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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의 이혼취소를 읽고

  • 작성자 병든 수캐
  • 작성일 2010-07-26
  • 조회수 1,024

 

<離婚取消> -김수영-

 

당신이 내린 결단이 이렇게 좋군
나하고 별거를 하기로 작정한 이틀째 되는 날
당신은 나와의 이혼을 결정하고
내 친구의 미망인의 빚보를 선 것을
물어주기로 한 것이 이렇게 좋군
집문서를 넣고 육부 이자로 십만원을
물어주기로 한 것이 이렇게 좋군

십만원 중에서 오만원만 줄까 삼만원만 줄까
하고 망설였지 당신보다도 내가 더 망설였지
오만원을 무이자로 돌려보려고
피를 안 흘리려고 생전처음으로 돈 가진 친구한테
정식으로 돈을 꾸러 가서 안됐지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고 저것을 하고 이것을
하고 피를 안 흘리려고
피를 흘리되 조금 쉽게 흘리려고
저것을 하고 이짓을 하고 저짓을 하고
이것을 하고

그러다가 스코틀랜드의 에딘바라 대학에 다니는
나이어린 친구한테서 편지를 받았지
그 편지 안에 적힌 블레이크의 시를 감동을 하고
읽었지 "Sooner murder an infant in its
cradle than nurse unacted desire"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았지 그러나 완성하진 못했지

이것을 지금 완성했다 아내여 우리는 이겼다
우리는 블레이크의 시를 완성했다 우리는
이제 차디찬 사람들을 경멸할 수 있다
어제 국회의장 공관의 칵텔 파티에 참석한
천사같은 여류작가의 냉철한 지성적인
눈동자는 거짓말이다
그 눈동자는 피를 흘리고 있지 않다
선이 아닌 모든 것은 악이다 신의 지대에는
중립이 없다
아내여 화해하자 그대가 흘리는 피에 나도
참가하게 해다오 그러기 위해서만
이혼을 취소하자

[註] 영문으로 쓴 블레이크의 시를 나는 이렇게 서투르게 의역했다.
  ---"상대방이 원수같이 보일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이 선의 입구
     에 와 있는 줄 알아라"
[註의 註] 상대방은 곧 미망인다

<1966. 1. 29>
 
 

 

<사랑의 변주곡, 1988, 창작과비평사>

이 시는 빚보증을 잘못서서 결국 이혼위기에까지 이른 상황으로 시작한다. 시인은 조금이라도 덜 피해를 보려는 자신을 그린다. 그러다가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 이야기를 꺼내고 갑자기 화해의 제안을 던지며 이혼을 취소하자는 말과 함께 시를 맺는다. 그가 돌연 화해를 제안한 이유는 시를 쓰기 전날 한 여류작가의 눈동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아내는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매일같이 피를 흘린다. 반면에 지성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여류작가의 눈에서는 피가 흐르지 않는다. 시인 자신은 피를 덜 흘리려고 몸을 사렸다. 이 지독한 모순 속에서 시인은 이기적인 자신의 모습을 뉘우치고 이혼결정을 이혼취소로 반전시킨다. 불순물 같던 영시는 하단부에 존재하는 주와 함께 또 하나의 반전을 머금고 있었다. 이 반전이 허공에 떠돌던 문장들을 내 마음에 안착되게 하였다. 그 구절을 해석하자면 ‘잠재된 욕망을 키우느니, 요람 속에 있을 때 죽이라.’는 뜻이다. 그것을 수영은 주의 형태를 빌려 ‘원수를 사랑하라’는 뜻으로 반전시킨다. 그 말에 따르기 위해서는 사랑보다 원수가 먼저 존재해야 한다. 원수가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할 준비가 된 것이라 그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수영은 ‘선이 아닌 모든 것은 악’이라며 자신의 본의 아닌 악에 대해 철저히 반성하고, 아내가 흘리는 피와 함께하고자 했다. 이 시 한 편이 날 잡고 놔주지 않았다. 지난 사년을 ‘천사 같은 여류작가’들의 외양에 홀려, 나를 위해 피 흘려 죽어간 ‘아내’를 끊임없이 증오했다. 사소한 오해 속에서, ‘아내’가 원수로 보일 때 나는 단 한번이라도 이해하고 사랑 할 의지가 없었다. 블레이크가 아닌 수영이 되지 못했다. 수영이 고심 끝에 자신의 아내에게 던진 화해의 말을 나는 쉽사리 전할 수가 없다. 말해도 들리지 않는 곳으로 나의 ‘아내’는 떠나갔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사념에 빠져 살아온 세월이 사년이다. 나의 언어는 갈 길을 알지 못하고 그저 떠돌 뿐이었다. 이젠 나도 ‘아내’가 흘리는 피에 참가하기 위해 나서야 할 시간이다. ‘화해하자.’는 한 마디를 전하기 위해, 그러기 위해서만 ‘무심한 하늘이 허락한 이혼’을 취소하기 위해 나는 펜을 들어야한다. 지금의 미천한 글쓰기는 내 나약한 감정들을 거름으로 삼아 ‘이혼취소’를 알리는 ‘문학’이란 전령으로 성장하여, 그녀에게 날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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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비평글 잘 읽었어요. 비평이 문학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좋은 내용이군요. 다만 화자와 시인을 동일시하는 표현은 때로 좀 어색할 수도 있지요.

    • 2010-08-01 10:39:19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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