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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낭만적인 혁명 - 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읽고

  • 작성자 윤스리
  • 작성일 2011-10-12
  • 조회수 508

(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作)

 

아마존의 눈물, 환경 다큐멘터리란 장르로 혁혁한 성공을 거둔 프로그램이다. 전작 북극의 눈물과 더불어 많은 화제를 낳았다.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 사는 아마존의 후예들을 보며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현대 문명과 격리된 원초적 자연(일부 부족은 심지어 나신이었다.)에서 그들은 우리와 다르게 살고 있었다. 우리가 슈퍼마켓에서 사먹는 음식을 그들은 아마존에서 스스로 구해먹었고, 우리가 백화점에서 사는 보석을 그들은 동물의 뼈나 가죽으로 스스로 만들어 치장했다. 우리는 일부일처에도 서로 간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갈라서는 반면 그들은 일부다처에도 문제없이 잘 사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평화로운 풍요로운 아마존을 위협하는 건 다름 아닌 문명이었다. 인류의 혁신적인 진보를 이끌었다고 자부하는 문명이 아마존을 침범하면서 그들의 삶을 조금씩 망가뜨리는 모습이 전파를 타고 우리들의 안방에 방송되었다. 개발이란 시체(時體)에 희생된 싸늘한 녹색주검이.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소설 읽는 노인은 아마존을 무대로 한 환경소설이다. 우리에게 환경소설이란 장르가 익숙하지 않겠지만 이상하게도 이질감이 들지 않는 건 환경이란 단어 때문일 것이다. 현대를 맞은 지구의 모습이 급속도로 변해왔고, 이를 막기 위해 환경을 지키자는 구호로 인해 귀에 딱지가 앉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고 있다. 현대인은 아직도 환경을 미개발지로 간주하고 있다. 자연을 사랑하지만 자연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자본주의다움이다.

연애소설 읽은 노인도 돈을 캐내기 위해 아마존에 침범한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야기는 암살쾡이에 의해 찢긴 시체를 발견하면서 노인이 사건조사에 착수하면서 시작된다. 도시에서는 이 사건을 살인범 수사로 부르겠지만 아마존에서는 모험이다. 이 모험의 목적은 재판을 열어 죄의 경중을 따지고 처벌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라 피에 눈 먼 맹수의 복수를 멈추기 위함이다. ‘복수라는 키워드는 작품 내 대립 구도를 이해하는데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아마존이란 순수한 자연의 땅에 불시착한 이방인. 지구상에 얼마 남지 않은 금을 처리하러 온 노다지꾼, 몸값 쳐주는 동물들을 손수 모시러 온 밀렵꾼, 신제국주의를 도모하는 백인…… 이해관계로 점철된 각축장을 통제하는 건 역시 금속성 야수이다. 결국 폭력의 이데올로기는 자연의 섭리를 해치고 필연적으로 비극적 결말을 낸다. 자연의 복수는 인간의 범죄에 대한 정당방위로 나타난다.

반면에 노인은 아마존 원주민인 수아르 족에 편입된 경력을 갖고 있을 정도로 아마존친화적인 인물이다. 수아르 족과의 생활은 그에게 아마존의 생리를 깨쳐주었다. 우기, 그것은 아마존의 땀이기도 했고 눈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기는 노인의 그것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사랑과 행복한 결말, 연애소설이 보여주는 허상 속에서 연명하던 노인에게 우기는 죽음에 대한 반동, 발기의 지속이었다. 연애소설 속의 문장을 통째로 외우며 무심히 흘려보냈던 세월은 우기를 맞으며 박진감 넘치는 모험으로 바뀌었다. 녹색지옥이라 불리는 아마존은 한 치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 순수한 야성이었기 때문이다.

비가 내리는 동안 싸움이 있었고 끝났다. 노인의 죽임과 암살쾡이의 죽음으로 사냥도, 복수도 끝났다. 하지만 싸움이 끝났다고 해서 전쟁이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우기는 계절을 훑고 지나 다시 찾아올 것이고 전쟁이 종결되지 않는 이상 또 다른 싸움은 언제든지 시작될 수 있다. 그 전쟁은 연애소설과 다르게 모두의 바람과 정반대의 결과로 끝날 지도 모른다. 새로운 시작이란 없는 죽음의 죽음으로..

환경문제는 어쩌면 자본주의의 태동에서부터 예견될 일인지도 모르겠다. 자본이 증식을 위해 먹어 치우는 먹이 중엔 환경도 포함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본주의가 환경을 파괴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것일까? 자본주의의 프락시스는 지구의 세포인 인간의 멈출 수 없는 아포톱시스란 말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진화하기 때문이다. 앙리 베르그송이 주창한 창조적 진화는 환경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할 수 있는 해결책이라 생각한다. 엘랑 비탈, 생명의 약진은 자본주의가 낳은 개발의 잔존물을 처리하고, ‘친환경적 개발’,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해 힘쓰고 있다. 현실적으로 개발을 포기할 순 없고, 그렇다고 환경을 포기하는 건 곧 삶을 포기한다는 말과 진배없다. 그래서 인류는 지속가능한 개발, 환경을 해치지 않는 친환경적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가 꿈꾸는 이상을 충족시키기 위해선 기술의 진보와 더불어 인간의 탐욕을 자재해 근본적인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그동안 인류가 자연이 베푼 은혜에 힘입어 혁신적인 진보를 이룩했다면 앞으론 자연에게 베푸는 또 하나의 커다란 진보를 이룩해야 할 것이다.

이미 우리는 지구가 자정 능력을 상실할 정도로 많은 상처를 남겼다.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을 범하면서, 아마존의 처녀성을 범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려하고 있다. 지금은 인류에게 우기이다. 이 우기를 버티지 못하면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말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우기는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을.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살인, 무차별적 폭력이 낳는 카니발리즘을 극복하고, 아름다운 자연 아래 인류가 함께 춤출 카니발을 열자. 축제를 위해 우기쯤 견뎌내자.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윤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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