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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의 시인 최승호

  • 작성자 바슬바슬
  • 작성일 2009-11-30
  • 조회수 1,132

 

 뼈의 시인 최승호 (고슴도치의 마을, 여백, 자코메티와 늙은 마네킹을 읽고서)


 시집의 앞표지를 보자. 보기만 해도 꺼끌꺼끌하게 느껴지는 정돈되지 않은 수염, 벗겨진 앞머리, 검정색 뿔테안경과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고민하는 듯 보이는 자세, 내 콩팥들을 샅샅히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은 눈매를 가진 사람이 최승호 시인이다. 어떻게 보면 오랜 세월 내공을 단련한 수도승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현대 미술을 이끌어나가는 미술가 같기도 하다. 아무튼 그의 모습은 평범한 세일즈맨과는 다르다.


 최승호 시인은 자신의 내면을 먼저 드러내기보다는 도시의 평범한 사물이나 생물을 냉철히 관찰하며 자신의 생각이나 느낀 바를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내가 그 시들을 보며 느낀 것은, 모든 시들이 ‘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흩날리는 눈보라 속 눈사람, 불에 달궈지며 몸을 뒤트는 오징어, 햇빛을 바라보는 해바라기, 대가리를 흔드는 나무말, 칼에 다져지는 고깃덩어리 등 최승호 시인은 말랑말랑하거나 쉽게 죽는 것들, 쉽게 잊혀지는 것에 자신의 관절을 심어주어서 그 생명들을 힘 있게 만들어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생명들은 대강 네 가지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통찰, 죽음, 순환, 순수가 그것이다.

(중략) 

ㅡ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바보 혹은 멍청이

철문이 닫힌 새장 속이 너무 편해

희망도 없고 절망도 없이

모이통과 둥지 그리고

막대기 위를 평생 왔다갔다 하는

앵무새 :

 부리는 짧으나 튼튼하며

 끝이 굽음

 혀는 肉質이 두텁고

 쉽게 길들며

 종류에 따라서는

 사람의 말이나

 동물의 음성을 흉내냄

- 앵무새 부분


 얼마 전 ‘시대정신’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그곳에서는 힘 있는 자들이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고, 보이지 않게 사람을 살상하는 지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였다. 그 다큐멘터리를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세계 어떤 진실도 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가지지 못한 자들을 ‘막대기 위를 왔다갔다’ 하게 할 수 있는 돈 있는 자와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엘리트들은(엘리트주의) 일상 속에서 부드럽게 우리를 사육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진실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조그맣게 던져진 모이를 먹으려고 스스로 새장 속에 갇혀있는 것이다. 그런 추상적인 생각을 이 시는 ‘앵무새’라는 존재를 통해서 나에게 구체화시켜주었다. 섬광처럼 가슴 가운데를 스쳐가는 전율과 함께 나는 최승호 시인의 통찰력에 감탄 했다.


 최승호는 죽음을 많이 보고 체험한 시인이다. 중학교 때와 대학교 때 친한 친구 두 명을 잃고, 자신 또한 폐결핵을 앓아 죽음의 문턱까지 가 보았다. 정끝별 시인은 일찍 죽음을 보게 된 최승호 시인을 보고 ‘장안에 한 젊은이 있으니/스물에 마음 이미 늙었네’라는 이하의 「진상에게」라는 시를 평론 처음에 달았다. 죽음을 일찍 알아서 일까, 스물에 마음 이미 늙어서일까, 최승호 시인의 ‘죽음’은, 죽음에 가까운 ‘외로움’은 생생하게 느껴진다.


 나는 말을 한다. 있을 수 없는 죽음에 대해서… 어느 날 나는 지상에 나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빙하기가 지상의 피를 다 얼려버린 것이다. 만약 내가 사람이었다면 내장까지 다 얼어붙은 채 동사(凍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만은 예외였다. 얼어죽기는커녕 눈보라가 칠 때마다 살이 찌는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뚱뚱한 몸에 설편(雪片)들이 들러붙어 나를 더 뚱보로 만들고 있었다.

 옥상 위 뚱보의 고독, 그렇다. 소름 끼치는 무서운 고독이 빙하기에 있었다. 내려다보면 거리는 텅빈 백색 동굴처럼 고요했다. 마네킹이 뛰쳐나와 울부짖을 것만 같은 적막의 거리. 소음도 소란도 없었다. 사람 하나 없었고 개 한 마리 없었다. 죽었는데 나만 혼자 구경꾼처럼 남아 있어도 되는 것일까. (하략)

- 그로테스크 부분


 눈사람은 지상에 혼자 남았다. 사람은 모두 죽고 눈사람은 뚱뚱한 몸에 설편들이 들러붙어

뚱뚱한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 움직일 수 없는 고독, 구경꾼처럼 남아있는 자신은 죽음보다도 더 무섭다. 죽음이 문턱까지 오는 병에 걸리면 이런 고독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자신이 죽으면 세상은 그대로 돌아갈 것 같은 두려움, 자신만이 혼자 저 세상으로 가는 외로움. 최승호의 죽음은 빙하기의 끝없이 불어대는 날카로운 눈보라 같다.


 밝혀진 바에 의하면 사람은 일 년에 자신의 몸무게 정도의 죽은 세포와 세균을 배설한다고 한다. 그 허옇게 죽은 것들을 뭉쳐서 눈사람을 만들면 사람들은 해마다 보기 싫어도 자신의 분신인 회색 눈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 올해 나는 마흔네 살이 된다. 올 겨울에는 마흔네 명쯤의 눈사람을 거느리게 되는 셈인가.


