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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성직자들

  • 작성자 韓雪
  • 작성일 2011-03-01
  • 조회수 467

 지식채널 e에서 어떤 성직자들이라는 제목으로 '삼소회'에 관해서 방송한 적이 있었다. 중국 고사 '호계삼소'에서 불교의 혜원, 도교의 육수정, 유교의 도연명이 종교로 싸우지 않고 그저 이야기에 취했다는 이야기처럼 서로의 종교를 비판하지 않고 그저 즐기면서 살자는 삼소회에 대한 이야기였다. 삼소회는 불교, 성공회, 천주교, 기독교, 원불교의 성직자들이 모여 서로 종교화합과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하나의 단체인데, 이 내용이 얼마나 내 마음에 와닿던지 모르겠다.

 최근에 일이 있어서 대구에 내려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근처 교회에 어찌하다보니 들르게 되었는데, 몇 몇 기독교 신자들의 글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최근에 일어난 이집트, 리비아 혁명이 이슬람교도의 붕괴라든지, 따라서 기독교의 세상이 이제 펼쳐지리라든지, 그토록 사랑을 강조하고 전파하던 종교가 왜 이렇게 다른 종교를 안을 줄 모르게 되는지 질문을 던지고 싶었을 정도의 글이었다. 그러면서 문득 생각이 들었다. 왜 우리나라의 종교는 전부 폐쇄적으로 변했을까. 분명히 다른 종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정을 안 하고 싸우게 된 걸까.

 우리나라는 반도라는 특성상 여러가지 극단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그토록 정통에 집착하는 것도 '민족의 피'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고, 그 때문에 극단적인 이분법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하나가 정통이면 나머지는 모두 이단, 가짜, 거짓이라는 사상이 말이다. 현재 북한과 남한이 그렇고, 음식점의 정통 싸움도 그렇고, 종교가 그렇다. 서로 이단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모두 정통 취급하지 않는 것. 그 것이 바로 우리나라 종교의 고질적인 병이다. 이 고질적인 병 때문에 최근에 이슬람채권법을 두고 대통령 하야를 하네 마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고, 다시 종교들끼리 으르렁거리게 된 것이다.

 이런 우리나라에서 삼소회는 정말로 재미난 단체일 수 밖에 없다. 서로 으르렁거리는 종교가 서로 손잡고 여행을 떠나고 자선행사를 한다니. 말 그대로 '하늘이 개벽한 이래로 가장 대단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런데 어찌보면 있어야 할 일이 아니었나 싶기도하다. 기독교의 기본 원칙은 '사랑'이고 불교의 기본 원칙은 '자비'인데 이 종교들이 서로 싸울 이유는 없다. 삼소회가 있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종교간의 화합이라는 의미이지만 다른 의미로서는 지금까지 종교간의 두터운 벽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하는 씁쓸함만이 든다.

 신앙에는 두 가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신념이고, 하나는 존중이다. 신념은 자기 종교에 대해서 굳게 믿는 것이고, 존중은 모든 이웃종교에 대해서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지금 우리나라 종교에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만이 든다.

