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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TH NOTE

  • 작성자 윤스리
  • 작성일 2011-12-26
  • 조회수 1,150

DEATH NOTE

 

 

. 이 글을 시작하며

 

 

 

오래 전부터 쓰고 싶었던 글인데 이제라도 글틴에 올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데스노트. 중학교 때 처음 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데스노트를 처음 본 순간이 생생히 기억나진 않습니다. 단지 정말 몰입해서 재밌게 읽었다는 인상만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색다름. 데스노트는 이전까지 제가 읽었던 만화책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가벼움, 데스노트는 가볍지 않았습니다. 이 만화책은 시간 죽이기를 위한 소비적 텍스트가 아니었습니다. 뭔가 작가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거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거나 작품에 압도된 느낌을 받진 않았습니다. 정말 재밌다. 정말 재밌게 읽었던 데스노트의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데스노트가 레테의 강에 유기되기 전에 건져 올려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명불허전이었습니다. 예전 그대로의 재미였습니다. 재미는 그대로인데 데스노트자체는 새것이었습니다. 첫 만남 때 그저 어리기만 했던 소년이 자라 문학의 이름을 도용하고 있었던 것이죠. 자칭 문학소년은 데스노트란 세계를 다시 만나 그 환경세계를 문학이란 안경을 통해 바라보았던 것이죠. 다시 만난 세계는 철저히 안경에 굴절된 상태로 망막에 맺혔습니다. 전체적인 풍경이 비슷하긴 했지만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가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쏟아졌습니다. 질문 하나에 키메라처럼 여러 가지가 섞이면서 하나의 수수께끼로 승화됐습니다.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선 얽히고설킨 DNA를 해독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키메라를 상대하는 힘든 작업을 시작하는데 있어서 친구가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넌 데스노트 보면서 그런 생각도 했어? 신기하다.

글틴 비평/감상글에서도 이미 한 번 논의된 사항을 재조명하기 위해선 달라야 했으니까요. 기존에 있던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채 이 글을 쓰게 된다면 새 생명을 얻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부모로서 사생아를 낳을 순 없었습니다. 출산에 대한 고민으로 집필계획을 질질 끌고 있었는데 친구의 격려가 제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건강한 아이를 출산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습니다. 읽을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고, 다양하게 해석되는 고전. ‘고전데스노트의 명성을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부족한 면이 더러 보이더라도 예쁘게 봐주세요.

 

 

 

. 우리가 사는 세상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지는 사건사고 속에 묻혀 사는 우리. 우리는 오늘도 때가 되면 뉴스를 보고 있을 겁니다. 노래가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톤의 변화를 주듯 뉴스 역시 다이내믹한 구성으로 연출의 미학을 여지없이 보여줍니다. 가벼운 소식, 무거운 소식, 정치 쪽 한번, 생활 쪽 한번, 경제 쪽 한번, 연애 쪽 한번, 차분하게 정장을 빼입은 뉴스는 현란한 스텝으로 관중들의 넋을 잃게 만듭니다. 담담하게 소식을 전하는 아나운서. 판단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입니다. 하지만 오프닝부터 내일 날씨까지 정보를 쏟아내는 통에 우리는 정신이 없습니다. 정신없이 뉴스가 지나가고 광고가 나오기 시작하면 무아지경, 바보상자의 독무대가 펼쳐집니다. 무의미하게 또 의미심장하게 광고가 지나가고 나면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재밌는 드라마 시청시간이 찾아옵니다. 드라마가 끝나도 쉴 틈은 없습니다. 예능 프로그램이 우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어느새 뉴스는 가물가물해집니다. 영상매체의 일방적 출력에 알게 모르게 입력된 정보들은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됩니다. 내일 또다시 오늘만큼의 정보를 넣으려면 그만큼 자리를 비워놓아야 하니까요. 정보의 실체는 하루가 다르게 죽어나가고, 이 짧은 인생을 요약하는 묘비명에 쓰인 희로애락만 남습니다. 때문에 즐거움이든, 분노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빨리 끓고 빨리 식어버리는 냄비처럼 일시적 반동에 그칩니다. 자신이 왜 즐거워했는지, 왜 분노했는지, 왜 기뻐했는지, 왜 슬퍼했는지 감정에 대한 기억은 있지만 그 감정을 이끌어냈던 내용을 잊었으니까요. 오늘도 NEWS, 새로운 소식들, 동서남북의 많은 소식들이 쏟아졌습니다. 그 중에서 필자는 가수 이은미 씨를 살해한 살인마의 죄가 20년에서 17년으로 감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NEWSIS 기사 인용]재판부는 "연인관계였던 조 씨는 결별을 통보받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피해자를 만났으나 모욕적인 말을 듣고 준비한 과도로 잔인하게 살해하는 등 범행 방법이 매우 잔혹하고 결과도 매우 중대한 점에 비춰 죄질이 매우 무겁다""유족들과 합의되거나 용서를 받지 못한 점 등에 비춰 엄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다만 "이 사건 범행을 시인하고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있는 점과 유족들에게 1000만원을 공탁해 다소 피해회복을 위해 노력한 점 등을 고려해 형을 정했다"고 설명했다.

