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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성석제/문학동네

  • 작성자 조셉 고든 레빗
  • 작성일 2012-08-31
  • 조회수 390

1.

 끊임없이 몰아치는 이야기들로 가득한 폭발하는 서사와, 허술하고 틈 많은 구성, 드라마틱한 사건의 전개 없이 일상만을 비추고 관념적인 것들이 주를 이루더라도, 충분히 마음을 동요시킬만한 문장들과 안정되고 수려한 묘사들로 인해 부족한 서사의 틈을 메꿔주는 작가의 문체.
 서사와 문장은 소설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소설의 척도이자, 재미있는 소설의 기준이다.
2.
 문단에 데뷔한지 15년이 넘는, 나름의 명성을 갖춘 작가이기에 많은 기대를 했었지만, 이야기와 문장이란 소설의 기본적 관점에 조명하여 볼 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성취하지 못한 채 실망감만을 안겨주며, 작가의 기본기마저 의심이 드는 졸작에 가깝다.
3.
 천명관의 [고래], 주노디아스의 [오스카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박민규의 초기작들이나, 이기호의 소설을 연상시키는 문체를 가지고 있지만, 가지처럼 흩어진 무수한 이야기들을 매끄럽게 그러모음과 동시에 계속해서 썰을 푸는 입담꾼적 기질이 서린 천명관과 주노디아스의 문체와 무척이나 비교되는 지점에 놓여있을 뿐만 아니라, 박민규와 이기호의 문장처럼 타고난 말장난같은 분위기속에서도 현실을 꼬집어내는 날카로운 냉소의 시각을 지니지도 못한다. 어떻게든 웃음을 주고자 억지를 부리는 코미디언 같은 문장에, 과도한 어휘들로 이루어진 어이없는 비유들과, 인물들의 대사들에 서술된 걸쭉한 욕설들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눈쌀만을 찌푸리게 할 뿐, 어떠한 효과도, 감흥도 주지 않는다. 또한 틈틈히 자연경관을 묘사하면서 본 이야기로 넘어가는 구조가 그리 잘 봉합되지 못하고 유연한 구석이 없어, 헛바퀴를 굴리는 듯한 느낌이다.
4.
서사 또한 그리 매력적이지 못하다.
각각의 사연을 가진 이들로 구성된 마을에 조폭들이 침입한다는 내러티브를 다루고 있는데, 그 개개의 사연이란 것들이 익히 보아왔던 상투적인 에피소드로 채워져 있고, 길이마저 짧아, 등장인물들에게 감정적으로 파고들만한 연민의 정서가 결여되어 있다.
더불어, 안이하고 유치한 문장들로 구사하는 유머들에 지쳐갈 무렵에도, 오물범벅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더욱이 짜증이 솟구치게끔 하고, 조폭들이 족구를 하는 부분이나, 마을사람들이 갑작스레 술판을 별이며 춤을 추는 부분, 그리고 결말부근에서 뜬금없이 중장비들이 등장하며 소설을 마무리짓는 것은, 작가가 어떠한 극적 효과를 위해 부여했다기보다, 난데없는 전개구조라 치부될만한 것이다.
5. 
 아직 한편 밖에 읽지않아, 그가 어떤작가라고 쉬이 얘기할 순 없지만, 이런 식 이면 곤란하다. 대표작이라 일컬어지는 [순정]이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펼쳐봐야 할 것이다.

조셉 고든 레빗
조셉 고든 레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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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셉 고든 레빗
  • 201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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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셉 고든 레빗
  • 2014-09-08
당신이라는 타투 - 은반지 / 권여선

