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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에 사는 시

  • 작성자 탈퇴 회원
  • 작성일 2011-11-07
  • 조회수 106

내 방에 사는 시

 

이영주 시인의 <108번째 사내>를 읽고

 

 

이제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아이들이 먹는 것은 날개의 파편이었다 차가운 총구를 핥는 입술 사이로 새까만 총알이 줄줄 쏟아졌다 불룩한 배를 쓰다듬으며 펭귄처럼 뒤뚱거리는 아이들 이 새는 왜 이렇게 딱딱한 거야 뒤통수까지 길게 찢어진 입으로 아이들이 중얼거렸다 현명한 사제도 예언하지 않았던 새로운 종족들이 바다를 건너왔다 시퍼런 죽창도 승리의 깃털도 없이 자욱한 연기가 골목마다 피어올랐다

 

  이제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날아가버린 머리통을 매일매일 찾으러 다녔다 사제의 예언은 하나도 맞지 않아 내 머리통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잖아 기름을 뒤집어쓴 긴 목 아이가 투덜거렸다 날개 잘린 새가 쿨럭거리며 뜨거운 불꽃을 쏟아냈다 아이의 피 같은 선홍빛 기름이 파편 위로 곱게 물들었다 어디선가 갑자기 몰려온 새로운 종족들이 허겁지겁 기름을 핥았다 이 종족은 죽은 새를 먹는 모양이야 모래바닥에 떨어져 물렁물렁해진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또다른 아이가 웃었다

 

  현명한 사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지러운 폭염이 계속되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잘못 찾은 머리통을 목에 끼워넣고 있었다 키득키득거리면서 서로의 머리통을 주물럭거렸다 주인을 찾지 못한 머리통은 버려진 책가방 속에서 달그락거렸다 막 태어난 아이들은 싱싱하게 파닥거리는 새로운 날개를 꾸역꾸역 씹어먹었다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 진행 중이다. 갖가지 이유로 무차별하게 자행되는 폭격과, 학살들. 전쟁이 진행될수록 사람들은 끊임없이 죽어가고 있고, 고아가 되어 버려진 아이들의 숫자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전쟁의 소용돌이가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거리에는 총알 파편과 온 몸이 망가진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다. 전쟁은 언제나 참혹한 풍경을 낳을 뿐이다. 그런 풍경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있다. 다른 나라의 비슷한 또래들과는 달리 너무나도 힘겨운 상황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

 

  시인은 그렇게 전쟁으로 고통 받는 아이들을 시 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전쟁의 상처가 깊게 남아있는 현실 속에서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한다. 학교에 갈 수 있는 돈도 없을뿐더러, 폭격으로 인해 학교가 무너져버린 경우도 허다하다. 배움의 날개를 달고 꿈을 향해 날아가야 하는 아이들이 오히려 ‘날개의 파편’을 먹고 있다. 병에 걸리거나, 혹은 성폭행을 당해 임신을 한 아이들은 ‘불룩한 배를 쓰다듬으면서 펭귄처럼 뒤뚱거리며’ 방황하고 있다. 그런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방황하며 ‘날아간 머리통’을 찾는다.

 

  ‘날아간 머리통’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을 찾는 한 아이의 모습을 보니 ‘날아간 머리통’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알 것 같다. ‘날아간 머리통’을 찾고 있는 ‘기름을 뒤집어쓴 긴 목 아이’는 예언자가 자신의 머리통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며 투덜거린다.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아이가 예언자에게 까지 물어 찾고자 했던 머리통은 희망 같은 것이 아닐까한다. 참혹한 현실 속에서 예언자는 당연히 그런 밝은 존재를 찾아 낼 수 없다. 결국 아이들은 ‘날아간 머리통’을 대신해 ‘잘못 찾은 머리통’을 가지고 키득키득 거린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과 ‘뜨거운 불꽃’같은 피를 토해내는 ‘날개 잘린 새’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희망을 잃어버린 아이들은 끊임없이 아픈 기억들을 토해내면서도 ‘서로의 머리통’을 주물럭거렸다. 마치 심심한 위로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는 ‘막 태어난 아이들은 싱싱하게 파닥거리는 새로운 날개를 꾸역꾸역 씹어 먹었다’라는 구절로 끝을 맺는다.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현실에서 희망은 찾아볼 수 없고,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조차 ‘새로운 날개를 꾸역꾸역 씹어’먹는 것이다. 언제쯤이면 아이들이 날개 대신, 따뜻한 밥으로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인지 자꾸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더불어 이런 아이들을 위해 시인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이렇게 시를 쓰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나 역시 그들을 위해 시를 한 편 더 써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아버지의 작업

늙은 자라의 등껍질에서
양식장의 흙을 뒤집던
아버지의 삽날이 쑥, 솟아올랐다.
솟구치는 자라의 붉은 피를
뒤집어쓰고

 

방 안으로 들어와 등을 구부리고 앉은 아버지는
연못처럼 깊어져갔다.
앉은 자리에서
오랫동안 썩어 있던
검은 못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점점 척추가 휘어가는 아버지
충혈된 아버지의 눈알이
연못 속에 핏줄을 풀어놓고 있었다.

