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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아침의 문」을 읽고

  • 작성자 silmshady
  • 작성일 2010-08-31
  • 조회수 992

2010-07-11

문학사상 펴냄 박민규 作

(소설) 「아침의 문」을 읽고

 

좌절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사실 책을 많이 읽는다고는 하지만,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읽은 현대소설 작가는 얼마 되지 않는다. 짧고 기억에 많이 남는 학창시절 동안에는 현대소설보다는 고전을 중심으로 책들을 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문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소설가들 중에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를 꼽으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박민규를 뽑을 것이다. 그는 나에게 새로움을 보여준 소설가이고 감정을 어떻게 적절히 소설 속에 넣어버리는지 알려준 작가다.

   그는 어쩌면 문단의 행운아라고 불릴 정도로 상복이 많다. 문학동네 작가상으로 데뷔해서 그 후 한겨레문학상, 신동엽창작상, 이효석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을 수상했는데, 이 정도로 많은 상을 가진 사람은 문단에서 찾아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도 올해 초 이상문학상을 수상함으로서 한국 문단을 굴복시켰다. 내가 ‘굴복’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박민규의 수상이 그만큼 혁신적이라는 이야기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과 평론가들이 그의 글을 대내외적으로 인정해주었다는 말이 된다. 어떤 때는 삼류 SF소설 같고, 어떤 때는 무협 소설같은 ‘순수문학 같지 않은 소설’이 국내에서 가장 권위 있는 소설에게 주는 이상문학상을 수상하다니. 박민규는 또 한 번 문단을 자기 손안에서 쥐고 흔들었다.

   박민규의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내가 아직 중학생이었을 때, 국어선생님이 수업시간을 떼어서 10분동안 독서를 하게 한 적이 있었다. 국어 선생님이 읽을 책을 가져왔는데 그 중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책이 있었다. 나는 처음에 겉표지에 실린 사진을 보고 그가 쓴 소설을 앞에 두고서도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심하게 고민했었다. 긴 머리에 선글라스를 낀 그는 소설가라기보다는 록밴드의 기타리스트에 가까웠다. 소설의 내용은 어떠한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괴상한 문장들로 ‘이것이 소설이 맞나?’ 하는 질문들을 하게 만들었고, 나는 그 책을 다 읽고서 그것이 소설이 아닌 수필로 판단했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게 소설적 감정을 느끼게 해준 최초의 작가는 박민규였다. 그가 써내려가는 패배자들의 이야기는 그때도 가슴 시리었고, 지금도 여전히 가슴 시리다. 나는 이미 그가 소설에 던진 문제의 화두를 중학생 때 경험한 것이었다. 그것도 아직 초등학생 꼬마 티를 벗지 못한 중학교 1학년 때에.

그 후에 박민규를 다시 읽은 건 삼년이 지난 고등학교 일학년 때였다. 나는 친구 녀석이 ‘박민규’라는 소설가를 읽어보라기에 그의 책을 사러 서점에 갔다. 그런데 웬걸. 내게 소설의 ‘쓴맛’을 처음 보여준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작가가 ‘박민규’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해괴망측한 문장으로 소설을 쓰고 있었고, 나는 그제야 그가 수필가나 록밴드의 기타리스트가 아닌 소설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서점에서 샀던 책이 그의 단편집 「카스테라」이다. 또 그의 소설에는 이상한 문장들만 가득한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이야기가 있었고 내 친구들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방 한구석에서 바보처럼 단편집에 실려 있는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를 읽고 울어버린 기억도 있다.

