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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무

  • 작성자 비틀즈
  • 작성일 2012-11-12
  • 조회수 761

『농무』

 『농무』는 70년대 한국 시단에 한 획을 그은 신경림의 시집으로써 당시 민중들이 처한 고난과 역경들을 생생하게 수록했다. 2차, 3차 산업의 급속한 발달과 대비되어 점점 소외되어가던 농촌사회의 풍경들을 직설적으로 던지는데, 예민한 주제였던 독재에 대한 비판적 의식 또한 서슴없이 드러냄으로써 70년대의 독자뿐만 아니라 현대의 우리 독자들에게까지 큰 충격을 주었다. 그 시집에 수록된 첫 작품인「겨울 밤」에서도 그러한 점들이 드러난다. ‘값 비료값 애기가 나오고/선생이 된 면장 딸 애기가 나오고/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아기를 뱃다더라.-신경림「겨울 밤」일부’와 같은 부분에서 비합리적인 쌀값과 비료값이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가 아기를 뱃’는 사회적 이슈들을 나열한다. 그 가운데에 자신의 마을 이야기인 면장 딸 얘기를 넣으면서 이 세 가지 사건 모두를 마을 안으로 농밀하게 집약시킨다. 또 13행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 뿐-신경림「겨울 밤」일부’과 25행의 ‘우리의/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 뿐-신경림「겨울 밤」일부’을 대구법으로 연결시키면서 자칫 산문적으로 풀어질 법한 산문시를 상당히 압축된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갈 길」이라는 시도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이 시를 시대적 상황과 연결시켜 민중을 억압하는 독재세력에 대해 봉기를 일으키는 농민들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녹슨 삽과 괭이도 버렸다-신경림「갈 길」일부는 농민들은 이제 ‘빈주먹과 뜨거운 숨결만 가지고 모였다-신경림「갈 길」일부’ 아무것도 쥐지 않은 채 불합리한 현실에 대응하겠다는 시인의 정신이 1행부터 8행까지 점점 심화되고 있었다.

 

 '꽃그늘'이라는 제목의 시 또한 직설적인 언어들이 매력적이었다. ‘‘건답직파’ 또는//‘농지세 1프로 감세’/신문을 뒤적이는/가난한 우리의 웃음도/꽃처럼 밝아졌으면.-신경림「꽃그늘」일부>’ 와 같은 부분에서 건답직파나 농지세 1프로 감세라는 신문에 나올법한 단어를 활용함으로써 시의 리얼리즘을 한 층 더 강화시켰다. 1연의 3번째 행인 ‘살구꽃 그늘-신경림「꽃그늘」일부’이라는 부분도 감각적인 표현이라 좋았다. 여기서 그늘은 현실 농촌의 어려움을 뜻하는데, 단순한 그늘이 아닌 ‘살구꽃’의 그늘이라고 표현하면서 겉으로 보거나 멀리서 볼 때에는 아름답고 탐스러워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늘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시인의 예리한 관찰과 사유로 풀어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외로 ‘눈길’이라는 시편에도 관심이 갔다. 첫행인‘아편을 사러 밤길을 걷는다-신경림「눈길」일부’부터 힘이 있었다. 주막을 배경으로 설정해 시대적 현실을 드러냈다. ‘주방 뒷방에 숨어 잠을-신경림「눈길」일부’자는 사람들은 모두 숨어서 잤다. 왜 시인은 굳이 ‘숨어’잔다는 표현을 썼을까. 나는 이것이 신경림 시인의 무의식 속 어딘가에 잠재된 욕망이 발현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숨고 싶은 욕구가 있다. 특히 그것은 무언가로부터 억눌려 있을 때 잘 발생되는데, 현실에 억눌린 민중들을 보며 시인이 직접 대중 속에 들어가 절절한 고통들을 체화하면서 무의식에 들어가 이런 시의 구절이 나온게 아닌가 싶다. 또 ‘바람은 뒷산 나뭇가지에 와 엉겨/굶어죽은 소년들의 원귀처럼 우는데/이제 남은 것은 힘없는 두 주먹뿐-신경림「눈길」일부’라는 부분에서 바람이라는 형태도 물질도 없는 대상의 특질을 이용하여 굶어죽는 소년들의 한을 표현했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힘없는 두 주먹-신경림「눈길」일부’만 남았다는 시인의 직설적 표현에서 물질적 풍요로움을 가진 자들과 반해 없는 자들의 비탄함과 서러움이 내내 독자들의 머릿속을 울리기도 한다.

 

 ‘밤새’라는 작품은 특히 ‘억눌린 자여 눈을 뜨라/짓눌린 자여 입을 열라-신경림「밤새」일부’로 이루어진 2연이 좋았다. 대구법이 사용된 두 행이 서로 의미를 강조해주면서 두행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간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밤새>와 <소년>을 ‘원귀로 한치 빈틈도 없는/낮은 하늘을 조심스럽게 날며//저 밤새는 슬프게 운다/상여 뒤에 애처롭게 매달려/그 소년도 슬프게 운다-신경림「밤새」일부’에서 동일시 한 것도 신선하게 느껴졌다. 저 밤새~ 운다 까지의 마지막 4연이 앞선 정서들을 함축적으로 던져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신경림 시인은 이처럼 시집에서 현실성을 가장 강조했다. 그만큼 언어들도 매우 실제적이고 정확한 것들로 선택했다. 시인의 가장 큰 경향은 사회적 사건들을 우리 모든 개개인의 일들로 축소시켜버리거나, 아니면 오히려 더 확장시켜버린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 당시 시집을 읽는 독자들에게 물음을 던지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것은 현대 2012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적용된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불평등과 억압적 상황이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나는 신경림 시인의 ‘농무’라는 시집을 읽으며 우리 현실의 부조리들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시대마다 일어나는 상황이나 사건들이 항상 비슷하게 일어나 비슷하게 끝난다는 것이다.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다 비슷하기에 생기는 현상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부조리한 일들은 많다. 네트워크의 눈부신 발전 뒤에 그만큼의 그림자가 늘어나 있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 시집은 역사처럼 과거를 비추는 거울역할을 해준다. 과거의 부조리들과 그것으로 인해 나타난 결과들을 시의 형태로 보여주면, 우리들은 그것을 읽고 또 다시 그런 일들을 반복하지 않게끔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집을 읽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가 오래 지속되면서, 그 역할이 다소 퇴색되었다. 그 역할을 다시 되살리기 위해선 우리들의 독서습관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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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틀즈
  • 2012-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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