 

못을 메워라, 얼른!
마당에 쌓은 흙을 져 나르는 어머니의
야윈 등이 딱딱해져갔다.
나는
장판을 뜯어내고 밑으로 가라앉는
죽은 자라를 보고 있었다.
핏발 선 거대한 눈동자 같은
연못 속으로 빨려드는,
등껍질 속에 몸을 숨긴,
아버지가 거품을 게워내고 있었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나는 항상 아버지라고 대답한다. 그것은 아버지를 무서워하던 유년 시절부터 고등학생인 지금 시점까지 변함없는 대답이다. 내가 이렇게 아버지를 존경하게 된 것은 아마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고생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이 하나의 나무라면 아버지는 언제나 땅 속에 박혀있는 뿌리였다. 든든하게 우리 가족을 지탱했고, 우리가 무겁게 아버지를 짓눌러도 불평 한 번 없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나는 자연스레 존경심이 생기게 된 것이다.

 

  시 속의 ‘아버지’도 가족을 위해 고생하는 아버지인 것 같다. 힘든 몸으로 일을 하면서 결국 ‘거품을 게워내’는 아버지. 아버지는 ‘점점 척추가 휘어가고’, ‘충혈된 눈알’은 연못에 핏줄을 풀어놓기까지 한다. 이는 아버지의 고된 노동의 흔적이자, 힘든 현실의 상징이다. 어머니들의 전유물로만 인식되었던 고된 노동의 후유증은 이 시대의 아버지들에게도 나타나는 것이었다. 또한 이 시에서 아버지는 끊임없이 추락한다. 가부장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방 안에서 ‘등을 구부리고 앉은’ 아버지는 ‘연못처럼 깊어져만’ 간다. 한없이 추락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낯설기까지 하다. ‘검은 못물’이 고이기까지 하는데 아버지는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다. 화자인 ‘나’는 그저 아버지를 관찰하는 데에만 머무르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끝내지 못한 일을 메우는 것에만 바쁘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아버지가 끊임없이 추락하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 ‘연못 속으로 빨려드는’ 자라의 등껍질 속에 몸을 숨긴 아버지는 ‘거품을 게워내’며 끝없는 추락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자라양식장의 흙을 뒤집으며’ 노동을 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자라의 등껍질’ 속에서 발견되는 것은 아버지는 영원히 노동의 현장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만 같았다. 방 안에서 끊임없이 깊어져만 갔던 아버지가 다시 자라의 몸속에서 발견되기까지의 행보가 궁금하다. 아마 아버지는 무거운 걸음걸이를 이끌고 다시 노동의 현장으로 걸어갔을 것이다. 하나의 습관처럼.

 

 

내 방에 사는 말

바람은 푸른 얼굴로 창문을 쑥 밀고 들어와 누웠지
창 밖 붉은 하늘을 더듬다 휘어진,
저녁이면 날고 싶은 늙은 나뭇가지 휩쓸려와
책상에 떨어졌지 보고싶었니,
네가 곁눈질로 훔쳐본 텅 빈 이 방?
주인 없는 말들이 어슬렁거리다
벽에 이빨을 박는 딱딱한 방.
퇴화된 뒷다리, 마르고 뻣뻣한 갈기가
밀랍인형처럼 굳어 가는 방,
이따금 잡상인이 누른 초인종에
후다닥 말들이 공중으로 흩어지지만
창문을 열고 나가지 못하지
창 안 쪽으로 몰려드는 파르라한 빛이
어둠을 향해 꼬리를 흔들 때
거대한 짐승이 벗어놓은 껍질 같은
어두운 허공으로 뛰어가지 못하지
그건 찾는 이 없는
이 방에 사는 말들의 운명
빛의 점을 따라 뛰쳐나가다
부서진 창에 다리가 잘리고 말지
창 밖, 작은 마당에 수북히 쌓인 말들의 시체
보고 싶었니, 말이 말을 낳고 또 말을 낳아
내 입 속에서 터질 듯 웅얼거리는
말의 망령들이 떠도는 이 지하방을?

