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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얼간이>, 우리가 꿈꾸는 새로운 세상

  • 작성자 늦은밤
  • 작성일 2011-04-03
  • 조회수 522

<세 얼간이>, 우리가 꿈꾸는 새로운 세상

 

1. 교육 현실에 경종을 울리다

뻐꾸기의 삶은 살인으로 시작된다. 뻐꾸기 어미는 알을 다른 새의 둥지에 몰래 넣어 놓고, 새끼는 다른 알보다 일찍 깨어나서 알들을 둥지 밖으로 밀어낸다. 학생들에게 바이러스라고 불리는 비루 교수는 신입생들을 처음 맞이하는 자리에서 자연의 잔인함을 소개한다. 경쟁에서 이기지 않으면 죽는다, 그러니 이겨라. 남을 떨어뜨리지 못하면 내가 떨어진다. 영화 세 얼간이들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은 인생은 레이스라는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달리지 않으면 밟혀 죽는 것이다.

이 영화는 인도에서 아바타를 제칠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식으로 개봉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입소문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세 얼간이는 여태까지 한국 시장에서 입지가 넓지 못했던 발리우드 영화에 대한 관심을 크게 높이는 데에 일조했다. 그것은 이 작품이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는 증거일 것이다. 실제로 세 얼간이의 주제는 놀라울 만큼 한국의 현실과 일치한다.

작품의 배경은 인도에서 가장 좋은 대학교라고 설정된 임페리얼 공학대학교이다. 주인공인 란초, 라주, 파르한이 신입생으로 입학하는 순간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파르한은 자신의 재능이 공학이 아닌 사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부모님의 기대를 져 버릴 수 없어 공학을 공부한 인물이다. 라주는 가난한 집의 유일한 희망으로, 자신이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 잡혀 늘 불안해한다. 그리고 그들은 란초를 만난다. 란초는 공부는 부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성취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학교 시스템에 반기를 든다. 공학이 아니라 점수 잘 받는 법을 가르치는 학교, 그리고 성적 중심의 사회를 대표하는 일명 바이러스교수에게 그는 눈엣가시다. 라주와 파르한은 란초의 방식에 매혹되지만, 때로는 의문을 품기도 한다. 과연 그의 이상이 현실에서도 통할 수 있을까. 그의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이 영화의 답은, 매우 긍정적이다. 파르한은 자신의 재능을 뒤따라가 유명한 사진작가로 성공한다. 라주 역시 여러 사고를 겪지만, 결국 훌륭한 공학자가 된다. 그리고 란초는 자신이 꿈꾸던 교육을 실천하며 동시에 유명한 공학자로 이름을 떨친다.

그러나 이 결말은 곧바로 수긍되기 어렵다.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이지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우는 즐거움의 의미를 알았던 조이 로보는 견디다 못해 결국 자살했다. 우리네 삶에서는 란초보다는 로보 같은 인물이 더 많고, 재능보다는 부를 따라간 사람들이 성공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수많은 학생들은 조이 로보처럼, ‘단 한 순간이라도 삶이란 걸 살게 해 줘요라고 노래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충분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바이러스 교수의 인간적인 변화가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이와 라주, 그리고 심지어 자신의 아들에게까지 매정하기 짝이 없었던 그가 란초에게 자신의 펜을 건넨 것이다. 네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야, 라고 말하면서도 바이러스 교수는 란초를 인정하며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한다. 사회가 바뀌는 것은 개개인의 변화가 이루어진 후에야 가능하다. 이 작품을 통해 현재 교육 시스템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많아졌다면, 영화의 가치는 이미 증명된 것이다.

우리 나라의 교육 현실은 참으로 비참하다. 학생들은 좋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가기 위해 끊임 없이 경쟁해야 하고, 대학교를 간 후에도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 스트레스로 자살하는 사람들도 많다. 상담실을 찾는 학생의 수 역시 점점 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서로를 짓밟으며 달리기 보다는 함께 사랑하며, 천천히 걸어갈 수는 없는 걸까. 모두가 변화를 원하고 있음에도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질문은 길지만 답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세 얼간이는 이러한 비관주의에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사회를 탓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자신이 먼저 친구를 경쟁자가 아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상대로 보아야만, 공부를 성공의 지름길이 아닌 하나의 즐거움으로 생각해야만 사회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짧은 기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정으로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현실이 될 수 있는 이상이다.

