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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에 만난 문학의 정원에서 ‘사랑과 평등’의 철학을 보다

  • 작성자 유현우
  • 작성일 2011-12-22
  • 조회수 161

 2007년 5월, 나는 세권의 책을 친구로부터 선물 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페라 명작 이야기란 책과, 셰익스피어의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의 어린이를 위한 동화라는 책이었다. 셰익스피어나 오페라 같은 것은 초등학생의 입장에서 보자면 유명한 것들이었기에 받았을 때 기쁘고 선물의 이유도 알 것만 같았다. 하지만 눈이 내리는 도시 위로 금을 문 제비가 날아가는 표지의 오스카 와일드 책을 받았을 땐, 작가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것인지라 의아하기도 하다가도 호기심이 생겼다. 나는 그렇게 오스카 와일드라는 작가와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의 첫 번째 이야기는 ‘이기적인 거인’이었다. 이기적인 성격의 거인이 있었는데, 그가 북쪽 지방에 사는 친구의 집에 머무는 동안 아이들이 와서 그의 아름답고 큰 정원에서 놀고 있었다. 그러나 거인은 자신의 집에 돌아오고부터는 아이들을 쫓아내고 자신의 정원을 독차지 해버렸다. 그러다 보니 아무도 그 정원에서 놀 수 없었고 아이들이 떠난 정원에는 차가운 겨울과 북풍, 눈들만이 지내어 황폐해져 버린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아이가 거인의 정원에 와서 나무에 오르려 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때 거인이 아이를 나무위에 올려 놀게 해 주면서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을 반성하고 아이들에게 정원을 개방하자 그의 정원은 아름답게 변한다. 하지만 그가 올려줬던 아이는 다시는 볼 수가 없었고, 거인은 그를 그리워한다. 그렇게 그리워하며 늙은 거인이 의자에 앉아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그 아이가 손과 발에 상처가 난 채로 그의 앞에 나타난다. 거인은 그의 상처를 보고 분노하지만 아이는 사랑의 상처라 말하면서 그를 천국으로 데려간다. 그 아이는 예수였던 것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나이팅게일과 장미’다. 이 이야기는 중세유럽의 전설과 페르시아의 신화를 섞어 만든 작품이라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와일드적 이지만 그의 보편적 주제와는 느낌이 달랐다. 작은 새인 나이팅게일은 가난하지만 학구적인 한 청년을 좋아하는데, 그가 사랑하는 여인은 붉은 장미를 구해오면 춤을 쳐주겠다 말한다. 하지만 그는 가난해서 장미를 구할 수가 없어 고통스러워한다. 나이팅게일은 그 모습을 보고 자기가 붉은 장미를 구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작은 새는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결국 붉은 장미나무 앞에 가게 된다. 하지만 서리를 맞아 꽃이 피지 못했고 그 꽃을 피우기 위해선 달이 뜬 밤 가시에 심장을 박고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장미나무는 말한다. 나이팅게일은 새(자신)의 목숨보다 인간의 사랑은 숭고한 것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하고 결국 장미는 피지만 나이팅게일은 죽게 된다. 청년은 그 꽃을 따서 여인에게 건네지만 여인은 거절하고 청년은 화가 나서 장미를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여인은 그의 무례함을 다시 경멸하고는 돌아선다. 그렇게 나이팅게일의 장미꽃은 버려진 채 더럽혀진다.

 세 번째 이야기는 ‘헌신적인 친구’다. 헌신적이고 착한 한스와 이해타산적인 키다리 휴를 대비시켜 한스가 죽고 장례를 치르기까지의 이야기인데 휴가 요구하는 대로 줄 수밖에 없는 한스의 성격과 끝까지 이득을 챙기고 한스가 죽게끔 만드는 휴의 태도가 보는 이의 마음을 울리게 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액자 밖의 물쥐와 홍방울새, 오리를 통해 동화적인 요소를 강화하고 객관적으로 주제를 생각하게 하기에 도덕과 정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란 점에서 이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었다.