韓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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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 -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사막에서 길을 잃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한다. 살인적인 열기의 낮과 극심한 추위의 밤. 인적 하나 없는 광대한 공간 속의 외로움. 그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메워지지 않는 목마름일 것이다. 그렇기에 문득 저 멀리에 호수가 보인다면 누구나 뛰어가기 마련이다. 희망을 가득 품고 허위허위 달려가 보지만 정작 있는 것은 모래밖에 없다.  신기루. 광학에서는 빛이 실제로 만나서 생기는 상을 실상이라고 하고, 빛이 실제로 만나지 않았음에도 생기는 상을 허상이라고 한다. 허상이 생기는 이유는 빛이 직선으로만 뻗어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미묘한 기온 차이에도 빛은 조금씩 꺾인다. 그 조금씩의 차이가 모여 나중에는 뒤집힌 허상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눈은 실상과 허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는 나무가 뒤집혀 있는 것을 보고 호수에 나무가 반사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허상을 실상처럼 받아들이는 것. 삶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광활한 삶의 한복판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다 우연히 발견한 이상을 향해 달려가곤 한다. 사막에서 길을 잃은 자가 호수를 향해 달려가듯이. 마침내 이상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을 때쯤 우리는 허상을 바라보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우리 삶에 내재되어 있는 부조리일지도 모른다.  김영하는 부조리의 작가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 삶에 숨어있는 허상을 들춰내어 폭로해왔다. 앞서 그는 「오빠가 돌아왔다」에서 왜곡된 가족 구성원의 모습을 보여주며 행복한 가정이라는 허상을 파헤친 바 있었고, 『빛의 제국』에서는 서로를 속이고 있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진실한 관계라는 허상을 파헤친 적도 있었다.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그가 천착하는 것은 바로 자아의 확실성이라는 허상이다. 그가 어떻게 자아의 확실성이라는 허상을 밝혀내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소설을 꼼꼼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  소설의 주인공 김병수는 은퇴한 연쇄살인범이다. 그는 “살인의 모든 과정과 느낌을 기록”하기 위해서 일지를 쓰겠다는 마음을 먹었지만 문장을 만든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시를 공부했고 어쩌다 등단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알츠하이머에 걸린 평범한 일흔 살의 노인일 뿐이다.  그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 이름은 은희. 그녀는 “농대를 나와 지역의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사실 그녀는 그의 친자식이 아니다. 그녀는 그가 마지막으로 죽인 여자의 딸이다. 여자는 자신의 딸만은 살려달라고 빌었고, 그는 그 약속을 지켜주기로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연쇄살인이 발생한다. “잇따라 여자 셋이 죽었”고 “세 여자 모두 이십대”인데다가 “밤늦게 귀가하다가 당했다”고 한다. 연쇄살인범으로부터 은희를 보호하기에는 그는 너무도 늙었고 심지어 최근 기억부터 없어질 위기에 처해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은희에게 밤길을 조심하라는 주의상황을 말하는 것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우연한 기회로 연쇄살인범의 단서를 찾는다.  나는 순간적으로 정차해 있는 놈의 차를 보지 못하고 그대로 추돌하고 말았다. 사냥용으로 개조한 지프였다.

  • 韓雪
  • 2014-12-23
과학에 관하여

과학이란 무엇인가 이제 갓 태어난 아기를 생각해보자. 열달동안 어둠 속에 살았던 아기의 눈에 분만실의 환한 조명이 들어왔을 수도 있고, 수술이 끝난 의사의 안도한 표정이 들어왔을 수도 있고, 비로소 어머니가 된 한 여자의 얼굴이 들어왔을 수도 있다. 아기의 눈에 어떤 것이 보였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아기가 ‘너’라는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다를 바 없었던 시간이 끝나자마자 홀로 세상과 대면하기 시작하면서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기가 어떤 물건이든지 우선 입에 넣어보려는 행동은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아기에게 있어서 감각이 가장 발달된 기관은 입이다. 아기는 물건을 입에 넣어보면서 물건에 대해 파악해나가는 것이다.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곧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바뀐다. ‘너’라는 존재를 그토록 궁금하게 여기는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타자에 대한 의문이 자아에 대한 의문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결국 모든 인간은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두 질문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셈이다. ‘너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모든 학문의 근저에는 이 두 가지 질문이 있다. 다만 조금씩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조금은 말장난 같겠지만, 미학은 미학적인 방식을 통해 아름다움의 원리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려는 학문이고, 경제학은 경제학적인 방식을 통해 경제 행위의 원리와 경제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려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과학은 무엇인가. 과학 역시 과학적인 방식을 통해 자연 현상의 원리와 그 원리를 따르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려는 학문이다. 과학적으로 ‘너’와 ‘나’를 분석해 보려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과학적인 방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도대체 과학적이란 것이 무엇이기에 우리는 과학을 절대적인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것인가. ‘과학적’이라는 단어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몇몇 과학철학자의 생각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과학은 생각의 관성이다 ‘해는 동쪽에서 떠오른다’라는 지식을 우리는 어떻게 얻게 되었을까. 우선 우리는 매일 해가 동쪽에서 계속 떠오르는 것을 확인했었다. 지금까지 해가 동쪽에서 계속 떠올랐다는 것을 확인한 우리는 내일도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100년도 채 안 되는 삶을 바탕으로 내일도 그럴 것이라고 섣불리 판단해도 될까? 물론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오는 역사책을 근거로 들면서 해가 동쪽에서 떠오른 것이 적어도 몇천년이 되었기에 확신할 만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신할 만한 것과 확실한 것은 분명히 다르다. 지금까지 태양이 매일 동쪽에서 떠올랐다는 사실과 내일도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라는 사실에는 어떠한 연관 관계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랜 기간의 경험을 절대적인 지식으로 처리해버린다. 태양이 내일 서쪽에서 떠오를 수 있는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지금까지의 경험을 미루어 보았을 때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라고 단정 짓는 것이다. 모두

