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아Q정전>을 읽고

  • 작성자 세계를펼쳐라
  • 작성일 2010-12-27
  • 조회수 238

중학교 2학년 때, 사회책에서 아시아의 근대 단계 즈음을 배울 때였던가, 중국 문화 부분에서 ‘루 쉰의 <아Q정전>’에 대한 내용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흔히 교과서에서 줄줄이 나오는 책 이름 중 하나로 여기고 그저 “<아Q정전>이란 책이 있구나, 근데 왜 제목이 아Q정전인거지? IQ에 대한 총정리 책인가?”하며 엉뚱한 생각만 하다 그것으로 그만두고 까마득한 기억의 창고로 깊숙이 던져버렸다. 그리고 지금에야 다시 이 책을 전정한 책으로써 접하게 된 것이다.

작가의 이름은 루 쉰. 교과서에 나온 이름이기에 그저 한번 외워두었던 이름이다. 그는 소설과 산문을 넘나드는 활발한 문필활동을 전개하여 중국 사회에 드리워진 암흑의 근원을 파헤치는데 혼신을 바쳤다. 그리고 오늘날 그는 봉건의 극복과 근대의 실현을 위해 치열한 고투는 벌인 문학가이자 사상가로서 널리 평가 받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아Q정전> 또한 그의 대표작인 만큼, 이 작품은 그의 그러한 신념과 열정,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 속에서 만난 작가는 그 시대 중국인들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을 비판하고 풍자하며, 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결연한 의지와 확고한 비판의식을 보여준다.

중국에 대한 배경지식도 미흡한 데다 난해한 책을 읽는데 익숙하지 못한 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작가가 중국인들의 어떠한 전형적인 사고방식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책 속의 인물 아Q로 대표되는 중국인들의 특성은 쉽게 말하면 지나치리만큼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책에서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아Q가 모든 일을 자신의 승리로 만들어 버리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이 승리는 단순히 긍정적인 의미의 승리가 아니다. 억지스러우며, 모순적이고 우둔하며 비논리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손해를 위로하는, 아니 어찌 보면 자신의 삶 자체를 합리화하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짜오 노어른에게 따귀 맞은 것은 노어른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고 자신이 아비를 때렸다며, 자기 자신을 짜오 노어른 보다 고상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 이런 사고방식대로라면 언제나 승리하며 살 수 있다. 하지만 난 이런 승리는 원하지 않는다. 사회의 압력과 구타를 묵인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사회는 핍박과 위협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그 사회는 발전이 없다. 루 쉰이 그의 우스꽝스런 풍자 뒤에서 독자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런게 아니었을까 한다. “승리요? 좋습니다, 승리자요. 하지만 진정한 승리는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저 사회의 공격을 즐거이 받아내는 한낱 스펀지일 뿐입니다.”

루 쉰은 자신의 이러한 비판의식을 독자들에게 아주 희화적인 풍자로써 돌려 말하고 있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비판은 아주 아이러니컬하고 독특한 느낌을 주는 방법이다. 서술자 자신마저도 아Q의 사고방식에 동화되어 설명도 아Q의 생각을 그대로 담아 이야기한다. 독자들도 헷갈릴 정도이다. 그러나 나마저도 이런 우스꽝스런 사고 패턴에 갇혀 버리게 되는 것을 깨달아 버린 순간,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은 극치에 달한다. 역시 그는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라 할 만하다.

그가 그리고 있는 아Q의 모습은 너무나도 특이하고 인상적이다. 특히 마지막에서 ‘젊은 과부 성묘 가네’, ‘용호투’, ‘내 손은 쇠채찍을 들어 너를 때린다’를 부리는 것에 대한 ‘당당하지가 못하다, 힘이 없다, 손이 없다’하다가 결국 노래 한 마디 없이 총살당한 아Q는 말 그대로 정말 웃기는 사형수이다. 끝내 노래 한마디를 못 부르다는 말이다. 작가가 비판하는 중국인, 바로 ‘말 한 마디 못하는 이’, ‘무비판적인 군중’이다.

<아Q정전>이 중국을 대표할 수 있는 문학 작품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기가 없다. 여기에서 좀 더 말을 보태자면, <아Q정전>이 지극히 중국적인 느낌이 강하다라는 것이 큰 요인이 된다. 웨이주앙, 짜오바이옌, 우마 등의 중국식 지명과 이름은 말할 필요도 없고, 중국 혁명당 사건, 변발 풍습, 중국 민속극 중 하나 ‘용호투’ 등의 중국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소재가 많다. 책 한 권으로 중국의 문화와 분위기를 온 몸으로 느낀 것만 같다.

