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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불쌍한 사랑기계>를 읽고...

  • 작성자 탈퇴 회원
  • 작성일 2010-07-02
  • 조회수 679

 

김혜순 시집 <불쌍한 사랑기계>


 

  김혜순 시인의 시집은 현재까지 총 9권이 출간되었다. 그 말인즉슨, 김혜순 시인은 작품 활동을 한지 어언 수십 년이 되어가는 중견 시인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지금까지 출간된 김혜순 시인의 시집 중에서 이번 <불쌍한 사랑 기계>시집은 서울의 모습을 그린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의 다음 시집이기도 하다.

  '불쌍한 사랑 기계'라는 다소 어두운 모습의 시집 제목과 함께 수록되어 있는 작품들은 대부분 긴 산문시이고 어두운 이미지가 곳곳에 도사리는 작품들이 많다. 그만큼 내용이 매우 어려웠고 작품에 대한 이해가 많이 힘들었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작품이 어려웠던 만큼, 한 작품 한 작품 읽어가면서 느끼는 기쁨은 <불쌍한 사랑 기계>를 끝까지 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환한 아침 속으로 들어서면 언제나 들리는 것 같은 비명. 너무 커서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는 어제밤의 어둠이 내지르는 비명. 오늘 아침 허공중에 느닷없이 희디흰 비명이 아 아 아 아 흩뿌려지다가 거두어졌다. 사람들은 알까? 한밤중 불을 탁 켜면 그 밤의 어둠이 얼마나 아파하는지를. 나는 밤이 와도 불도 못 켰겠네. 첫눈 내린 날. 내시경 찍고 왔다. 그 다음에 아무에게나 물어보았다. 너 내장 속에 불켜본 적 있니? 한없이 질량이 나가는 어둠. 이것이 나의 본질이었나? 내 어둠 속에 불이 켜졌을 때. 나는 마치 압핀에 꽂힌 풍뎅이처럼. 주둥이에 검은 줄을 물고 붕 붕 붕 붕 고개를 내흔들었다.  <이하 생략>

 

 

  시집의 첫 작품은 <쥐>이다. '환한 아침 속으로 들어서면…'으로 시작하는 '쥐'는 대체적으로 시의 출발과는 다르게 어둠이란 단어와 함께 내시경을 하는 화자의 모습을 그려낸다. 화자는 '내장 속에 불을 켜본 적이 있나'는 물음과 함께 자신을 마치 압핀에 꽂힌 풍뎅이로 묘사한다. 또한, 내시경을 입에 물고 있는 자신을 '주둥이에 검은 줄을 물고 붕 붕 붕 고개를 내흔들었다'라며 작품에 그려 넣는다. 이렇게 내시경이 화자의 몸속을 살펴보는 때에 마침 불빛에 벌벌 떨고 있는 내장 속 지하 감옥의 검은 흑인을 만나게 된다. 이 지하 감옥 속의 흑인은 아마도 화자의 몸속에 도사리고 있는 질병이었을 것이며 이 내시경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쥐>는 '밤은 저 빛이 얼마나 아플까'라는 구절을 끝으로 시 속에서의 '쥐' 는 '검은 흑인' 이며 그것은 '내장 속의 질환'임을 암시하며 끝난다.

 

내가 모든 등장인물인 그런 소설1

나는 내가 모든 학생인 그런 학교를 세울 수 있지.
쉰 살의 나와 예순 살의 내가 고무줄 양끝을 잡고, 열살의 내가 고무줄 뛰기하는 그런 학교. 이를테면 말이야. 지금의 내가 기저귀 찬 나에게 엄마 엄마 이리 와 요것 보세요 말을 가르칠 수도 있고, 여중생인 나에게 생리대를 바르게 착용하는 법도 가르칠 수 있을거야. 어쩌면 열 살인 내가 예순 살인 나에게 인생이란 하고 근엄하게 가르칠 수 있을지도 몰라. 또, 이를테면 말이야, 나는 또 내가 모두 등장인물인 그런 소설을 지을 수 있지. 실연당하고 미친 듯이 농약을 구해온 열아홉살 나와 네가 싫어 그랬다고 우리집 담을 도끼로 부수던 남자를 바라보는 스무 살의 내가 함께 나오는 그런 소설도 지을 수 있을 거야. 이런 소설은 어때? 열 살의 나와 예순 살의 나에게 겸상으로 우리 엄마가 밥상 차려주는 그런 소설. 결혼 전의 내가 공원에 앉은 나의 뺨을 때리고, 일흔 살의 내가 뺨맞은 나를 위로해주는 그런 소설 말이야. <이하 생략>