 

물론 이 판결 하나로 우리나라 법조계에 대한 성급한 일반화를 해선 안 되겠죠. 하지만 적어도 이 판결 하나만큼은 그냥 보고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1000만원=감방생활3, 사람을 죽이면 20년 감방생활을 하게 되는데 1000만원으로 17년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위로금과 죗값이 반비례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돈이 많을수록 똑같은 죄를 짓더라도 재판에서 결정된 죗값은 적어지는 것이죠. 꼭 위로금이 아니더라도 감형을 위해 검은 돈이 오간 사례는 많으니까요. 살인마의 인권을 생각하는 판사의 휴머니즘이 참 눈물겹습니다. 성폭력에 대해서 솜방망이 처벌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살인죄의 경우, 적어도 우리나라 법원이 사형은 아니더라도 무기징역 정도는 판결내릴 거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안이하게 말이죠. 한 생명이 죽었습니다. 24살의 꽃다운 나이에 말이죠. 가족들은 절망적 슬픔에 빠질 것입니다. 이를 위로하기 위해 을 건넨 살인마는 죗값을 할인받았습니다. 이 기사에 댓글이 많이 달렸습니다. 이성적으로, 감성적으로 분노에 찬 모습입니다. 많은 이들이 부조리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비판할 가치도 없는지 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이 되고, 일주일이 지나고, 언젠가 기사는 인터넷상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안치될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계속 불만에 찬 소리를 내준다면, 이 사건에 대한 기사가 계속 나온다면 조금이나마 연명할 순 있겠죠. 대중은 산소, 산소에 노출된 불씨는 꺼지지 않겠지만 폭발하진 못할 겁니다. 대중은 최소한의 관심을 가져주는 산소일 뿐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가연성의 수소가 아니니까요. 수소를 만나지 못하고 결국 죽어버린 불씨는 웬만해선 부활하지 못합니다. 산소와 수소가 모여 물을, ‘이은미 법같이 생명력 있는 복합물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결국 이 불씨가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 법이란 무엇인가

 

 

 

: [명사]국가의 강제력을 수반하는 사회 규범. 국가 및 공공 기관이 제정한 법률, 명령, 규칙, 조례 따위이다.

 

사회는 법을 통해 국민들을 통치합니다. 국민들은 법에 지배당하는 것을 동의하고, 그 절대적 권력 아래 보호받습니다. 법이 절대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키라고 만든 것이니까요. 법은 최소한의 도덕입니다. 최소한의 도덕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사회는 혼란을 야기할 것이고, 크고 작은 혼란이 만든 카오스는 사회를 무너뜨릴 것입니다. 사회가 여기저기 흔들려 무너지지 않도록 질서를 잡는 기둥이 법인 겁니다. 정의가 살아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법이 정의로워야겠죠. 법은 사회정의를 실현시키는 가장 직접적이고, 영향력 있는 도구일 뿐 법 자체가 정의(正義)는 아닙니다.

 

판사는 법에 의해 재판의 판결을 내리는 사람입니다. 법의 대리인 자격으로 말이죠. , 판사 중 하나라도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을 때 재판은 정의의 길을 따를 수 없습니다. 따라서 판사이기 전에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사는 완전한 판결을 내려야합니다. 조금은 무리한 요구이긴 하지만 심판의 재량을 신께 전적으로 위임했던 중세와 달리 근대 이후론 인간이 심판자를 자처해왔으니 감당해야할 부분이죠. 판사는 신의 대리인인 셈입니다. 그런데 중세시대 신의 대리인인 종교가 타락하면서 나라가 썩었던 것처럼 근대 이후론 판사가 썩으면 나라가 썩는다는 치명적인 구조적 결함을 보였습니다. 타락한 종교를 심판하기 위해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타락한 사법기관을 심판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고인 물을 갈아치울 새로운 정신이, 신선한 법이 필요할 겁니다.

 

 

 

 

 

. 이 노트에 이름이 적힌 사람은 죽는다.

 

 

 

어느 날 사신 류크는 인간계에 데스노트를 실수로 떨어뜨렸습니다. 데스노트를 주운 야가미 라이토는 반신반의하며 데스노트를 사용했죠. 그리고 야가미 라이토에 의해 데스노트에 이름이 적힌 사람이 실제로 죽었습니다. 라이토가 판도라의 상자를 연 순간이었죠. 인간의 원초적 본능 중 하나인 호기심은 절대로 열어보지 말라는 상자는 열었고, 절대로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할 재앙들이 쏟아졌습니다. 역사상 최강의 살인병기, 데스노트. 악마적 능력을 얻게 된 라이토는 데스노트를 사용한 사람은 천국에도 지옥에도 갈 수 없다는 사신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트를 빽빽이 채워나갔습니다. 데스노트가 자신의 사상을 실현시킬 수 있을 만큼 대단한 힘을 가진 도구였기 때문입니다. 정의로운 사회, 범죄가 없는, 범죄를 일으키는 사회악을 처단하는 공정한 사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살기 좋은 세상, 모든 이들이 꿈꿀 법한 유토피아 건설을 위해 데스노트를 사용한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누군가 심판을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세상이 바뀐다는 겁니다.

 

[선량한 사람들이 손해 보는 시대는 갔다. 신적인 존재가 악()을 심판하고 있다. 나는 신의 뜻에 따를 것이다.]

 

라이토의 계산대로 사회는 쉽게 복종했습니다. L이란 세계적 탐정을 주축으로 한 저항세력이 있었지만 대세는 저항이 아닌 복종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벌어질 대량살상을 앞두고 라이토는 류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신()세계의 신()이 될 거야.’ 라이토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인 것이죠. 하나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세계의 신이 되는 겁니다.