 

 

  문득 내 방을 살펴본다. 얼마 전에 친구에게 선물 받은 화분이 책상 위에 있고, 좋아하는 가수들의 앨범이 텅 빈 책꽂이에 꽂혀있다. 방문에는 시화 작품과 내일 입고나가야 할 교복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발아래에는 핸드폰 케이블이 뱀처럼 흐느적대고, 먹다 남은 아이스크림 통이 땀을 흘리며 서 있다. 고개를 들어보니 둥근 달처럼 형광등이 밝게 빛나고 있다. 이 풍경은 내 방에서만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다. 누구도 복제 할 수 없는 나만의 풍경이다. 모든 물건에서는 나의 사연이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연들도 내 방을 이루는 하나의 풍경이라고 생각한다.

 

  시 속 화자의 방은 나의 방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그의 방은 ‘말의 망령들이 떠도는 지하방’이다. 그의 방에서 ‘주인 없는 말’들은 어슬렁거리다가 벽에 이빨을 박고, ‘퇴화된 뒷다리’, ‘마르고 뻣뻣한 갈기’가 밀랍인형처럼 굳어 간다. 신비로운 분위기가 가득한 이 방은 시를 쓰고 있는 사람의 방인 것 같다. 습작을 하며 내내 풀어놓은 말들은 방을 떠돈다.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흩날리기도 하는 말들은 너무나 자유롭다. 자유로운 말들은 원고지 속에 들어가 또 다른 ‘말을 낳고, 또 말을 낳아’ 한 편의 시를 완성 시킨다. 이따금 ‘잡상인이 누른 초인종’에 말들은 공중으로 흩어지기도 하지만, 없어지지는 않는다. 한 순간의 집중이 깨졌다고 해서 시를 이루던 말들이 창문을 열고 멀리 달아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잡상인이 초인종을 누르는 그 순간 집중은 잠깐 깨질 수 있다. 시인은 그런 상황을 ‘후다닥 말들이 공중으로 흩어진’다며 익살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창 밖, 작은 마당에 수북이 쌓인 말들의 시체’라는 구절을 바라보다가 문득 내 방 책상 아래 쌓인 종이들을 바라본다. 나도 시를 쓰고 있는 사람이다. 나의 방에도 내가 풀어놓은 말들이 뛰어다니고, 나는 그 말을 붙잡아 한 편의 시를 쓴다. 하지만 그 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는 종이를 구겨 책상 아래에 던져 놓는다. 종이 속에 다닥다닥 박힌 말들이 시체가 되어 쌓인 것이다. 화자도 나와 비슷한 행동을 하나보다. 작은 마당에 수북히 쌓인 말들의 시체는 내 방 책상 아래에 쌓인 말들의 시체와 비슷한 성격을 하고 있을 것이다. ‘입 속에 터질 듯 웅얼거리는 말의 망령들’이 떠도는 방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이영주 시인의 시는 전반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이다. 그녀의 시에서 발랄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다. 나는 그런 분위기에 매혹됐다. 어두우면서도 몽환적인 그녀의 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한 환상적인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녀의 어조는 차분하다. <108번째 사내>에 수록된 시들을 읽다보면 나는 적막한 폐가 속에 서 있는 느낌을 받는다. 폐가는 무섭고 서늘한 분위기를 나에게 전달하지만, 귀신의 집처럼 어떤 인위적인 장치들로 나를 놀라게 하려 하지 않는다. 하나의 풍경마저 사건이 되어버린다는 한 시인의 말처럼 이영주 시인의 시는 하나의 풍경이 사건이었고, 시였다. 그저 관찰하고 보여주는 것만으로 나는 그 속에서 시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특히 내가 인상 깊었던 부분은 현실을 바탕으로 한 환상적인 이야기가 많았다는 점이다. <밀입국자>나 <네크로폴리스 축구단>,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라는 시들은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냥 풀어갔다면 따분했을 소재들이지만, 그녀에게선 하나의 인상적인 풍경으로 변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습작생들이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따분할 법한 주제라도 재미있는 상상력을 덧붙이면 시가 살아날 수 있다는 것. 소재를 가지고 고민하는 습작생들에게 좋은 대안이 아닐까 했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풍경에는 모두 시가 살고 있다. 떨어져 있는 먼지에서도 시를 찾을 수 있다. 이영주 시인의 시 <내 방에 사는 말>처럼 우리도 풍성하게 떠돌고 있는 말들을 잡아 좋은 시를 써내려갔으면 좋겠다. 내 방에는 시가 살고 있고, 내 주변에도 시가 살고 있다. 주변을 방황하고 있는 풍경을 잡아서 한 편의 시를 써보자. 무한한 상상력이라는 옷을 입혀서 말이다. 시집 <108번째 사내>는 내 방에 사는 시들을 다시 한 번 인식하게 해주는 뜻 깊은 시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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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통'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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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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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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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 회원
  • 2019-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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