 네 번째 이야기는 ‘행복한 왕자’로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일 갓이다. 행복하게만 살았던 왕자가 죽은 뒤, 높은 곳 위에 서고 나서야 빈민들의 아픔을 깨닫게 되었고 이집트로 날아가려던 제비가 어느 날 그의 발치에서 잠들려 하자 그 제비를 시켜 자신의 보석을 빈민에게 전달해 주는 이야기이다. 제비는 간곡한 동상의 부탁으로 이집트에 가지 않고 왕자의 모든 보석을 나눠줘 볼품없어진 동상아래서 죽는다. 결국 동상은 허영이 많은 시장과 그의 부하들의 명령으로 녹여 사라지고 그들은 시장의 동상을 세우기로 하며 좋아한다. 하지만 왕자의 심장은 결코 녹지를 않았고 제비와 함께 쓰레기통에 던져진다. 하느님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을 구해오란 명을 받은 천사는 이 두 가지를 가져가고 하느님은 흡족해 한다는 이야기이다. 왕자의 심장이 녹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그가 아끼던 제비의 죽음과 많은 이에게 나눠준 사랑의 덕의 힘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다섯 번째 이야기는 ‘유난스러운 로켓 폭죽’이다. 왕궁의 허영심 많은 왕은 불꽃놀이를 구상하고 그를 위해 많은 폭죽들을 사드리는데, 그 폭죽들의 이야기이다. 여러 성격의 폭죽들 중 로켓 폭죽은 제목과도 같이 유난스러운데, 그 중에서도 유난히 허영과 자아도취 해 있다. 자기 부모님들에 대해 얘기하는가 하면 자기들이 ‘푹죽’이라고 우긴다. 그는 자기를 과시하려고 눈물도 흘리는데 막상 불꽃놀이가 시작 되었을 때에도 화약이 눈물에 젖어있어 발사되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버려지는 로켓 폭죽은 진흙 속에 쳐 박히고, 아이들이 장난으로 불을 붙일 때 까지도 자기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남들이 자신이 폭발되면 알아 줄 것이라고 기뻐한다. 하지만 진흙 속에서도 젖어버린 폭죽은 아무도 그의 폭발을 알지 못하고 그는 떨어지지만 마지막 순간 까지도 그는 자신의 위대함에 대해 말한다.

 마지막 이야기는 ‘소년 왕’이다. 행복한 왕자와 마찬가지로 유복한 소년 왕이 자신의 삶을 즐기고 있는데, 즉위식을 치르기 전날 밤 여러 꿈을 꾸게 된다. 그의 옷을 만들기 위해 뼈 빠지게 이라는 직공과 왕관의 보석을 찾기 위해 바다를 헤집고 다니다가 죽게 되는 노예 소년 등등. 소년 왕은 그런 꿈을 꾸고 나서 즉위 복장을 치우라고 말하곤 어렸을 적 목동에게서 자라던 시절의 허름한 옷을 걸치고 성당으로 향한다. 귀족들, 사제들, 심지어 수고하는 빈민들 까지도 그가 복장을 갖추라고 말하지만 소년왕은 개의치 않고 즉위식이 있을 예배당으로 들어간다. 결국 귀족들은 왕을 어리석다고 생각하곤 죽이려 들지만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비춰지는 불빛과 꽃들의 조화가 마치 신이 천사를 내린 것과도 같아서 모두 그에게 예의를 갖춰 뉘우친다는 내용이다. 우리나라의 한중록 맨 앞부분에서 어린 정조 대왕이 ‘사치라’ 라고 말하는 부분과 닮아 이단 느낌을 받기도 한 내용이다.

 

 나에게는 이 책을 바라보는 2가지의 시선이 있다. 정말 그 선물해 준 친구에게 감사하게도, 어렸을 적에 ‘동화’라는 장르의 이 책을 읽으며 생각했었던 하나의 시선과 어느 정도는 세상을 알게 된 청소년 시기의 생각과 시선. 이 두 가지의 시선으로 이 책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렸을 적에는 이 책의 따뜻함에 감동하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내용과 형식적인 면에서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는 세밀하게 채색된 하나의 그림이다. 도덕성에 대해 호소하는 그의 글은 읽을 때마다 몇 번씩 눈물을 흘리게 하곤 한다. 정교한 표현과 무엇보다도 인간들만의 대화가 아닌 짐승, 혹은 사물들의 대화가 주는 신비로움이 어렸을 적 이토록 따뜻한 글을 읽고도 힘들다고 불평만하며 살아가고 있는 나에 대한 반성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이러한 신비로움과 도덕적인 마음이 지니는 따뜻함의 성격은 그 가치 하나만으로도 독자를 부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정말이지, 어린아이들이 빠져들기 좋은 흡입력을 가진 책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어렸을 때 나에게 삶의 위안이 되었고, 인생을 나아갈 방향을 집어주는 책이었었다.