 

 

 

 

 

. 가미()가 아닌 키라(살인마)?!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항이 있습니다. 심판을 내리는 자의 존재를 인지하게 된 사람들이 라이토를 가미()가 아닌 키라(killer,살인마)라 불렀습니다. 라이토의 사상을 동의하는 사람들조차도. 이는 상식적으로 데스노트를 통한 인구청소가 심판이 아닌 살인범죄라 생각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라이토가 데스노트란 가공할만한 살인병기를 앞세워 지구 전체를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변모시킨 것이죠. 물론 지구인 전체를 인질로 삼았습니다. 라이토 개인의 생각을 사람 목숨을 결정하는 잣대로 삼고, 사람들에게 도덕적 인간이란 면죄부를 강매했습니다. 결국 이 도덕성은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가면에 불과한 것입니다. 폭군의 공포정치에 위선적 충성을 보이는 겁에 질린 백성들처럼 말이죠.

 

이는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설명한 신체형의 메커니즘을 라이토가 데스노트를 통한 살인에 적용시킨 것으로 생각됩니다. 범죄자의 인권이란 명목 아래 신체형이 거의 멸종된 현대사회에서 말이죠. 신체형은 그 형식의 잔인함을 군중들에게 시각적으로 노출시킴으로써 권력의 공포를 각인시킵니다. 그 공포는 곧 권력의 위세와 연결됩니다. 결국 신체형은 신체란 물질을 통해 정신을 지배하려는 목적 아래 실시된 겁니다. 군중들의 정신적 복종, 즉 키라의 사상에 대한 동조가 신세계 건설을 위한 필요조건이었기에 이를 위해 라이토는 신체형을 부활시킨 겁니다. 하지만 반대로 신체형을 실시했기 때문에 더더욱 라이토는 결코 가미가 아닌 키라로 불릴 수밖에 없었던 거죠. 라이토가 진정 신으로 불리길 원했다면 신체형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군중들이 사회에 해악을 끼치지 않는,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간이 되도록 도와야 했습니다. 라이토가 지향하는 신()인류, 이상적 인간상인 도덕적 인간은 유전자 조작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는 생물학적 진화체가 아니니까요. 인간 스스로가 영적인 수련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정신적 성취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자신의 영혼을 단련시켜야만 성취를 거둘 수 있으니 말입니다. 라이토가 데스노트가 아닌 종교나 교육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면 효과는 데스노트를 사용할 때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늦게 나타나겠지만 궁극적인 효과는 질적으로 더 컸을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라이토는 너무 서둘러 포기한 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류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요.

 

 

 

 

 

 

. 키라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인신(人神)

 

 

 

여기서 라이토의 사상과 파시즘 사이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파시즘의 사상적 근간을 이루는 기둥 중 하나인 엘리트주의를 살펴봅시다. 파시즘이나 나치즘 같은 전체주의 사상에서 엘리트주의가 필요한 이유는 자신들이 행사하는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섭니다. 지배자-피지배자 구조를 폭력을 통해 강요했고, 우수한 인종이 미개한 인종을 지배하는 것이 인류 전체의 번영을 위한 길이라고 외쳤던 것이죠. 라이토의 경우엔 키라란 절대적 존재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인류 전체의 번영을 위해서 도덕적 인간만 필요하다고 외쳤습니다. 적어도 인종이란 개인적 차이로 인간을 분별하진 않았죠.

 

하지만 라이토는 자신의 순수한 이상을 스스로 어기고 맙니다. 바로 키라 제국에 대항하는 반란군인 FBIL을 죽이면서 절대 권력에 눈 먼 부패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물론 그 전에 라이토는 인간의 생명을 함부로 다뤄도 된다고 생각한 살인마이죠. 하지만 그 전까지는 자신의 사상에 입각한 합리적 살인동기 아래 심판을 자행했다면 이 순간부턴 자신의 권력을 수호하기 위한 무차별살인을 감행한 것이죠. 라이토는 키라의 사상을 부정하는 모든 이들을, 애초에 자신이 지향한 도덕적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제거하기로 마음먹습니다. 키라를 수사하기 위해 창설된 본부 사람들, 정의감이 투철한 경찰들을 죽일지 말지 고민하기도 하고, 심지어 자신이 존경하는 아버지나 사랑하는 여동생을 죽일지 말지 고민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향한 아마네 미사와 타카다의 마음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아마네 미사는 자신의 수명을 반으로 줄이는 사신의 눈 계약을 두 번이나 이행하고, 타카다는 데스노트를 대신 쓰게 하다 쓸모를 다하게 되자 바로 라이토에게 살해됩니다. 모든 것이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감수해야 할 희생이라 여겼던 것이죠. 라이토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데스노트를 사용한 이 전의 사용자들과 히구치의 전철을 밟았던 겁니다.

 

이는 데스노트의 영향권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아마네 미사란 인물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의 키라인 아마네 미사는 키라를 추종합니다. 그 이유인즉슨 자신의 부모님을 살해한 범죄자, 재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합리적 심판을 받지 못한 이, 사법제도의 빈틈이 만들어낸 부조리를 키라가 대신 심판해주었기 때문이죠. 아마네 미사는 키라의 수혜자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키라 추종자들은 아마네 미사 같이 키라의 사상에 전적으로 동의해 그를 긍정하는 게 아니라 키라에 의해 어떤 형태로든 이익을 얻었기 때문에 그를 긍정하는 겁니다.