<아Q정전>은 이해하기 쉽지 않고, 조금은 흥미가 떨어질 만한 책일지도 모르지만,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고전인 것은 분명하다. 루 쉰이 취하고 있는 그의 독창적인 사고의 전달 방식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것이며, 그가 지적하고 있는 중국인들의 문제점은 상당히 예리하고 신랄하다. 루 쉰의 <아Q정전>은 중국의 문화와 중국인들의 사고방식 등을 비롯해서 정말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고전 중에서도 고전이다.

세계를펼쳐라
세계를펼쳐라

추천 콘텐츠

'법의 정신에 대한 이해와 비판'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읽고)

법의 정신에 대한 이해와 비판     몽테스키외의 권력 분립론은 정치, 법 분야에서 익히 나오는 개념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권력 분립론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은 단순히 개념적인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 분립론에 대해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각 권력의 개념과 상관관계를 파악하는 것과 더불어 권력 구조 형성의 장이 되는 각 정체(政體)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는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통해 그의 언어로 쓰여진 권력 분립론의 참다운 의미와 의의를 알고 그 밖의 법 본질적인 개념에 대해 심도 있게 파악할 수 있다.   제1부에서 제6부에 이르기까지 법 일반에서 시작하여 법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을 거쳐 정체와 기타 실질적 사안들을 모두 총괄한 ‘법의 정신’은 책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몽테스키외가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가 머리말에서 ‘책 전체를 두고 칭찬하거나 비난하기를 바란다. … 이 책을 지은 사람의 의도를 찾아내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 책의 구상 안에서만 확실하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그가 노력 끝에 완성한 책의 구상만큼은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제1부 제2편 정체의 본질에서 직접 유래하는 법에서 몽테스키외가 정체의 종류를 공화 정체, 군주 정체, 전제 정체 세 가지로 나누고 각각의 본질을 탐구하여 대리자(행정관) 선출 방식, 덕성·명예와 같은 정체의 원동력에 대하여 기술한 내용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주권을 갖는 사람의 수와 법에 대한 고려를 바탕으로 정체를 나눈 것은 당대의 창의적인 발상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비판의 대상이 될 만한 것이 있다면 이 같은 정체의 분류법을 포함한 법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여러 존재에 대한 논의, 정체의 세 권력에 대한 분류에서 그 기준을 명확히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서술 방식으로 인해 정체의 분류 편 같은 경우 공화 정체와 군주 정체에서는 주권인의 수를 고려하고 전제 정체에서는 이를 포함한 법의 유무를 따지는 이중적 기준을 적용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법의 정신’에서 몽테스키외의 논의하는 바에는 250여 년 전의 발상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구시대의 잔재가 남아있다. 그 첫 번째는 ‘신’에 대한 언급이다. 제 1편 제1장 여러 존재와의 관계에서의 법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는 신에 대한 언급과 논의는 분명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공감대를 갖을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당대 그의 종교관이 개입되어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그의 개인적 종교관이 이 같은 인간 사회의 정체에 대한 논의에서 적합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두 번째는 각 정체를 구성하는 인민의 구성에 대한 것이다. 그가 공화정, 군주정, 전제정 세 정체의 인민의 구성에 대해 언급한 내용에서는 ‘차별은 당연히 필요하다&rs

  • 세계를펼쳐라
  • 2010-12-27
국제 사회 분쟁에 대한 해답, 그리고 새로운 희망의 지평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를 읽고)

국제 사회 분쟁에 대한 해답, 그리고 새로운 희망의 지평      과학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인류의 유혈행위 또한 무서울 정도로 대규모화 되었다. 핵무기가 개발되고 새로운 폭력 유형이 나타난 지금, 인류는 현재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위태로운 시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의 저자 다케나카 치하루는 21세기 분열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접근에서 시작하여 폭력과 분쟁의 모습, 특징을 분석하여 ‘세상은 이젠 달라질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책 전반에 걸쳐 저자는 철저한 분석을 바탕으로 국제 사회에서 국가 간 안보 경찰관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미국의 국제 무력적 간섭 행위 속 모순을 지적하며 실상을 밝히고 있다. 다케나카 치하루의 미국에 대한 논의는 미국이 내세우는 ‘정의로운 전쟁’이란 과연 무엇이며, 그 속의 모순은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미국에 대해 한마디로 ‘국제 사회의 얌체’라고 정의할 수 있었다. 미국은 ‘정의로운 전쟁’이란 이름 아래 국제여론도 무시한 채 폭력을 행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국제적 분쟁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폭력 사태가 발생하고 있는 지역에 일관되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사상과 노선에 대립되는 국가에만 개입하여 이를 그들을 미국화시키고 있다는 데서 미국이 말하는 ‘정의’가 실체 없는 허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국제사회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어느 정도 이익이 실현됐다 싶을 때는 뒤로 빠져버리고 만다. 결국 미국이 그 자리에 남기고 가는 것은 미국의 간섭에 반발하여 일어난 무장조직과 그들 세력 간의 내전이다.   이 책이 주는 ‘혼란스럽고 분열된 현 세계’에 대한 해답은 특별하다. 단순히 현실주의 입장에서 국제사회의 일면만을 고려한 해답도 아니며, 이상주의 입장에서 그다지 효력이 없을 듯한 그야말로 ‘이상’적인 해답은 더더욱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우리의 선택이 곧 세계의 미래’라고 말한다. 이는 전혀 뻔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고통의 공유’와 ‘내가 먼저 건내는 화해’, ‘모르니 기다려 달라고 말할 수 있는 자세’는 외교관, 국가원수 등 특정 인물이 아닌,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체적인 노력이다. 그가 내린 해답은 세계를 ‘안전하고 풍요로운 지역’과 ‘가난하고 위험한 지역’으로 나누어 두 지역 상호간에 미치는 영향과 그 구조를 파악하고, 양 측의 실제적 상황과 그들의 태도를 모두 고려한 끝에 거둔 결실이며,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간의 줄타기 끝에 내린 총체적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신문의