 해마다 나는 눈사람을 낳는다

마흔 네 개의 눈사람 전문


 최승호 시인은 죽음을 냉철하게 보면서도 죽음과 같이 태어나는 탄생을 그려낸다. 그것이 곧 순환이 된다. 자신의 배설물과 세균이 다시 자신이 되고, 다시 그 죽음을 자신이 마시고 먹어 또 다시 배설한다. 그렇게 영원은 계속되고, 시인은 마치 그 순환을 통달한 듯한 눈으로 생명의 운명을 처연히 적고 있다. 물론 이 순환이란 주제는 많은 예술가들의 주제였다.  동양에서 순환은 단연 단골주제였고, 서양에선 에셔같은 미술가가 이 순환을 그려내었다. 시인은 그 순환을 눈사람으로 나타내고, 자신의 시로 나타내고(눈 위의 발자국), 꿩의 발자국으로 나타내고(꿩 발자국), 눈으로 나타내고 있다(첫눈 오는 날).


 사물의 순수한 존재를 ‘삐뚫게 보기’를 통해 나타내는 최승호 시인의 시를 보면 두터운 몽둥이가 내 머리를 힘 있게 때리는 듯한 충격을 받는다.


그 오징어 부부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부둥켜안고 서로 목을 조르는 버릇이 있다

‘오징어3’ 전문

 오징어의 흐물흐물 거리는 다리가 어떻게 목을 조른다는 상상을 했겠는가! 더군다나 시인은 오징어 ‘부부’를 말하면서, 쓰다듬어주고 안아주는 사랑이 아니라 서로의 목을 조르는 사랑을 말해주고 있어 그 충격은 더하다. 묘사 없이 그저 ‘설명’으로만 시인은 두 오징어에 대한 그림을 그려주고, 오징어의 본질을 말한다. 사람의 눈으로 보자면 오징어는 목을 조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사람의 성식기가 없는 오징어에겐 그런 행위가 사랑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어쩌면 오징어 부부가 마조히스트일 수도 있고 말이다.


 짧게나마 최승호 시인의 시세계를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이 평론은 그저 내 주관적인 생각이다. 시를 읽는 사람은 그저 자기 맘대로 단단한 뼈를 깨뜨리거나 만지거나 쓰다듬거나, 사골을 만들거나, 애완견에게 주거나 해서 자신 맘대로 가지고 놀면 된다. 위와 같이 주제를 네 개로 나눈 것은 그저 편의를 위해서다. 오징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 걸고 부부싸움하는 것일 수도 있고, 사랑한다면서 서로의 통장 계좌를 확인하는, 서로를 못 믿는 부부들을 풍자한 것일 수도 있다. 덧붙여, 최승호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무런 주장도 하지 않는다. 주장이 텅 비어 없기 때문에 자유롭게 시를 쓸 수가 있고 다양한 시가 나타날 수 있다. (하략)

詩論에 대하여

ㅡ 나가르주나의 말과 같이

(부분)



바슬바슬
바슬바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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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처럼

    ''시를 읽는 사람은 그저 자기 맘대로 단단한 뼈를 깨뜨리거나 만지거나 쓰다듬거나, 사골을 만들거나, 애완견에게 주거나 해서 자신 맘대로 가지고 놀면 다. ''라는 주장이 정말 재미있군요. 자신의 비평보다 인용글이 좀더 많다는 지적에 대해 귀기울일 바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소중하게 강조해야 할 것은 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시를 대상으로 비평글을 쓰는 학생들이 거의 없는 우리 시대의 현실을 본다면 이러한 시도는 천금의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더욱 많은 비평글 만나길 바랍니다.

    • 2009-12-12 16:53:35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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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최승호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재해석하여 제시하는 능력은 높게 살만 합니다. 자신의 경험과 연관지어 시인의 철학을 이해하는 과정도 나쁘지 않았구요. 하지만 아쉬운 점이라고 하면 역시 인용이 70%가까이 되서 감상글이라고 하기에도 나쁜것 같고,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이라고 하지만 거의 시어의 분석들의 집합으로밖에 글이 보인다는건 저만의 생각일까요.

    • 2009-12-03 22:31:24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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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평론가는 시인이 작품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창조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기존에 있던 시인에 대한 견해나 평론과는 다른, 자신만의 시각으로 작품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김현 문학평론가가 쓴 ''젊은 시인들의 상상세계/말들의 풍경''이라는 책을 추천합니다. 최승호는 물론, 여러 다른 시인들에 대한 독자적이 평론이 들어있습니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 2009-12-01 20:3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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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한마디로 필자의 글은, 중심이 없는 겉핥기식 평론이란 느낌이 드는 것이죠. 또 필자의 주장에 비해 작품 인용이 너무 많은 느낌이 있습니다. 평론을 할때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은 시인의 작품이 아니라 평론가의 사유입니다.

    • 2009-12-01 20:3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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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시인 최승호에 대한 평론이군요. 최승호의 시에서 필자가 통찰, 죽음, 순환, 순수 이 네가지이 키워드를 뽑아냈다면, 이 부분을 좀 더 심도있게 파헤치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하나의 짧은 글로 시인의 전면을 평론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승호의 시세계나 그가 추구하고 있는 사유들을 간추려, 그것을 중심으로 필자의 글을 전개해나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입니다.

    • 2009-12-01 20:32:0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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