특히, 전형적인 기회주의자 모습의 방송국PD 데메가와는 자신의 방송이 사회적으로 어떤 파장을 미칠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자극적이 소재로 시청률’, ‘을 벌어들이는데 혈안이 된 모습입니다. 키라를 팔아 한턱 거하게 챙기자는 식의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키라의 사상을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미카미란 인물조차 자신의 소망을 키라가 대리 실현해줬기 때문에 키라를 따르는 것일 뿐이니까요. 데스노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미카미는 처음에 라이토를 이라 부르지만 라이토의 패배를 목격한 이후엔 너는 신이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라이토가 더 이상 키라의 사상이 아닌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데스노트를 통한 살인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고 말입니다. 미카미의 눈에 라이토는 더 이상 신세계의 신이 아닌 게임에서 진 패배자로 비춰진 겁니다. 미카미는 결국 지금까지 충성을 바쳤던 신의 실체가 아주 위험하고 잔혹한 게임에서 진 패배자란 사실을 깨닫고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라이토는 권력은 부패하기 쉽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로드 액턴의 명언을 그래도 따른 셈이죠. 라이토는 설사 자신을 도와준 아군이라 하더라도 데스노트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이들은 예외 없이 죽이려 했죠. 데스노트의 비밀이 세상으로 새어나가는 순간 자신의 신화가 깨질 수 있었기 때문에. 신의 권능이 단지 데스노트의 힘을 빌린 거란 사실을 알게 되면 민중들의 무조건적 순종을 이끌어낼 수 없을 테니까요. 데스노트를 갖는 것으로 신이 될 수 있다면 기존의 신에 따르기보다 데스노트를 뺏어 자신도 신이 되길 원하는 자가 양산될 테니까요. 데스노트=신의능력, 이는 누구도 알아선 안 될 신의 태생적 비밀이 돼야만 했던 겁니다.

 

라이토는 초인사상을 향유하고 있었습니다. 류크에게 데스노트를 통한 유토피아 건설이란 청사진을 설명하면서 이 일을 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 아니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돼.’라고 말했죠. 자신은 이인(異人)이기 때문에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 살인범을 살해하는 자신은 똑같은 살인범이 아닌 정의의 사도라는 생각, 남이 하면 불륜, 자신이 하면 로맨스라는 생각이 데스노트에 의한 숱한 살인에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던 이유인 것이죠. 인류의 번영이란 빛나는 이상으로 무장하고 유태인들을 학살한 나치 장교들이 가정집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했던 것처럼 말이죠. 라이토가 말하는 정의, 대의를 위해 작은 것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논리가 틀린 이유는 간단합니다. 라이토가 말한 작은 것이 비록 처벌받아 마땅할 악인(惡人)의 생명이지만 인간()이기에, 인간의 생명이기에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죠. 인간의 정신을 개혁해 범죄를 사전에 단절시키는 미래지향적 사고는 훌륭했지만 개혁의 방법이 잘못됐던 겁니다. 피의 혁명으로 세운 왕조는 피로써 무너지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결과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신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21세기의 아담이 데스노트란 선악과를 먹는 순간부터 예정된 결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라이토는 인신(人神)이 되고자 했던 또 다른 인물인 라스꼴리니꼬프처럼 자신의 영혼에 저지른 죄에 대한 속죄를 구할 기회조차, 구원의 가능성조차 얻지 못하고 타계했지만요. 데스노트를 쓴 순간부터 천국도 지옥도 갈 수 없던 운명이니 당연한 결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라이토가 이겨 키라가 정의가 됐더라도 라이토 자신은 패배한 셈이니 말입니다. 자신의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큰지 깨달았다면 라이토의 영혼은 산산조각 났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모르고 죽은 게 다행일 정도의 원죄였으니 말이에요.

 

 

 

 

 

 

. 신세계는 무정부주의 종교국가?

 

 

 

라이토는 왜 신이 되고 했던 것일까요? 신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데스노트를 전체적으로 놓고 봤을 때 라이토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인물로 그려지지만 여기에선 반대의 경우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데스노트의 사용목적이 순수하게 자신이 생각하는 유토피아 건설을 위해서였다면 라이토는 굳이 키라의 존재를 세상에 노출시키지 않아도 됐을 겁니다. 범죄자를 제거하는 인구청소 작업만으로도 자신이 의도했던 효과를 충분히 거둘 수 있었을 테니까요. 라이토는 우상숭배의 대상, 즉 하나의 종교로서 또 그 종교의 정점에 선 신으로서 군림해야만 민중들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라이토가 생각한 유토피아는 정치적으로 아나키즘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군대나 경찰 같은 무장 세력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것이 전쟁을 일으키는 범죄조직, 폭력집단을 데스노트에 적어버리면 되거든요. 전쟁이란 것도 결국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일으키는 것인데 목숨을 잃는 순간 모든 게 말짱 황이 되니까요. 전쟁을 일으키는 폭력분자들이 없으니 군대의 존립이유가 원천적으로 사라지는 것이지요. 물론 동물농장처럼 나폴레옹은 자신의 치하에 충견들을 둬 대내적 안정까지 추구하고 싶겠지만요. 어쨌든 군대와 마찬가지로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도 필요 없습니다. 범죄가 예비범죄자들에 의해 사전예방 되거든요.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요. 어떤 범죄가 장발장이 빵을 훔친 것처럼 복지기능이 결여된 사회가 부추긴 미필적 고의가 아니라 개인의 도덕적 결함에 기인해 발생한 것이란 전제 하에 말이죠.