  • 韓雪
  • 2014-07-13
나와 너 사이에서 - 김연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당신, 사랑을 믿나요?    언젠가 당돌하게 소설의 첫 문장을 써본 적이 있다. 당신, 사랑을 믿나요. 거기서 끝이었다. 글은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원래 문장은 문장을 부르는 법이다. 문장이 제대로 들어서기만 하면 자연스레 그 다음의 문장이 들어선다. 나는 분명히 정확한 문장을 썼다.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문장이었고, 읽는 이의 관심을 끌만한 문장이었으며, 문법적 오류도 없었다. 그럼에도 글은 써지지 않았다.  어디선가 읽어본 듯도 했다. 제대로 문장을 썼는데도 다음 문장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그건 자신이 쓴 문장을 스스로 믿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 누구도,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설득시킬 수 없는 이야기를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당신, 사랑을 믿나요? 나는 이 문장을 믿지 못한 게 분명했다. 나는 사랑에 설득되지 않았다. 나는 사랑을 믿지 못했다.  한 줄만 써놓고 버렸던 원고지를 내가 다시 꺼내는 데에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내가 사랑에 설득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순간부턴가 나는 사랑을 믿었다. 당신, 사랑을 믿나요? 이 문장을 믿을 수 있었다. 소설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문장은 문장을 따라왔다. 물론 첫 문장은 다른 문장으로 바꿨다. 퇴고를 하면서 첫 문장이 너무 감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소설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소설을 써냈다는 것이다. 그 문장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문장으로 말이다. 사랑을 믿지 않았던 나는 사랑을 믿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건 순전히 김연수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 아닐까 싶다. 나는 김연수 때문에 사랑에 설득되었고 사랑을 믿었던 것이다.  세상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너’로. 자아와 타자. 세상은 그 둘로 구성되어 있다. 나와 너는 이분법적이다. 나와 너 사이에는 거대한 심연이 있다. 나와 너는 선천적으로 다르다. 나는 결코 너가 될 수 없다.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렇다. 나는 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너의 조그마한 움직임이나 바뀐 말투 정도로 너의 생각을 간신히 추측할 뿐이다. 나에게 있어 너는 철저한 미지未知다. 그리고 그건 너도 그렇다. 너는 결코 나라는 존재가 될 수 없다. 나와 너는 영원히 갈라서 있다.  사르트르는 말했다. 타자, 그것은 곧 지옥이라고. 너라는 존재는 나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는 내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너는 나를 끊임없이 간섭한다. 결국 너는 나를 꺾어버린다. 내 의지는 너 앞에서 비참하게 허물어질 뿐이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너란 존재는 나를 방해하는 존재일 뿐이며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일 뿐이다.  타자를 극복하려 했던 건 사르트르뿐만이 아니다. 철학사에 이름을 남긴 대부분의 철학자들 역시 타자를 극복해야 할 그 무엇이라고 규정했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이었다. 나라는 존재만이 유일하고 확실하며 절대적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유아唯我론으로 귀결된다

  • 韓雪
  • 201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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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잘 읽었어요. 그런데 중간 부분의 내용은 너무 단정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우리나라 종교는 폐쇄적으로 변했다'고 한 부분이나 반도라는 특성 때문에 극단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는 부분이 특히 그렇군요.

    • 2011-03-09 10:53:28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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