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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시봉에 열광하는 까닭

  • 작성자 韓雪
  • 작성일 2011-02-09
  • 조회수 278

 이번 설에 MBC 놀러와에서는 <세시봉 콘서트>를 방송했다. 그리고 그 이전에 방송만큼 커다란 센세이션을 우리나라에 불러일으켰다. 특히 세시봉의 노래를 처음 듣는 청소년마저도 세시봉에 빠져버렸다. 왜 사람들은 세시봉에 열광하는걸까? 아이돌에 푹 빠진 청소년들조차도 세시봉이라는 옛 향수에 빠지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우선 세시봉의 노래에는 이야기가 있다. 어디선가 있을 듯한 이야기, 내가 언젠가는 겪어볼 듯할 이야기가 세시봉의 노래에는 있는 것이다. 예로, 이장희의 '내 나이 육십하고 하나일 때'는 거의 모든 세대의 공감을 이끈다. '책과 조국, 아내, 꿈, 슬픔이 가득했던 내 청춘은 과연 내가 육십하고 하나일 때도 영원할 수 있을까? 그 때도 나는 내 사랑을 사랑하고 있을까?'라는 진지한 고찰이 드러나는 이 노래는 10대에게도, 60대에게도 감동을 주는 노래인 것이다. 담배가게 아가씨도 사랑을 얻기위한 모습이 너무도 희극적으로 보여진다. 마치 소설처럼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모습을 담아내는 것이다. 모든 시대에서도 통영되는 사랑, 우정, 기쁨, 슬픔 같은 감정을 너무도 소소한 모습에 담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차트에서 10위안에 드는 곡을 보아도 이야기는 없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모두가 재미있게 느낄 수 있는 이야기가 없다. 이야기는 모든 노래에서 사라진 지 오래이다. 오직 감정만이 남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그저 아무런 소재 없이 표현하고자 하다보니 모든 노래가 같아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노래가 점점 후렴구만을 반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모든 노래가 그저 가슴에 울림 없이 들리는 것이다. 이런 노래들만이 넘쳐나는 우리 세대들의 mp3에서 세시봉의 노래는 커다란 파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 파도의 이야기는 감미롭다. 그렇기에 우리 세대들은 그 파도에 몸을 맡길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세시봉에 열광하는 이유이다.

 또한, 세시봉의 노래에는 시가 있다. 시가 노래에 있다는 것은 운율이 있고, 정서가 있다는 것이다. 가만히 듣다보면 나도 모르게 따라부르게 되는 그런 운율이 있다는 것이다. 그 운율은 어쩌다 끼워맞춘 운율이 아닌 정서에 가장 가깝게 표현하다보니 만들어진 운율이다. 가장 자연스러운 운율인 것이다. 또한, 우리의 정서를 대변해준다. 우리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서, 비록 모든 곳에서 통할 것 같은 감정을 우리만의 감정으로 만들기 위해서 세시봉의 노래는 외래어나 외국어를 많이 배제한다. 그저 우리만의 감정을 노래한다. 자칫 통속적일 수 있는 감정을 그들만의 색깔로 노래한다. 세시봉이라는 비슷한 노래 안에서 제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또한 색다른 소재, 참신한 표현을 찾아 나선다. 그래서 그들의 노래는 살아 움직이는 시로 들린다. 지금의 아이돌들의 곡은 외래어, 외국어에 너무나 치중한 데에 비해서 그들은 우리말을 살려낸다. 아이돌처럼 화려한 말도 아니라 그저 진솔하고 작은 표현으로만 우리의 정서를 표현한다. 그렇게 작게 빛나기에 그들은 더욱 아름다운 별이 아닌가 하다. 그들이 있었기에, 노래는 시를 대변하기 시작했고, 시가 노래를 대변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만 싶다. 그들은 운율도, 정서도, 참신함도, 그 모든 시의 물결을 노래한 것이다.

 이렇게 세시봉의 노래가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를 써 보았지만, 이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세시봉이 사랑을 받는 이유를 정확히 써내지 못한 것 같다. 그 이유는 세시봉에게는 표현할 수 없는 어느 매력이 있어서일지 모르겠다. 양희은의 '아침이슬'을 듣고 눈물 흘리는 것은, 이장희의 '내 나이 육십하고 하나일 떄'를 듣고 가슴이 먹먹한 것은 왤까. 조금 시적으로 표현하자면 이 세상에 별이 없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의 노래는 그 별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세시봉의 노래는 그 별을 보라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보게 된 첫 별은 빛난다. 우리를 비춘다. 그리고 그 따스함에, 그 아름다움에 눈물 흘리는 것은 아닐까? 세시봉의 노래가 다른 노래들과 다른 이유는 세시봉의 노래에는 별이 있고, 눈물이 있고, 그 속에 녹아든 우리의 삶이 있는 것이 아닐까.