 

데스노트는 법의 손이 닿지 않는 인간의 정신, 그 기저까지 침투해 범죄를 방지합니다. 개인의 도덕적 결함을 보완해주는 혁명적 도구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방법에 있어 살인을 차용하고 있기에 진정한 진보, 시민의식의 고양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시민의식의 퇴보라 할 수 있죠. 사실 형벌의 주안점은 처벌에 있는 것이 아니며, 그 근본목표는 교정’, ‘감화’, ‘치료에 있는 것인데 데스노트식 형벌은 처벌로 끝나버리는 폭력에 불과하니 말이죠. 사법 이전의 시대로, 모든 권력을 손에 거머쥔 폭군이 칼로서 국민의 동의를 이끌어냈던 시대로 회귀한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럼에도 데스노트 찬양자들과 우리 독자들 중 일부가 데스노트를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건 데스노트의 효용 때문이겠죠. 단 몇 년 만에 전 세계의 흉악범죄와 전쟁을 거의 소멸시켰으니 말입니다. 커닝을 했지만 시험은 대박을 쳤고, 국민들의 등골을 빼먹었지만 경제성장률은 대단했던 부정(不正)의 역사가 아직도 우리에게 통()하고 있다는 반증이겠죠.

 

부정의 역사 위에 세워진 키라 제국.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 정신적 대륙이 세상에 정착하기 위해선 국민들이 스스로 이 대륙에 정착하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좋든 싫든 대한민국 헌법을 따르는 것처럼 국민들이 데스노트란 새로운 질서에, 초헌법적 법에 따라야만 신세계가 존립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신세계는 종교국가가 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던 겁니다.

 

법은 앞서 말했듯 좋든 싫든 따라야 하는 게 법입니다. 한마디로 의무인 거죠. 개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무조건적으로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의사가 법의 영역을 엇나갔을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어떤 악마적 충동을 억제해야 할 모토가 초자아의 목소리가 아닌 법이니까요. 비싼 변호사를 사 재판에서 이익을 챙긴다든가 법의 허점을 파고들어 교묘히 범죄를 저지른다든가 범죄를 저질렀을 때 거두는 이익과 형벌에서 오는 손해를 계산한다든가 하는 더러운 행위는 범죄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억제됐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법이, 사법제도 자체가 불완전한 체계란 겁니다. 일단 범죄를 저지르고 나면 범죄에 대한 피해는 온전히 피해자에게 부과되고, 교도소란 공간에 범죄자가 맡겨진다 해서 A/S센터처럼 도덕적으로 고장 난 인간이 100% 갱생되지도 않습니다. 물론 어떤 악인에게나 가능성은 열려있죠.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면 희대의 살인마도 선인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르죠. 하지만 교도소에 수감된 모든 이들을 치료하기엔 의사도, 약도, 돈도 부족합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단 소리죠. 그렇기에 어떤 인간이 범죄자가 되기 전에 범죄를 막아야 합니다.

 

이 국가적 과업은 가정에서 학교, 사회에 이르기까지, ‘교육이란 자기혁명의 과정에 성패가 달려있습니다. 하지만 기업형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교육제도 속에서 인격이나 도덕 따위는 찬밥 신세입니다. 문제는 교육제도와 함께 국민들의 인식 또한 변한다는 겁니다. 학교선생님들은 이제 인격수양이나 도덕심함양을 더 이상 외치지 않습니다. 학생들에게 씨알도 안 먹힐 소리란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학생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성적, 명문대진학, 대기업취직, 난사람의 길 뿐입니다. 도덕, 윤리, 양심 같은 게 밥 먹여주는 건 아니니까요. 또한, 오히려 이에 반하는 비도덕적 행위가 사회적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기도 하니 고매한 윤리 따위는 개나 줘라 식이 돼버린 거죠. 상황이 이렇다보니 된사람의 길을 걸으려는 사람은 사회적인 관점에서 멍청이죠. 공자, 맹자, 칸트, 니체의 책을 읽는 게 시간낭비라 여겨지니까요. 철학과에서 학점을 따기 위해 읽는 사람은 제외하고요. 일련의 문제를 학생이나 학부모, 선생님, 교육제도 속 구성원들만의 책임이라고 볼 순 없습니다. 사회 전반을 요목조목 따져봐야 하고, 자본주의와 결부시켜 생각해봐야할 주제죠. 하지만 확실한 건 서구식 합리주의로 점철돼버린 의식체계 속 도덕이 설 자리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겠죠.

 

이런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라이토는 자신이 원래 꿈꿨던 경찰이 돼봤자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자신이 꿈꾸는 사회를 만들 수 없을 거란 판단한 듯합니다. 그래서 메피스토펠레스가 들어있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자신의 영혼을 팔아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려 했던 거라 생각됩니다. 부패한 사신 계에 싫증을 느껴 재미로 인간계에 내려온 류크, 우리 마음 속 어두운 곳에 잠들어 있는 메피스토펠레스가 어느 날 눈앞에 나타난다면 그 유혹을 쉽게 뿌리칠 수 있는 인간은 거의 없을 겁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밝고, 희망차지 못하니까요. 적어도 자신의 현실을 어둡게 하는 악인이 있다면 그 유혹은 더 은밀하고 강력할 겁니다.

 

만약 이번에 자살한 대구중학생처럼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힘들 정도로 누군가에게 학대당하고 있었다면 이건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학생이 데스노트를 읽었다면 정말 간절히 데스노트가 실재하는 것이길, 누군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적(), 악인(惡人)을 제거해주길 마음속으로 기도했을 겁니다. 라이토처럼, 또 라스꼴리니꼬프처럼 생각하면 이런 악인은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게 세상 사람들을 위한 길이니까요. 그리고 이 극단적 생각은 전적으로 틀리진 않습니다. 만약 이 악인이 죽을 때까지 악행을 멈추지 않는다면 빨리 죽일수록 좋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교육을 통해 개선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쓰레기 같은 죄는 용서받지 못하지만, 쓰레기 같은 인간은 용서받을 수 있는 거죠. 일련의 쓰레기 같은 범죄가 양산되고 있다면 이는 개인보다 사회에 책임을 더 물어야 합니다. 불량청소년(이 표현 자체가 마음에 들진 않습니다만)이 많아질수록 괴롭힘 당하는 피해자 학생이 많아질 것이고, 악덕 전당포 주인이 많아질수록 제 2, 3의 라스꼴리니꼬프가 많아질 겁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만 도려낼 게 아니라 정상적인 세포를 감염시키는 암세포를 뿌리 채 뽑아야죠.