 

  시집 30쪽~35쪽까지는 <내가 모든 등장인물인 그런 소설>이라는 연작시가 1편부터 3편까지 나뉘어서 등장한다. 시집 속에는 다른 연작시인 <길을 주제로 한 식사 3~4>가 등장하지만, '내가 모든 등장인물인 그런 소설' 작품이 더 인상 깊었다. '신생아 시절의 화자, 어린 시절의 화자, 사춘기 시절의 화자, 노년 시절의 화자'를 작품 내에서 고루 등장시키며 시의 제목처럼 자신이 모든 등장인물인 작품을 나타내었다. 때로는 화자 자신의 상처 입은 과거를 들추며, 때로는 자신보다 늙은 자신을 등장시키며 하나의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시라는 점에서 굉장히 새롭고 흥미로웠다. 누군가 공감을 할 수 있는 작품이고, 1편에 나오는 구절처럼 '식어가는 화로 하나' 껴안은 것처럼 따뜻했던 작품이었다. 무엇보다도 삶에 대한 진솔함이 담겨있던 작품이라 많은 공감과 따뜻함을 느끼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을 한다.

 

나의 너에 대하여

베틀에 앉은 외할머니가
베틀북을 높이 들 때처럼
길이 당겨 올라간다
지구 곳곳에 흩어져 살던 LH718 승객들의
긴장한 길이 비행기 안으로
팽팽하게 당겨진다
328개의 길이 이륙한다

숨이 찬 내 애인아
나무들 잎잎마다 들러붙어
숨 몰아쉬며 불어제친다
아직도 할말이 남았어
비행기 창밖에 구름 그림자 진다
나무들이 한쪽으로 쏠린다
몰려가는 구름처럼 그가 입만 벙긋거린다

낮고도 낮은 저 아래
푸른 머리칼 오그라붙은 자지러지는 산맥들
내 애인의 얼굴 위로 침 흘리는 강들, 단단한 바다들,
내 마음을 어디다 붙들어매었던가
내 애인은 어디쯤에서 솟구쳐올라
나를 덮쳤던가
낮고도 낮은 저 아래
눈발은 어디를 휘돌아 그 얼굴을 흰 붕대로 감았던가

 

  시집의 중반부를 읽다 보면 <나의 너에 대하여>라는 작품이 나온다. 이 작품을 처음 접하였을 때는 '베틀'이라는 단어가 생소하였다. 시 속에 등장하는 외할머니의 베틀은 바로 명주·무명·모시·삼베 따위의 피륙을 짜는 직기였다. 이러한 베틀을 등장시켜 '비행기, 당겨진다'라는 단어들과 함께 시를 전개시키는 것이 굉장히 생생하게 느껴졌다. 또한 비행기를 단순히 비행기라고만 표현하지 않고 기종명인 'LH 718'을 등장시켜 시의 밋밋함을 없애주었다. 그리고 시 중간 중간 비행기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들을 사람의 모습과 연관시키는 표현을 찾아볼 수 있었다.

  김혜순 시인의 <불쌍한 사랑 기계>는 전체적으로 책의 프로필처럼 시간과 공간을 요리하고, 초월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현실공간에 안주하지 않고 여러 공간과 시간을 어우르는 좋은 작품들이 많이 수록되어있는 시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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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을 올리고 난후, 부족한 부분을 조금 더 신경써보았는데
아직도 보충해야할 부분은 많은 것 같네요. 좋은 지적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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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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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가워요. '입 속의 검은 입'을 읽고 글을 쓴 적이 있다니 기억이 나는군요. 그때보다 많이 발전했어요. 축하해요. 그럼에도 약간 지적하고 싶은 것은 글의 마지막에서 '시간과 공간을 요리하고, 초월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했으나 앞의 내용은 거기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아서 좀 집중력이 떨어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시공간의 초월에 초점을 두려면 앞의 내용도 그 방향으로 전개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

    • 2010-07-05 21:2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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