뻐꾸기가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뻐꾸기는 휘파람새, 붉은 머리 오목눈새 등 번식력이 매우 강한 종들의 둥지에만 알을 낳는다. 번식력이 뛰어난 새들의 숫자를 줄이지 않으면, 그 새들이 벌레를 모두 먹어 다른 종들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뻐꾸기는 결코 비열하거나 잔인하지 않다. 생태계의 균형을 맞추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사회에서와는 달리 자연에서는 불필요한 폭력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오히려 뻐꾸기를 본받아야 한다. 모든 것이 조화로운 세상, 우리가 꿈꾸던 그 곳의 해답이 바로 자연에 있지 않은가.

 

 

2. 노래, , 그리고 사랑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다. 내 가슴이 내 마음대로 뛰지 않는 기분, 그것을 세밀하게 그려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 예술이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며 사람들은 어렴풋하게나마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다. 인도 영화들은 이러한 예술의 특징을 매우 효과적으로 이용한다. 춤을 통해 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표현하고, 동시에 노래를 통해 청중의 감정을 증폭시키며 한 편의 뮤지컬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세 얼간이에서도 역시 뮤지컬적 요소들은 제 기능을 발휘한다. 다음은 피아와 란초가 사랑에 빠진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가사이다. ‘바람이 휘파람을 불고 하늘은 콧노래를 부르고 내 주위의 모든 게 노래를 하네요. 영화에서 보았던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네요.’ 귀기울이지 않아도 노래가 들려오는 순간, 사랑은 시작된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사실이 있을까.

피아와 란초의 첫만남은 피아 언니의 결혼식에서 이루어진다. 란초는 피아의 애인인 수하스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아버지(비루 교수)의 권력과 의사라는 직위를 탐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피아는 수하스가 사 준 비싼 시계를 잃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가 불같이 화를 내는 모습에 란초의 말이 진실임을 깨닫는다.

이 장면에서 란초와 수하스는 극명히 대비된다. 수하스는 모든 면에서, 심지에서는 사랑에서까지도 계산적인 인물이다. 그는 우리네 삶의 가장 씁쓸한 모습을 단면적으로 보여준다. 취업이 점점 어려워지는 가운데 돈은 점점 중요해지는 세상, 그런 곳에서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반면 란초의 인간상은 지금의 비극에 대한 해결책이다. 이제는 영화 속에서나 존재할 것 같은 진실된 사랑, 돈이나 조건이 일순위가 아니라 나의 마음이 일순위가 되는 관계,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궁극적인 가치인 것이다.

피아와 란초의 사랑은 이 영화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약간은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는 이야기에 훌륭한 활력제가 되어주기도 하고, 여러 장면에서 등장하는 노래와 춤은 영화의 예술적인 가치를 높이는 역할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뮤지컬적 요소들은 단순히 재미를 위해 포함된 것은 아니다. 주된 목적은 척박한 현실과 대비되는 인간미를 보여주는 데에 있다. 주는 데에 아쉬움이나 조건이 없고, 받을 때에도 갚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없어 순수하게 기쁜, 그런 이상적인 관계를 제시하는 데에 있다.

모두 잘 될거야(All is well)’ 라는 란초의 신념은 자칫 위험하게 들릴 수 있다. 미래에 대한 고려가 없는 내 감정에 충실한 사랑, 그것은 너무 자신감 넘치는 모험이 될 수도 있다. 어떤 문제가 우리에게 닥칠지 모른다. 재능을 따라가다 보면 성공이 뒤따라온다는 말도 상투적인 설교일 뿐, 내게 벌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란초는 말한다. “모두 잘 될 거라고 믿는다고 반드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야.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지. 어쩌면 일이 꼬일지도 몰라. 하지만 중요한 건, 잘 될 거라고 믿으면 실제로 문제를 잘 풀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야.” 문제를 잘 풀 수 있는 용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약간의 무모함이다.

란초, 파르한, 그리고 라주가 ‘All is well'이라고 춤추며 노래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이다. 그 노래를 따라부르다 보면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란초의 생각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아름다운 바다를 배경으로 다시 만나는 피아와 란초의 모습은 정말 모든 것이 잘 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힘든 순간도 있을 것이고, 일이 어긋나는 순간도 있겠지만, 분명 진실된 사랑은 이루어진다. 나의 직업에 대한 사랑, 친구에 대한 사랑, 진정한 반쪽에 대한 사랑, 어느 것이든 상관은 없다. 내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 찾던 보물이 있다.

노래, , 사랑. 그것만이 우리의 현실에 대한 해답이며, 모두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원동력이다.

늦은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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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읽었어요. 재미있고,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라고 생각해요.

    • 2011-04-11 00:20:33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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