 

암세포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기 전에 하던 얘기를 마저 하도록 하죠. 무정부주의, 아나키즘의 아나키(anarchy)는 지도자가 없는 혼란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정부도, 군대도, 경찰도 없으면 맘만 먹으면 마음껏 살인, 강간, 전쟁, 평소에 해보지 못했던 극악범죄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국민들이 일절의 통제도 받지 않고 살인, 강간,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일련의 통제기구가 필요 없어집니다. 역사적으로 여태까지 실험된 유토피아 사업을 살펴보면 대부분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평등한 공동체사회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자신의 소설 개미파피용’, ‘을 통해 유토피아 건설을 시도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유토피아는 세 작품에서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죠. 하지만 실패를 성공의 어머니로 변모시킬 교훈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폭력. 평등한 세상을 때려 균형을 무너뜨리니 구시대적 유물이 하나둘씩 부활하기 시작했습니다. 힘의 논리에 의한 지배-피지배 구조, 정치적 양극화 그리고 대립, 1보 전진 3보 후퇴 등 지금까지 인류를 괴롭혀온 고질병 같은 암세포들이 폭력이란 도화선에 의해 폭발적으로 번식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폭력은 절대적으로 근절해야할 대상이란 결론이 나옵니다. 하지만 데스노트에선 사신의 낫을 앞세워 유토피아를 만들려하고 있습니다. 이 자체로 이미 세 소설의 전철을 밟게 될 운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궁극적으로 유토피아 건설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닌 키라의 사상에 대한 진정한 동조에 의해 건설돼야만 했습니다. 더 이상 데스노트에 의한 살인이 자행되지 않아도 국민들 스스로가 퇴폐적 이드를 압도하는 초자아를 향유하길 원했던 것이죠. 그 초자아는 학문적 지식이 아닌 종교적 가르침을 통해 얻어지는 정신, ‘키라라는 신을 숭배하는 신앙심이 돼야 했던 겁니다. 이로써 폭력을 쓰지 않고도 민중을 통제할 수 있게 되고, 민중 스스로가 범죄를 검열하니 신세계는 이론적으로 실패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현재 인도의 어느 도시에서 유토피아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는데 성공적인 결과가 나오길 기대합니다. 이미 많은 상처를 입은 인류와 지구를 위해서 말입니다.

 

 

 

 

 

 

. 라이토는 선인(善人)인가? 악인(惡人)인가?

 

 

 

 

 

 

 

 

 

 

 

 자신을 신이라 생각하는 사나이,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남자, 일본 전국 모의고사 1등에 빛나는 수재, 수려한 외모 위에 살포시 피어나는 썩소, 두 얼굴의 라이토에 대한 이야깁니다. 겉으론 정의감이 투철한 경찰관, 지킬 박사의 얼굴을 띠고 있지만 속엔 자신을 방해하는 자들을 모두 제거하고 신세계를 건설하려는 키라, 하이드 씨의 얼굴이 감춰져 있습니다. 라이토가 선과 악의 이중적 면모를 모두 띠고 있지만 극이 후반으로 치달을수록 악에 중독된 하이드의 모습을 보입니다.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에서 지킬박사는 악마적 본성을 깨우는 약을 복용해 악인 하이드로 변하고, 나중엔 약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하이드로 변해 결국 그 모습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중적 자아를 개체(個體)로 분리시킨 착상이 돋보이는 작품이죠. 그런데 이 작품은 한 인간 속에 두 가지 얼굴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예전부터 인정되었단 반증이기도 합니다. 고대 동양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며 성선설, 성악설, 성무선악설 같은 이론을 정립했을 정도로 인간의 본성은 오래 전부터 인류의 관심사였습니다. 인간이 선천적으로 선한지, 악한지 단정 짓긴 힘들지만 확실한 건 인간은 선해질 수도, 악해질 수도 있는 존재란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악마적 본성을 이끌어내는 약의 존재는 중요합니다. 지킬 박사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을 한 순간에 하이드로 타락시켜버리니까요. 필자는 데스노트가 이 약과 많이 닮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데스노트를 사용하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누군가를 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만은 속일 수 없겠지만요.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수중에 데스노트가 들어온다면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될 것임은 분명합니다. 누군가를 죽여도 나말곤 아무도 모르니까. 자신을 손가락질할 사람도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만 속일 수 있다면 죄책감에 빠지지도 않겠죠. 살인과정에서 어떠한 증거도 남기지 않으니 아무리 유능한 형사와 탐정이 수사한다고 해도 자신이 용의자로 지목되는 일은 없으니 처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런 유혹에 꿈적도 안할 강단의 소유자가 결코 흔치 않을 겁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주변엔 없는 게 더 낫다고 사료되는 사람들이 한명씩은 존재하니까요. 그것이 대구중학생 같은 처지라면 데스노트에 대해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겁니다. 살기 위한 선택, 불가항력적 상황이란 말이죠. 한마디로 이 세상은 데스노트를 쓰고 싶게 만드는 그런 곳입니다. 만약 라이토가 데스노트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는 경찰관으로서 사회에 공헌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 데스노트가 라이토를 하이드로 만든 약이란 증거는 실제로 데스노트 극 중간에 등장합니다. 라이토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데스노트의 소유권을 포기함으로써 데스노트에 대한 기억을 상실했을 때 말입니다. 라이토는 L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만약 키라라면 분명 키라처럼 범죄자를 처단하기 위해 데스노트를 썼겠지만 나는 키라가 아니야