 요즘에 들어 많은 좋은 책들을 읽고 난 뒤 이 책을 다시 꺼내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의 완성도를 의심할 수 없었다. 이 책은 어린이들에게 주는 따뜻함 그 이상의 것이 있다. 나는 앞서 오스카 와일드의 문학은 한 편의 그림과도 같다고 했다. 내가 이런 표현을 쓴 이유는 ,예를 들자면, 어렸을 때 고흐의 명작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작품을 봤다고 하면 재미난 그림이네. 아름답다. 라고 정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교양이 는 사람이라면 굴곡진 고흐의 인생이 보이는 군하며 감탄할 지도 모르겠다.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은 같은 맥락 이다. 이 책은 나이가 조금 더 든 나에게 삶의 지혜를 줬다. 이 사실은 어쩌면 허무하고 또 어쩌면 책이라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권의 책이 어느 개인에게 있어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될 수 있다면 이 책은 죽을 때까지 그 개인에게 긍정적인 효과, 그리고 더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본다.

 이 책은 흔히 방황의 시기라 표현되는 청소년기의 나에게 사상서들처럼 ‘…해’가 아니라 ‘이런 일들이 있더라고…’라 하며 독자에게 아 그럼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하는 삶의 표지판이 되어주었다. 인간은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심히 철학적인 질문에 대해 논리와 궤변들로 현혹시켜 이런 거야 그러니 착하게 살아 라는 식의 남의 생각을 주입하는 책이 아닌, 네가 이 책을 읽고도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냐? 라고 물을 수 있을 정도로 스스로가 “도덕의 실현 이유”를 가르쳐 준 책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은 어려서 읽었을 때, 나이가 더 들어 읽었을 때, 노인이 되어 읽었을 때 그 깨달음의 폭이 커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노인과 바다’도 물론 좋은 책이지만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야 말로 그 명성을 누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노인과 바다는 유아들이 읽기에는 어렵고 지루하다. 그에 비해서 오스카 와일드의 문학에는 어린아이에서부터 청년 더 나아가 이르기까지 한평생동안 즐길 수 있는 일종의 배려가 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도 교훈에 다가갈 수 있고, 청년, 노인 모두에게도 교훈을 전달해준다.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공정함은 마치 ‘이기적인 거인’ 속 거인의 정원에 있는 듯하다. 어린 아이건 노인이건 이 오스카 와일드라는 거인의 정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헤밍웨이의 정원엔 어린아이들이 많지 않은데 비해서 이 정원에는 깨달음의 열매가 키 작은 어린아이도 따먹을 수 있게 주렁주렁 달려있는 느낌을 주었다.

 

 그럼 이제 작품별로 내가 따온 열매들을 봐보자. ‘이기적인 거인’은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봄처럼 파릇파릇하고 밝은 이미지인데 비해 이기적인 삶은 차가운 북풍이나 눈, 서리와도 같은 것의 세계이며 자라나려던 새싹조차 땅속으로 다시 들어가 버린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성공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지금의 나로서는 좋은 교재를 찾았다면 굳이 나 혼자서만 볼게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소개해 주고 서로 모르는 문제를 공유하고 같이 풀어갈 수 있게 해주지 않아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선 멀뚱히 서서 남이 오길 기다리기보다 내가 먼저 아이를 나무 위에 올려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마 거인도 내가 이제 와서 정원을 개방한다니, 사람들이 그동안 속 좁은 놈아 옛날엔 왜 그랬어 라고 물으면 뭐라 대답해야하지? 그래 그냥 저 아이는 담장 밖으로 던져버려야 겠어 란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이게 실생활 속에서는 남을 도와줄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누군가가 죽고 있어도 방관하거나 아무에게도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소극적인 성격의 사람들이 더 많아졌을지도 모르겠다. 남을 사랑하라는 같은 예수의 가르침을 성서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나이팅게일과 장미’에서는 솔직히 큰 감동을 느끼진 못했다. ‘나눔이라는 따뜻한 사랑’이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대 주제에 비해서 이 작품은 무언가 짜깁기한 느낌만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끝의 비극적인 결말은 ‘헌신적인 친구’에서 주는 비극성보다 방향성도 옅었다. 게다가 좀 과장하자면 인류의 사랑(행복)을 위해서라면 작은 새 같은 미물은 사라져도 그만이라는 잘못된 사고관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소지가 있지 않은가싶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 작품도 아름다운 노래를 하는 가치가 있는 새가 사랑의 성립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조차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의 ‘사랑’은 중요한 것이다 라는 교훈성이 더 짙다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헌신적인 친구’는 보다 무게감 있는 내용이다. 헌신의 경계와 도덕이라는 소재 말이다. 선악의 구분만이 있는 어린아이들에게도 이런 소재를 이렇게 쉽게 보여주다니. 한스는 분명 착한 사람인데 왜 죽는가. 이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내용이니까 말이다. 즉 다시 말하자면 이 내용의 비극적 결말은 주제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란 것이다. 유아에게 충격과 함께 세상물정을 보여주는가 하면, 청년들에게는 맹목적인 삶을 살거나 도덕만을 행하는 삶이 과연 옳은가 라든지 무조건적인 ‘예스맨’이 된다는 건 과연 옳은 일일지에 대해서 해답을 주기 때문이다.

