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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개론> 기억의 습작: 보존된 추억 위에 집을 짓는 일

  • 작성자 희희희
  • 작성일 2012-03-25
  • 조회수 871

 

<건축학개론> 기억의 습작: 보존된 추억 위에 집을 짓는 일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처음 만난 서연과 승민은 같은 동네에서 함께 숙제를 하며 급속도로 친해진다. 이미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던 승민은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알고 싶고,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싶지만,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듣고 보고 경험해보았듯 말처럼 쉽지 않은 게 바로 사랑고백이다. 그렇게 우물쭈물 여엉부영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채 둘의 90년대는 흘러가고, 15년 뒤, 서연과 승민은 재회한다. 서연이 승민을 찾아온 것이다. 집을 지어달라며. 승민은 15년 전 사랑했던 그녀를, 건축가로서 자신의 첫 번째 작품의 건축주로 맞게 된다. 낯설면서도 반갑고 아연하면서도 문득 마음이 가는 그런 상황.


바야흐로 21세기가 도래하던 시기에도 고작 일곱 살이었던 94년생의 나는, 게스(GUESS)의 짝퉁 ‘GEUSS’ 티셔츠와 1GB 용량의 컴퓨터, 올백 머리를 도와주는 헤어 무스나 허리춤에 달고 다니던 삐삐 등에 대해서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 당시 내 눈에 펼쳐졌던 세상의 풍경에 대한 기억이 많지도 않을뿐더러, 이러하고 저러한 물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어른들로부터 듣거나 TV에서 봐 알 뿐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는, mp3에 넣을 노래들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던 중에 전람회를 알게 된 세대이자, 휴대폰 하나로 노래도 듣고 사진도 찍고 얼굴 보며 전화하는 게 당연한 시대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세상은 참 많이, 그리고 빠르게도 변했다. <건축학개론>은 스무 살의 숙맥청년이 서른다섯의 건들건들한 남자어른이 되기까지의 세월, 그 시절의 깍쟁이 소녀가 현재의 딱 부러진 귀부인이 되기까지의 세월동안에 일어난, 변화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화다. 결국 지금은 그렇지 않으나, 그때는 그랬던 그 사랑을 말하는 영화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첫사랑’이라는 정서. 모두가 겪어본 그 아득하고도 아련한 감정. <건축학개론>은 숱한 멜로드라마에서 다뤄져온 그 평범한 재료, 익숙한 서사와 궤를 같이 하지만, 그 중심축에 ‘집’이라는 말뚝을 단단히 박아놓아 새로운 이야기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서연의 집이 승민의 설계에 의해 뚝딱뚝딱 지어지는 과정은, 미숙하고 유약했던 스무 살과 그래도 조금은 여유로워진 듯 보이는 현재의 상황과 함께 교차되며 성장한다. 거실을 넓히고 층을 하나 더 쌓는 건축의 시간들과 함께 그들의 과거는 복기된다. 굳건한 저변 위에 공들여 쌓아 올린 벽돌들은 무너질 여지의 틈 없이 매끄럽게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영화의 결말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서사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마음의 여진을 길게 늘어뜨린다. 이 비극적이고도 애틋한 성정의 영화가 말하는 것이 생각보다 직설적이라 조금은 생뚱맞게도 보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더욱 서글픈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 기억의 습작은 추억들을 온전히 보존한 채 집을 짓는 일이다. 어린 시절 기대서 키를 재던 벽, 다 마르지 않은 시멘트 속 여섯 살짜리의 발자국과 같은 흔적들을 그대로 지켜둔 채 현재의 나를 위한 방을 만드는 일인 것이다. 첫사랑에 대한 추억이라는, 수없는 회한으로 점철된 망설임과 쓸쓸함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거나, 혹은 상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가끔은 마음 아플 것이다. 왜 그때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왜 그때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하고. 그렇게 했더라면, 이렇게 말했더라면 그 당시의 ‘철없던 나의 모습이 얼만큼 의미가 될 수 있는지’ 과연 알 수 있었을까.


 

희희희
희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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