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라는 강물 속 개인의 자갈들 - ‘고리오 영감’을 읽고
- 작성자 똥필이
- 작성일 2011-03-31
- 좋아요 0
- 댓글수 1
- 조회수 355
‘사실적’으로 그려낸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일까? 우리는 종종 문학작품을 비롯한 사진이나 음악과 같은 예술 작품이 사실적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하지만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했다는 사실 만으로 어떤 작품이 ‘리얼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많은 비평가들은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과 같은 소설을 리얼리즘이 훌륭히 구현된 문학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그 중 많은 이들은 주로 ‘당대의 부르주아 사회와 그것이 빚어낸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통찰력 있게 파고들었다’는 이유로 이 소설을 예찬한다. 지금까지 많은 문학 작품을 읽어오면서, 나는 상당수의 책들이 ‘현실을 얼마나 정확히 닮게 그렸는가’의 기준에 따라 평가되어 왔다는 것을 느꼈다. 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은 문학작품은 우리에게 독자 대부분이 수긍할 수 있는 특정 사회의 모습을 정직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나름의 고유한 사실성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를 고려할 때, 소설을 전자와 같이 이해하는 것은 리얼리즘의 개별성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을 읽으면서, 나는 현실이라는 하나의 큰 물줄기를 그려냄과 동시에 ‘독자 개개인에게 사실적인’ 현실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작가를 만날 수 있었다.
‘고리오 영감’은 리얼리즘의 개별성 이전에 독자의 대부분이 거부감 없이 공감할 수 있듯이, 당시 사회현실을 정확하고 날카롭게 그려냈다. 소설 속에 묘사된 19세기 프랑스 사회는 모순과 속물들이 가득 찬 세상, 그리고 ‘부’와 ‘명예’를 수단으로 한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조정래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우리 민족 역사의 치열한 모습과는 다르지만, 발자크는 ‘고리오 영감’에서 그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낱낱이 밝히고 비판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특히 작품 속에서 영감의 두 딸들과는 다르게 아직 돈과 사회적 지위로부터 순수함을 잃지 않은 ‘라스티냐크’라는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작가는 당시 사회의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발자크의 비판적인 리얼리즘은 더 나아가 소설 속 사회를 19세기 프랑스만으로 한정시키지 않고, 독자들이 현재까지도 공감할 수 있도록 어느 시대의 인간 사회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고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작가가 리얼리즘의 개별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이 묘사한 현실 속의 인간상을 규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개인과 사회는 서로 수많은 영향을 주고 받지만,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이러한 개별적 사실성은 작가가 주인공 ‘라스티냐크’를 그리는 방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돈과 명예, 그리고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소설 속의 현실에서, 작가는 그를 속세에 찌든 타락한 인간으로도, 사회의 부조리에 무조건 저항하려는 인간으로도, 현실의 모순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며 체념하는 인간으로도 그리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는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라는 주인공의 대사를 통해 각각의 ‘독자 자신에게 사실적인’ 현실을 묻고 있다. 당시의 전반적인 사회 풍조는 정확하고도 비판적으로 그려내면서, 동시에 그 현실 속의 개인은 어떠한가에 대한 생각을 독자에게 맡기는 것이다. 개인이 없는 사회와 현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작가가 통찰력을 가지고 표현해낸 사회의 모습과 독자 자신의 사실적인 개인의 모습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진정한 리얼리즘이 구현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 속의 자갈들은 대체로 강의 큰 물줄기를 타고 움직이지만, 그 각각의 흐르는 양상은 모두 다 다르다. 발자크가 ‘고리오 영감’에서 구현한 리얼리즘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사회의 현실이라는 큰 물줄기와 그 속에서 개개인의 자갈들이 각자의 사실성을 가지고 살아가듯이 말이다.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잘 읽었어요. 리얼리즘, 혹은 사실성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하는군요. 그러나 '리얼리즘의 개별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