 

범죄자 말살을 통해 사회를 정의롭게 개혁시키겠다는 라이토의 사상은 분명 잘못된 겁니다. 하지만 데스노트가 없었더라면, 라이토가 데스노트의 주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그의 사상이 실천으로 옮겨지진 않았겠죠. 또한 라이토가 이런 극단적인 사상을 사유하게 된 데엔 그가 경험한 미래에 대한 좌절도 일조했을 거라 사료됩니다. 앞서 말했듯 라이토는 경찰관이 되길 꿈꿨습니다. 하지만 일개 경찰관이 사회를 바꿀 순 없다는 것을 라이토 본인이 모를 리 없었죠. 경찰관이 돼 부와 명예를 누린다 해도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는 결코 실현시키지 못했을 겁니다. 경찰관으로선 말이죠. 범인이 싸지른 범행의 잔해를 치우는 범죄청소부, 범인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는 범인스토커 신세로 제한적인, 소극적인 정의를 실천하는 게 한계(限界)란 말입니다.

 

라이토의 사상에 깊게 공감한 미카미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미래에 대한 좌절을 경험했습니다. 미카미는 약자를 지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지키는 사람보다 괴롭히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많았으니까요. 중학교 때까진 정의의 편에 선 사람이 더 많았지만 고등학교 때부턴 괴롭히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정의의 편에서 방관자 무리로 편입된 사람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정의를 수호하는 건 지극히 귀찮은 일인데 반해 방관은 지극히 편한 일이죠. 누가 집단따돌림을 당하든, 괴롭힘을 당하든, 성희롱을 당하든, 지하철노선에 뛰어들든 간에 나만 아니면 돼라 생각하면 훌륭한 방관자가 될 수 있으니까요. 미카미는 검사가 되었지만 검사의 운명이 경찰관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라이토와 미카미는 허황된 꿈을 가졌는지도 모릅니다. 현생엔 이룰 수 없어 현재는 비록 허황된 꿈이지만 언젠간 반드시 이뤄져야 할 꿈, 몇 백 년에 걸쳐 진행돼야 할 너무나도 거대한 미래지향적 꿈을요.

 

그런데 여기서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데스노트의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약은 지킬박사가 직접 만들어낸 물건이지만 데스노트는 사신 계에서 인간계로 굴러 떨어진 물건이란 거죠. 그렇다고 라이토와 미카미가 나쁜약의 피해자란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을 100% 악인(惡人)이라 보는 건 지킬박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이드는 약을 먹기 전까진 지킬박사였으니까요.

 

 

 

 

 

. 데스노트를 봉인할 수 있는 주술(呪術)

 

 

 

데스노트. ‘데스노트도 이 글도 모두 데스노트가 인간계에 불시착하면서 시작됐습니다. 라이토가 죽으면서 데스노트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지만 필자가 이 글을 마무리 지으려면 죽음 이외의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죠. 데스노트에 대한 논의를 여기까지 진행해오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이 글을 종결짓기 위해서 데스노트가 라이토의 손에 들어가기 전으로 시간을 돌리겠습니다. 이제 야가미 라이토는 키라가 아니라 성실한 고등학생으로, 아마네 미사는 사신의 눈을 가진 제2의 키라가 아닌 인기 있는 모델로, 미카미는 키라 추종자가 아닌 유능한 검사로 돌아왔습니다. 정의를 위한 대결구도도 키라 vs L이 아닌 선인 vs 악인으로 복구됐고요. 범죄도, 전쟁도 모두 원상복구 됐습니다. 하지만 데스노트에 의한 살인도 멈췄지요.

 

데스노트에 의한 살인을 절멸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당연한 얘기지만 데스노트를 없애는 겁니다. 그런데 데스노트가 불사의 존재라서 물리적으로 없앨 수 없다면 정신적으로 멸해야 합니다. 영혼살인이란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데스노트란 판도라의 상자 안엔 어떤 인간이라도 한 순간에 타락시킬 수 있는 메피스토펠레스가 잠들어 있습니다. 그의 영혼을 파괴함으로써 악마에게 영혼을 뺏길 일말의 가능성까지 말살하잔 말입니다. 데스노트를 봉인시키잔 말이기도 하고요.

 

데스노트란 마물(魔物)을 봉인시키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요?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금고일까요? 아마 금고에 데스노트가 보관된다면 누군가는 그 금고를 열기 위해 신무기를 만들 겁니다. 사신 류크(참고로 류크는 사과에 환장합니다)에게 사과를 가득 안겨 주면서 사신계로 데스노트와 함께 돌아가라고 부탁하는 건 어떨까요? 류크를 겨우겨우 설득해 사신계로 돌려보낸다고 해도 류크의 선례를 보고, 인간계에서 재밌는 경험을 하고자 데스노트를 선물로 들고 인간계를 찾는 사신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신 계는 그야말로 나태(懶怠)의 낙원이니까요. 인간계로 데스노트를 떨어뜨리는 조그만 일탈을 통해 사신들은 따분한 일상의 활력소를 찾으려 할 수도 있습니다.