   내가 그때 울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서민이 되려고 발버둥치는’ 지하철 푸시맨의 이야기는 내 아버지의 이야기고, 내 친구들의 이야기이고, 나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내 손으로 돈을 번 적이 한 번도 없지만 항상 박민규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과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살아간다. 박민규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좌절을 경험하지도 않았지만 나는 항상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감한다. 그들의 삶이 나의 삶이고, 그들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라는 사실을. 이것은 예상이 아니라 ‘사실’이다. 철저히 자본주의 매커니즘에 입각한 현실을 그려는 그는 진짜 현실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아침의 문」에서 나오는 자살모임은 허구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다. 5000원의 시급을 주고 5000원의 시급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소설 속의 편의점 아르바이트 여직원처럼, 남자에게 버림받고 아이를 몰래 낳아 도망가는 여자도 분명 존재한다. 박민규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대부분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좌절과 삶에 대한 고찰, 그리고 슬픔은 모두 ‘가난’하고 돈이 없는 데에서 기인한다. 자본주의라는 것이, 돈이 넉넉한 사람들은 참 천국이 따로 없는 시스템이다. 자기돈 뺏길 염려 없이 마음대로 물건을 사고, 쓰고 하면 되니까. 하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에 ‘어쩔 수 없이’ 종속해야 하는 많은 서민들과 ‘서민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빈민들’에게 자본주의란 너무 잔인한 것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시급 5000원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사회적 천시를 받고 무시를 받는다. 모든 문제는 ‘어쩔 수 없이’라는 말에 들어있다.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시대가 오고 만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비극이다.

   그들이(박민규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이 가난하게 된 이유에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내 나이 또래의 인간들, 혹은 내 아버지 또래의 인간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이 가난하게 된 이유는 물론 돈이 없어서이겠지만, 왜 그들이 돈이 없을까? 어쩌면 사회라는 게, 그들에게 돌아갈 돈을 애초부터 가로채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노력해서 안 되는 거 없다지만, 내가 보기에 이제는 정말 노력해도 안 되는 시대가 온 것 같다. 이 말을 증명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박민규는 ‘88만원 세대’라는 용어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소설가 중에 하나다. 내가 내년에 20살이 되지 않는다면, 내가 이미 40대를 넘긴 중년이라면 이런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나이를 지나온 엄연한 40대이고,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40대이지 20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의 부는 20대보다는 40대에게 더 많이 돌아간다. 나도 이러한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내년이면 어느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것이고, 갈비 집에서 고기를 뒤집고 있을 것이다. 어쩌겠는가. 시금 5000원이라도 벌어야 죽지 않고 연명할 수 있는 세상인데.

   박민규의 인물들은 좌절해서 쓰러지기도 하며, 그 좌절을 이겨내기도 한다. 「아침의 문」이 가져다주는 것은 비참함 그 자체다. 아무리 박민규가 공동체적 사랑을 말미암아 사건을 해결하려고 했다지만, 그들이 사는 세계가 쉽게 변할 리 없다. 죽음의 문턱에서 생명 탄생의 문을 바라본 청년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아이를 달래는 장면은 그가 누군가를 ‘달랠 수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림과 동시에 그도 이 사회에서 ‘달랠 수 있다는’ 존재의 탄생을 의미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의 죽음을 막아준 존재가 바로 이 버려진 아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는 연결되어 있다. 죽음과 탄생은 서로를 극단으로 치닫게 하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쓰고, 편의점 여자와 자살을 결심한 청년 사이에 ‘아이’의 존재가 나타남으로서 그들의 좌절을 이겨나갈 동기가 마련된다. 그 동기는 연대성이다. 어차피 같은 시급을 받고, 그 시급에 맞춰서 비슷한 생을 살아갈 운명들이라면, 서로 얼굴 한번 봐두고, 악수라도 한번 나누는 것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더 많은 도움을 주지 않을까.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적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박민규는 사회학자나 정치가가 아닌 소설가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문학적인 답안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

   박민규가 이러한 소설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를 둘러싼 세계에는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느 건물 옥상에서 몰래 애를 낳고 도망가는 여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 봐야 한다. 누가 이 사람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이 질문의 해답에서 박민규가 제시한 연대성의 답안도, 사회학자나 정치가가 제시할 수 있는 실질적인 답안도 유추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들의 좌절이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면, 그것은 사회가 어느 정도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여야 한다. 아무도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면, 결국 그들이 좌절하고, 자살하고, 옥상에 몰래 애를 낳고 도망가는 원인은 돌을 손에 쥔 채 차마 던질 수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멍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우리들에게도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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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ilmshady
  • 2010-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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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비평글 참 잘 읽었어요. 꽤 좋은 글을 써 줬군요.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어야 하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청년, 이 문제는 그들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기보다 우리 사회가 공범으로 만들어냈다는 지적에 공감이 가요. 경제적 효율성을 최상의 가치로 신봉하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문제겠지요. 소설의 내용을 자기 시각에서 꽤 자연스럽게 풀었어요.

    • 2010-09-06 21:10:47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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