛰쳐나간 교육을 받는 가장 적극적인 형태의 저항의 한 방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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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2-14
상처가 날아간 자리에도 희망의

 오늘날 대부분의 시는 눈을 위해 쓰여지지만 귀를 위한 시도 엄연히 존재한다. 종이 위에 활자로 쓰여진 시가 작가와 독자 사이에 개인적인 교신을 갖는데 비해 음유시는 그 생명이 다수 사이의 공감 즉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데 있다. 시인은 우주와 교감하고 만인의 심금을 울린다. 오르페우스가 그랬고 백수광부의 처가 그랬다. 음유시에는 항상 '민중'이란 말이 따라 다닌다. 소리에는 국경도, 계급도, 남녀의 구분도, 언어의 장벽도 없는 탓에 사람들 가슴 깊은 곳에 바로 가서 닿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수많은 무명시인과 무명가수들이 남긴 노랫가락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까닭은. 음유시인들은 그 노래를 모아 이곳 저곳 떠돌아다니며 나누어주는 이들이다. 왕이나 귀족, 성직자와 같은 지배자 중심의 역사가 있는 반면 그의 반대편엔 민중으로 대변되는 피지배자들의 역사가 있다. 그리고 그 민중의 역사는 세계의 전역에서 수많은 노래로 불려져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건너온다. 예지의 서양시인 빌헬름 버틀러 예이츠가 그의 시 <술노래>의 첫 구절을 빌어 '술은 입으로 흘러들고 사랑은 눈으로 든다'고 말한 것처럼, 동양의 시선(詩仙) 이 백이 <대지의 슬픔을 위한 술노래>에서 '술은 금술잔에 이미 넘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마시지는 말아라. 우선 먼저 내가 당신을 위해 노래를 부르리니,'라고 읊었던 것처럼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그의 운을 받아 한국의 국민시인 소월 김정식이 <님과 벗>에서 '그대여, 부르라. 나는 마시리.'로 끝맺었듯 사람들이 술을 마실 때와 같이 아주 자연스럽게 노래는 사람들의 가슴속으로 스며든다. 보통 TV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대부분의 노래들은 일시적인 유행에 의해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아 정신을 잃게 만드는 반면 당대의 뛰어난 시에 선율을 붙여 부르는 음유시인의 노래들은 그 생명력이 길다. 그것은 그들의 노래가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대중음악과는 달리 한 자아의 내면으로 깊이 침잠하여 자신을 발견하는 길로 인도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샹송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프랑스의 대표적 음유시인이자 무정부주의자인 조르주 브라상스는 비용과 엘뤼아르, 아라공의 시를 노래했고 좌파 지식인인 벨기에의 가수 자크 브렐과 정치학을 전공한 모나코 태생의 레오 페레와 장 페라는 사회주의 성향이 짙은 가수이며 <죽도록 사랑해>의 가수 프란시스 카브렐은 녹색당 소속의 지방의원인가 하면 사르트와 돈독한 친분을 유지했던 줄리에뜨 그레꼬 역시 남미의 반독재 시위대 앞에서 콘서트를 여는 저항활동의 기수이다. 감미로운 샹송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이브 몽땅이나 사회참여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였던 장 자끄 골드만마저도 <붉음>이라는 메시지가 강한 노래를 선보이기도 했다. 비단 프랑스를 위시한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 걸쳐 사회적 메시지를 대중 속에 깊이 뿌리 내리려는 의식이 투철한 민중가수들이 존재해왔다. 독일의 한스 바이더나 캐나다의 부르스 콕번, 터키의 쥘푸 리바넬리, 스페인의 유이스

  • 아마도생선
  • 2007-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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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저는 한빛고등학교에 다닙니다. 한빛고등학교는 대안학교입니다. 대안학교에는 대안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저희 학교에 한에서 그런 평을 하겠습니다. 다른 학교들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세계적인 추세에서 벗어난 대안교육이란 것이 어디까지 받아들여질 수 있겠는가,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대안학교가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직 저도 대안교육이란 것이 뭔지 모르지만, 아직까지 대안 교육은 비효율적이고 현실적이지 못한 교육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 2008-02-11 17:58:1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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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자신이 평소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를 중심으로 주제를 정해 글을 쓴 흔적이 뚜렷한 이 글을 읽으며 공교육에서 교사의 입장에 있는 나도 공감하는 바가 많았습니다. 이제 곧 대학생이 될 '아마도생선'님의 글을 읽으면서 가르치는 일을 바로 해야 하겠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 2008-02-02 01:39:41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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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라는 입장을 강조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우리의 교육현실이 참으로 안타깝고 미안하기만 하군요. 대부분의 학생들은 숲안에서 숲 전체를 알 수 없듯 공교육 제도 안에서 생활하다보니 그 불편함이나 부당함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오? 그렇게 굳어있는 우리의 의식을 일깨우며, 자신이 누구이고, 왜 공부는 해야 하는 것인지? 어떤 공부가 참된 공부인지를 찾으려는 질문이 진지하군요.

    • 2008-02-02 01:37:10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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