韓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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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 -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사막에서 길을 잃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한다. 살인적인 열기의 낮과 극심한 추위의 밤. 인적 하나 없는 광대한 공간 속의 외로움. 그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메워지지 않는 목마름일 것이다. 그렇기에 문득 저 멀리에 호수가 보인다면 누구나 뛰어가기 마련이다. 희망을 가득 품고 허위허위 달려가 보지만 정작 있는 것은 모래밖에 없다.  신기루. 광학에서는 빛이 실제로 만나서 생기는 상을 실상이라고 하고, 빛이 실제로 만나지 않았음에도 생기는 상을 허상이라고 한다. 허상이 생기는 이유는 빛이 직선으로만 뻗어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미묘한 기온 차이에도 빛은 조금씩 꺾인다. 그 조금씩의 차이가 모여 나중에는 뒤집힌 허상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눈은 실상과 허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는 나무가 뒤집혀 있는 것을 보고 호수에 나무가 반사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허상을 실상처럼 받아들이는 것. 삶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광활한 삶의 한복판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다 우연히 발견한 이상을 향해 달려가곤 한다. 사막에서 길을 잃은 자가 호수를 향해 달려가듯이. 마침내 이상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을 때쯤 우리는 허상을 바라보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우리 삶에 내재되어 있는 부조리일지도 모른다.  김영하는 부조리의 작가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 삶에 숨어있는 허상을 들춰내어 폭로해왔다. 앞서 그는 「오빠가 돌아왔다」에서 왜곡된 가족 구성원의 모습을 보여주며 행복한 가정이라는 허상을 파헤친 바 있었고, 『빛의 제국』에서는 서로를 속이고 있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진실한 관계라는 허상을 파헤친 적도 있었다.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그가 천착하는 것은 바로 자아의 확실성이라는 허상이다. 그가 어떻게 자아의 확실성이라는 허상을 밝혀내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소설을 꼼꼼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  소설의 주인공 김병수는 은퇴한 연쇄살인범이다. 그는 “살인의 모든 과정과 느낌을 기록”하기 위해서 일지를 쓰겠다는 마음을 먹었지만 문장을 만든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시를 공부했고 어쩌다 등단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알츠하이머에 걸린 평범한 일흔 살의 노인일 뿐이다.  그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 이름은 은희. 그녀는 “농대를 나와 지역의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사실 그녀는 그의 친자식이 아니다. 그녀는 그가 마지막으로 죽인 여자의 딸이다. 여자는 자신의 딸만은 살려달라고 빌었고, 그는 그 약속을 지켜주기로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연쇄살인이 발생한다. “잇따라 여자 셋이 죽었”고 “세 여자 모두 이십대”인데다가 “밤늦게 귀가하다가 당했다”고 한다. 연쇄살인범으로부터 은희를 보호하기에는 그는 너무도 늙었고 심지어 최근 기억부터 없어질 위기에 처해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은희에게 밤길을 조심하라는 주의상황을 말하는 것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우연한 기회로 연쇄살인범의 단서를 찾는다.  나는 순간적으로 정차해 있는 놈의 차를 보지 못하고 그대로 추돌하고 말았다. 사냥용으로 개조한 지프였다.

  • 韓雪
  • 2014-12-23
과학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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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雪
  • 2014-07-13
나와 너 사이에서 - 김연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당신, 사랑을 믿나요?    언젠가 당돌하게 소설의 첫 문장을 써본 적이 있다. 당신, 사랑을 믿나요. 거기서 끝이었다. 글은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원래 문장은 문장을 부르는 법이다. 문장이 제대로 들어서기만 하면 자연스레 그 다음의 문장이 들어선다. 나는 분명히 정확한 문장을 썼다.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문장이었고, 읽는 이의 관심을 끌만한 문장이었으며, 문법적 오류도 없었다. 그럼에도 글은 써지지 않았다.  어디선가 읽어본 듯도 했다. 제대로 문장을 썼는데도 다음 문장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그건 자신이 쓴 문장을 스스로 믿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 누구도,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설득시킬 수 없는 이야기를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당신, 사랑을 믿나요? 나는 이 문장을 믿지 못한 게 분명했다. 나는 사랑에 설득되지 않았다. 나는 사랑을 믿지 못했다.  한 줄만 써놓고 버렸던 원고지를 내가 다시 꺼내는 데에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내가 사랑에 설득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순간부턴가 나는 사랑을 믿었다. 당신, 사랑을 믿나요? 이 문장을 믿을 수 있었다. 소설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문장은 문장을 따라왔다. 물론 첫 문장은 다른 문장으로 바꿨다. 퇴고를 하면서 첫 문장이 너무 감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소설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소설을 써냈다는 것이다. 그 문장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문장으로 말이다. 사랑을 믿지 않았던 나는 사랑을 믿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건 순전히 김연수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 아닐까 싶다. 나는 김연수 때문에 사랑에 설득되었고 사랑을 믿었던 것이다.  세상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너’로. 자아와 타자. 세상은 그 둘로 구성되어 있다. 나와 너는 이분법적이다. 나와 너 사이에는 거대한 심연이 있다. 나와 너는 선천적으로 다르다. 나는 결코 너가 될 수 없다.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렇다. 나는 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너의 조그마한 움직임이나 바뀐 말투 정도로 너의 생각을 간신히 추측할 뿐이다. 나에게 있어 너는 철저한 미지未知다. 그리고 그건 너도 그렇다. 너는 결코 나라는 존재가 될 수 없다. 나와 너는 영원히 갈라서 있다.  사르트르는 말했다. 타자, 그것은 곧 지옥이라고. 너라는 존재는 나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는 내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너는 나를 끊임없이 간섭한다. 결국 너는 나를 꺾어버린다. 내 의지는 너 앞에서 비참하게 허물어질 뿐이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너란 존재는 나를 방해하는 존재일 뿐이며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일 뿐이다.  타자를 극복하려 했던 건 사르트르뿐만이 아니다. 철학사에 이름을 남긴 대부분의 철학자들 역시 타자를 극복해야 할 그 무엇이라고 규정했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이었다. 나라는 존재만이 유일하고 확실하며 절대적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유아唯我론으로 귀결된다

  • 韓雪
  • 201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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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읽었어요. 그런데 정리되어야 할 것이 좀 있어요.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누구인지, 너무 일반화시킨 것은 아닌지, 그리고 '세시봉'은 노래 유형이라고 봐도 되는지 등에 대해서는 좀 생각을 더 해야겠군요.

    • 2011-02-20 20:44:18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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