 ‘행복한 왕자’는 앞선 깨달음의 연속이다. 행복한 왕자 동상은 동상이 되고 부턴 일종의 헌신을 한다. 그렇다면 헌신의 경계는 어디까지라고 볼 수 있을까? 에 대한 해답을 주는 것이다. 개인적으론 주관의 개입여부가 아닐까 싶다. 왕자상은 자의지에 의해서 헌신을 베풀지만 한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되어 버렸고, 휴의 연설이나 외바퀴수레 등과 같은 보상이 있어서 더 강제성을 띄게 하는 반면에 행복한 왕자는 속죄의 의미로 빈민에게 헌신을 베푸는 것이 아니었을까. 사실상 속죄적인 헌신은 순간적으론 손해 보는 느낌이 날 수도 있을 것 같다. 볼품없어져 녹아버리고, 허영심 많은 시장의 동상이 대신 서게 된다면 굉장히 마음 아픈 일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것마저 고려한 모양인지 이들을 천사의 선택을 받게 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왕자와 제비 모두 천국에서 살 수 있을 권리를 준 점에서 오스카 와일드는 놀랍기 만한 존재다.

 ‘유난스러운 로켓 폭죽’은 자아도취의 경계성을 잘 보여줬던 작품이다. 언젠가 베틀로 천을 짜는 주요 무형문화재가 되신 한 어른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가 대한민국 최고의 기술자가 되기까지의 시간을 말한 글이었다. 그는 일이 어느 경지에 이르기까지 연방 ‘혼 내주세요.’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살았다고 하는데 ‘유난스러운 로켓 폭죽’의 주제와 닮은 느낌이 든다. 괜히, 안 그래도 되는데 굳이 나를 뽐내고 나의 재능을 보일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 재능이란 걸 누가 인정할 수 있겠는가. 가지고 있는 재능도 낮추고 혼 내달라 말하는 것이 진정 고개를 숙인 알찬 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로켓 폭죽처럼 불필요한 짓을 많이 해서 인생을 망치려고 하진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소년 왕’은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해주는 글 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현재 누리고 있는 기쁨을 모른다. 그 권리가 없어져야만 그 시절이 행복했다고 느낀다.’는 걸 깨닫게 해 주었다. 소년왕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악몽일 뿐이라고 넘어갈 수 있는데도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미 소년이 아닌 어른들과 대적하는 것 이었다. 사제도, 귀족도. 그의 이러한 자세의 승리는 생각하고 깨달은 바가 있다면 행동하라 라는 가르침을 내게 주었다.

 이 책은 지금 까지도 많은 것을 선사해준 책이지만, 앞으로도 인생을 살아가는데 하나의 지침서가 되어 줄 것이다. 성인이 되어서, 그리고 노인이 되어서. 이 책은 이렇게 나아가시오 하는 인생의 ‘주역(周易)’ 책이 되어 줄 것이다. 이 책은 인생을 사면서 앞으로도 영원히 잊지 않고 함께 나아갈 현명한 동료다.

유현우
유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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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문학이 눈뜬 자의 전유물인가