1.   사물과 현상에 있어서도 정의내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순조롭고 유려하게 흘러가는 논리와 치밀한 관찰 끝에 얻은 결과에 따라 사물과 모양을 지각하고 그 뜻을 규정해보지만, 이내 외관 속에 머물렀던 본질이 비어져 나와 막힘없어보였던 당연한 이치를 부정하는 순간이 더러 있기에, 어떤것에 정의내린다는 것은 무척이나 까다롭고 복잡한 일임이 명백하다. 서로간의 관계에 정의 내리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나와 상대방을 지탱해주었던 관계속의 끈끈한 인력은 몇마디의 실언과 잠깐의 실수로도 어느새 서로를 거부하는 척력이 되어 짦게나마 공유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 조차 염증을 느끼게 만든다. 친구와 가족의 관계라고 명명하고 금세 우리의 사이를 단정짓지만 그 관계속에 도사리고 있는 타인의 심상과 감정을 결코 눈으로는 목격할 수 없기에 쉽사리 부서지고 허물어내리는게 관계이다. 권여선은 이것을 포착해낸다. 이제는 복구가 불가능할 지경으로 도태되어버린 인간관계에서 원인을 규명하는 처사따위는 불필요하다는 것을 문학으로 담아내며 흉터를 씻어지울 수 없듯,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기억속의 흔적을 남기고 간 당신이라는 타투를 지긋이 응시한다.   2.   똑같은 사물을 대면하고 있더라도 그것에 대한 나와 타인의 생각이 동일한 범위에 속해있다고 단언할 수 없듯, 같은관계를 공유하지만 이 관계에대한 상대방의 의중 역시 결코 수를 세는 것 마냥 쉬이 헤아릴 수 없다. 우선 작품속으로 들어가보자. 주인공은 어느덧 이마에 굵은 주름이 패인 노파(오여사)로, 아무런 경제적 어려움 없이 그런대로 자기나름의 삶을 영위하는 중이다. 그녀에게 걸리는 문제가 한 가지 있다면 얼마전까지도 자신의 집에서 동거하다가 갑작스레 훌쩍 떠나버린 심여사와의 관계이다. 비록 심여사가 자신의 집에 얹혀사는 신세였지만 그녀 자신은 심여사에게 단 한번도 '눈치를 주거나 모멸감을 느끼게 한일이 없었'으므로, 꽤나 괜찮은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자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딸네 집으로 간다는 통고 한마디만 남긴 채 연락을 끊어버린 심여사의 행동에 오여사는 그 의중을 알 수 없는 상태로, 벌써 반년이 지나갔다. 계속해서 자신의 비위를 건드리는 딸들의 전화를 받고 문득 울화가 치민 오여사는,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지속했던 심여사를 그리워하며 기필코 그녀를 한번 만나보리라 결심한다. 유려하지만은 않은 과정을 거쳐 심여사가 머무르고 있다는 요양소에 당도했지만, 그녀가 기대했던 환대와는 달리 심여사의 얼굴엔 당혹스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하고, 대화가 계속될수록 거북함과 불편함만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돈다.   다 지나간 얘기지만, 아니, 이런 얘긴 안 하는게 좋겠어요. 아니 얘기해봐요 심여사. 우리 사이에 못할 말이 뭐가 있어? 제가 일본에 있는 딸네 집에 가기 전에 말이지요 몇날 며칠을 두고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몰라요. 간다는 얘길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오 여사님 앞에만 가면 입이 떨어지지 않더라고요. 왜 그런가 했더니 오 여사님이 절 못 가게 붙들까봐 그런 거 였어요. 오 여사님

  • 조셉 고든 레빗
  • 2014-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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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雪

    『위풍당당』에서 보여준 서사와 문체가 지닌 힘이 황만근 작가의 다른 작품(가령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이 가진 것에 비해서 약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 대해서 이 정도로 실망을 했다면, 다른 그의 작품에서도 실망할 수밖에 없지는 않을까 싶습니다.

    • 2012-09-02 20:07:28
    韓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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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雪

    눈높이를 맞추면 재밌게만 느껴지는 그런 몸개그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의 문체는 당연히 박민규 작가를 비롯해서 다른 작가들과 다를 수밖에 없고, 다르게 느껴질수밖에 없습니다.

    • 2012-09-02 20:05:09
    韓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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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雪

    또한, 성석제 작가의 문체는 해학의 문체입니다. 여기서 해학이라고 함은 '현실을 꼬집애'냄으로써 보여주는 풍자를 말하는 것도, 입담꾼이 말하듯이 계속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는 수다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석제 작가의 문체가 보여주는 해학은 우스운 상황을 통해서 웃음을 주는 것입니다. 이는 개그맨들이 보여주는 몸개그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하위 수준으로 규정한다면 재미를 느낄 수 없지만,

    • 2012-09-02 20:04:50
    韓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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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雪

    그리고 그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노인들입니다. 그들이 조폭에 대항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오물범벅'을 쓰는 것뿐이기도 합니다. 또한, 조폭을 잡아서 기쁜 나머지 '술판을 벌이며 춤을 추는' 것은 고재종의 시 「한바탕 잘 끓인 추어탕으로」에서 볼 수 있듯이 노인들이라면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조폭들이 족구를 벌이는 것도 가족을 표방하지만 결국 가족애가 없는 조폭의 모습을 마을 사람들과 대조하는 부분으로 보아야합니다. 급작스러운 마무리를 제외하고는 서사에서는 그리 큰 문제가 없다고 저는 봅니다.

    • 2012-09-02 19:57:27
    韓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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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雪

    『위풍당당』을 썩 좋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급작스러운 결말이 아쉬운 건 사실이었지요. 그런데, 그렇다고 『위풍당당』을 졸작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습니다. 『위풍당당』은 조폭과 마을 사람들의 다툼을 주로 다루고 있기 보다는, 다툼을 통해서 드러나는 마을 사람들간의 가족애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영화 와 꽤나 비슷한 작품이기도 하고요.

    • 2012-09-02 19:57:18
    韓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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