 

필자는 봉인은 오직 주술을 통해서 이뤄질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주술은 바로 자기 안의 하이드를, 메피스토펠레스를 이기게 하는 정신적 무장입니다. 힘의 원천은 영혼으로부터 샘솟기 때문에 힘을 키우려면 영혼의 단련이 필요합니다. 영혼을 단련시키는 방법이라면 우리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교육(敎育)과 종교(宗敎). ()에 달려 있는 겁니다. 감옥이 아닌 교육현장과 종교현장에서 교화(敎化)를 선행해야 합니다. 교육에서 자기 안의 숨은 재능을 발굴해내는 일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인간이 되는 것이겠죠. 인간을 인간다운 인간으로 길러내는 교육의 본질을 상기해야겠죠. 종교도 마찬가집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종교, 신앙생활을 통해 영혼에 차오르는 고름을 걸러내야 합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고, 자신이 저지른 죄에 용서를 구해 더렵혀진 영혼을 정화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작업일 겁니다. 구원(救援)이란 것도 신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부터 오는 거니까요. 필자는 올바른 교()를 만난 인간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언젠간 데스노트가 전혀 쓸모없는 진정한 신세계가 우리 앞에 활짝 열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 이 글을 마치며

 

 

이렇게 데스노트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했으면서 고작 내놓은 결론이 조금은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필자가 내린 결론이 뜬 구름 잡는 식의 추상적인 생각이라고, 너무 이상에만 젖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들을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의 해결책은 누구나 생각해낼 수 있는 기본적인, 아주 기본적인 것이죠.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 세상에 가장 필요한 건 기본(基本)’이라 생각합니다. 기본이 결여된,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이상한 세상을 바로잡는 길은 기본부터 차근차근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본이 된 인간이 사는 기본이 된 세상. 때문에 인간에게 필요한 기본이 무엇인지, 세상에게 필요한 기본이 무엇인지 오늘날을 사는 우리가 다시금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데스노트에 대한 글을 쓸 수 있도록 용기를 준 친구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겠네요. 그리고 이 지루하고 긴 글을 끈기 있게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 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윤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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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1-06
짝 - 사랑의 레시피

최근에 '맑시즘과 윤리교과서'란 제목이 달린 분홍사슴 님의 글을 보았습니다. 신랄하게 교과서의 맹점을 꼬집으시더군요. 사실 그 작업은 필자도 버킷리스트까진 아니지만 위시리스트에 고이 모셔 두었던 항목이었는데 말이죠. 특히, 맑시즘과 관련된 갈등론 부분은 iEBS 홈페이지를 통해 비판문을 게재한 적도 있습니다. 한창 인강을 듣다 이건 아니다 싶었던 거죠. 어떤 내용을 적었는지 정확히 떠오르진 않는데 핵심은 기억납니다. 먼저, 사회문화 교과서(수능완성)에서 갈등론의 관점으로 현대 ‘대한민국’ 사회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현실과 괴리감이 너무 컸습니다. 이 괴리감은 분홍사슴님이 지적해주신 것처럼 맑시즘을 극단적으로 해석한 편협한 시각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자본주의 무한경쟁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선 갈등론이 아닌 기능론적 사고 체계가 필요했으니까요.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 현대사회의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기능론은 정(正), 이에 반하는 갈등론은 반(反), 교과서는 정, 반을 극명하게 갈라놓았을 뿐 합(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필자의 비판문에 답변을 달아주신 선생님께선 그 생각을 ‘응원’한다고 말하셨습니다. 처음엔 이게 응원 받을 만한 일인가 의아했습니다. 어차피 교과서 내용을, 교육의 방향을 시정하는 건 정부의 몫이었습니다. 내년에 실시될 대선 결과에 따라 필자의 비판의 운명이 판가름 날 것입니다. 그 말인즉슨 제 비판은 무의미해질 수도 있습니다. 비판받는 대상이 자신을 향한 비판에 동조하지 않는다면 그 비판이 아무리 진리를 담고 있고, 좋은 말이라 해도 허공에 흩어질 소음밖에 그칠 겁니다. 어쨌든 필자는 생면부지의 선생님께 응원을 받았습니다. 생각해보니 누군가로부터 글 쓰는 행위를 독려 받은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인터넷상으로나마 받은 응원에 고마움을 느끼게 되더군요. 그래서 이 자리에서 그 응원에 보답하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분홍사슴님께 선수를 빼앗겼네요. 하지만 필자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교과서를 살펴보니 크고 작은 소재들이 즐비했습니다. 비판거리가 말이죠. 필자는 어떤 소재를 고를지 고민해야 했습니다. 고민 끝에 결정된 것은 ‘핵가족’이었습니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짝’이란 프로그램과 비교해서 보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건 요리사의 팁일 뿐이니 식자(食者)님들은 참고만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지금부터 맛있는 요리를 올릴 예정이니 식자(食者)님들께선 맛있게 씹어주시기 바랍니다.   핵가족   정의 : 부부 또는 (한)부모와 그들의 미혼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 관계 : 평등한 민주적 관계 특성 : 부부 간의 유대 중시, 구성원의 개성과 자유의지 존중, 이동성이 높은 산업 사회에서 기능적임, 현대사회의 주된 가족 형태 장점 : 민주적이고 평등한 수평적 관계, 개성이 존중되고 창의성 개발에 유리 여성의 지위 향상 단점 : 구성원의 결속력 약화 가족해체 증가 노인문제 증가 자녀양육문제 이혼 증가  

  • 윤스리
  • 2011-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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