 2012년 5월 14일, 임태형 감독의 영화 ‘안녕, 하세요!’가 개봉했다. 별다른 기대 없이 타임 킬링용으로 보게 된 이 영화는 나의 진로마저 바꿀 정도로 내게 큰 영향을 주었다. 영화의 내용은 인천 시각장애인 학교인 혜광 학교의 초등, 중등, 고등부 학생들의 삶을 다큐멘터리 식으로 담은 영화로 평점 9.8에 2만여 관객을 동원했을 정도로 히트 하기도 했다. “세상이 어떻게 아름다운지 궁금해요.” 라고 말하는 한 학생의 말에 나 역시도 감동받아 일반 학교 국어교사에서 시각장애인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바뀌게 해준 영화였다.  하지만 이러한 결심을 한 후에 금세 직면한 문제가 있는데 바로 시각장애인에게 문학을 어떻게 이해 시키겠느냐의 문제였다. 물론 맹인 학교에 간다 할지라도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시각장애인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야가 좁아 전방만 볼 수 있는 학생도 있었고, 빛의 형태 정도만 볼 수 있어 색을 구별해 낼 수는 있는 학생들 등등 완전한 맹인만이 있는 것은 아니긴 했다.  그렇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다. 시각장애인이 어느 정도는 볼 수 있어 ‘녹빛 신록의 계절’이라는 시어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해도, 완전히 한치의 앞도 볼 수 없는 맹인이 문학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건 아니기 때문이다. 참으로 골치 아픈 문제다. 녹색빛을 노란색과 파란색이 섞인 것이라 설명해 줄 수 도 없으니 말이다. 대체 보인다는 것은 뭘까. 색을 넘어 심지어 밝고 어두운 것을 구별할 수도 없는 맹인들은 현재 예술로부터 소외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예술 중에서도 음악이나 미술은 힘겹게라도 할 수 있지만, 문학으로부터는 완전히 차별 당한 채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시각장애인 대표기관으로 서울특별시립 노원 시각장애인 복지관이 있다. 이곳은 ‘넓은 마을’이라는 시각장애인 전용 통신망을 구축해 센스리더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입력된 전자도서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나는 이 영화를 본 후에 가장 먼저 한 것이 이곳에서 자원봉사자 교육을 받고 현재 재가봉사로 문학 입력봉사를 하고 있다. 교육 후 첫 입력 도서는 시각 장애인 측에서 신청한 책 중 한 권을 반드시 입력한 후에 시작할 수 있는 봉사활동이다. 28기 교육 때 굉장히 다양한 책들이 있었는데 경영학 도서, 철학 도서, 심지어는 라이트 노벨(시드 노벨, 판타지 문학 등의 대중문학을 이르는 말) 까지도 있어 시각장애인의 독서 욕에 놀라게 되었다. 내가 입력하게 된 책은 황지우의 ‘게 눈 속의 연꽃’이라는 문학과 지성사의 시집이었다. 이것으로 시각장애인들에게 문학을 선사 할 수 있다는 기쁜 마음으로 타자를 두드리던 중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예를 들자면 ‘華嚴光州’라는 시로 이승하의 ‘이 사진 앞에서’라는 시와도 같이 사진을 개재한 시였다.

  • 유현우
  • 2012-11-18
왕유를 기억하며 그를 읽다.

 중국 시문학사에서 가장 찬란했던 당(唐)대. 당시를 이끌었던 세 시인을 꼽으라하면 이백과 두보를 꼽힐 것임은 누구나 알지만 많은 사람들이 당시의 세 번째 거장인 왕유(王維)는 잘 모른다. 이들은 제각기 주력으로 하는 시적 장르가 다른데 이백이 낭만시를, 두보가 사회시에서 특히 재능을 보였다면 왕유는 자연시에서 그 독보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문학사적으로 동진의 도연명 이후로 자연시문학을 완성했다고 일컬어지며 훗날 송나라의 소동파가 ‘ ’라고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는듯하다.) 예찬했을 정도인 왕유지만 시선(詩仙)과 시성(詩聖)에 가려 그 진가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 듯하다. 한국어로 번역된 왕유 시집은 4-5권에 불과할 정도니(이백, 두보는 셀 수조차 없다.)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기회에 왕유의 시들을 자연시, 송별시, 은거시, 불교적인 시 로 4개의 카테고리로 나눠 15편의 시를 소개해 볼까 한다. 필자는 박삼수 번역의 왕유시선(王維詩選)을 주로 참조했는데 가장 번역이 말끔하여 이를 밝혀둔다. 고로 이 글을 읽고 왕유의 시를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이상으로 왕유를 짤막하게 소개해 보았는데 더 말할 것 없이 왕유의 시를 보도록 하자. 앞서 말했듯이 첫 번째로 삼은 카테고리는 바로 자연시로, 당시중에서 왕유만의 특색이 가장 짙고 쉽게 감상 할 수도 있는 시 장르다.   荊溪白石出 형계의 시냇물 줄어 바닥 흰 돌 드러나고 天寒紅葉稀 날씨 차가워 어느덧 단풍잎도 드문데 山路元無雨 한적한 산길에는 본디 비 내리지 않았건만 空翠濕人衣 빈 산중의 짙푸름은 사람의 옷을 적실 듯하다. -‘산중에서(山中)’ 전문, 왕유  왕유를 소개할 때 소동파 시인이 왕유의 시를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는듯하다.’라고 평했다 했는데 소동파가 왕유를 예찬하며 예로 든 시가 바로 ‘산중에서’이다. 사람의 옷을 적실 듯한 청량한 가을 산 속을 배경으로 드문드문 흰 바위와 붉은 단풍들이 보이는 시적 풍경을 상상해보면 절로 한 폭의 수채화가 그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왕유는 자연시를 쓸 때 색채묘사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 내리지 않았건만 사람의 옷을 적실 듯’ 하다며 표현했듯이 그 풍광을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게 해주어 시를 자주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쉽게 시인의 정서를 공감하고 마음적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해준다.  왕유는 산 속 은거 생활을 좋아하여 ‘망천’이라는 산골짜기에 ‘망천장’ 이라는 별장을 지어놓고 한때는 그 주변을 돌며 20여 편의 시를 지어 ‘망천집’으로 엮기도 했었다. 망천집은 그의 시우(詩友) 배적과 함께 망천이십경을 돌며 각각 20수 씩 총 40수의 오언절구로 구성되어있다고 한다.   秋山斂餘照 가을 산은 석양빛을 거둬들이고 飛鳥逐前侶 나