  • 세계를펼쳐라
  • 2010-12-27
제프리 삭스의 <빈곤의 종말>을 읽고

제프리 삭스의 <빈곤의 종말>    “빈곤의 참상에서 출발하지만 감성에 호소하지 않고 빈곤이 해결 가능한 문제라는 걸 증명한다.” 제프리 삭스의 <빈곤의 종말>에 대한 국민일보의 평이다. 세계 빈곤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 기존의 각종 기사와 홍보자료, 서적들은 주로 독자들의 동정을 불러일으켜 빈곤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데 급급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전에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으면서도 오히려 읽는 내내 희망의 불이 사그라드는 것만 같았던 것도, 책의 마지막장을 넘길 때까지도 빈곤이 해결될 수 있다는 해결책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빈곤을 어떻게 퇴치할 수 있는가’란 독자들의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다. 정면으로 “이러면 되지 않습니까. 단언컨대 우리 시대에 빈곤은 끝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무엇보다도 바로 이 점이 이 책의 가치를 확연히 드러나게 해 주는 것이다. 제프리 삭스는 빈곤이 해결 가능한 문제라는 걸 증명하는 과정에서 ‘임상 경제학’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오늘날의 개발경제학이 가지는 맹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빈곤 문제 전반에 관련된 경제학적인 접근 자체를 전면 수정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실시하는 국내의 빈곤층들을 위한 정책들을 한 예로 들어보아도, 기존의 경제학적인 접근은 대부분 매우 단편적으로 이루어져왔다. 단순한 사고 과정만을 거쳐 생활비 부족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위해 기부금을 받는다거나 복지 예산을 늘린다는 식의 일차원적인 공식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임상경제학은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듯 그 국가의 시스템에 대한 진단에서 시작해 체계적으로 순서화된 체크리스트를 통해 한 나라의 경제를 되살린다는 점에서 매우 획기적이다. 임상경제학이라는 개념은 이 자체로 빈곤 문제에 관해 활동하고 있는 전 세계의 NGO와 국제기구, 세계 각국의 정부에 큰 울림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받은 감명을 남겨두기 위해서 짧게 한 줄의 메모를 해 놓았는데, 이것은 나를 가슴 벅차오르게, 또 조금은 씁쓸하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작은 종이에 “나 또한 그처럼 지구의 인류를 사랑하고, 전 지구의 행복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 할 수 있도록.”이라고 적었다. 면학실 책상에 이 메모를 붙여놓고 볼 때마다 미래의 내 모습을 그리며 국제기구 종사자로서 빈곤 퇴치를 위해 힘쓸 생각에 가슴 이 벅차 올라 미소를 짓지만, 세계무대에 진출하지 않으면 내가 과연 할 수 있는 게 있을까하는 생각에 금세 씁쓸한 마음이 들곤 한다. 제프리 삭스가 말하고 있는 빈곤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들은 국제기구 종사자나 정치경제적으로 전문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가 아닌 일반 사람들에게는 다소 먼 이야기이다. 저자는 ‘우리 세대’에 빈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lsqu

  • 세계를펼쳐라
  • 2010-12-27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
  • 익명

    잘 읽었어요. 제목은 소설로 접근했는데 내용은 오히려 작가론에 가깝군요. 그런데 작가론으로 접근하더라도 작품을 중심으로 했으면 좋겠어요. 루쉰 혹은 루쉰 문학에 대한 일반적 평가를 많이 활용해서 신선함이 떨어져 보여요. 작품에 대한 언급이 있긴 하나 그것이 중심이 되고 있다는 느낌이 덜해요.

    • 2011-01-03 15:59:39
    익명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