  • 유현우
  • 2012-09-27
우리가 대선 후보를 믿지 않는 이유

 이제 곧 대선 철이다.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등등 올 대선에서 거론되는 후보들은 많지만 사실 대한민국의 성년들은 대통령 후보들에 대한 불신과, 정치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다반사이다. 이런 인식은 무투표로도 이어져서 저조한 투표율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한 국가의 수장을 뽑는 투표에 있어서 이러한 무책임한 의식이 생기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심해 보았다.  우선 첫 번째 시각으로는 경험론적 시각에 기인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고등교육을 받으면서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정치라는 것에 대해서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막상 투표로 총수를 뽑아도 말뿐인 공략을 내세웠다 던지 하는 부정적인 면을 보고 신뢰감을 잃었을지 않을까하고 가정해 보았다. 실제로 이승만 독재정권과 2번의 군사정부체제를 겪은 정치판에 현대 민주정치가 자리 잡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감사원과 각종 청문회 등이 지금과 같은 영향력을 가지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 세대로부터 과거의 민주적이지 못한 정치를 들은 자녀가 많아졌을 것이다. 거기에 각종 촛불 시위와 데모(시위와 같은 말이지만 반복을 피하기 위해 일반적 시위를 대신하기로 하자.) 등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고 각종 매체를 통해 (SNS, 아프리카TV, 등등 무궁무진하다.)정치 비판을 접해 무의식적으로 부정적 인식이 남게 되었을 수도 있다. 하물며 일부 정치색이 강한 전교조 교사들은 공무원임에도 불구하고 야당의 입장에서 여당이 저지른 문제들을 극히 강조하기도 하는 등 얼마든지 정치에 대해서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게 될 수 있다. 선대들의 경험에서 비롯된 이러한 비판에 노출된 국민들은 그 정치적 피해가 자신에게 오지 않았다 할지라도 공감을 통해서 간접경험으로 정치를 불신하게 되었을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 입장은 젊은 세대들에게 유행처럼 번진 ‘투표 인증 샷’으로 인해 설명하기 어려워지는 감이 있다. 젊은 세대들 중에도 정치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없이 투표 인증 샷을 올린다. 경험을 통해서 정치판의 더러움을 알게 되었다면 오히려 투표 인증 샷을 남기면 “쟤 왜 저래? 저거다 부질없는 일인데”하며 반응할 것이고 이 유행은 자멸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정치 불신현상이라는 심각한 문제는 어디서 기인한 것인가?  결론적으로 나는 두 번째 시각으로 선험적 결과를 생각해 보았다. 투표를 경험하기 이전, 즉 고등학생 이전에 정치와 투표에 대해서 불신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나는 최근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았는데 아직 고등학교 2학년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주민등록증을 받는 다는 게 신기했다. 지금 당장에 술, 담배를 살 수는 없지만 이제 내가 성장했다는 것이 느껴졌고 점차 나의 권리와 의무가 생겨간 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실수를 해도 포용해 주던 미성년을 지나 행동 하나하나, 말과 글 하나하나에 의미가 생기게 되었단 생각에 나에게 있어 주민등

  • 유현우
  • 2012-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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